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중국에 빠져 한국사를 바라보다
심재훈 지음 / 푸른역사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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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부 중국 전문가의 한국사 관전평


"한국 상고사 특히 고조선에 관한 문헌기록은 위만조선 멸망과정을 다룬 《사기》 <조선열전> 이전의 자료로 한정하면 정말 한줌에 불과할 정도이다. 사마천이 《사기》를 편찬한 연대가 기원전 2세기 말~1세기 초 정도이니, 그 이전에 조선을 언급한 중국 측 기록은 글자수로 따지면 아마 100자 남짓 되지 않을까 한다. 그러니 위만조선 이전의 고조선사를 구축하는 작업은 기둥 몇 개만 가지고 큰 집을 지어야 하는 지난한 작업이다. 고고학 자료 역시 많은 한계를 안고 있다. 특정 자료를 민족이나 국가의 강역이나 활동 구역을 밝히는 증거로 활용하는 데는 큰 문제들이 따른다. 특정 고고학적 유물을 다른 족속들이 나누어 썼을 가능성뿐만 아니라 같은 족속이라도 다른 유물을 사용했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고학적 자료를 민족의 구분에 활용하려는 시도는 문헌자료의 오용 못지않게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고조선 연구에 한국 학자들이 남용하고 있는 비파형동검이 좋은 사례다."(222-3)


"기원전 2세기경 출간된 복생伏生의 《상서대전尙書大傳》에는 주나라 무왕武王이 상나라를 멸망시키고 수감 중에 있던 기자箕子를 풀어주자 이를 부끄럽게 여긴 기자가 조선으로 망명했고, 이에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고 전한다. 《상서대전》보다 약 50년 후 사마천 역시 〈송미자세가宋微子世家〉에서 비슷한 내용을 전하고 있다." 1970년대 랴오닝성遼寧省의 서부 다링하大凌河 유역에서 "기자 일족과 연관될 수 있는 기후라는 명문이 새겨진 상 말기의 청동기가 상당량의 다른 상말주초商末周初 청동기들과 함께 이 지역에서 출토되었다. 따라서 기원전 11세기경 기자 조선동래설은 상당한 고고학적 근거를 갖게 된 셈이다. 문제는 기자의 조선 동래를 전하는 문헌기록과 고고학 자료 간에 연대 편차가 너무 크다는 점이다. 고고학 자료에서는 기원전 11세기 그 족속의 이동 가능성을 볼 수는 있지만 문헌자료는 그보다 약 1000년 이후인 기원전 2세기 한나라 때나 되어서야 그러한 인식이 존재한다."(224-6)


선진先秦시대 문헌에서 기자는 상의 마지막 왕에게 학대를 받았지만, 주의 무왕에게는 환대를 받은 현인 정도로 묘사될 뿐이며 조선과의 연관성은 언급되지 않는다. "기자와 조선의 연관성이 한대에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과 함께 시간이 갈수록 기자 관련 이야기가 증폭되는 양상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상서대전》이나 《사기》가 단지 기자의 조선 이주와 분봉만을 전하는 반면에, 《한서》에는 조선을 교화시킨 문화적 영웅으로서 기자가 나타나고, 이어지는 《삼국지》에서는 40대를 존속한 조선의 통치가문으로서 기자조선 상이 정립되는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가 1,400년 이후 조선 왕조에서 더욱 확대되어, 한민족의 시조로서 기자의 위치가 더욱 공고해졌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러한 양상은 전설적인 이야기가 후대의 문헌으로 갈수록 더욱 세밀하게 증폭되어 나타난다는 구제강(고힐강)의 '누층적累層的으로 조성된 고사古史'설과 맞아떨어져, 그 진위 여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229)


"따라서 기원전 11 세기 중엽 상 멸망 직후에 기자가 조선으로 왔다는 《상서대전》과 《사기》 〈송미자세가〉에 언급된 고사의 신빙성 여부도 엄정하게 재검토되어야 한다. 물론 기자 조선동래설을 비판하는 학자들도 상말주초인 기원전 11세기 다링하 유역에서 기자 일족이 일시적으로 존재했을 가능성은 부인하지 않듯이, 상 멸망 이후 기족을 비롯한 상의 귀족 세력들이 다링하 유역으로 이주했을 개연성은 있다. 이는 그 지역에서 발견된 다량의 상 후기 청동기들을 통해서도 입증된다." "서주 전기 연나라의 도읍으로 추정되는 유리허琉璃河 유적지를 비롯한 연나라의 근거지에서도 기족 관련 청동기들이 다수 출토되었다. 다링하 유역과 가까운 연에 근거지를 둔 소공과 기자와의 인연이나 양 지역에서 모두 출토된 기후 명문을 지닌 청동기들 역시 기자 일족의 동북이주설을 뒷받침해준다. 그러나 기자 일족이 도피해간 바로 그 지역에 과연 조선이라는 정치체가 존재하고 있었을까는 별개의 문제이다."(229-30)


"고조선에 관심을 가지는 유사역사가들이나 학자들까지도 그 연구에서 범하는 가장 큰 오류는 고조선의 원고성遠古性에 대한 선험적 믿음이다. 고조선이 기원전 2333년이나 혹은 기자조선 얘기처럼 기원전 11세기에라도 존재했다면, 그 후신인 위만조선이 기원전 108년에 멸망했기 때문에 고조선은 최소한 2,000년 혹은 1,000년 이상 존속한 나라가 된다. 인류 역사상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장기적으로 존재한 나라다." "역사상 존재한 한 정치체나 나라의 존재 여부를 확정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두 가지 전제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첫째 신빙성 있는 문헌 증거로 입증되는 실체가 있어야 한다. 둘째, 고고학적으로 입증되는 실체일 텐데, 최소한 그 중심지로 추정될 만한 성곽이나 묘지 등의 존재가 적절한 편년編年과 함께 제시되어야 한다." "중국 최초의 왕조로 알려진 전설상의 하夏나라와 그 유적지로 추정되는 기원전 얼리터우二里頭 유적과의 연관성은 그 좋은 사례가 될 것이다."(230-1)


선진시대 문헌 중에 고조선의 존재를 입증하는 근거로 동원되는 "《관자》와 《전국책》은 기원전 1세기 말 유향劉向의 편집을 통해 현재의 형태로 전래되었고, 조선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는 《산해경》의 두 편 역시 한대에 편집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특히 《관자》는 그 내용이나 어법이 전국시대 이전으로 소급될 수 없는 부분이 많고, 한 사람의 저작으로 보기도 불가능하다. 따라서 그 원형은 전국시대 제나라의 직하稷下에서 활동하던 다양한 학자들이 당시 영웅화된 관중의 사상을 대변하는 형태로 이루어졌지만, 대부분 진과 한나라 초기를 거치며 소실되었고 유향의 재편집 당시 많은 부분이 새롭게 추가되었을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설사 백번 양보하여 《관자》 두 편에 나오는 내용의 신빙성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문헌으로 입증할 수 있는 조선의 최초 출현은 (환공과 관중이 활동했던 기원전 7세기로서) 기자가 조선으로 왔다는 기원전 11세기 중반과는 무려 400년의 차이가 존재한다."(233-4)


"기원전 211년 진의 통일 이후 《사기》 〈진시황본기〉에 진의 영토가 동쪽으로 조선에까지 이르렀다고 언급되어 있듯이 조선이 중국 동북방의 중심 세력으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사마천은 또한 〈조선열전〉에서 기원전 194년 위만의 조선 왕위 찬탈 이후 조선의 급성장과 함께 1년을 끌어온 한 무제의 조선 정벌에 대해 비교적 상세히 언급하고 있다. 따라서 조선의 존재를 강하게 인식하지 못했던 선진시대의 학자들과 달리 한대 이래의 학자들에게는 요동의 동부나 한반도 서북부를 차지했을 조선이 오늘날 중국 동북부의 대표 세력으로 각인되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한대인들은 오늘날 우리들이 이용 가능한 고고학 자료를 활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곳의 대략적 위치(다링하 유역)에 대한 정보는 없었을 것이다. 나아가 한 무제의 조선 정벌에 뒤이어 그 지역에 설치한 군현 지배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의도까지 더해져 기자의 조선동래 고사는 더욱 정치하게 다듬어질 수 있었다."(235-7)


"중국 동북 지역의 역사를 자신들의 충성심에 따라 정치적 변신을 거듭한 요遼나라 때(907~1125) 변경 주민들의 시각을 통해 바라본 나오미 스텐든은 《속박되지 않은 충성심》에서 당시 중국 동북 지역에서 '중국'은 통합된 개체로서나 관념적으로도 존재하지 않았고, 문화적인 정체성이나 민족성 역시 존재하지 않았다고 본다. 오직 지역 지도자들의 충성심이 정치적 추이를 결정하는 요인이었다는 것이다. 중세까지 이 지역을 단일한 민족이나 국가적 정체성으로 규정하기 어렵다는 얘기다. 그렇지만 중국 동북 지역에서 중국의 부재가 지금부터 2,000~3,000여 년 전 그 지역을 아우르는 고조선의 존재를 보증해주는 것도 아니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많은 한국인들이 자신들의 연원이라고 믿고 있는 고조선이 어떤 식으로든 존재했을 수 있지만 만주 지역은 고대 이래 청대까지도 다양한 세력이 이합집산하며 명멸한 곳이었다. 결코 민족 개념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일종의 용광로였던 것이다."(24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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