(20)

서재필은 크리스마스에 도착했지만, 그날 조선의 달력은 11 10일이었다. 그러나 일주일 뒤에는 1896 1 1일이 된다. 양력이 시행된 것이다. 갑오개혁으로 개국 연호를 사용하던 조선은 양력을 세운다는 의미로 건양(建陽)’이라는 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달력은 개혁 조치 중 하나였는데, 흥미로운 점은 양력보다 요일제가 먼저였다는 것. 1895 5월에 주 7일 요일제가 시행되어, 양력보다 6개월 앞섰다. 하지만 명성황후 시해 이후 단발령과 함께 진행된 양력에 반발은 만만치 않았고, 종두법을 도입한 신지식인 지석영조차도 반대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22-23)

이처럼 <독립신문>은 가독성을 위해 한글 띄어쓰기를 채택했고, 이후 띄어쓰기가 대중화되고 정착되었다. 논설은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각국에셔난 사람들이 남며 무론하고 본국 국문을 몬저 배화능통한 후에야 외국 글을 배오난 법인데, 죠션셔난 죠션 국문은 아니 배오드래도 한문만 공부하는 까닭에 국문을 잘 아는 사람이 드물미라. 죠션 국문하고 한문하고 비교하여 보면 죠션 국문이 한문보다 얼마가 나흔 거시 무어신고 하니 첫재난 배호기가 쉰이 됴흔 글이요, 둘재난 이 글이 죠션글이니 죠션 인민들이 알어셔 백사을 한문 대신 국문으로 써야 샹하 귀쳔이 모도 보고 알아보기가 쉬흘 터이라.”


(46)

1919년 응우옌은 파이레 미리 도착해 활동 중인 한국 대표단의 도움을 받기 시작했다. 프랑스 당국은 응우옌이 한국 대표단과 매우 가깝게 지낸다며 심지어 응우옌과 한국인들의 대화 내용도 기록해두었다. 응우옌은 한국 대표단의 도움으로 세계 각국 언론과 인터뷰도 진행할 수 있었다. 당시 신문들은 이 한국 대표단이 대한민국임시정부(Provisional Government of Republic of Korea)’에서 파견되었다고 기록한다. 나중에 응우옌이라는 이 베트남 젊은이는 이름을 호치민(Ho Chi Minh)’으로 바꾸었고, 마침내 베트남을 독립시켰다.


(47)

해방될 때까지 독립운동 자금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 것은 하와이 노동자들이 일당을 아껴서 모은 돈이었다. 그 총액은 1945년까지 300만 달러에 가까운 것으로 추산된다. 1954, 이들은 미국의 MIT에 못지않은 공과대학을 설립해달라고 대한민국에 15만 달러를 기부했다. 1954년 대한민국의 1인당 국민총소득(GNI) 70달러에 지나지 않았다. 이렇게 설립된 학교는 그들이 떠난 인천과 정착한 하와이의 첫 글자를 따서 인하대학교라고 이름 지어졌다.


(61-62)

여기서 이극로는 베를대학이 왜 한국어를 가르쳐야 하는지 논리적으로 설명한다. 내용은 이렇다.

한국어는 현재 동아시아에서 세 번째로 중요한 언어입니다. 한국, 만주 및 동시베리아에 사는 2000만 명이 한국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특히 한글은 매우 독특합니다. 한국어는 실용적 측면 외에 언어학적으로 매우 큰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독일에는 한국어를 아는 이가 거의 없습니다.

한국 문화와 한국어를 독일에 전하기 위해 아시다시피 저는 3학기 동안 무보수로 한국어 강의를 제공하였습니다. 3학가 동안 12명이 수강했습니다.

모든 동아시아 언어에 대한 관심이 다시 증가하고 있으므로 한국어를 강의하는 것은 동양어 세미나에 큰 의미일 것입니다. 따라서 제가 향후 수업에 대한 적절한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장관님께 청원해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이처럼 갈등과 분열의 상태에서는 식민지 조선의 지식인들은 절망에만 머무르지 않았고,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잠시도 멈추지 않았다.


(78)

1933 6 <과학조선> 창간호 표지

첫 페이지 과학 조선의 탄생부터 도발적이다. 일제강점기임에도 굳이 임진왜란의 거북선, 진주성 전투의 비거(飛車)’와 비격진천뢰로 시작했다. 그리고 고려 고종 21(1234)의 금속활자와 조선 태종의 주자소가 구텐베르크보다 앞선다는 내용과 세종 때의 측우기 이야기로 이어진다. 이 잡지는 오늘날 기술 관료제로 번역되는 테그노크라시라는 단어도 영어 그대로 사용했다. 14페이지에는 특허제도 소개도 있다. 특허제도의 기원으로 16세기 네덜란드 수학자 시몬 스테빈의 이야기도 나오고, 1925년 지식재산권에 대한 헤이그협정 비준 현황도 실었다. 발명학회는 특허에 진심이었다. 재미있는 부분은 18페이지 향기의 과학. 향기의 역사에서 시작해 에스테르, 알코올 등 화학 성분에 대한 설명이 이어진다. 향기의 조합을 음악에서 협화음과 비교한 부분을 보면, 뉴턴이 <광학>에서 프리즘으로 분해한 빛을 피타고라스 음계와 비교했던 것도 떠오른다. 24페이지에는 질문과 응답 코너가 있다. 태양 빛이 지구에 도달하는 시간부터 시작해, 계절의 변화를 설명하는 대목이 재미있다. 좋은 사진기를 추천해달라는 질문에 이스트만 코닥으로 답한 것도 볼 만하다. 무엇보다 한 번 응답한 질문은 다시 응답하지 아니함이라는 글귀가 인상적이다. <과학조선> 첫 페이지에 나오는 측우기는 역사상 유일하게 발명 날짜가 알려진 발명품이며, 발명자는 당시 세자였던 문종이다. 이 날을 기념하기 위해 1957년부터 5 19일을 발명의 날로 지정했다. ‘과학의 날이 제정되기 10년 전의 일이다.


(86-88)

베를린 유학생 황진남이 상대성이론 특집 기사는 아인슈타인이라는 인물에 대한 자세한 소개로 이어진다. 도입부가 재미있다.

소개함니다. 물리학에서 연구하시는 아인스타인양임니다. 우리 시대 위인인 아인스타인의 사촌 누이라 하는 한 여학생이 내게 말함은 오 년 전 스위스 쭈리히(취리히) 대학에서 공부할 때다. “당신은 물론 아인스타인이 누구인지 아시오하고 뭇난 데 대하야 아모 형편도 모르는 나는 부정사로 답하얏다. 긔가 막히여 우스면서 이 불상한 냥반아! 용서하시오”(…)

아인스타인의 존재 여부도 모르든 나는 이 여학생의 비소를 감수하얏다.

이후로는 아인스타인과 상대성에 대한 해석적 서류도 읽어보고 또 그의 저서도 연구하야 보앗스나 (…) 책장을 넹길 때마다 츨라톤(플라톤)의 아카데미 문 앞에 설린 수학에 불통하는 자에게는 허입을 금함이라는 구절을 기억치 아니치 못하얏다. 아인스타인씨 자신도 말하기를 상대론의 진의를 이해하는 이가 현재 차세에 5인 이외에 없다 하얏다는 풍설이 잇다. 고등 수학에 정통히 못하고는 상대론의 진미를 모르고 상대론을 이해치 못하면 아인스타인 숭배도 허위라 하겟다. (…) 그런대 유태인 배척이 이러케 심한 독일이 그를 위하야 특별히 천문대를 창건한 것을 보든지, 독일을 그러케 배척하든 영국과 전국 각 학교에 독일어 교수를 금지하든 미국이 그를 초청하는 것을 보면, 심지어 독일 것이라면 열성으로 증오하는 프랑스까지 그를 초청하야 후대하는 것을 보면 그 과학적 공적이 위대함을 추상할 수 잇다. 그런데 그가 우리 동아시아에 여행하려 출발하얏다는 소식을 듣고(우리 학계에 기와 누차 명석하게 소개되얏슬 듯하다) 상대론의 원리를 소개코자 하얏다.”


(148-149)

상하이를 거점으로 활동하던 여운형이 체포된 것은 야구 시합때문이었다. 만능 스포츠맨이었던 여운형은 특히 야구를 좋아했는데, 1912년 한국 최초의 야구단인 YMCA 야구단을 이끌고 일본 원정을 떠나기도 했다. 일본 대학들과의 경기에서 큰 점수 차로 패하기는 했지만, 당시 이들의 경기는 일본에 유학 중인 한인 학생들을 크게 고무시켰고, 여운형은 이 원정을 통해 국제 스포츠 경기의 중요성을 인신하게 된다. 여원형은 독립운동에 몰두하던 상하이에서도 야구를 즐겨 코치를 맡기도 하고, 유학생들을 모아 팀을 만들기도 했다. 이렇게 모인 선수 중에는 문인 주요한도 있었다. 여운형은 나중에 유학생 축구팀까지 만들어 동남아 원정을 떠나 국제경기도 했다.


(161-162)

1936 2 8일부터 15일까지 최규남은 신흥 물리학의 추향이라는 6편의 시리즈를 <조선일보>에 기고하면서 양자역학의 최신 동향을 소개한다. 그의 시각은 시리즈의 첫 문장에 잘 드러난다.

최근 이십 년간의 물리학 발전은 실노 녯것을 보내고 새것을 맛기에 무가지감이 잇다. 나날이 발전되는 신이론은 또다시 신이론 출현의 동인이 되여 물리학사상에 보기 드문 위관을 정하게 되엿다. 일즉이 전 세계 과학에 일대 혁명적 센세이슌을 일으킨 아인스타인의 상대성이론도 어언간에 고전물리학으로 귀결되엿고 현대물리학계에 가장 새로운 이론은 뿌라크리(드 브로이)’, ‘쉬레덴가(슈뢰딩거)’, ‘하이센벨크{아이젠베르크}’, ‘드랙(디랙)’, ‘풀랑크(플랑크)’, 여려 사람의 파동역학, 양자역학 및 양자론 등이라고 하겟다. (…) 인간의 사상사가 생긴 이래 철칙으로 미더오는 인과율도 조상지육이 되엿고 따라서 자연과학의 기초적 개념에까지 동요를 주게 되엿다.”


(188)

한편, 전쟁이 한창이던 시기에도 교토 다키이 연구소에서 우장춘의 연구는 계속되었다. 1941년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하자, 우장춘은 가족에서 일본이 이번에는 패배할 것이다라고 단언했고, 그들은 가장의 돌출 발언이 알려질까 봐 가슴 졸이며 전쟁을 견디고 있었다. 특이한 점은 디키이 연구소에 조선인 청년들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일주일에 한 번씩 우장춘이 기숙사에 찾아가 이들 조선인만을 상대로 강의했다는 것이다. 가끔 조선 청년들은 흥분해서 소리를 쳤고, 뒤이어 달래는 듯한 우장춘의 낮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고 가족들은 증언한다.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모르나, 우장춘이 이 무렵 전쟁이 곧 끝나리라는 것을 감지하고 있었으며, 그 뒤에 자신이 어떤 길을 가야 할지 깊이 고민하고 있었던 것만은 틀림없다.


(205-206)

사회자 : 선생님 지금 구십 평생을 살아오셨는데요. 선생님 일생을 간단히 한마디로 평을 하신다면, 어떻게 하실 수 있을까요?

피천득 : 그저 인생을 착하고 아름답게는 살려고 했는데, 그게 끝이고… (…) 우리나라는 과거에 저항 운동을 꼭 해야 할 필요가 여러 번 있었어요. 근데 그걸 한 걸음 나가지 못하고 (…) 뒷골목으로 다니면서 한숨이나 쉬고 이렇게 한 것이 지금으로(서는) 한이고 부끄럽고 그렇습니다.


(247-249)

타향에서 고국의 소식을 접하던 그는 자신의 심정을 1949 3.1절 경축사에 육성으로 남겼다. 3.1운동은 그의 인생을 결정지은 사건이었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이건 서재필이기 미국에서 말하는 것이오. 나는 미국에 돌아온 뒤에 신체가 좀 강해지고, 시방 건강이 매우 좋지만은 아직도 언제 조선에 갈런지는 모르겠소이다. 내가 가든지 안 가든지 다만 부탁하는 말은 아무쪼록 조선 살게들 하시오. 합하면 조선이 살 테고, 만일 나뉘면 조선이 없어질 것이오. 조선이 없으면 남방 사람도 없어지는 것이고, 북방 사람도 없어지는 것이니 죽을 일을 할 도리가 있습니까? 살 도리를 하시오. (…)

한 집안으로 4000년을 살았는데 왜 지금 나뉘어서 두 집안이 될 까닭이 있습니까? 둘이 되면 둘이 다 약해지고 살 수가 없을 터이니, 한 배 속에 든 것과 같아서 한쪽 배가 무너지면 저쪽도 망해지는 법이오. 나는 설령 미국에 있더라도 내 정신은 조선 사람과 같이 있으니 아무쪼록 합심하고 합동해서 조선을 살게 해주시기를 나는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292-293)

100년 전 우리 독립운동가들은 머나먼 저곳까지 가서 3.1운동을 알리고, 레닌에게 한국의 독립을 지원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림을 보면 전 세계에서 모인 공산주의자 모두가 붉은 깃발을 흔들 때, 유독 이들만은 태극기를 흔들었다. 대한민국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독립운동가들은 태극기를 앞세워 광장을 누비고 생소했던, 당시 러시아 화가의 눈에도 인상적이었기에 굳이 그림 중앙에 넣은 것이다.


(293)

이처럼 우리 선조들은 무기력하지 않았다. 국제적으로 폭넓은 행보를 보이며 당대의 흐름과 같이했다. 과학도 예외는 아니었다. 당시 과학계의 가장 뜨거운 논쟁거리였던 상대성이론을 소개한 선구자가 있었고, 조선 전역을 돌며 순회강연을 했던 젊은이도 있었다. 그들은 무슨 생각으로 상대성이론을 알리는 데 그토록 열정적이었을까? 과학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기에 다시는 과학에 뒤처지지 않겠다는 다짐한, 현식 극복의 역사가 여기에 있다. 그들은 누구보다 뜨거운 시대를 살았으며, 그들이 소개한 과학으로 우리는 식민지에서 벗어나고, 전쟁의 잿더미에서 불과 몇십 년 만에 선진국 대열에 올라서는, 세계사에 유례없는 기적을 보여준 것이다. 이 책은 시대의 아픔과 비극을 과학으로 극복하려 했던 분들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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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34)

1940년의 뉴욕이란!

그런 뉴욕은 다시 없을 것이다. 그 이전이나 이후의 뉴욕을 폄하할 생각은 물론 없다. 언제라고 뉴욕이 중요하지 않았겠니. 하지만 그때의 뉴욕은 그 도시에 첫발을 내딛는 젊은이들에게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바로 그 도시, 오직 내 눈에만 새롭게 창조된 뉴욕은 다시 존재하지 못하겠지. 그 뉴욕은 책 사이에 끼워 말린 나뭇잎 책갈피처럼, 나만의 완벽한 뉴욕으로 기억 속에 영원히 남아 있단다. 너에게 너만의 완벽한 뉴욕이 있겠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겠지만, 그때의 뉴욕은 언제나 나만의 뉴욕이란다.


(357)

네가 너에 대해 모르는 게 하나 있어. 비비안. 너는 절대 흥미로운 사람이 아니라는 거야. 그래, 물론 예쁘긴 하지. 하지만 그건 오직 젊기 때문이란다. 아름다움은 곧 사라져. 하지만 넌 결코 흥미로운 사람이 될 수 없어. 내가 이 말을 해주는 이유는, 네가 스스로 흥미로운 사람이라고 착각하면서, 네 삶도 중요하다고 착각하면서 살고 있기 때문이야. 하지만 넌 전혀 흥미롭지도 않고, 네 삶도 전혀 중요하지 않아. 한때는 나도 네가 흥미로운 사람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내가 틀렸어. 네 고모 페그가 바로 흥미로운 사람이야. 올리브 톰슨도 흥미로운 사람이고, 나 역시 마찬가지야. 하지만 넌 전혀 흥미롭지 않아. 무슨 말인지 알겠니?”


(498)

아무나 쉽게 어른이 되지 못해.” 올리브는 페그의 말을 못 들은 것처럼 다시 입을 열었다. “어렸을 때 아빠가 해주신 말씀이지. 어른의 세상은 어린이의 세상과 다르다고. 너도 알다시피 아이들은 고통을 견딜 필요가 없지. 그런 기대를 받지도 않고. 너무 어려운 일이니까. 하지만 어른이 되려면 어른의 자리에 서야 해. 당연히 그런 기대도 받게 되고. 자기만의 원칙과 신념도 지켜야 하고. 희생도 필요하단다. 사람들은 널 판단하겠지. 실수를 하면 해결해야 하고. 어름이 되지 못한 사람보다 충동을 자제하고 더 고상한 입장을 취해야 할 때가 있을 거야. 물론 많이 아프겠지만 그렇기 때문에 어른의 자리가 힘든 거란다. 이해하겠니?”


(529)

나에 대해 이렇게 솔직하게 털어놓아본 적은 없었다. 내 경험을 말로 표현해본 것도 처음이었다. 하지만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 것 같았다. 내가 말한 어둠이 나 사악함이 아니라는 걸 어떻게 설명한단 말인가? 내 마음속 깊고 깊은 곳에 세상의 빛이 결코 닿을 수 없는 곳이 존재한다는 뜻이었다. 오직 섹스만 그곳에 가닿을 수 있었다. 태곳적부터 내 안에 존재하는 곳, 문명의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곳, 말이 가닿을 수 없는 곳이었다. 우정으로도 불가능했다. 창의적 노력으로도, 경외와 기쁨으로도 건드릴 수 없는 곳이었다. 내 안의 그 어둠은 오직 섹스를 통해서만 가닿을 수 있었다. 남자들이 그 어둡고 은밀한 공간에 도달하면 나는 마침내 나라는 인간의 기원에 내려섰다고 느꼈다.


(548)

잘 들어요, 프랭크 그레코. 당신이 겁쟁이라면 그래요, 당신 말대로 그렇다고 쳐요. 그래도 그건 아무 의미도 없어요. 내 고모 페그는 알코올 중독이에요. 고모는 술을 절제하지 못해요. 그래서 인생이 엉망진창 꼬였죠. 그게 무슨 뜻일까요? 아무 뜻도 없어요. 그렇다고 고모가 나쁜 사람일까요? 술을 조절하지 못한다고 실패한 사람일까요? 당연히 아니에요. 고모는 그저 그런 사람인 거예요. 어쩌다 알코올 중독이 된 것뿐이에요, 프랭크. 누구나 그런 일을 겪을 수 있어요. 그래도 우리는 우리예요. 그 사실을 바꿀 수 있는 건 없어요. 빌리 삼촌은 약속을 밥 먹듯 어기고, 여자에게 충실하지 못해요. 그것 역시 아무 의미 없는 일이에요. 빌리는 멋진 사람이면서 믿을 수 없는 사람이에요. 삼촌은 그저 그런 사람인 거예요. 그뿐이지 아무 뜻도 없어요. 그래도 우린 그를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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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3 23일 스티븐스(일본 통감부 외교고문)는 샌프란시스코 오클랜드 역 구내에서 장인환, 전명운 두 애국지사의 총격을 받았다. 두 사람은 처음부터 같이 행동한 게 아니라 서로 모른 채 각각 거사에 나섰다. 먼저 전명운이 권총을 쏘았으나 불발되자, 장인환이 다시 3발을 쏘아 2발은 스티븐스의 가슴과 허리를 관통했고 나머지 한 발은 전명운의 어깨에 맞았다. 스티븐스는 병원에 옮겨진 후 사망했다. 그는 보호조약을 강제로 맺게 함으로써 나의 강토를 빼앗았고, 나의 종족을 학살했기에 이를 통분히 여기어 그를 쏜 것이다라고 말했다.


(42-43)

(베델)는 마지막 숨을 거두면서 나는 죽더라도 신보는 앵생케 해 한국 민족을 구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베델의 그런 한국 사랑은 그가 강한 민족주의 정서를 갖고 있는 웨일스 출신이라는 사실과 관련이 있는 걸까? 베델의 한국 사랑과 반일정신은 매우 투철해 한때 미국의 <워싱턴 포스트>“<대한매일신보>의 통감부에 대한 공격을 중지시킬 수 있는 방법이란 베델을 암살하는 길밖에 없을 것이라고 쓰기도 했다. 베델의 장례식은 동대문 밖 영도사에서 수천 명이 모인 가운데 성대히 거행되었으며 그의 시신은 양화진(서울 합정동) 외국인 묘지에 묻혔고 그의 공적을 기리는 사람들의 성금에 의해 1910년 묘비가 세워졌다.


(132-133)

1910 2 7일 오전 9시 뤼순 법정. 당시 15만 부를 발간하던 영국 최대의 주간지 <그래픽>의 기자 찰스 모리머는 재판 참관기를 통해 세기적인 재판의 승리자는 안중근이었다. 그는 영웅의 월계관을 거머쥔 채 자랑스레 법정을 떠났다. 그의 입을 통해 이토 히로부미는 한낱 파렴치한 독재자로 전락했다고 썼다. 모리머는 재판을 참관하던 많은 일본인들조차 안중근에게 지극한 존경심을 가졌으며 그들에게서는 살해된 정치인의 추억보다 안중근의 명성이 더럽혀지도록 내버려둘 수 없다는 분위기가 형성됐다고 말했다. 또 그는 안중근에 대해 그는 삶의 포기를 열렬히 염원했다이 사건으로 인해 재판에 오른 건 다음 아닌 일본의 현대문명이었다고 말했다.


(184-185)

한국은 종교적으로 세계에서 가장 역동적이고 활기찬 나라이나 어떤 단일 종교도 한국인들의 종교생활을 지배하고 있지 않고 있는 다종교 국가이다. 종교적 갈등을 겪고 있는 많은 동구, 중동, 아프리카 국가들과 달리 한국에서는 기독교(개신교), 천주교, 불교, 유교, 천도교가 평화롭게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종교적 다원주의는 동아시아 국가들에게 종교적 평화의 모델이 될 것이다. 또한 한국은 유교의 문화적 전통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나라이면서도 아시아적 가치를 변용하여 서구의 자유주의, 합리주의를 수용하는 데 가장 개방적인 나라이다. 한국은 아시아적 가치와 서구의 가치가 화해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

아니 어쩌면 한국은 새무얼 헌팅턴이 역설한 문명의 충돌에 대한 해답까지 제공해줄 수 있는 나라일지도 모르겠다. 이는 한국의 극단주의는 신바람특성과 맞물린 것으로 늘 잠재돼 있긴 하지만 오래 지속되긴 어렵다는 걸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정리해볼 수도 있겠다. 한국인은 단기적으로 극단주의적이지만, 장기적으론 중용 지향적이다.


(189)

<독립신문> 1898 2 8일자 논설에 따르면, “사람이 시계를 살 때마다 기계 속을 모른즉 시계 좋고 아니 좋은 것을 아는 도리는 다만 전면에 비늘 둘이 시간과 분과 각을 옳게 가리키는지 아니 가리키는지 하는 것을 가지고 아는지라. 그것과 같이 사람을 옳고 그른 것을 아는 것은 그 사람의 하는 행사를 가지고 알기 외에는 다른 도리가 없는 것이라. 설령 시계가 보기에 훌륭하고 금과 보석으로 꾸민 시계나 그 시계가 시를 맞추지 아니 할 것 같으면 그것은 시계가 아니라 일개 값진 물건이라. 금과 보석을 팔면 돈은 생길지언정 시계로 쓸 것은 못 되지 그것과 같이 사람도 외양이 좋고 의복을 잘 입어 보기에는 좋은 사람 같이 보이나 자기 맡은 직무를 못 할 지경이면 무용지안이라. 그러하기에 시계 살 때에 외양과 모양은 어떠하였든지 시만 잘 맞추면 그 물건이 쓸데 있는 물건이요 사람도 지체가 없고 오양도 준수치 않더라도 맡은 직무만 착락 없이 할 것 같으면 그 사람이 보배로운 사람이라.”


(288)

조선은 당파싸움 때문에 망했다는 일본인들의 주장이 많은 한국인들에게도 먹혀 들어갔다면, 그건 조선이 망해 일본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는 명백한 사실의 힘 때문일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왜 조선이 망했는가? 이에 대한 만족스러운 답을 우리 스스로 내놓지 못한 채 당파싸움 때문에 망한 건 아니댜라고 주장하는 건 매우 옹색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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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빅뱅 역시 하나의 거대한 폭발이었다. 따라서 에너지 외에도 수많은 것이 만들어져 주위로 퍼져나갔다. 물리학에서 관심 있게 지켜보는 여러 미립자의 이에 해당한다. 글루온과 쿼크, 입자와 반입자, 뮤온과 타우, 그리고 2013년 공식적으로 발표된 힉스 입자 같은 미립자들 말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 몇몇 미립자가 자연계의 힘으로 뭉치면서 가장 작고 가벼우며 간단한 최초의 원소와 원자가 탄생했다. 원자번호 1이라는 숫자 자체로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는 수소가 그 주인공이다.


(66)

이후 시간이 흘러 히타이트와 힌두 지방에서 탄소가 함유된 철광석으로 강(steel)을 만들어내면서 진정한 철기 시대가 시작되었다. 철강은 청동과 마찬가지로 합금으로 구분되는데, 철이 대부분이고 다른 금속이나 비금속 원소가 소량 혼합된다. 이 시대를 우리는 철기시대라고 칭한다. 그러나 잠시 성행했다 사라진 구리 시대(BC 4000~BC 3000, 일명 동기 시대)보다 청동기를 더 중요한 시대로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엄밀하게는 철강 시대라고 표현하는 것이 화학과 물질 측면에서 더 정확하다.


(69)

이런 관점에서 현대 사회를 2의 석기 시대라고 부르는 빈도가 높아지고 있다. 생각해보면 지금 우리 삶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반도체다. 전자 기기를 기반으로 사회 전체 시스템과 고성능 정치들이 운영되고 있고 즉각적으로 효율적인 정보 교환과 습득도 이루어지는 만큼, 그것에 관여하는 가장 중요한 핵심 부품인 반도체의 역할을 무시할 수 없다. 실제로 지금 당장 반도체 기반의 모든 전자 기기가 사라진다면 인류는 농경 생활이나 목축 생활로 돌아가야 할지도 모른다. 집을 지어 생활하는 것 외에는 현대 삶의 이기와 관련 있는 차별화된 모든 체재를 잃고 철기 시대와 다를 바 없이 생활해야 할 수도 있다. 이 반도체를 구성하는 핵심 요소가 규소이며, 규소는 모래로부터 얻는다. 그래서 지금을 제2의 석기 시대라고 하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다.


(122-123)

수많은 수도관을 통해 분수대와 공중목욕탕은 물론, 로마 제국 전역에 물 공급을 가능하게 한 우수한 상수도 시설을 현재까지도 가치 있는 문화유산이다. 그런데 문제는 상수도 시설은 현재까지도 가치 있는 문화유산이다. 그런데 문제는 상수도 시설을 기다란 관 형태로 만들기 위해 금속으로 납을 선택했다는 점이다. 납은 소금처럼 빠르게 용해되는 염은 아니어서 매우 서서히, 적은 양만 상수를 통해 유출되었을 테고, 물이나 공기와 닿은 납에 산화 납으로 이루어진 막이 형성되어 추가 유출 도한 최소화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속적으로 인체에 유입되어 쌓인 납이 중독 문제를 전혀 유발하지 않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131)

일반적으로 연금술이 발생하는 데는 두 가지 전제 조건이 필요했다. 바로 기후와 금 가치에 대한 사회적 합의다. 신화와 토속신앙이 성행한 핀란드나 노르웨이 같은 북유럽 지역에서는 연금술이 자연적으로 발생하지 않고 나중에 유입되는 방식으로 전해졌다. 북유럽 지역은 혹독한 추위와 가혹한 기후 탓에 식재료 확보가 언제나 우선순위였으며, 그만큼 사색과 연구에 시간을 투자하기 어려운 환경이었다. 철학이 성행한 고대 그리스의 연금술이 발달한 이집트의 경우 노예가 노동 인력을 대체하고 작업에도 숙달되어 시민들이 여가 시간을 충분히 누렸다는 점을 고려하면, 북유럽 지역에서 연금술이 발달하지 않은 이유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136)

진시황은 수은으로 된 연못을 만들어 놓았고, 수은을 먹거나 몸에 바르기도 한 것으로 전해진다. 수은을 몸에 바르면 피부에 일부 흡수되는데, 이것이 근육을 경직시켜 모세혈관의 혈류를 저해한다. 그러면 낯빛이 창백해지고 피부 주름이 부분적으로 펴지는 현상이 나타난다. 중금속의 체내 축적 원리를 알지 못한 채 단순히 현상만 본다면 변색되고 주름진 피부가 밝고 탄력 있게 바뀌는 느낌이 든다. 서양에서도 납과 수은이 함유된 화장품이 피부 미백에 흔히 사용되었으며,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1세처럼 납과 수은에 중독되어 여러 부작용을 겪은 사람이 많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진시황 또한 이런 단편적 변화에 만족해 수은에 중독되고 만 것이다. 진시황릉 주변 토양에서 높은 수치의 수은이 검출된 것도 수은에 대한 진시황의 병적인 집착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186-187)

과학혁명을 이끈 인물로는 프랑스 근대 철학자이자 수학자이며 과학자 르네 데카르트(1596~1650)와 영국 근대 철학자이자 정치인 프랜시스 베이컨이 대표적이다. 베이컨은 화학을 직접 연구하지는 않았지만 경험주의의 아버지로 불릴 만큼 근대 교육과 학습체계를 확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저서 <노붐 오르가눔>(1620)에서 과학이 다른 분야들과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 그리고 과학의 목적에 도달하기 위한 근본 원리를 찾아내는 방법은 무엇인지 서술했다. 책 제목 노붐 오르가눔은 아리스토켈레스의 오르가논의 다음으로 넘어가고자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실험과 분석을 도구 삼아 자연과학을 연구하는 새로운 토대를 마련한 베이컨이 남긴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격언은 그의 사상을 가장 잘 표현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베이컨이 강조한 과학적 방법론과 실험 철학에 대한 그의 기여는 18세기까지 계속해서 영향을 미쳤다.


(214)

블랙은 이 기체가 판 헬몬트 등이 연소나 호흡, 발효를 통해 얻은 기체와 동일한 종류가 분명하며 연소반응에 부정적 영향을 끼치는 무거운 기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를 고정된 공기(fixed air)’라고 명명했다. 명확히 규명되지 않은 상태의 이산화 탄소를 발견한 셈이다. 이와 같이 블랙이 생명 반응이나 연소가 아닌 화학반응으로 생성되는 이산화 탄소를 분리해냄으로써 후대 화학자들이 화학반응과 기체의 관계에 주목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216-217)

러더퍼드는 고정된 공기에 관한 실험과 마찬가지로, 확보한 질소가 담긴 용기에 쥐를 넣은 뒤 생존 여부를 관찰했다. 그 결과 질소 역시 해로운 기체라는 판단을 내렸다. 질소의 영어 명칭 나이트로젠(nitrogen)탄산 소듐을 의미하는 그리어서 니트론(nitron)만들다라는 뜻을 가진 접미어 제네스(-genes)의 합성어에서 유래했다. 질소가 초석을 비롯한 질소 함유 물질의 주성분이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은 것이다. 이에 반해 우리말 명칭인 질소(窒素)호흡에 사용할 수 없다는 러더퍼드의 결론에서 유래해 질식(窒息)과 같이 숨이 막힌다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228)

당시 연구에 필요한 산화 수은 등을 구입하고자 유럽을 방문한 프리스틀리는 라부아지에에게 새롭게 발견한 탈플로지스톤화 공기의 특징을 알려주고 심도 있는 토론을 이어갔다. 이후 라부아지에는 탈플로지스톤화 공기를 금속 등 여러 물질과 반응시키면 나중에 밝혀질 산화반응을 통해 각각 무게가 증가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를 연구 논문으로 보고하는 과정에서 화학 혁명의 큰 시작과 도전이 이루어졌다. 바로 당시 학계의 주류 이론이던 플로지스톤설을 전혀 인용하지 않은 채 반응을 거친 물질은 무게가 증가한다는 사실을 논한 것이다. 탈플로지스톤화 공기와 비금속 원소의 반응을 통해 형성된 물질들은 모두 무게가 증가한다는 점 외에도, 물에 용해되어 산성을 보인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플로지스톤을 기반으로 명명이 이루어진 기체는 이제 (oxy)을 만든다(genes)’는 의미에서 산소(oxygen)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249)

전기(electricity)라는 단어는 나무 수지(樹脂)가 굳어서 된 보석의 일종인 호박(amber)’을 뜻하는 그리스어 일렉트론(elektron)에서 유래했다. 탈레스가 장식용 호박에 붙은 먼지를 양모로 털어내는 과정에서 정전기가 발생했고, 더 많은 먼지가 달라붙는 현상을 통해 전기를 발견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기의 실질적인 첫 포집은 1752년 미국 과학자 벤저민 프랭클린(1706~1790)이 비 오는 날 하늘에 연을 말려 라이덴병(하전된 입자를 축적해 방전 실험을 하는 장치)에 전기를 모음으로써 성공했다. 이로부터 전기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되었다.


(271)

(패러데이)는 또한 용액 속에서 이동하며 전기를 옮기는 물질을 설명하기 위해 그리스어로 방랑자를 뜻하는 이온(ion)이라는 단어를 생각해냈으며, 마찬가지로 양과 음의 전하를 갖는 이온을 구분해 각각 양이온(anion)과 음이온(cation)이라고 지칭했다.


(330)

켈빈은 1848년 여러 종류의 기체를 일정한 양으로 고정한 후 온도에 따라 변하는 거동을 분석해 그래프로 그렸다. 그리고 그 결과를 가지고 관측된 값으로 한계점 이상의 값을 추정하는 외삽을 했을 때 모두 동일한 온도에서 압력이 0으로 수렴하는 현상을 관찰했다. 그는 이 온도를 절대 영(0)도로 간주하고, 이를 기준으로 다른 모든 온도를 양수로 만들 것을 제안했다. 그리고 1851년 그는 열 엔진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열역학(Thermodynamics)’이라는 단어를 처음 사용했다. 이후 열과 일을 포함한 에너지 전환에 대해 설명할 때 이 용어가 쓰이기 시작했다.


(343)

물리화학은 물리학 이론과 실험 결과를 활용해 물질의 화학적 성질 및 반응을 연구하는 분야다. 돌턴의 원자론과 맥스웰의 통계적 분자 에너지 분포, 기브스의 자유 에너지 개념이 맞물리면서 탄생했다. 초기 물리화학 형성 과정에서 누구보다 물리화학의 가치를 기대하고 확신한 인물은 독일 물리학자 프리드리히 빌헬름 오스트발트(1853~1932). 학창 시절 그는 곤충 채집이나 목공예 등 잡다한 취미 활동에 시간을 보내느라 학업에는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아버지에게 경고를 받은 이후 학업에 전념했으며, 화학교수가 되어 열역학과 상변화 등을 주 관심사로 삼아 물리화학 발전에 기여했다. 그는 1880년대 후반 물리화학 분야의 첫 번째 저널인 <독일 물리화학 저널>을 만들기도 했다.


(396-397)

그런데 그가 노벨상과 노벨재단 설립을 추진한 이유는 형 루드비그 임마누엘 노벨의 사망에서 비롯된 해프닝 때문이었다. 사망 소식을 접한 신문사들은 알프레드 노벨이 죽은 것으로 오해하고 부고 기사를 서둘러 인쇄해 발행했다. 거기에는 산업 분야에서 거둔 성공과 기여는 무시한 채 전쟁용 폭발물을 만든 죽음의 상인이라는 모욕적인 기사만 가득했다. 이 기사들은 본 노벨을 자신이 죽은 후 모두가 자신을 부정적으로 기억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자산의 94퍼센트에 해당하는 약 3,100만 크로나(스웨덴 화폐 단위)를 노벨재단 자금으로 할당했다. 이는 현시점으로 약 17 200만 크로나( 2,244억원)에 해당하는 금액으로 매년 노벨상 수상자에게 수여하는 상금과 메달 비용으로 사용되고 있다.


(491-492)

화학은 실체가 있는 물질을 중점적으로 탐구하면서 발전을 거듭해왔다. 그리고 그 발전 과정에서 가장 흔하게 반복된 부분이 기능과 특징, 가치의 재발견이다. 탄소의 아주 일부분을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이 점을 이해할 수 있다. 선사 시대에 탄소는 주로 불을 피우는 재료나 벽, 바닥, 몸에 그림을 그리는 검은색 안료로 쓰였다. 화학반응인 연소가 규명되고 화학이 형성된 후에는 숯 또는 석탄 형태로 산업 전반에 활용되었다. 이후 분석화학 기술이 진보하고 질량 분석 기술이 도입되면서 1985년 육각형과 오각형 형태로 배열된 탄소들이 축구공 모양의 입체 분자 구조를 이루는 풀러렌이 발견되었다. 곧이어 1991년에는 더욱 특징적인 튜브 형태의 탄소가 확인됨으로써 전도성과 강도가 높은 탄소 나노튜브 시대가 열렸다. 2004년 흑연의 판상 구조를 얇은 한 겹 단위로 분리 혹은 생성한 탄소 구조체인 그래핀이 확보되면서 탄소는 이제 단순한 연료나 필기도구가 아닌, 신소재로 주목받고 있다. 탄소 신소재들은 플레서블 디스플레이나 스마트 기기, 태양관 발전, 촉매 등 다양한 분야에 적용되고 있으며, 관련 연구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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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드디어 맨 처음 비늘 모양의 금 조각이 발견되었던 곳 가까이까지 오게 되었다. 여자 손톱처럼 생긴 무의미한 그 금 조각이 캘리포니아의 미래와 미국의 영혼을 뒤흔들어 놓으면서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사람들을 끌어들였던 것이다. 몇 년 후에 신문기사로 변신한 제이컵 토드가 이런 기사를 쓴 적이 있었다. ‘미합중국은 고된 노동의 대가만을 원하고, 어떠한 역경이라도 딛고 일어서려는 용기를 가진 선교자들, 개척자들, 건실한 이민자들에 의해 세워진 나라이다. 그렇지만 금으로 인해, 미국 국민의 가장 큰 단점인 탐욕과 폭력이 극명하게 드러나게 되었다.’


(101)

다른 히스패닉 계열에 비해 사람 숫자도 훨씬 많고 성격도 다혈질인 칠레 사람들은 외국인들의 증오를 한 몸에 받았다. 엘리사는 샌프란시스코에서 호주 사람들 한 무리가 칠레 부락을 습격해 전쟁을 방불케 하는 싸움을 벌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사금광들에서는 시골 일꾼들을 데리고 온 여러 칠레 회사들이 운영되고 있었다. 그들은 봉건 세습 제도하에 대대로 쥐꼬리만 한 임금을 받고 일하는 소작인들로, 그들이 발견하는 금은 자기들의 것이 아닌, 주인님의 것이라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그렇지만 양키들의 시각에서 보면, 그건 단순한 노예제도였다. 미국 법은 개인에게 유리하게 되어 있었다. 각 개인의 소유지는 자기가 일할 수 있는 만큼의 공간에 해당되었다. 그래서 칠레 회사들은 더 많은 토지를 확보하기 위해 일꾼들 각자의 이름으로 명의를 이전해서 법을 농락했던 것이다.


(244)

샌프란시스코는 이제 남자들만 홀로 외롭게 사는 삭막한 캠프촌이 아니었다. 여자들도 몰려들었으며 그와 함께 사회도 변했다. 여자들은 금을 찾아 나선 모험가들 못지않게 기가 센 여자들이었다. 황소들이 끄는 마차를 타고 대륙을 횡단하기 위해서는 강한 정신력이 필요했으며, 그 여자 개척자들은 그런 정신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들은 자기 어머니나 언니, 여동생들처럼 우는 소리나 하는 여자들이 아니었다. 그곳에서는 아마존의 여전사들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여자들은 용감무쌍한 남자들과 매일 지칠 줄 모르고 고집스럽게 싸우면서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으며, 남자들은 여자들을 자기들과 동등한 사람으로 대우했다. 그 여자들은 다른 곳에서는 여자들에게 금기시된 일들도 마다하지 않고 나서서 열심히 했다. 여자들도 금을 찾아 나섰으며, 카우보이로 일도 했고, 노새들도 몰고, 현상금이 걸린 악당들을 잡으러 나섰고, 노름방, 레스토랑, 세탁소, 호텔을 운영했다. ‘여기 여자들은 자기 이름으로 토지를 소유하고, 사고 팔 수도 있으며, 내키면 이혼도 할 수 있어. 펠리시아노도 나한테 서툰 짓만 했다 하면, 그 즉시 홀딱 벗겨서 땡전 한 푼 없이 쫓아낼 테니 조심 좀 해야 할 거야.’ 하고 파울리나는 편지에 농담까지 했다. 그리고 캘리포니아에는 쥐, , 무기, 악과 같이 없어도 될 것까지 골고루 다 갖추고 있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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