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지 않는 책


이따금 사람들은 책 밑에서 토론을 한다. 나무 그늘 밑에서 토론을 하듯.
그럴 때 책 속의 언어들은 바람처럼 우리들 내부로 시원하게 불어오기도 하고태풍처럼 비바람을 몰고 오기도 한다.

대부분의 삶이 책 속에서 이뤄지는 사람들은 제 자신을 애기하듯 책을 읽고
읽은 책들로 은밀히 자신만의 정원을 꾸민다.

이따금 나는 그들의 정원에 초대되어햇빛이 아닌 다른 빛에 열광하는 꽃과 나무들 사이로어렴풋이 보이는 그들만의 비탄을 탐색한다.

아직도 그들 속에 숨쉬는 자연의 일부인 그들을 훔쳐본다.

그들에게 책은 큰 평화이기도 하고 가장 큰 불안이기도하고
끝끝내 이기고 싶은 적(敵)이기도 하지만
책 읽기란 맨얼굴로 산소를 들이마실 때처럼 자연스러워야 하는 법.

운명을 씹듯이 책들을 씹으며 자꾸만 작아지는 사람들. - P48

도움그들의 타는 입술은 무덤 같아요
혀 밑에 파묻힌 죽은 자들의 얼굴이 보이는 듯하지만
책에 대한 경의는 책에 빠진 그 사람만의 행복.

때로는 행복한 책한권 때문에
임종을 앞둔 수술대 위에서도 죽지 않는 책을 꿈꾸고 공유하고 싶은 법.

내 속에도 그런 책들이 있다.
부싯돌처럼 서로를 비비며 불꽃을 만들어내는 책. 음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이방 저방에서 불이 켜지는 책.
그들에게도 있고 내게도 있는 책.
죽지 않기 위해 자꾸만 창백해지는 새하얀 책! - P49

중독된 사람들


나는 내 몸에 쌓이는 니코틴이 좋고 타르가 좋고 카페인이 좋다 날마다 마지막 담배를 피우는 것으로 인생을 흘려보낸 제노 코시니가 좋고 담배와 섹스 중 하나를 택하라는말에 담배를 택한 루이스 브뉘엘이 좋고 죽는 순간까지 시가를 끊지 못했던 프로이트가 좋고 담배를 끊지 않으면 다리를 절단해야 한다는 의사의 말에도 아랑곳없이 담배를 계속 피운 사르트르가 좋고 니코틴 때문에 손톱이 딱딱한 나무껍질처럼 변한 자코메티가 좋고 세비야의 담배 공장에서여공으로 일했던 비제의 카르멘이 좋고 로마의 한 호텔방에서 자기 자신을 최후의 담뱃불로 불태운 잉게보르크 바흐만이 좋다 담배 한 개비를 피울 때마다 2리터의 독극물이 제몸에 쌓이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던 사람들 나는 그들이 좋다 그 습관과 그 독으로부터 비겁하게 도망치지 않았던 중독된 사람들 그들의 그 사랑스런 검은 폐가 좋다 담배와 아무 상관없이도 하루에 1분 1초도 출산 없이 지나가는 날 없고 죽음 없이 지나가는 날 없다 담배가 무서운 사람은 담배를 피우지 않으면 된다 도처에 무수히 깔린 금연 서적에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일생 동안 담배맛을 즐겼던 쉼보르스카의 시집 앞에서 오늘의 다섯번째 담배에 불을 붙이는 숙녀!
오늘은 저 숙녀와 함께 「첫눈에 반한 사랑」*을 읽어야겠다에쎄 스페셜 골드를 맛있게 나누어 피우며


*쉼보르스카의 시 제목. - P53

검은 숲


내 생의 모든 것들 네가 다 가지렴
그 뒷면 어디쯤, 혼자서도 노랗게 피어나는 민들레꽃.
그 악착같은 아이덴티티도 모두 네가 가지렴
나는 내 안에서 뭉게뭉게 피어나는 멋진 구름 아래의자 하나 갖다놓고
깊은 심심함에 아비 없이 장기 여행 떠나는 아이처럼
세상의 모든 길들 혼자 익히고 혼자 버릴게
사람들은 손을 타면 탈수록 공중에 매달린 장미 가시 같아지고
발걸음은 더욱 무거워져 하루종일 폭풍 주의보에 시달린다지
그 피할 수 없는 욕망의 고달픔도 모두 네가 가지렴어느 날 갑자기 체포되어 개처럼 칼에 찔려 죽은 요제프K*도
매일매일 안개 낀 생의 뒷면 닦고 또 닦으려다
절망 위에 쏟아진 정체 모를 기의와 기표에 눌려 압사당한 거라지
그 아픈 표지도 모두 네가 가지렴
쉬지 않고 내용에 도전하고 형식을 갈아끼워도
의도적으로 행갈이당해야 하는 사람들로 넘쳐나는 이 축복받은 거리도
모두 네가 가지렴습관적으로 피 묻혀 보여주는 왜소한 감상 저장고, - P64

64페이지에 이어서


그 불결한 발작성 무의식의 권태도 모두 다 네가 가지렴
나는 내 안에서 뭉게뭉게 피어나는 멋진 구름 아래의자 하나 갖다놓고
비상하는 힘찬 해만 모으며 사는 황홀한 새들만 골라 잡아먹는
검은 숲이나 그릴게
아주 새카맣고 아주 구슬프
어떤 용서도 없이
내 사랑! - P65

석양의 얼음공주



나는 그가 좋아 세상 물정에 어둡고 오만하고 잘난 체하는 나를 한 마리 새하얀 양으로 그려주는 그가 나는 좋아 가시 많은 장미꽃보다 헐벗은 카우보이 같은 잭 런던의 강철군화를 벽에 걸어주고 아양 떨고 매달리고 침 흘리는 개새끼들을 저멀리로 차버리는 그가 나는 좋아 호시탐탐 그의하나밖에 없는 애인이 되고 싶어 불타는 권총 한 자루와 날렵한 잭나이프를 가슴에 숨기고 보이는 대로 그의 여자들에게 뜨거운 피맛을 보여주는 나를 향해 던지는 그의 야릇한 천만 불짜리 윙크가 나는 좋아 그는 세기의 소매치기 집단 페이건보다 더 빠르게 내 마음을 훔치고 카사노바보다더 빨리 나를 군중 속으로 밀어내지만 나는 뒤집기 게임의명수 그의 수법을 쭉쭉 빨아당겨 멋진 복수를 꿈꾸는 얼음공주 그가 달콤새콤하고 쫀득쫀득한 손길로 나를 어루만질때에도 그가 세기의 영웅처럼 코트 자락을 펄럭이며 우아하게 자동차 문을 열어 그 안에 탄 여자들을 보여줄 때도 나는앙증맞은 토끼처럼 깡충거리며 겉으론 환하게 속으론 새파랗게 칼을 갈지 물론 그는 모르지 모르면서도 힘껏 가속페달을 밟으며 음산한 엑스터시 협곡을 향해 신나게 질주하는그 그는 꿈에도 모르지 얼음은 녹을 때 더 치명적이고, 더아리고, 더 정직해지고, 더 뜨겁다는 걸 죽을 것 같은 쾌감이 크면 클수록 내가 더 자주 더 빨리 활활 타오르는 불꽃들을 비웃는 얼음공주로 변해간다는 걸 비웃음은 붉은색으로만 치장된 화려한 매장 어떤 것을 골라도 아주 지루하고 건 - P66

66페이지에 이어서


조해지지 비루먹은 개처럼 역겹고 추해지지 온갖 감정이 넘쳐나는 문체 뒤에 숨어 있는 심장의 메마름‘ 나는 그 서늘한 메마름으로 서서히 내게서 그를 죽일 거야 새하얀 양가지 많은 장미, 헐벗은 카우보이. 달콤새콤하면서도 쫀득쫀득한 손길. 텅 빈 새파란 하늘, 그 모든 것을 발갛게 물들이며 죽어가는 저 잔인한 석양처럼! - P67

황홀한 침법
--------사임 수틴


그에게 필이 꽂혀버렸어. 언제나 해진 외부 주머니에 손을 넣고 구부정하게 도심을 기웃거리는 씻어지게 가난한헌옷 수선공의 열번째 아들. 바로 1분 전의 일이라도 지나간것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고, 친구라곤 오로지 피범벅이 되어 쓰러지는 권투장의 아우성과 고함소리, 외롭고 퉁명스럽고 거칠고 지저분한, 늘 허기진 위통에 시달리는 파리한얼굴의 남자, 동시대 작품들에겐 아무런 흥미도 없고, 플랑드르 대가들의 그림이나 쿠르베, 샤르댕, 랭브란트 그림 앞에선 무아경이 되는, 밤새 지붕 틈새로 새어든 빛 같은 그에게 나도 모르게 필이 꽂혀버렸어. 아마도 그가 그린 붉은색때문일 거야. 화폭을 가득 채운 강렬하면서도 비극적인 붉은색, 나는 그보다 더 칠흑 같은 빛을 보지 못했어. 그보다더 크게 울부짖는 열림을 보지 못했어. 내 옆의 누군가가 감자기 나를 움켜쥐는 뜨거운 손 같은, 불꽃으로 달려드는 나방처럼 나도 모르게 그에게 필이 꽂혀버렸어. 그건 마치 죽은 자들의 왕국으로 침범해 들어가 그들의 영혼을 황홀하게만지는 것과 같았어.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한 아주 깊고 오래된 집 앞에 영원히 혼자 서 있는 듯한!
- P69

아비뇽의 처녀들



아비뇽의 처녀들은 촉촉이 젖은 살갗 위에
옷 대신 캄캄한 밤을 입는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더 빛이 나는 아비뇽의 처녀들은
남이 입던 신의 축복 따위는 청동거울 속에 집어넣고
당신 때문에 활활 사랑이 불타오른 척
당신 머리 위를 노래하는 새처럼 날아다닌다

참으로 아름다운 아비뇽의 처녀들은
한 여인이면서 다섯 여인 몫의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어
이 세상에 어떤 美가 존재하는지 어떤 시인이 그 美를 찬양하는지
아무런 관심이 없다

오로지 당신 눈빛과 마주치고
그 눈빛에서 절망 대신 환희가 솟아오르면
화창한 주말 날씨의 해변처럼
따뜻하고 부드러운 자궁을 한껏 열어
당신을 품고 당신을 낳을 뿐

한 번도 누구누구의 정식 연인이 되어본 적 없는 아비뇽의 처녀들은
홀로 있을 때나 함께 있을 때나 발가벗어 그림자 진 당신영혼에 - P72

기쁘게 은방울꽃과 데이지꽃 수를 놓으며
서둘러 짐 챙겨 떠나는 이 세상 모든 이별의 왈츠가이제는 당신 마음속에서 끝나기를 곧 끝나버리기를 기다린다

캄캄한 밤을 달래는 푸른 달빛이 서서히 서쪽에서부터 차올라오듯이 - P73

위대한 양파



아버지의 외박이 일주일째 계속되던 날, 어머니는 양파를까자고 했다. 양파 중에서도 가장 어리고 독한 것들만 골라오라고 했다. 나는 광주리 가득 양파를 담아왔다. 양파를 까면서 우는 건 자연스런 일이므로 눈물 콧물 흘려가며 열심히 양파를 깠다. 껍질이 벗겨지면서 드러나는 양파의 눈처럼 희고 예쁜 속살은 언제 봐도 신기했다. 한참 그 美에 빠져 있다 문득 어머니를 올려다보니 어머니도 울고 있었다.
온몸이 울음바다로 변해 있었다. 하지만 그 눈물은 양파 때문이 아니라 일주일째 집을 비운 아버지가 만든 진짜 눈물이었다. 어린 눈에도 그 눈물이 너무나도 아파 나는 못본척숨죽이며 양파만 깠다. 눈물 콧물이 떨어져도 가만히 있었다. 어머니가 왜 우는지, 어머니의 설움이 무엇인지 알기에꼼짝도 않고 양파만 깠다. 아, 어머니는 저렇듯 남몰래 흘려야 할 눈물이 있을 때, 남몰래 터뜨려야 할 설움이 차오를때 이렇게 양파를 까며 우신 거구나! 나는 양파가 내심 고마웠다. 어머니는 양파를 까면서 울고 깐 양파를 썰면서도 울었다. 그 때문인지 눈물 젖은 하얀 양파가 프라이팬에서 황갈색으로 익어가며 내뿜는 향기는 무어라 말할 수 없이 달달하고 먹음직했다. 온 마음이 깨끗해지는 기분이었다. 채소 중의 채소, 양파는 정말 위대했다. 어머니의 아픔을 모조리 눈물로 씻겨내고는 다시 평심(心)의 세계로, 다시 우리 어머니로 말끔히 되돌려놓아주었다. - P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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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렌지


시든, 시드는 오렌지를 먹는다
코끝을 찡 울리는 시든, 시드는 향기
그러나 두려워 마라
시든. 시드는 모든 것들이여
시들면서 내뿜는 마지막 사랑이여
켰던 불 끄고 가려는 안간힘이여

삶이란 언제나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될 때에도
남아 있는 법

오렌지 향기는 바람에 날리고
나는 내 사랑의 이로
네 속에 남은 한줌의 삶
흔쾌히 베어먹는다 - P10

때로는



아주 오래된 지도

지구가 둥글다는 걸 몰랐던 시절의 지도

때로는 그런 지도 위에서 살고 싶어질 때가 있다.

지구가 끝나는 곳이 두 눈에 보이고

그곳으로 곧장 걷고 또 걸어가기만 하면

그 끝에 가닿을 수 있는

그래서 다시는 처음으로 되돌아갈 수가 없는

뛰어내리기만 하면

몇 시간이고 몇 날이고

하염없이 떨어지다

결국

무(無)가 되는 - P16

16페이지 이어서------


무한이 되는

때로는 그런 지도 위에서 살고 싶어질 때가 있다

너무나도 간절하게 - P17

읽어줘요. 제발



마르크스가 죽은 해 카프카는 태어났지만
카프카가 죽은 해 나는 태어나지 못했어요
입 밖에 내지 못할 어둠 속에 그냥 누워서
입속에서 죽어버린 내 사랑만 탓하고 있었어요

마음 던질 시간도 없이
마음 모을 시간도 없이
날마다 마음에다 벼랑만 쌓았어요
노란 튤립처럼 머리를 꼭 닫고 있었어요

서로 뒤얽힌 운명처럼 뒤얽힌 머리로 뭘 하겠어요?
생에 침을 뱉고 그 속에 꼭꼭 숨어서
금방 구워낸 일곱 색깔 무지개처럼
두 눈 속에 빠뜨린 태양만 쪼아대고 있었어요

아무리 나를 아끼려고 해도
무수히 발길질해대는 내 자궁 안의
불온한 버릇

-----계속해서 읽어줘요. 제발

타버린 그대 마음속 지독한 탄내 같은 시집(詩集)! - P25

아무르장지도마뱀


나는 한때 사랑에 빠졌지요
녹색 넥타이를 맨 남자
언제나 발코니 끝에 서서
먼산 바라보듯 나를 바라보던 남자
나는 그게 남자들의 본성인 딴생각인 줄도 모르고내게 없는 큰 장점이라 생각하여
오랫동안 그 모습에 경탄하며 바라보았죠

그러다 아무르장지도마뱀을 발견했죠.
녹색 넥타이를 맨 그 남자와 너무나 닮은 도마뱀
침대나 식탁 위에선 분홍 혀를 날름거리며 온갖 아양을떨다가
궁지에 몰리거나 다급해지면
그 꼬리 잡힐까봐 마구 흔들어대다
급기야는 제 꼬리 댕강 잘라놓고 부리나케 도망치는 남자

나는 한동안 그 남자와 사랑에 빠졌지요
아무르장지도마뱀이 알을 까고 새끼를 어루만질 때 보이는
그 다정함과 늠름함이 너무 사랑스러워
내 발목이 퉁퉁 붓는 줄도 모르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래만 부르는 귀뚜라미들을 잡아
그 남자 앞에 제물로 바쳤지요 - P26

페이지 26의 시에 이어지는 페이지


그러나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
그 남자가 맨 녹색 넥타이가 분홍 넥타이로 바뀌었을 때
나는 울면서 내가 키우던 도마뱀들의 꼬리를 모두 잘라
뒷산에 내다버렸지요
인간이 파충류와 사랑에 빠지다니!

아무르장지도마뱀 같은 그 남자는
이제 새 꼬리 분홍 넥타이를 매고
마치 자신이 아무르장지도마뱀이 아니라는 듯
온 마을 온 시내를 미끄러지듯 싸돌아다니고 있어요

아무리 잘라내고 또 잘라내도 다시 자라는
얄미운 도마뱀 꼬리 같은 분홍 넥타이를 매고
아주 신나게 아주 의기양양하게! - P27

벌거벗은 도시



나는 벌거벗은 도시에 산다
잠들 때도 혼자
깨어날 때도 혼자다

나는 혼자서 오리엔테이션을 하고
오리엔테이션을 받는다

혼자를 둘로 쪼개고
둘을 넷으로 쪼개고
넷을 여덟으로 쪼개고...………

그런 노래를 작곡하고
그런 노래를 부른다

누군가가 죽고, 또 누군가가 죽고. 또 누군가가 죽어 나가는••••••
이 도시가 너무나 슬프고 아파

나는 혼자서 집을 짓고
운하를 만들고 교회를 세우고
마구간을 짓고 식품점을 연다

그러곤 내가 아는 이름들을 그곳에다 붙인다. - P44

44페이지에 이어서


이름을 하나하나 부를 때마다
그곳에선 불이 켜지고
달빛보다 환한 불이 켜지고

혼자가 둘로 쪼개지고
둘이 넷으로 쪼개지고
넷이 여덟으로 쪼개지고…………

내 안으로 모여들어 쌓이는
무수한 모래알들

나는 그 모래알들을 모아
다시 집을 짓고
운하를 만들고 교회를 세우고
마구간을 짓고 식품점을 연다

결코 끝난 적 없는, 끝이 없는
그런 도시를

혼자서 지어내고
혼자서 듣고
혼자서 노래 부른다 - P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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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향은 이몽룡과 상관없이 ‘자신을 위해‘ 저항했다. 이몽룡을 사랑했지만 이몽룡을 향한 사랑 때문에 저항한 게 아니라 ‘자신의 사랑을 위해‘ 저항한 것이다. 이 사랑은 자신이 누군가를 진심으로 좋아하고 따랐던 진정을 의미하지, 나를 사랑했던 남자나 나를 구해주러 올 남자 같은 외적상황으로 구현될 그 어떤 존재가 아니다. 결과적으로 춘향은 정절을 지킨 셈이 되었다. 그러나 그녀가 목적하고 의도한 것은 그런 어설픈 정절 관념이 아니라, 자신의 자신다움을 지키려는 것이었다.
사실 춘향은 정절을 강요당하는 상황에 놓인 게 아니었다. 이몽룡은 정절을 지키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했다면 그것은 그냥 헤어지기 위한 하나의 회유책에 불과하다. 이몽룡이 남다른 인물이기에 돌아왔지. 돌아오지 않을 수 있었고 그것이 일반적이다. - P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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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결혼은 처가살이가 기본

시집살이가 어쩌고저쩌고하는 말을 늘 듣다 보니 그것이 우리의 오랜 풍습 같지만 사실은 아니다. 조선시대 내내 결혼은 남귀여가혼인 처가살이가 기본이었다. 이런 풍습은 고려시대부터 있어왔다. 결혼과 동시에 처가로 몸만 쏙 들어가 살면 되니 남성 입장에서는 이 처가살이가 아주 괜찮은 풍습이었다. 우리는 보통 조선시대에도 여성이 결혼하면 시집으로 들어가 살았다고 알고 있지만 그것은 19세기 즈음 시작된 풍습으로 이후 일제강점기를지나면서 공고화되었을 뿐, 조선시대에는 처가살이가 기본이었다.
처가에 들어가 살면 장인 장모가 사위를 먹이고 입히고공부시키는 것은 물론이고 관직까지 다 알아서 해주었다.
그러니까 아버지보다 장인이 자신을 더 여러 면으로 돌봐주었다고 볼 수 있다. 심지어 사위의 첩까지 장인이 골라주었다. 이런 제도가 가능했던 것은 남녀가 균등하게 상속받았기 때문이다.
아들 입장에서 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유산을 받을 수 없지만 처가에 들어가 살면 우선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된다. 게다가 장인이 돌아가시면 딸이 처가 유산을 상속받으니 독립해 살 수도 있다. - P62

조선시대 초부터 신진사대부를 비롯한 양반 기득권자들이 어떻게든 시집살이를 정착시키려 애를 썼다. 남성의 가치와 가부장의 권위를 강화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하는 게 옳다고 생각한 신진사대부들은 조선시대가 막을 연 1392년부터 줄기차게 시집살이를 추진했다지만 성공하진못했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관련 기록을 보면 이에 대한 고민이 자세하게 적혀 있다. 세종은 온 백성이 처가살이를 해오던 고려시대부터 내려온 풍습을 어떻게든시집살이로 바꾸고자 했다. 그래서 솔선수범해 자기의 딸인 옹주를 시집살이를 하도록 사위의 집으로 내려보냈다.
당시 풍습과는 정반대로 한 것이다. 당대 지존인 왕이 몸소 이런 결정을 내렸음에도 대신들은 이를 따르지 않았다.
그러니 평민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오늘날 대통령의 권력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왕조차도 이 풍습을 바꾸지 못했다. - P63

기본적으로 처가살이를 하다가『흥부전」이 탄생할 때쯤 비로소 장자 위주의 상속제로 바뛰기 시작했다. 처가살이에서 시집살이로 바뀌는 시점은학자마다 의견이 조금씩 다르긴 한데, 시작은 대략 17세기중후반부터 산발적으로 이루어졌다고 본다. 자료를 보면17세기 후반쯤에 장자 위주로 재산을 상속했다는 몇몇 기록을 볼 수 있다. 아직 전면적 확산은 아니고 이런저런 타협적 양상이 산발적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그러다가 19세기로 넘어오면서부터 차츰 확산되었다.
이때는 딸에게는 아예 상속하지 않았다는 기록도 있다. 딸이 밉거나 차별해서가 아니라 혼인한 뒤 시집살이하게 된딸에게 재산을 상속하는 것은 사돈집에 재산을 내주는 격이니 더 이상 딸들에게 재산을 상속하지 않게 된 것이다.
「홍부전』은 바로 이렇게 조선시대의 사회경제적 구조가바뀌던 시기를 그 배경으로 한다.
처가살이가 시집살이로 바뀌면서 늘어난 것은 사실 남성들의 부담이다. 가장이란 허울은 좋지만 그 무게가 어깨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여성이 자기 집에 들어와 살게 되니 경제적으로 자신이 먼저 독립해야 했다. 먹고 살려면마땅히 그래야 했다. 이런 시대인 만큼 흥부는 정신을 차렸어야 했다. 아주 똑바로 말이다. - P65

이런 지경에 이른 사람들은 먹고살아야 하니 사돈의 팔촌까지 찾아다니며 손을 벌린다.
여유가 있는 양반집에서는 그렇게 찾아와 손을 벌리는 친족들을 내치지 못하고 거두기 시작했는데 그러면서 점점종법 제도가 갖춰지고 강화되었다.
종법 제도는 정실에게서 태어난 장자 위주로 가문 전체를 유지하는 일종의 사회 시스템이다. 이는 조선 후기가족 제도의 근간이 되었고, 가족 윤리를 기반으로 한 조선사회의 규범적 체제를 지탱시킨 중요한 원리 중 하나가 되었다. 한마디로 상호부조와 사회복지 시스템이었다.
조선 후기에 종법 제도가 강화된 것은 양반 가부장의 힘을 강화해 사람들을 지배하려는 이유도 있겠지만, 그것이 시작은 아니다. 몰락하는 양반이 많아지는 시대에 한 가문의 장자를 중심으로 혈연관계를 정리해 그 안에 속한 사람들에게 최소한의 먹거리를 줌으로써 그들이 살아갈 수 있게 하는 현실적 이유 때문이었다. 문중, 종가, 적장자, 예법등의 관념에 동의해서가 아니라 먹고사는 지극히 현실적 이득에 동의해 종법제가 강화된 것이다.
- P69

「춘향전』의 본질은 수동성이 아니라 능동성이며,
기다림이 아니라 쟁취하는 것이고,
아무도 인정하지 않지만
나 스스로 그것을 뚫고 나가려는 강한 열망이다. - P96

여전히 찜찜하다면 춘향의 성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라.
대개가 ‘성춘향‘으로 알고 있다. 그녀의 아버지가 성참판이기에 그렇다는 것이다. 하지만 ‘성춘향‘은 지금의 전주 지방에서 판각되어 유통된 『열녀춘향수절가女守의 영향을 받은 작품에서만 그렇다. 서울 지역에서 유통된 『춘향전』에서는 춘향의 성이 ‘김‘이다. 즉, ‘김춘향‘
이다.
사실 『춘향전』 이본 중 가장 주목해야 할 이본은 서울에서 유통되던 『남원고사南原古詞』로, 『열녀춘향수절가』보다 적어도 30년가량 먼저 출현했고 분량도 두 배 이상 많고 풍성하다. 무엇보다 돈을 받고 책을 빌려주던 세책점의 세책본이라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읽던 텍스트였다. 그「남원고사에 등장하는 춘향의 성이 ‘김‘이다. 그러니 광복이전까지 서울 사람 대부분은 춘향을 김춘향으로 알고 있었다. 그때 『춘향전』의 성춘향 어쩌고 하면 아마 고개를 갸우뚱했을 가능성이 크다. 광복 이후 영화, 드라마 등에서 춘향을 ‘성춘향‘으로 고정시켜 만들면서 성춘향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사실 진짜 춘향의 성은 없다. 이른 시기의 대다수 『춘향전』 이본은 다 그렇다. 당연한 소리다. 낳아준 어머니는 확실하나 아버지를 모르기에 그렇고, 혹시 안다해도 성을 붙이기도 쉽지 않다. - P106

관기는 지방에 출장 온 손님들을 접대하기 위한 필수요원으로 남원은 물론 어느 관청이든 법률로 그 숫자를 정해놓았다. 그런데 보통 지방관이 내려와 한 기녀와 지내다보면 정이 들게 마련이고, 그러다 보면 그곳을 떠날 때 그기녀를 데려가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국법에 어긋나지 않으려면 다른 기생을 채워 넣어야 하는데 이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렇게 관기를 빼돌리는 폐해를 방지하기 위해 법으로 이를 금했고, 신임 사또는 필수적으로 그 인원을 확인했다. 그것이 기생점고다. 변학도가 특별히 음탕해서 기생점고부터 한 게 아니라 국가 재산인 관기를 점검했을 뿐이다.
그렇다. 독자들의 눈에 이게 불편했던 것이다. 사람을 짐승이나 물건으로 여기는 시각이 마뜩잖았고, 그래서 자꾸본질을 어그러지게 보았던 것이다. 기녀는 천민으로 그냥 막 대하는 존재였다. - P111

이런 상황이니 ‘춘향전을 앞에 두고는 늘 고심이다. 진짜 춘향은 정점의 화신이 아니라 섹스의 화신이라고 말하면 천하의 몹쓸 놈이 되기 십상이니 말이다. 밝히는 놈에서부터 음란을 부채질하는 반동분자까지 뭐든 될 수 있다.
민족의 고전을 도색잡지로 만드는 못된 놈이 되지 않으려면 하는 수 없다. 타협해 같이 입을 모아 춘향을 욕하든지,
춘향의 절개를 찬양해야 한다. 아니면 그냥 보고도 못 본책 입을 꾹 다물든지,
결국 이렇게 현대의 춘향이는 혁명성을 빼앗겼고 《춘향전 》은 고루한 도덕 교과서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춘향은 지고지순한 사랑과 정절로 남성을 기다리는 멋진(?) 여자가 되었고, 평생 미치도록 이몽룡을 따라다니는 질긴 여자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춘향은 질긴 여자도 아니고 잡년도 아니며 열녀도 아니다. 춘향은 ‘봄의 향기‘이고 ‘혁명가‘였으며, 《춘향전》은 민중의 열망을 담아낸 민족의 고전이었다. 이제 그이야기를 해보도록 하자. - P131

 그야말로아무것도 아닌 천대받는 일개 기녀였지만 그녀는 진정한 여성다움으로 주체적이고 능동적으로 당대 문제에 도전했고, 인간다움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강렬한 웅변을 뿜어냈다.
그것을 알아본 민중들이 『춘향전』에 열광했다. 그리고이몽룡도 아니고 당연히 변학도도 아닌 ‘춘향‘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춘향전‘으로 만들었다. 당대에 가장 천하고 한심하고 함부로 대해도 아무 일 없는 그런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는 점이야말로 「춘향전』이 가지고 있는 혁명성의 한 모습이다.
게다가 이런 열망은 앞서 본 것처럼 성이 없을 수밖에없는 춘향이를 ‘김춘향‘, ‘성춘향‘, ‘안춘향‘ 등 지역마다 자신들의 고장을 상징하는 성을 붙여 그녀를 돋보이게 하는것으로 이어졌다. 이는 단순히 「춘향전』이 인기가 높았다는 정도가 아니라 사람들이 자기의 열망과 희망을 춘향에게 모두 투영했다는 의미이고, 자기들만의 춘향을 만들고자 노력했다는 의미다. 어떻게든 ‘우리 춘향‘이고 싶었던당대 민중들의 마음에서 「춘향전』 혁명성의 깊이를 짐작할 수 있다. - P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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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부전』은 욕심에 대한 이야기다. 과도해서 자신을 망각하고 남을 해코지하는 놀부의 욕심만이 아니라, 과도해서 자신을 해치고 급기야 주변까지 망쳐놓는 흥부의 욕심이 문제라고 지적하는 이야기다. 비록 놀부의 욕심은 쉽게눈에 띄고 흥부의 욕심은 판별하기 쉽지 않지만 똑같은 문제다. 그 욕심의 본질은 같다. 양상만 반대일 뿐 서로 닮은꼴이다. 마치 거울을 마주하는 것처럼 말이다. - P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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