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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비하인드 도어
B. A. 패리스 지음, 이수영 옮김 / arte(아르테)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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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글라스 케네디였나, 아무튼 뭐 그런 류의 장르 소설을 읽으며 새롭게 깨우친 독서 기술이 있다. 한 번에 두 페이지 씩 넘기는 거. 그리고 페이지의 첫, 중간, 마지막 문장만 읽는 것. 그런 망나니 짓을해도 줄거리를 따라잡는데는 아무런 장애가 없다. 하루에 책을 한 권씩 읽는다는 사람들을 보며 도대체 어떻게? 라는 의문을 가졌었는데 얼추 이해가 된다. 그렇다면 두번째 의문이다. 그렇게 읽는 게 의미가 있냐는 것이다. 책은 원래 꼭꼭 씹어 완전히 소화를 시켜야 정신에 이로운 게 아니냐는 것이지. 결론은, 


충분히 의미가 있다. 왜? 


재미있기 때문이다. 결말을 향해 질주하는 맛이 있다. 흥미는 퇴색되지 않는다. 고조된다. 열매를 갈아 고농도의 압축액을 마시는 것 같다. 왜 그런게 있지 않나. 고속도로 휴게소에 들러 잠시 쉬는 시간. 버스는 15분 뒤에 출발하고 주문한 잔치국수가 3분만에 나온다. 후루룩 국물까지 다 마셔도 시간은 남아 화장실까지 다녀온다. 버스에 앉으니 뜨거워진 뱃가죽의 열기에 노곤 노곤 행복한 기분이 든다. 모든 음식이 미슐랭 스타를 받을 필요는 없다. 휴게소의 잔치국수는 그 나름의 가치와 맛이 있는 것이다.


<비하이드 도어>는 잘생긴 싸이코패스의 완벽한 함정에 걸린 한 여자의 이야기를 그린다. 여자에겐 누구보다도 소중한 여동생이 하나 있다. 다운증후군. 부모는 아이를 버리려고했지만 언니는 자신의 인생을 포기해가며 기꺼이 그 책임을 맡는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무게가 느껴진다. 평생 책임져야 할 장애인 여동생 때문에 사랑하는 남자들과 헤어져야만 했다. 쌓이는 나이가 단순한 숫자로 느껴지지 않는다. 바로 그 때 조지 클루니를 닮은 마흔살의 유명 변호사가 그녀에게 손을 내민다. 놀라운 외모에 탄탄한 재력, 완벽한 매너까지. 여기서 팁 하나. 누군가 우리에게 제안을 했을 때 그게 사기인지 아닌지 판별하는 법은 아주 간단하다. 내가 가진 것에 비해, 내가 줄 수 있는 것에 비해 더 많은 보상을 제공하는가. 그렇다면 그건 100% 함정이다. 여자도 어렴풋이 그런 의심을 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랑이 개입됐을 때 주고 받음의 크기는 좀처럼 가늠이 되지 않는다. 과도한 배려, 과도한 희생, 과도한 지원은 종종 사랑과 얽혀 숭고한 정신으로 오해된다. 인간이 가진 감정 중 가장 보안이 취약한 게 바로 사랑이다. 그 또는 그녀가 나를 사랑한다고 착각하는 것. 불행은 바로 여기서 출발한다.


신과 같았던 남자가 다소 허무하게 무너져버려 아쉬운 점은 있지만 꽤 재미 있게 읽은 소설이다. 특히 맥빠진 결말을 붙잡는 마지막 장은 전율이 돋기에 충분하다. 기대했던 맛은 아니지만, 충분히 맛있게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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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개의 특강으로 끝내는 수학의 기본 원리
제리 킹 지음, 박영훈 옮김 / 동아엠앤비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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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말, 나는 갑자기 수학을 공부하고 싶어졌다.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을까? 당시 내가 초등학생을 위한 수학 과목 서비스를 기획하고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던 것 같다. 물론 그게 작은 계기가 됐을 수는 있지만, 거기엔 보다 큰 뭔가 근본적인 갈증이 있었던 것 같다. 이를테면, 세상의 본질이 궁금했달까?


우리는 실생활에서 다양한 현상을 마주하지만 그런것들을 만들어내고 조정하는 추상적 법칙이 어딘가에 내재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래서 생각이라는 것이 탄생한 이래 수많은 철학자들이 그 본질을 찾아내려 한 것이다. 그 중 가장 유명한 후보는 역시 '수'일 것이다. 그리고 수는 지금까지도 꽤 설득력 있는 의견을 제시한다. 그렇다면 수는 정말로 우리 세계의 본질일까? 이런 생각을 처음으로 가진 피타고라스는 그렇다고 말한다. 그와 그의 제자들에게 수는 일종의 종교였다. 그들에게 수학자는 수학이라는 종교가 만들어 놓은 법칙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사제였고, 신은 최초의 수학자였다.


수학을 공부하고자 하는 두 번째 이유는 하나의 거대한 체계가 무엇을 기반으로 어떻게 형성됐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나는 쌓고 만드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고 그걸 업으로 삼고 있기도 하다. 그러니 쌓을 땐 무엇을 조심해야하고 쌓고나면 뭘 확인해야 하는지, 역사적으로 가장 오래되고 방대한 체계를 참고하는 게 당연한 일 아니겠는가.


수학의 증명 과정을 보고 있으면 그걸 종교로 받아들인 피타고라스의 심경이 이해가 된다. 하나의 증명을 위해 수학은 더 이상 증명이 불가한 자명한 사실만을 이용한다. 깍아내고 깍아내고 또 깍아내어 손에 든 정수. 그래서 수학은 절대 복잡하지 않다. 우리가 수학을 어렵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우리의 수학 교육이 증명없이 공식을 들이밀기 때문이다. 증명 과정을 알고 있으면 결과(공식)는 자연스럽게 도출 될 수 있다. 그러나 결과만을 주입하면 그 과정을 파악하는 건 괴로운 연구 과제가 된다. 우리는 이 순서를 바꿔서 해왔기 때문에 수학을 지긋지긋해 하는 것이다.


물론 수학에서도 계명은 존재한다. 유대인들이 십계명에 어떠한 토도 달지 않듯 그렇게 믿어야만 하는 명제는 존재하는 것이다. 예컨대 "0으로 나누지 말지어라" 같은. 물론 저자는 이를 증명하기 위해 아래와 같은 계산을 시도한다.


x, y를 0이 아닌 유리수라고 하고 x=y라고 하자. 그러면 다음이 성립한다.




2x=x를 만족하는 유리수는 x는 0이 유일하다. x가 0이 아니라면 우리는 2x=x 의 각 항을 x로 나눌 수 있기 때문에 2=1이라는 결과를 받아들여야 한다. 이는 모순이므로 그 무엇도 0으로 나눌수는 없다. 그러나 나는 여기에 뭔가 석연치 않음을 느낀다. 증명 과정에서 우리는 증명되지 않은 어떠한 방법도 사용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2=1이라는 결과가 나왔다면 1과 2를 구분하는 우리의 셈 체계에 근본적 결함이 있다는 말 아닐까? 다음은 1과 0.999...(9가 무한히 반복된다)가 같음을 증명하는 과정이다.





수학적으로 9가 무한히 반복되는 실수 0.999...는 정확하게 1이며 이는 결코 어림한 값이 아니다. 위 수식이 바로 이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2=1은 모순이고 1=0.999...는 모순이 아닐까? 이는 그저 9가 무한히 반복되는 실수 0.999...를 0.999...로 표현할 수 밖에 없는 우리 문자 체계의 한계로 봐야하는걸까? 이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수학의 입장에서 이는 아주 치명적인 문제다. 수학은 수 많은 명제가 동시 다발적으로 생성되어 구성한 체계가 아니라 아주 당연한 정리부터 하나씩 차곡 차곡 쌓아 올려 만든 학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중 하나라도 결함이 존재한다면 그 증명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이후 증명들은 모두 믿을 수 없는 것이 되버린다. 예컨대 1과 2는 아무런 차이가 없음을 증명할 수 있다면 지금껏 수학이 아무리 훌륭한 성과를 냈고, 아무리 현실 세계의 현상과 부합한다 하더라도 송두리째 무너질 수 밖에 없다. 나는 왜 모든 수학자들이 신경과민에 빠지지 않는지 신기하다.


물론 여기에 대한 답을 얻지는 못했지만 나는 이 책을 통해 꽤 즐거운 여행을 했다. 일반적으로 수학은 간결하고, 아름다우며, 우아하기까지 하다. 증명 과정을 보고 있으면 그 신묘함에 저절로 고개가 수그려진다. 그러나 이 책은 수학에 대한 책이라기 보다는 수학책에 가깝다. 아름답고 우아하다는 말에 이끌려 덥석 집어든다면 갈수록 복잡해지는(왜 앞 단원을 놓치면 줄줄이 망하는지 알겠다) 증명과 용어에 비명을 지를지도 모른다.


이 책을 읽으며 놀라웠던 건 각 장의 순서가 우리 수학 교육의 순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것이다(그 끔찍한 수학의 정석과 아주 흡사하다). 그러니 우리는 잘못된 내용을 배운 건 아니다. 단지 잘못된 전달 방법으로 고통받은 것 뿐. 내가 배우던 시절에도 이렇게 원리를 강조하는 교수법이 있었다면 훨씬 즐거웠을 것 같다. 하지만 이를 실천하는 선생님들은 시험에 나오는 문제를 풀어달라는 부모들의 요구에 엄청나게 시달렸을 것이다. 그러고보면 뜻이 없는 게 아니다.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세상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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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어트 2018-03-20 1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무한의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학생들이 유한의 단계에서 무한의 단계로 확장될 때 오개념을 겪게 됩니다. 0.999...는 무한급수로 설명하여 극한 개념을 사용하는게 형식적으로 엄밀하고 제일 간단한 방법입니다. 하지만 중학생들은 아직 그러한 개념을 배우지 못하였기 때문에 교수학적 변환을 통하여 무한소수라는 개념을 배우게 됩니다.

한깨짱 2018-03-21 13:43   좋아요 0 | URL
네 댓글 고맙습니다. 0.999...에 lim을 하는 걸로 설명해야 한다는 말씀이시죠? 그런데 저는 9가 계속되고 이를 극한으로 끌고가는게 왜 1이 되는지, 그 자체가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극한이라는 개념 자체를 이해 못하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저에겐 여전히 제논의 역설이 풀리지 않는 신비로 남아 있습니다.
 
[eBook] 종의 기원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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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학계의 싸이코패스라 불리는 정유정 작가의 신작이다. <7년의 밤>에서 무시무시한 살육극을 보여줬던 악녀의 귀환. 이번에도 그녀의 관심은 인간의 근원적 악과 그 악행이 연출하는 카니발이다.


전작 <7년의 밤>이 산꼭대기에서 시작해 줄곧 내리막길을 걷는 요상한 작품이었다면(흥미 곡선이 절정, 위기보다 발단이 높은 몇 안되는 책이다) <종의 기원>은 시종일관 늪지를 헤매는 책이다. 사람은 커녕 고기도 한 번 먹어본 적 없는 척, 점잖은 악어 한마리가 물 밑에서 잠행을 한다. 그러다가 사람이 나타나면 쓱, 물 위로. 어머, 넌 참 착한 악어구나. 반갑게 인사한다. 악어가 물끄러미 쳐다본다. 그리고는?


정유정이 이 시들한 이야기에 <종의 기원>이라는 거창한 제목을 붙인 이유는 인간이라는 종의 본질이 악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생각 때문인것 같다. 정유정은 종의 진화 과정이 폭력으로 점철되어 있으며 "나의 생존=타자의 죽음" 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 같다. 그러니까 싸이코패스라는 독특한 정신적 기질이 유전자에 각인된 우리의 본성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생각해보자. 싸이코패스의 행동과 유전자의 행동은 비슷한 점이 많다. 역사를 돌아보며 그 피비린내에 죄책감을 느끼고 반성을 하는 건 우리의 의식이지 유전자가 아니다. 의식이란 무의식을(유전자의 행동) 억제하기 위해 만들어진 일종의 감옥이다. 이 감옥은 윤리, 도덕, 신뢰, 공감 같은, 인간과 인간의 관계 사이에서 태어난 간수들이 지킨다. 이 중 몇몇 간수가 사라졌거나, 죽었거나, 애초에 태어난적 없는 사람은 무의식이 행동으로 발현되고 우리는 그것을 싸이코패스라 부르는 것이다.


유전자가 자신의 행동에 죄책감을 느낄까? 유전자는 오직 하나의 법만을 따른다. 생존. 이를 위해선 복잡한 작동 구조가 필요없다. 아니, 오히려 그건 치명적 약점이 된다. 자신이 생존하기 위해, 후손에게 자신의 형질을 물려주기 위한 결정적 순간마다 이것이 맞는가, 이 행동이 옳은가를 따진다면 이미 늦어버리는 것이다. 따라서 유전자는 마치 자석의 N극과 S극이 서로를 알지 못하고, 서로를 미워하고, 심지어 서로를 죽이고 싶어하더라도 근처에 다가오는 순간 척, 하고 붙을 수 밖에 없는 것처럼 기회를 얻었을 때 무조건 행동하는 것이다. 유전자에게 윤리를 바라는 건 선로 위에 놓인 나뭇잎이 자기를 밟고간 기관차에 사과를 요구하는 것만큼이나 무의미하다. 기관차는 뻔뻔하거나 사악하거나 나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게 왜 잘못인지 모르기 때문에 사과를 할 수 없다.


인간의 어둠에 집착하는 작가라면 이는 평생에 걸쳐 고민해볼만한 주제이다. 하지만 이 고민을 평생의 과제로 삼는 것과 그것을 작품으로 옮기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그곳은 너무나 어둡고 깊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다. 모든 기획이 완료됐다 하더라도 실제 책상 앞에 앉아 문장을 적는 순간 아주 끔찍한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작가는 과연 그들의 심리를 이해할 수 있는가?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들은 악한게 아니라 선과 악을 구분짓는 잣대가 없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그들의 행동을 예측할 수는 있어도 그 순간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알 수는 없다. 설령 우리가 그걸 완벽히 이해한다 하더라도 작가는 결코 그것을 묘사해선 안 된다. 싸이코패스의 마음을 세세히 읽게 된다면 그 불가사의한 악의 존재감을 독자가 제대로 느낄 수 있을까? 그건 패를 다 까고 치는 포커보다도 재미가 없을 것이다.


정유정은 작가의 말에서 이 소설을 쓰는 과정이 너무나 힘겨웠으며 삼인칭으로 기술하던 주인공을 일인칭으로 바꾸고 나서야 어느 정도 전개를 보였다고 했다. 하지만 이는 완벽한 실수다. 소설은 끝까지 삼인칭으로 남았어야 한다. 심리를 드러내는 싸이코패스는 딸기를 좋아하는 지렁이만큼이나 어색하다. 정유정은 싸이코패스가 만들어지는 과정도, 만들어진 싸이코패스를 묘사하는데도 성공하지 못한 것 같다. 주인공은 그저 싸이코패스가 되고 싶은 중2병 풋내기처럼 보인다.


그들을 다루는 불문율은 그들의 심리를 묘사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첫 일초부터 마지막까지 이 규칙을 지키는 영화 두 편을 알고 있다. 하나는 코맥 매카시의 원작을 영화화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고 하나는 데이비드 핀처가 일부 에피소드를 연출한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마인드 헌터>다. 싸이코패스가 정말 어떤 사람들인지 알고 싶다면 이 영화들을 보라. 아무런 위화감도 없이, 아무런 위협도 없이, 꿈결처럼 다가와 슥, 목을 베고 가는 섬뜩한 괴물들. 그 천진난만함을 보고 나면 <종의 기원>이 낳은 갈증이 한방에 날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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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반
폴 비티 지음, 이나경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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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배반>에 대한 해외 평 중에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얘기가 종종 나오는데, 한국 독자에 한해
 그건 신랄한 풍자와 문체, 거침없는 욕설에 대한 대비가 아니라 전적으로 지루함에 대한 경고라고 봐야 한다. 왜? 우리는 결코 흑인이 당한 인종차별의 고통을 피부로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이 책은 흑인과 그들이 겪는 인종차별을 주제로 한다). 우리가 그들의 마음을 이해하려면 북유럽에서 블루칼라 아시아인으로 살아가거나 조선 초기 명망 높은 양반 집의 노예가 되어 애기씨를 훔쳐봤다는 이유로 두 눈이 뽑혀 쫓겨나는 일을 삼대 쯤 겪어야 한다. 솔직히 우리의 모국에서 우리는 대개 인종차별의 가해자지(중국인 여행객, 조선족들에 대한 적대적 태도를 보자) 피해자가 아니다.


지금부터 아프리카 이외의 지역에서 흑인으로 산다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자. 그건 우리가 우리의 이마에 조상님들의 신분을 가리키는 문신을 새기고 사는 것과 비슷하다. 반갑습니다. IT 개발실의 김갑수 입니다. 반갑게 인사를 나눈 뒤 회의실에 앉았는데 자꾸만 이마의 문신이 눈에 들어온다. 김갑수씨는 확인이 가능한 선조대부터 쭉 망나니를 해왔던 집안의 27대손이다. 까만색으로 '천'이라 적힌 글자는 그의 근본이 오랜 시간 불가촉천민의 토양 위로 뿌리 내리고 있음을 얘기해 준다. 이런 사회에서 김갑수 씨는 제대로 된 평가를 받을 수 있을까? 지각, 업무상의 실수, 프로젝트의 실패 등은 다른 사람이 저질렀을 때와 똑같은 무게를 지니는가? 이뿐만이 아니다. 김갑수씨는 취향이나 취미마저 자신의 뿌리와 연계되어 설명되는 부조리를 겪어야 한다. 천민이라 역시 생선을 좋아하네요. 천민들은 고기를 살 돈이 없어 비린내 나는 생선을 주로 먹었답니다. 저 사람들이 잡곡밥을 즐기는 이유는 쌀밥을 먹지 못했던 조상들의 입맛이 그대로 이어져온 거라고 봐야합니다. 대한민국은 다행히 봉건 시대의 신분 제도가 완전히 사라진 근대 국가이며(대신 자본주의 시대의 새로운 계급이 탄생했지만) 설령 이런 차별이 존재 할지라도 자신의 출신을 감추는 게 어느정도 가능한 사회다. 하지만 흑인은 절대 그럴 수가 없다.


그들의 얼굴이 '검기' 때문이다.


그들의 피부엔 그들의 뿌리를 증명하는 문신이 새겨져 있다. 그것은 캐내거나 지울 수 없으며 그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피부를 모두 벗겨낸 뒤 과다 출혈로 죽는 것 뿐이다. 아프리카 이외의 지역에서 흑인으로 산다는 건? 자신이 노예의 자식임을 증명하는 라이센스를 지닌 것이다.


이 책의 주인공 Me는 LA 근교 디킨스 시에 사는 흑인이다. 그는 농장을 경영하며 호미니라는 흑인 노예를 소유하고, 병원과 학교 버스 등 공공시설물에 백인과 흑인의 이용 범위를 구분하는 표지판(혹은 페인트 칠)을 붙여 디킨스 시에 철저한 인종 분리를 시도한다. 그의 노예 호미니는 흑인 아역 배우 출신으로 인종차별이 난무하는 코미디 TV 드라마에 출연한 경력이 있는 노인이다. 호미니는 드라마에서 온갖 차별을 당했던 그 시절을 오히려 자신의 전성기로 추억하며 나이를 먹고 나서도 학대를 당하는 걸 최고의 즐거움으로 여긴다. Me는 호미니를 즐겁게 해주기 위해 그의 생일날 백인 지정 좌석이 있는 버스를 선물해준다.


흑인 작가가 흑인을 주인공으로 이런 얘기를 한다는 건(그래서 이 책의 제목이 배반이다) 어떤 상징이나 대의가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는 미치광이처럼 날뛰는 이 부조리극을 통해 흑인 대통령이 탄생하고, 인종차별이 천박과 무지의 뿌리로 대변되고, 더 이상 어떤 회사도, 학교도, 병원도 인종 분리를 하지 않는 세상이 왔지만 여전히 흑인은 도시의 가장 가난한 동네에 살고 마약 거래와 총기 없이는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가난과 범죄의 상징으로 대변되는 현실을 조롱하려 한다. 폴 비티는 Me를 통해 묻는다. 미국에서 인종 문제는 완전히 해결됐는가? 얼굴이 검다는 의미는 더 이상 물건을 훔치거나, 세금 또는 카드 대금을 내지 않거나, 빈 집을 털거나, 백인 여자를 강간하거나, 주유소에서 강도질을 하는 것과 동일시되지 않는가?


이 책이 신랄한 풍자와 조롱 블랙코미디로 무장하고 있음에도 결코 재밌거나 공감가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배반>은 흑인 역사에 대한 수 많은 레퍼런스를 제공하고 친절한 출판사는 그 모든 내용을 각주로 촘촘히 설명하지만 설명은 설명이고 글은 글일 뿐이다. 8,000RPM으로 눈알을 아래 위로 굴리며 그 모든 단어와 문장을 섭렵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이 이야기를 피부로 느끼지 못한다. 우리는 한번도 이런 차별을 경험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당신이 일제 시대에 태어났다면 이 말은 취소다)! 따라서 우리는 이 만연체 문장, 그러니까 흑인이 부딪혀온 수많은 역사적 난관을 딱 잘라 말할 수 없기에 구불구불 단어에 단어를, 문장에 문장을 붙여 표현하는 저자의 독특한 스타일을 난잡하다고 느낄 것이다. 이 책이 맨부커 상을 받았대도 소용없다.


내가 <배반>을 위해 해줄 수 있는 홍보는 딱 하나다.


이 책이 조지프 헬러의 <캐치-22>를 정돈된 소설로 보이게 할만큼 대단한 난동극을 보여준다는 것. 


검은 얼굴을 한 요사리안이 보고 싶다면 이 책을 사라. 내가 거기에 넘어갔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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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겁쟁이 겁쟁이 새로운 파티
정지돈 지음 / 스위밍꿀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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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한국 소설의 아쉬운 점은 서사가 일상에 매몰됐다는 것이다. 그 바닥에서 이야기는 완전히 촌스러운 게 된 것 같다. 호환마마나 역병을 보듯 작가들은 이야기를 발로 쫓아낸 뒤 재미도 없고 착하지도 않은 계모를 안방에 들였다. 고통받는 건 계모 밑에서 자랄 독자니까 뭐.


정지돈을 처음 본 건 <문학동네 젊은 작가상 수상집>에서 였다. 그는 <건축이냐 혁명이냐>라는 단편 소설로 대상을 받았는데, 그야말로 압도적이었다. 힘을 쭉 빼고 내뱉는 덤덤한 문장들은 진지함과 농담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들었고 대단한 지향과 목표가 없는 듯 부유하는 이야기 속에 본인이 추구하는 비전이 확실하게 들어있는 이중성은 하루 종일 잔소리를 하다 툭, 하고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잔을 내놓는 츤데레 대리님같은 매력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 사람의 장편을 꼭 한 번 읽고 싶었다. 이런 스타일의 이야기가 길어졌을 때 단편과 똑같은 집중력과 재미를 유지할 수 있을까? 농담은 주제를 막론하고 길어질 수록 그 재미가 떨어진다. 정지돈이라면 농담의 긴장감을 몇 페이지까지 유지할 수 있을까? 나는 그게 궁금했다.


<작은 겁쟁이 겁쟁이 새로운 파티>는 2063년의 한반도를 배경으로 한다. 남과 북은 드디어 통일이 되었다. 국제 정세는? 일본 열도가 마침내 물 속으로 가라 앉았고 정부 혹은 국토를 잃은 전세계의 난민들이 아직 존재하는 국가를 향해 질주하는 상황이다. 때문에 중앙 정부의 치안 유지력과 행정력은 수도 서울에 한해서만 유효하다. 난민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였는지 한국은 총기 소지를 합법화했고 총격전은 일상이 됐다. 아내가 남편에게, 자식이 부모에게, 아파트 발코니에서 도로의 행인에게 총격이 가해지고 도로는 박살난 시체로 가득해졌다.


버스 기사 짐은 안드레아의 제안을 받아 만주까지 운전을 해주기로 한다. 매우 위험했지만 서울에서 계속 살기 위해선 돈이 필요하다. 태워야 할 사람은 안드레아와 무하마드. 무하마드는 분단 시절 아랍인으로 가장해 남파된 간첩이었고 1996년 발각되어 무기징역을 받을 위기에 처했지만 그간 무하마드가 보여준 학문적 성과(아랍과 고대 한반도의 관계 연구)와 간첩 행위의 경미함으로 사면을 받는다. 올해 나이는 129세. 현재 직책은 한국문명교류연구소 소장. 그러나 그 연구소는 국가 전복을 꿈꾸는 테러 단체의 한국 지부였고 안 그래도 위험했던 여행은 국가 공권력의 추격까지 받는 혈투가 된다.


자, 여기까지만 말해도 이 소설이 그간 한국 문학계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세계를 그린다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대단한 기대가 부풀어 오른다. 현란한 총격전, 숨막히는 추격, 영리한 따돌림과 충격전 반전! 그런데 이런 이야기들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소설은 마치 독자의 바람을 외면하는게 일생일대의 미션이라도 되는 양 힘을 쭉 뺀 채 부유한다. 만일 이 책이 159페이지에서 끝나지 않았다면 나는 완독하지 못했을 것이다. 정지돈은 이 위기를 분량으로 해결했다. 한 페이지에 540자, 159페이지면 8만 6천자가 넘는 분량이지만 수 많은 공백을 고려하면 8만자도 채 되지 않을 것이다. 단편 소설 5개. 어쩌면 이 분량이 바로 농담의 한계인지도 모르겠다.


정지돈은 주인공 짐의 입을 빌려 이런 얘기를 한다.


짐은 텅 빈 놀이터, 유원지, 공원을 걸었다. 아무런 의미도 기능도 없는 글. 짐이 걷기 좋아하는 곳이 그런 걸지도 몰랐다(23p).


정지돈에게 글쓰기는 어떤 의미일까? 단순한 유희? 정신이 이상해진 알콜중독자 노숙자가 행인을 향해 내뱉는 얘기 같은, 의미도 의도도 없는 말.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정지돈 만큼 행복한 작가는 없을 것 같다. 그는 유희를 직업으로 삼고 있으니까. 그 놀이가 좀 더 지속될 수 있도록 내가 그의 책을 좀 사줘야겠다. 혹시 또 모르잖아, 언젠가 내가 그 바턴을 이어받을 수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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