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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넷페미史 - 우리에게도 빛과 그늘의 역사가 있다
권김현영 외 지음 / 나무연필 / 2017년 1월
평점 :
한동안 페미니즘 책을 멀리했다. 그 책들을 읽는 바람에 오랜 우정을 잃었고 사랑이 위태로워졌기에. 페미니즘은 가장 친밀한 관계들에 균열을 일으켰고 차별에 분개하면서도 당연시하는 나 자신의 이중성을 일깨웠다. 독서는 괴로웠고, 어디서부터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채 분노만 쌓는 것이 싫어 페미니즘이 이슈가 되고 책들이 쏟아져 나와도 선뜻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런데 <대한민국 넷페미사>는 달랐다. 제목이 이상해서(‘넷페미가 뭐지?’) 집어 들었다가 빵 터졌다. 책을 보다가 이렇게 웃은 게 얼마만인지. 이 책은 2016년 10월 ‘페미니즘 라운드 테이블’이 기획한 강의와 토론을 정리한 것인데, 생생한 입말 덕에 여느 페미니즘 책보다 쉽고 즐겁게 읽힌다. 기막힌 현실을 한숨이 아니라 웃음으로 전하는 권김현영과 손희정의 입담은 감탄스럽거니와, 그 입담에 담긴 1990년대 중반부터 현재까지의 온라인 여성운동사는 더욱 감탄스럽다. 특히 이들의 강의에 이어진 박은하․이민경의 3강은, 90년대 영 페미니스트들을 자신의 계보로 인정하면서도 그들과는 독립적으로 새로운 활동을 전개해가는 뉴 페미니스트들의 목소리를 통해, 나 같은 비관주의자의 예단과 달리 여성주의의 역사는 도도히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것은 내가 산 시대였으나 내가 아는 역사는 아니었다. 내가 아는 역사에서 여성은 언제나 대사 없는 보조출연자거나 말 못하는 피해자였다. 그러나 이 책은 말하는 여성, 말로 싸우는 영혼들의 역사를 보여준다. 그 역사는 메갈리아의 언어만큼이나 낯설고 뜨겁다. 이상한 것은 언론에서 메갈리아의 언어를 처음 접했을 때 눈살을 찌푸렸던 내가 이 책에서 그걸 봤을 때는 웃음을 터뜨렸고 통쾌함마저 느꼈다는 점이다. 왜 똑같은 언어가 이렇게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을까? 그것은 언어가 놓인 ‘맥락’이 달랐기 때문이리라. 권김현영은 과거 영 페미니스트들이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주장을 했을 때 이를 ‘맥락적으로’ 이해하고 그 가치를 지켜가려는 ‘사회’가 있었음을 상기시키면서, 정치적으로 올바른 언어란 과정과 맥락 속에서 구성된다고 지적한다.
그 지적은 오늘날의 ‘사회’를 돌아보게 한다. 정치적 올바름을 내세워 소수자의 언어를 검열하고 ‘예스컷’을 외치는 사회, 양성평등의 이름으로 다수자가 억울함을 토로하는 사회. 그 사회에서 아버지들은 버림받았다며 흐느끼고, 아들들은 “자신은 이 가부장제의 수혜를 받은 적이 없다고 광광 울고” 있다. 현 사회의 시대정신과도 같은 이런 자기연민은, 자신의 인생과 사회에 대한 책임을 부정하고 전가하는 미성숙함을 반영한다. 그러니 이들에게 넷페미들이 “그만 징징대라”고 일갈하는 것은 얼마나 올바른가.
물론 필자들이 인정하듯 넷페미나 여성이 늘 옳은 말을 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여성의 목소리가 많아지는 게 진보지 그 목소리가 다 옳은 얘기여야 진보는 아니다.” 진보란 올바른 하나의 목소리가 아니라 온갖 목소리들의 아우성이 올바름을 만든다고 믿는 낙관이다. 영웅의 웅변이 아니라 아우성의 낙관이 역사를 만든다. <대한민국 넷페미사>를 읽고 영화 <파란 나비효과>를 본 지금, 나는 비로소 역사를 믿게 되었다. 내가 역사임을 믿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