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다 하루끼의 북한 현대사
와다 하루키 지음, 남기정 옮김 / 창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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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은 1937년 6월 4일 보천보(普天堡) 공격으로 세간에 존재감을 각인시켰다. "보천보는 호수 308호에 경관 5인이 상주하는 산중의 작은 마을"로서, 이 공격은 경관 2명을 사살하는데 그쳤지만, "이웃에 있는 인구 1만 3,000명의 혜산진"을 통해 전국에 이름을 알리는 뛰어난 선전효과를 거두었다.(31) 최용건, 김책, 김일성은 소련이 조직한 항일부대인 88특별여단의 조선인 최고위 지도자들로서, 최용건과 김책은 나이와 투쟁 경력에서 김일성에 한참 앞섰지만, "조선으로 진공작전을 펼친 김일성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했다."(41)


1945년 9월 20일 스탈린이 북조선에 우호적인 정권을 만들라는 지시를 내리자, "국내계를 중심으로 소련계와 만주파 등이 결집하여 북조선의 공산당 중앙 조직이 만들어졌다."(52) 이들은 모스크바 3상회의를 기점으로, 박헌영이 장악하고 있는 서울 중앙으로부터 독립을 결심하고, 1946년 2월 8일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하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발족했다. 공산당 선전부는 김일성이 토지개혁을 실시하여 "누가 정말 오늘 조선민주혁명의 지도자인가를 증명한다"(61)고 적었으며, <김일성 장군>이라는 소책자를 간행하여 일찌감치 개인숭배 작업에 착수했다. 


한국전쟁은 김일성에게 군사적으로 실패를 안겨주었지만, 정치적으로는 정권을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1953년 1월 "박헌영, 이승엽 등 남로당계가 해방 전의 전향과 해방 후의 배신을 추궁당해 체포"되었고, 소련계 지도자인 "허가이는 정전협정 성립 직전인 7월 2일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인민들이 정전협정 조인(1953.7.27)으로 "B-29의 공습이 끝났다는 것을 진정으로 기뻐"하는 동안 "8월 3일 이승엽 등 남로당계 12명은 미국의 스파이라는 혐의로 재판을 받았고 그중 10명에게 사형판결이 내려졌다."(105)


전후 북한 정권이 야심차게 벌인 농촌 부흥 운동은, "수단을 가리지 않고 곡물 매입계획을 달성"하는데 매달린 나머지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김일성은 곡물 매입 실패를 "다른 나라 당들의 이론과 투쟁경험을 기계적으로 받아들인"(114) 탓으로 돌리면서, 자주성을 전면에 내세웠다. 그가 주장한 '우리 식 체제'는 "모든 노동자는 당의 요청에 대답하여, 천리마의 속도로 사회주의화를 목표로 전진"(137)하라는 '천리마 운동'으로 발현된다. 당과 국가체제를 동일시하는 북한의 국가사회주의체제가 성립된 순간이었다.


1967년 김일성은 "당의 유일사상체계"를 공고히 하면서, "베트남전쟁에 호응하여 남조선혁명을 조직하고, 필요하다면 다시 혁명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전인민이 항일유격대원의 정신"으로 무장할 것을 촉구했다.(161) 이로써 항일유격대원을 모범삼아 "김일성이 유격대 사령관이며 전인민이 유격대 대원"인 '유격대국가' 이념이 선포된다. 그러나 기대했던 남조선의 "혁명적 대사변"은 일어나지 않았고, 군 최고위급 간부들이 실패한 작전에 책임을 지고 전원 해임되었다.(173)


1970년대 들어 북한은 '유격대국가'에서 '극장국가'로 변모한다. 극장국가란 "권력이 의례를 통해 과시되면서 연극화하는 국가"를 말하며, 그 역할을 담당한 것은 "수령의 아들 김정일"이었다.(181) 1972년 김정일은 영화 <꽃 파는 처녀>의 제작을 지도하고, "조선혁명박물관 건립과 그 앞의 광장에 거대한 김일성 동상을 세우는 작업을 주도했다."(183) 여기에 더해 김정일은 1974년부터 "경제건설의 방식으로 '속도전'을 주창"하고, 생산현장에서 "3대혁명적기쟁취운동을 조직하도록 지도했다."(188) "혁명적 대사변"이라는 목표가 사라지자 국가를 경제위기에 대처하는 체제로 변모시킨 것이다.


경제위기는 오일쇼크와 대외 차관 감소라는 악재와 중첩되어 커져만 갔다. 여기에 안이한 자연개조사업으로 일관하던 주체농법의 실패는 돌격 일변도의 체제 구조에 일격을 가했다. 그러나, 위기 타개책은 또다시 정신 무장이었다. 1980년 전후로 "새롭게 '가족국가론'이 제창되어, 유격대국가라는 건물 위에 간판처럼 내걸렸다." 여기서 중심이 된 것은 "어머니 당"이라는 새로운 용어였다. "수령이 아버지이고, 당이 어머니이며, 대중은 그 자식"(198)이라는 가족주의 국가디자인은 1990년대 들어 '충효'를 강조하는 '전통적 국가론'으로 나아간다.


1989년 동유럽 붕괴와 1991년 소련 연방 해체는 내부 동력을 상실한 북한 체제가 자생할 수 있는 여지를 완전히 제거했다. 이제 북한은 "핵카드를 구사하여 미국을 교섭의 장으로 이끌어내는 벼랑끝전략으로 돌진해갔다."(231) 여기에 1994년 7월 8일 김일성의 사망은 영생불멸하는 '사회적, 정치적 생명체'의 "뇌수"인 수령 직책 또한 영생불멸이며, 아무도 이를 계승할 수 없다는 논리적 모순마저 야기했다. 인민들 사이에서도 "김일성은 영원히 북한의 당과 혁명의 수령이라는 감정이 고조되었다."(242) 


"후계체제 구축을 위해 고민하던 김정일은 자신이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이라는 사실로부터 출발"(244)하여 "삶의 순간순간을 당과 수령에 대한 충성과 효성으로 빛내이는 참다운 진정한 충신, 지극한 효자"(233)가 되자는 구호를 내세워 내부 결속을 다졌다. 김정일은 1995년 대규모 수해로 극심한 식량위기가 닥쳐오자 '고난의 행군' 정신을 천명하면서, 인민군대를 "우리식 사회주의의 기둥이며 혁명의 대학"(255)이라고 규정하여, 군을 당 앞에 내세우는 '선군정치'로 위기를 정면돌파해 나아갔다.  


2000년 들어 북한은 푸틴의 러시아와 관계를 정상화하고, 남북정상회담과 북미대화를 성사시켰으며, 2002년에는 북일정상회담을 개최하는 등 변화를 모색했다. 그러나 남한과는 국지적 도발에 따른 긴장 고조로, 일본과는 납치문제를 둘러싼 갈등으로, 미국과는 부시정부의 강경책과 이라크 침공으로, 신통치 않은 결과만을 낳았다. 북한은 점점 더 핵무기에 의존하게 되었고, 2011년 12월 17일 김정일은 "자신이 갖고 있던 국방위원회 위원장, 당 총비서, 당중앙군사위원회 위원장, 최고 군사령관이라는 네 가지 직책 가운데 어느 것 하나도 김정은에게 물려주지 않은 채" 심근경색으로 사망한다.(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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