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키스토크라시 - 잡놈들이 지배하는 세상, 무엇을 할 것인가
김명훈 지음 / 비아북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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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키스토크라시란 못된, 악한 등을 뜻하는 그리스어 kakos의 최상급 kakistos와 권력, 통치를 뜻하는 cracy의 합성어다. 쉽게 말해 개똥 같은 인간들이 지배하는 국가를 의미한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이 책은 전 세계에 만연한 빈부격차, 그리고 그것을 유지하려는 부자들의 탐욕과 비도덕성에 피를 토하는 책이다. 작가는 1963년생의 한국 남자로 초등학교 때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그래서 미국의 역사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는데, 총 5부로 구성된 책에서 3부 한 장을 통째로 도널드 트럼프에게 할애하기도 한다. 사실 카키스토스란 말 자체를 그를 위해 준비한 게 아닌가 싶다.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외쳤던 루소는 정치체제를 민주정, 귀족정, 그리고 군주정으로 구분했다. 루소의 민주정은 국민 전체가 정치에 참여하는 것이었는데 이 같은 이상을 실현하는 국가는 역사상 존재한 적이 없다. 민주정이란 현재 대의민주제와 거의 동일시된다. 국민을 대표하는 직업 정치인을 선거로 뽑아 정치를 대리하는 것이다. 민주정은 다시 사회의 생산물과 생산 수단을 어떻게 배분하느냐에 따라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로 나눌 수도 있는데, 둘은 비슷해 보이지만 공산주의는 결과물을, 사회주의는 생산 수단을 공유한다는 데서 큰 차이가 있다. 하지만 이렇게 복잡한 구분은 오늘날 아무런 쓸모가 없다. 우리는 모두 '자본주의'의 시대를 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결코 자본주의가 아니다. 그러나 자본의 막강한 힘은 정치의 색깔을 모조리 지워버렸다. 한때 인류는 세계를 왼쪽으로 끌고 가려는 세력과 오른쪽으로 밀고 가려는 세력을 가진 적이 있다. 그러나 현재는 온 힘을 다해 오른쪽으로 미는 집단과 적당히 미는 집단이 있을 뿐이다. 국가를 다스리는 건 정치가 아니라 돈이다. 우리는 법 앞에서 평등한 게 아니라 돈 앞에서 평등하다.


오늘날 돈의 힘을 제어할 수 있는 집단은 없다.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전 세계 경제가 침몰 직전까지 갔음에도 월스트리트의 CEO 중 감옥에 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그들은 구제 금융을 받아 자기 자신에게 막대한 성과급을 지급했고 금융 규제를 막으려는 로비에 사용했다. 정치인들은 돈 앞에서 무력할 수밖에 없었는데 선거에서 이기려면 이들이 기부하는 정치 자금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들을 막아줄 최후의 보루인 시민마저 돈에 중독이 됐다는 것이다. 미디어는 시종일관 부를 우상화함으로써 돈만 있으면 최고라는 기풍을 대중문화에 깊숙이 퍼뜨렸다. 어느샌가 우리도 '돈만 많으면 형'이라는 말을 부끄럼 없이 하게 되지 않았는가?


하지만 미국 사회가 kakos에서 kakistos로 진화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부패라는 말이 머쓱해질 정도로 압도적인 개망나니의 등장에 있다. 노골적인 인종차별과 거짓말로 국민을 이간질하고 사이다로 대변되는 자극적 언행으로 팬덤을 형성해 범법을 일상화하는 상상초월의 인물. 금융과 산업계의 부자들은 이런 인물에게 풀베팅을 함으로써 부자 감세를 가속화했다. 공유와 소통을 가치로 내걸던 최신 미디어들은 거짓 뉴스를 전파하는 도구로 전락해버렸다.


이는 비단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각도의 차이는 있을망정 대한민국도 동일한 목적지를 향해가는 선로 위를 달리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시스템을 미국에서 빌려왔고, 그들을 선진 사회의 표준으로 받아들이는 한국이니 미국의 현재가 곧 한국의 미래라고 믿을만한 근거가 충분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더 늦기 전에 코인이나 해서 기차의 앞칸으로 옮기는 것만이 답일까?


<카키스토크라시>는 현실을 첨예하게 기술하지만 그 원인을 파헤치고 극복 방안을 제시하는 데는 다소 아쉬움이 있는 책이다. 게다가 문제의 초점이 부패한 권력층에 맞춰지다 보니 역설적으로 문제의 해결이 우리의 노력과는 무관하다는 인상까지 주곤 한다. 이런 생각은 그저 이 모든 상황을 한방에 해결해줄 메시아의 도래만 기다리는 소극적 사회를 만들 수 있다. 도널드 트럼프 같은 사기꾼은 오히려 이런 토양에서 탄생한다.


역사적으로 국가의 위기는 정치에 무관심한 서민과 계층 상승의 꿈만 꾸며 체제에 안주하려는 중산층의 비겁함,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영민하게 이용하는 정치인의 등장으로 완성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심각하게 고민해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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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원 생리학 인간 생리학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류재화 옮김 / 페이퍼로드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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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노레 드 발자크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 없다면 당신은 평생 단 한 권의 책도 읽지 않은 것이다,라고 하는 건 좀 오버고 책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어디서 한 번쯤은 이름만이라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발자크는 19세기 프랑스에서 활동한 소설가이자 컬럼리스트로 <인간희극>과 <고리오 영감>등의 작품을 남겼다.


워낙에 문명이 휘날리는 사람이라 이름을 듣자마자 고개를 끄덕끄덕 할 테지만 그의 책을 읽어본 사람 손 들어보세요,라고 묻는다면 상황이 좀 달라질 것이다. 쭈뼛쭈뼛 두리번두리번. 사실 대문호들의 작품이란 게 다 그렇다. 대부분 제목만 '확실히' 알고 있는 것들. 이를테면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라던가 <안나 까레리나> 같은...


아무튼 발자크도 이런 반열에 드는 사람이다. 최고의 작품으로는 많은 사람들이 <인간희극>을 꼽는 거 같은데, 몇 개의 작품이 워낙에 유명하다 보면 반드시 알려지지 않은 작품을 찾아 틈새를 노리는 기획이 탄생하게 된다. 그렇게 해서 나온 책이 바로 이 <공무원 생리학>이다.


사실 나도 뻔질나게 발자크라는 이름을 들어왔지만 그의 책을 읽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그런 나에게 이 번지르르한 신간은 도저히 피할 수 없는 '덫' 같은 것이었다. 게다가 최근에 크게 논란이 된 LH 사태로(물론 그들이 공무원은 아니지만) 공기업에 대한 신뢰가 바닥에 떨어진 것도 한몫을 거들었다.


<공무원 생리학>은 19세기 프랑스, 이제 막 공화국이 된 이 갓난아이의 공무원들을 살벌하게 비판하는 책이다. 이 나라나 저 나라나 공무원은 다 똑같네 하는 공감대가 형성될 수는 있는데, 그 이상이 없는 건 조금 아쉽다. 그냥 씹고 끝낼 생각이었다면 굳이 이렇게 길게 말할 필요가 있었을까? 혁명과 왕정이 엎치락뒤치락 반복되던 격동의 시대를 경험하다 보니 아무래도 작가의 감정이 뼈에 사무친 게 아닌가 싶다. 콩 코드르 광장에서 시민이 직접 왕의 목을 자른 지 얼마나 됐다고 다시 왕들이 돌아오고, 혁명을 완성할 것처럼 보였던 국가의 희망은(나폴레옹) 제국주의의 야망에 불타 나라를 수렁으로 몰아넣었으니, 누가 우두머리가 되든 그저 배를 붙이고 자기 자리를 지키기 바빴던 공무원들에게 분노를 내뱉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시간에 깊숙이 파묻힌 감정은 역시 시간의 흐름과 함께 빛이 바래는 걸 막을 수는 없는 것 같다. 지나친 뜨거움은 종종 시간이 지나 민망함으로 변하곤 한다. 책 전반에 걸친 과장된 말투는 그 시대를 공유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생뚱맞게 들릴 수 있다. 감정을 이입하기 위해선 우리를 괴롭혔던 부조리한 공무의 경험을 끊임없이 떠올려야 한다.


많이 기대했던 책이기에 아쉬움도 크다. 변화구보다는 역시 직구를 노려야 했던 걸까? 오노레 드 발자크라는 큰 산을 이렇게 오르기엔 부족함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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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해변
이도 게펜 지음, 임재희 옮김 / 문학세계사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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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 게펜은 한 마디로 이스라엘의 테드 창인데, 그래서 소설이 굉장히 지루하다. 긴박감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이야기가 시종일관 만만디다. 둘 다 단편을 쓰는 것도 똑같다. 이 부분은 이해가 되는 게, 아이디어가 워낙 많다 보니 하나의 주제를 오래 전개하기보다는 여기저기 발산하는 것이다. 물론 이야기에 깊이가 없다는 건 아니다. 그건 분량이 좌우하는 게 아니니까. 박학다식한 다학제적 천재들은 신선한 소재를 짧게 구현하는데도 그 안에는 번개 같은 사색이 깃들어있다. 테드 창이나 이도 게펜이나 둘 다 과학과 문학 사이를 자유롭게 오가는 사람들이다.


<예루살렘 해변>의 단편들을 하나의 주제로 정리하기란 불가능하다. 몇몇 소설들만 소개하면, 일단 <101.3FM>은 타인의 마음이 라디오 주파수에 잡히는 설정이다. 라디오 다이얼을 이리저리 돌리면 근처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 소리가 들린다. <데비의 드림 하우스>는 꿈을 제조하는 회사의 이야기다. 더 큰돈이 보장되는 악몽 제조에 발을 들였지만 차마 사랑하는 여자에게만큼은 악몽을 건네지 못하는 한 남자의 고뇌가 펼쳐진다. 페이스북에 거짓 포스팅을 하고 그게 얼마나 멀리 퍼져나가는지, 사람들이 그걸 얼마나 믿는지 실험하는 <베를린에서의 3시간 떨어진>. 한 번 꿈을 꾸면 거기서 몇 년을 살아가느라 항상 잠에 취해 있는 딸을 키우는 <엑시트>. 서로의 기억을 공유하는 시술에 대한 소설 <사막을 기억하는 법> 등이 있다.


이것은 SF인가? 테드 창에게 늘 따라붙던 질문이 이도 게펜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인가? 장르가 무슨 신성불가침의 영역이라도 되는가? 해당 장르의 특성이 고스란히 반영되지 않는다고 그 소설을 폄하할 이유가 되는가? 정작 당사자는 끼워달라고 한 적도 없는데 말이다.


환상과 과학이 절묘하게 어우러지지만 소설들은 전혀 어렵지 않다. 복잡한 언어학 이론과 프로그래밍 원리가 주요한 줄기를 구성하고, 또 그걸 완벽히 이해해야만 더 큰 감동을 느낄 수 있는 테드 창과는 그런 면에서 확실히 다르다. <예루살렘 해변>은 훨씬 더 캐주얼하다. 그저 소재가 특이할 뿐 이해에 큰 노력이 필요하진 않다. 유일한 단점은 그냥 '지루함'이다.


똑같이 지루한 데다 더 어려운데도 불구하고, 선호를 묻는다면 나는 테드 창 쪽이다. 적으로 둘러싸인 지정학적 특수성, 그로 인해 발생하는 의무 군 복무 등 따지고 보면 비슷한 게 상당히 많은 이스라엘이지만 어딘가 낯설다. 푹 빠져들기엔 뭔가에 가로막힌 기분이다. 어쩌면 지루함의 강도가 더 커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형식면에선 더 새로운 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참 난감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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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조선의 또 다른 풍경 - 풍문부터 실록까지 괴물이 만난 조선
곽재식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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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배경으로 한 괴물 이야기가 가당 키나 한가?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아무리 상상력은 무죄라지만 그렇게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통할까 싶은 것이다. 실제로 크게 성공을 거둔 작품은 넷플릭스의 <킹덤> 정도만 떠오른다. 개인적으로는 이 작품도 어디서 재미를 느껴야 하는지 모르겠으나, 그래도 <창궐>, <물괴>, <조선구마사>에 비하면 수작임이 틀림없다.


해답은 <조선왕조실록>에 있었다. 주자학에 심취한 사대부의 나라가 이토록 많은 괴물 이야기를 했을 줄이야! 실록에는 물괴(물오름, 적조, 기이한 모양의 바위 등의 자연현상과 귀신같은 초자연현상을 통칭했던 말)에 대한 언급이 차고 넘친다. 백성들 사이에서 풍문으로 도는 이야기만이 아니다. 어떤 신하의 집에 귀신이 들었다더라 하는 얘기를 왕과의 경연장에서 심각하게 주고받은 기록이 보인다. 일부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로 일축, 초연함을 보이지만 일부는 진실로 믿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다음은 성종 실록 197권의 일부다.


영의정 정창손의 집에는 귀신이 있어 능히 집 안의 기물을 옮기고, 호조좌랑 이두의 집에도 여귀가 있어 매우 요사스럽습니다. (중략) 임금이 말하기를, "부엉이는 세상에서 싫어하는 것이나 항상 궁중의 나무에서 우니, 무엇이 족히 괴이하겠는가? 물괴는 오래되면 저절로 없어진다" 했다. 유지가 아뢰기를, "청컨대 화포로써 이들을 물리치소서." 하니, 임금이 응하지 아니했다. _<성종실록>(197권) 1486년 11월 10일(p.123)


중종 시대에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진짜 괴물 이야기가 나온다. 방구(크고 두터운 개)같은, 망아지만 한 짐승이 궁궐 안을 돌아다녔다는 것이다. 일명 수괴(짐승이 얽힌 괴상한 것)! 영화 <물괴>가 바로 이 사건을 주제로 한 영화다.


이처럼 <조선왕조실록>에는 인요물괴(줄여서 요괴), 즉 사람 중에 요사스러운 것이 나타나고, 물건 중에 괴상한 것이 나온다는 이야기가 상당수 기록되어 있다. 그러니 후대의 이야기꾼들이 조선을 배경으로 한 괴물 이야기를 쏟아내는 것도 별일은 아닌 것이다. 누가 먼저 냄새를 맡았는지는 모르지만 참으로 부지런하고 똑똑하다.


게임이나 소설을 기획하다 보면 한국의 괴물 이야기를 찾아볼 때가 많다. 서양의 괴물들은 정리된 게 종종 있지만 한국의 전통 요괴 이야기는 여러 곳에 산재해 있다. 그러던 중 <한국 괴물 백과>라는 책이 눈에 띄어 몇 년 전 고민도 하지 않고 샀던 기억이 있다. 알고 보니 이 책은 SF소설가 한 분이 자신의 블로그에 정리하던 괴물 이야기를 책으로 엮은 것이었다. 그리고 다시 시간이 흘러 이분이 <한국 괴물 백과>를 쓰면서 아쉬웠던 점을 보강해 새 책을 한 권 내놓는다. 그게 바로 이 책 <괴물, 조선의 또 다른 풍경>이다.


놀라운 건 이 SF 작가가 바로 <토끼의 아리아>의 주인공 김재식 님이었다는 것이다. 한 작가의 책을 세 권이나 읽었음에도 그게 같은 작가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다니. 기연이라면 기연이라 부를만하다.


이 책은 <한국 괴물 백과>를 조선 시대로 한정하고 각각의 괴물이 탄생하게 된 배경을 덧붙였다. 흥미진진한 소설은 아니지만 과거를 배경으로 한 괴물 이야기의 근원을 찾고 싶은 사람이라면 참고할만한 내용이 많다. 좀 다른 얘긴데, 이 책을 읽고 나니 <조선왕조실록>을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새는 인터넷에서 전체를 볼 수 있다고 하니 아직 발굴되지 않은 이야기들이 얼마나 더 있을까, 가슴이 두근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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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1-04-18 10: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킹덤이 그렇기 인기라서 봤지만 저는 솔직히 별로 재미없더라구요. 그래서 이 책도 시큰둥하게 넘겼는데 한깨짱님 글 보니 궁금해집니다. ^^ 조선왕조실록은 정말 무궁무진한 이야기의 보고라는 생각이 또 드네요

한깨짱 2021-04-19 19:06   좋아요 0 | URL
저도 도무지 킹덤이 왜.... <괴물, 조선의 또 다른 풍경>은 정독할 책이라기 보다는 이야기 짓는 사람들이 참고 도서로 옆에 두고 볼 책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네요. 조선의 최대 유산은 조선왕조실록이 아닐까 합니다.
 
세상을 바꾸는 행동경제학 - 행동 설계의 비밀
마이클 샌더스.수잔나 흄 지음, 안세라 옮김 / 비즈니스랩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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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적 경제학은 행위의 주체인 인간을 이성적 존재로 판단한다. 즉, 어떤 상황에 처했을 때 인간은 자신의 이익에 반하는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다. 자주 거론되는 예시 중에 절약의 역설이 있다. 경제가 불황에 진입했을 때 개인이 허리띠를 졸라매면 오히려 공황에 빠질 수가 있다. 소비가 줄면서 기업은 더 큰 위험을 맞고 그 결과 실업의 증가와 개인 소득 하락의 악순환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로 살기가 빡빡해졌을 때 오히려 소비를 늘리는 사람들이 있을까? 전문가들이 아무리 어리석은 일이라고 호소해봐야 사람들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도대체 미치지 않고서야 어떤 개인이 그런 판단을 내리겠는가?


인간은 이성적이기만 한 존재는 아니다. 이성의 입장에선 그걸 결함이라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그게 바로 인간의 본모습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아무리 본인에게 이득이 된다고 해도 마음이 동하지 않으면, 혹은 믿음이 없으면 행동하지 않는 게 바로 인간이다. 때때로 판단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이 내린다. 인간이 정녕 이런 존재라면 전통 경제학은 그 기반부터가 잘못된 것이다. 소수의 이단아들은 바로 이 점을 파고들었다.


행동경제학(Behavior economics)은 경제학과 심리학이 융합된 학문이다. 판단이 머리가 아니라 가슴에서 내려진다면 경제학도 그 관점에 서야 행동을 더 잘 예측할 수 있지 않겠는가. 다학제적 학문이 거의 그렇듯 행동경제학은 잡스러운 것으로 치부됐고 주류 경제학에서는 늘 뒷전에 머물렀다. 인간의 탐욕과 야만성이 똘똘 뭉친 서브프라임 모기지가 전 세계 경제를 쑥대밭으로 만들기 전까진 말이다.


행동경제학은 인간의 행동을 미시적으로 관찰하기 때문에 굉장히 좀스럽게 보일 수 있다. 내놓는 결과물을 보고도 '에이 설마', '진짜 그러겠어?' 하는 의문이 들 수도 있다. 예컨대 행동경제학은 특정 고정관념에 빠지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성과가 낮아질 수 있다고 말한다. '문과라서 죄송합니다'라는 생각을 갖는 것만으로도 수학 시험에서 원래 자신의 실력보다 더 낮은 점수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정치는 예전부터 행동경제학을 가장 잘 이해하는 분야였다. 히틀러는 인간의 판단력이 흐려지는 저녁 시간대에 연설하기를 고집했다. 야외 연설은 붉은 노을이 지는 석양을 배경으로 했는데, 그 황홀한 분위기가 달콤한 거짓말과 융합해 목전에 다다른 패배도 잊게 해 줬기 때문이다.


<세상을 바꾸는 행동경제학>은 비슷한 장르의 다른 책들과 마찬가지로 수많은 실험과 결과를 담고 있다. 마케팅이나 홍보, UX, 서비스 기획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이 사례들을 통해 사용자의 행동을 유도, KPI를 달성할 힌트를 얻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나친 기대는 금물이다. 책 한 권을 읽는 것으로 천지가 개벽할 성장을 하는 건 무협지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이 책은 이론이 아닌 사례를 다룬다. 그래서 읽기가 쉽고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비슷한 실험을 계획하고 있지만 대상을 어떻게 나누고 어떤 방식으로 실행해야 할지 몰랐던 사람이라면 눈 앞을 가리는 안개가 한결 옅어진 것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비슷한 책을 몇 권 읽어본 사람이라면 그렇게 신선한 느낌을 받지는 못할 것이다.


행동경제학 이론을 적용해볼 만한 일을 하지만 아무리 들어도 반신반의했던 사람이라면 아주 작은 것부터 한번 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사람의 마음은 복잡한 듯 보이지만 또 의외로 단순한 점이 있다. 간단한 수정만으로도 고객의 유입과 전환이 변화하는 걸 확인하면 더 큰 흥미를 붙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한번 맛을 들이면 더 이상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는 일을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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