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처음 철학 공부 - 소크라테스부터 쇼펜하우어와 니체까지 형이상학부터 유머의 철학까지 세상의 모든 철학 지식 인생처음 공부시리즈
폴 클라인먼 지음, 이세진 옮김 / 현대지성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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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인 리뷰에 앞서 저자 소개와 책 특징에 대해 설명하겠다. 저자인 '폴 클라인먼'은 원래 미국의 TV 방송 작가이자 스토리 프로듀서로서, 현재는 프리랜서로 활동 중인 사람이다. 철학을 전문으로 배우지 않았다는 점에서 흠칫할 수 있지만 저자는 평소에 철학과 심리학에 관심이 많았고, 전공자들이 자기들만의 언어로 어렵게 철학과 심리학을 설명하는 것에 회의감을 느껴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분야에 관심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에 일반인의 눈높이 맞는 쉬운 인문학 입문서들을 집필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오늘 소개할 <인생처음 철학 공부>도 위와 같은 취지로 쓴 책이다. 그가 쓴 책들은 미국 현지에서 10년 넘게 사랑받고 있다고 하니 너무 진지하게 보지 말고 가볍게 읽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본 책을 읽으면서 좋았던 점은 철학을 단순히 철학자들의 업적만으로 도배하지 않고, 총 3가지 테마로 딱딱 나눠서 정갈하게 설명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중 1부는 고대부터 근현대 철학자들의 간단한 소개와 그들의 사상을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개인적으로 놀랐던 건 우리나라에선 잘 알려지지 않은 철학자들에 대해서도 소개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특히 '이븐 시나(980년 ~ 1037년 12월 10일)'가 그랬다. 이븐 시나는 서양의 중세 시대에 해당하는 '이슬람 황금기' 때 페르시아에서 태어난 이슬람 철학자였다. 보통 '철학'하면 소크라테스나 아리스토텔레스, 데카르트, 마르크스 등등 유럽 철학자들을 떠올리기 쉬운데, 사실 이슬람에도 유명한 철학자가 많았다. 특히 이븐 시나처럼 이슬람 황금기 때의 중동 철학자들은 기독교에 심취해 철학을 등한시했던 유럽을 대신해 고대 그리스 철학을 비롯한 철학을 연구하며 그 명맥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앞서 말한 유럽 철학자들에 밀려 이들이 주장한 철학 사상과 이론은 잘 알려지지 않았고, 국내에선 더더욱 이들의 존재에 대해 알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그런데 본 책에선 이븐 시나의 삶은 물론 그의 이론에 대해 (간략하지만) 소개하고 있었다.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아무튼 이븐 시나는 의사이자 철학자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중심으로 공부했으며 인간의 존재 이유와 본질에 대해 깊이 연구했다. 그가 보기에 인간은 그 본질이 실존에 앞선다고 보았다. 즉, 본질이 제일 중요하며 실존은 단순한 우연이라는 것이다. 단, 알라 신만은 제1실재로서 본질이 실존에 앞서지 않는 유일한 존재라고 봤다. 알라는 필연적 존재하며 정의하기 어려운 그 자체로 완벽한 존재다. 다소 이슬람 신자다운 결론이지만 그래도 이븐 시나는 인간의 지성이 구원의 조건이며 앎을 인간의 제일 중요한 요소로 봤다.


이외에도 중간중간에 도표를 비롯한 간단한 도식을 통해 읽는 이의 이해를 돕고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가뜩이나 어려운데 거기다가 여러 가지 주장들이 난무하는(흡사 엠비티아이 N 기질이 다분한ㅇㅇ...) 철학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개념조차 정확히 무엇인지 파악하기 힘들어한다. 한 마디로 갈피를 잡기 어렵다는 거다. 그런데 본 책에선 철학자들의 주장을 아주 간단한 도식을 통해 보여준다. 그래서 일일이 독자가 메모를 할 필요 없이 위의 그림들과 함께 읽다 보면 보다 쉽게 철학자들의 사상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 같은 경우 칸트를 읽을 때 도식들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철학자 중에서도 넘버 원으로 가장 중요한 칸트는 세상을 우리의 생각이 결코 현실 그대로의 모습을 인식한 게 아니라고 말한다. 현실 있는 그대로의 존재를 '물자체'라고 하며 이를 인간이 우리의 인식이 여과해서 보는 해석된 세상을 '현상'이라고 봤던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칸트가 관념론자는 아니다. 왜냐하면 어찌 됐든 현실 세계는 존재한다고 인정했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선험적으로 아는 것과 후천적으로 아는 후험적인 요소 역시 칸트가 발견한 것이다. 이는 그전까지 신이나 절대적인 것에 대해 토론하던 철학계의 분위기를 바꾸는 발견이었다. 읽으면서 왜 칸트가 철학계에서 극찬을 받는지 알 것만 같았다.


1부가 시간의 흐름대로 철학자들의 역사를 다뤘다면 2부에선 철학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여러 이론들에 대해 다루고 있다. '인식론'을 비롯해서 '공리주의', '계몽주의', '이원론', '형이상학', '언어철학' 등등 주요 철학적 논쟁들이 담긴 이론을 간략히 소개하고 있는 게 특징이다. 철학 책을 읽다 보면 빠짐없이 나오는 이런 논제들을 사전에 알지 못할 경우 철학자가 왜 저런 주장을 하는 건지 파악하기 쉽지 않다. 그런 점에서 개인적으로 나는 2부가 마음에 들었다. 철학을 좋아하는 나조차도 미처 알지 못한 논제가 많아 유익했다. 1부에 비해선 다소 어려웠어도 마찬가지로 도식과 간결한 설명으로 이해하기 쉬웠달까. 이 부분은 철학 초심자인 철린이뿐만 아니라 철학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는 중급 철학 덕후들의 눈높이에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3부에선 철학계를 빛낸 난제들이었는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플라톤의 '동굴 속 그림자(이데아론)'을 비롯해 각종 역설적인 주장들을 소개하고 있어 흥미로웠다. 예를 들어 '테세우스의 배'라는 난제가 있다. 과거 아테네를 건국한 테세우스라는 왕이 배를 타고 오랜 시간 동안 항해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항해 도중 배가 낡기 시작하자 중간중간마다 배의 판자를 교체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고향에 돌아왔을 때는 배의 판자가 전부 새것으로 교체되었는데, 그렇다면 과연 그 배를 '테세우스의 배'라고 부를 수 있을까? 출발했을 때 있었던 배의 판자가 없고 완전히 새로운 배가 되었는데 과연 온전한 테세우스의 배라고 할 수 있을까라는 문제다. 사실 이 테세우스의 배 난제는 '역설'과 관련이 있다. 처음엔 그럴듯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은 주장들을 역설이라 하는데 테세우스의 배도 마찬가지다. 내 생각에도 테세우스의 배는 설령 배의 판자가 전부 교체되었다고 해도 어쨌든 테세우스가 타고 있으니 테세우스의 배가 틀림없다. 하지만 이 문제는 철학적으로 생각할 계기를 마련해 준다. 만약 처음 출발할 때 배를 이루고 있던 판자, 중간에 떼어버린 그 판자를 누군가가 가져가서 또 다른 배를 만든다면? 그리고 그 배를 새로 판자를 덧댄 테세우스가 타고 있는 배와 함께 오고 있다면 우리는 어떤 배가 진정한 테세우스의 배라고 할 수 있을까 하는 논리적 추론이 말이다. 어처구니없어 보여도 재미를 주는 부분이었다.

전체적으로 <인생처음 철학 공부>는 철학 입문자에게 제격인 책이었다. 간결한 설명과 헷갈리지 않게 주제에 걸맞은 체계적인 구성이 그랬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쉬운 책은 아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철학에 대해 어느 정도 지식이 있는 사람도 충분히 유익한 책이다. 철학에서 주요 논쟁으로 다루고 있는 이론들이라든지, 난제들이 그렇다. 때문에 본 책은 정확히는 철학의 갈피를 잡아주는 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특히 공부할 때도 그렇고 독서할 때에도 따로 노트를 정리하는 걸 좋아하는 분에게도 제격이라는 생각이 든다. 개념 정리가 확실한 책이니 말이다. 하지만 아쉬운 점도 있었다. 간결하게 설명해서 그런지 깊고 자세한 설명이 조금 부족해 보였다. 물론 '쉽게 배우는' 철학이기 때문에 자세한 설명을 바라는 건 어려운 일이다. 대신 깔끔한 개념 정리가 있기에 이를 유심히 살펴보며 읽다 보면 어느새 철학에 능통한 자신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 본 책은 출판사의 지원으로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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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3-10-16 1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철학사 소개서들은 대개가 비슷해요. 가장 대표적인게 철학자 별로 정리한 책이죠. 철학자도 전공한 저자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긴 하지만 대동소이 합니다. 이 책에서는 유일하게 이븐 시나를 소개했네요. 비슷한 다른 책에는 아베로에스(이븐 루시드)를 소개하죠. 왜냐면 이슬람 최고 철학자라고 회자되는 사람이 아베로에스 이니까요. 서광사에서 나온 이슬람철학사를 보면 보통 사람들이 거의 모르는 철학자들이 등장합니다.ㅎㅎ 그래도 이븐 시나 정도는 중세철학사에 거의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 책도 다른 철학사 간략 소개서들과 대동소이 할 듯합니다.

미국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퍼스, 제임스, 듀이가 빠져있네요. 조지 산타야나도 없구요. 그냥 대중적인 철학자와 철학 주제별로 편집된 책인듯 합니다..^^
 
퍼스트 리폼드
폴 슈레이더 감독, 에단 호크 외 출연 / 미디어룩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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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주 베르나노스의 <어느 시골 신부의 일기>가 연상되는 영화이다. 오랜 역사를 지닌 ‘퍼스트 리폼드‘ 교회의 목사인 ‘톨러‘의 육체적, 정신적 고통과 고뇌를 오늘날 중요한 환경적 문제와 함께 진중하게 다루고 있는 게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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셜리 2
모리 카오루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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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일상이지만 여전히 재밌다. 언젠가 늦더라도 후속편이 더 나왔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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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벌 - 하 열린책들 세계문학 2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홍대화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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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지난 <죄와 벌> 상권에 이어 하권이다. 며칠 간에 걸쳐 완독하니 이렇게 기쁠 수가 없다. 개인적으로 도스토옙스키 작품 중에서 <죄와 벌>만큼 후반부에 갈수록 긴박감이 넘치는 건 없는 것 같다. 시작과 끝이 모두 강렬하고 동시에 감동적이었다. 그리고 성인이 되어 다시 읽어봐서 그런지 새로운 부분이 많았다. 예를 들어 원래부터 밥맛이었던 루쥔이 더 밥맛이라는 거, 라스콜리니코프의 친구인 라주미힌은 정말 천사라는 점, 예심판사인 뽀르삐리가 무척 얄미우면서 동시에 심문하는 방식이 매우 심리적으로 정교하다는 점, 작중 악인으로 등장하는 스비드가일로프가 정확히 무엇을 상징하며 그가 라스콜리니코프의 분신이나 마찬가지였다는 점 등등이 그랬다. 또한 비중은 적었지만 라스콜리니코프의 어머니의 무한한 사랑이 나를 눈물짓게 했다.


하권에선 상권에 이어 노파를 살해한 후에 괴로워하는 라스콜리니코프 앞에 과거 그의 여동생인 '두냐'를 유혹하려 했던 '스비드가일로프'가 등장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어렸을 땐 이 스비드가일로프라는 캐릭터가 그냥 파렴치한에 사기꾼인 줄 알았다. 가정이 있으면서 두냐를 유혹하려 했다는 건 물론이고 예전에 도박 사기꾼으로 이름 날렸다는 것과, 자기 하인을 자살에 이르게 하고 14살의 농노 소녀를 농락해 역시 자살에 이르게끔 했다는 점이 참 후덜덜한 악한으로 보였다. 게다가 아내가 사망하자마자 두냐를 쫓아 이렇게 그녀의 오빠인 라스콜리니코프를 찾아왔다는 것이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계속 읽어보니 이 사람은 단순한 악인이 아니었다. 스비드가일로프는 '허무주의'를 상징한다. 그가 이렇게 색욕과 무절제함을 보이는 건 내면 속 깊이 자리 잡은 '허무함' 때문이었다. 작중에서도 말했다시피 스비드가일로프는 '아름다운 외모'에 귀족 지주인 만큼 '돈'은 물론이고 '고상함'이 넘치지만 본인은 삶의 이유와 진리가 사실은 '거미들이 들끊는 구석진 방'에 존재하는 거 아니냐며 무료해한다(세상은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것이 없으며 살아있을 이유 또한 딱히 없다는 식). 라스콜리니코프는 비록 세상이 타락했지만 그 안에서 어떻게든 해결책을 찾아보려고 나름대로 사상을 만드는 노력을 했지만, 스비드가일로프는 걍 본능에 따라 동물적으로 살아간다. 그러나 결론은 달랐어도 둘 다 세상에 대해 환멸감이 드는 건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라스콜리니코프는 스비드가일로프를 만날 때마다 왠지 모를 동질감과 불쾌감을 느낀다. 만약 라스콜리니코프에게 자존심이나 별다른 생각(사상)이 없었더라면 스비드가일로프와 마찬가지로 세상에 허무감을 느껴 본능에 따라 짐승처럼 살던가 자살했을지도 모른다.


스비드가일로프와의 에피소드 외에도 하권에서 인상 깊었던 부분은 라스콜리니코프와 창녀 '소냐'의 대화였다. 이 장면에서 나는 라스콜리니코프의 고뇌 이유와 특유의 불같은 자존심 외에도 다른 무언가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 만남에서도 라스콜리니코프는 역시나 소냐에게도 자신의 사상을 들먹이며 정의를 얘기한다. 소냐가 악인인 루쥔에게 억울한 누명을 쓰고 고통을 받은 직후였기에 라스콜리니코프는 그녀에게 '이 세상에 루쥔같은 나쁜 인간이 살아야 할지, 아님 까쩨리나(소냐의 어머니로 폐병과 가난에 괴로워함) 같이 선하고 고통받는 인간이 살아야 할지' 말해보라고 한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당근 선한 사람이 살아야지!'라고 말했겠지만 소냐는 이 물음에 답하지 않고 눈물만 흘린다. 작중 소냐는 창녀지만 마음만큼 매우 순수한 인물이다. 오죽하면 남을 위해 모든 걸 바칠만하다는 말을 들을 정도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자기희생'의 전형이 소냐라고 할 수 있다. 자신과 정반대 성격인 소냐 앞에서 라스콜리니코프는 처음엔 독기 어린 말을 하지만 이내 그녀의 눈물에 자기도 모르게 풀이 죽는다.


여기서 놀라운 점은 그 자존심 강하던 라스콜리니코프가 무릎을 꿇고 그녀의 발에 입을 맞췄다는 사실이다! 이때 하는 말이 소름인데, 라스콜리니코프가 무릎을 꿇은 이유는 다름 아닌 소냐같이 '남에게 핍박받는 모든 존재가 겪은 고통에 대해' 절을 한 것이라고 한다. 사실 라스콜리니코프가 계속해서 악인과 선인의 존재 이유에 대해 말하는 것도, 이를 바탕으로 전당포 노파를 죽인 것도 다른 무엇도 아닌 '핍박받는 사람들'을 향한 연민과 그들의 고통을 보고도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는 부조리한 세상에 대한 분노 때문이었다. 그는 자기 손으로 직접 악을 징벌함으로써 세상에 정의를 내세우고 싶었고, 자신이 '평범한 사람'이 아닌 세상을 바꿀 '영웅'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누구나 한 번쯤 자신은 물론 약자들을 위해서 부조리한 세상과 남을 괴롭히는 범죄자들을 벌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봤을 거다. 세상에 정의를 세우는 것! 때문에 나도 그렇고 아마 몇몇 사람들은 라스콜리니코프의 사상을 완전히 거부하기란 쉽지 않을지도 모른다. 라스콜리니코프가 소냐에게 갔던 것도, 자신의 죄를 고백한 것도 어쩌면 자신과 마찬가지로 스스로를 죽이면서까지 남을 위해 희생한 소냐에게서 동질감을 느꼈기 때문으로 보인다. 다만 라스콜리니코프는 사상을 위해 스스로를 죽였지만 소냐는 그리스도의 아가페적 사랑으로 스스로를 죽였다는 점(가난한 가족들을 위해 스스로 몸 파는 여자가 됨)에서 차이가 있다.


하지만 동시에 라스콜리니코프는 끝까지 자신의 행동과 사상에 대해 후회하지 않는 태도를 보인다. 만약 자기한테 능력이 있었더라면, 실패하지 않았다면 영웅이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면서 말이다. 여기서 나는 그가 '사상의 노예'라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라스콜리니코프는 착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선한 마음이 이성과 논리에 의해, 결정적으로 정의의 문제로까지 이어지자 길을 잃고 사상에 경도되어 버린 것 같았다. 한 마디로 라스콜리니코프는 삶보다 자신의 사상을 우선시했고, 이로 인해 자신의 삶은 물론이고 타인의 삶 역시 사상의 희생양으로 삼은 것이다. 작중 라스콜리니코프는 좁디좁은 방에서 고립된 삶을 살아갔다. 또한 노파를 살해한 후에도 사람을 죽였다는 알 수 없는 고뇌로 라스콜리니코프는 자신이 세상과 더욱 멀어졌다는 사실을 점차 깨닫게 된다. 시작은 연민이었건만, 정작 그 결과는 단절이었던 셈이다.


라스콜리니코프의 자백을 들은 뒤 소냐가 그를 향해 눈물을 흘리며 '당장 네거리 광장으로 가서 내가 죄를 지었다고 외치라는' 말도 부조리한 삶에 대항하기 위해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사상에 경도된 라스콜리니코프의 처지에 대한 해답으로 보인다. 아무리 정의롭고 이성적으로 옳다고 해도 자신과 타인의 삶을 파괴하는, 고립된 사상은 결코 건강하지 못하니 말이다.

이를 잘 드러내는 장면은 라스콜리니코프가 수형 생활 중에 꾸었던 꿈에서도 잘 드러난다. 꿈에서 어느 먼 미래에 '섬모충'이라는 기생충이 나타나 사람들을 감염시키는데, 이 기생충에 감염된 사람은 저마다 자기가 가장 뛰어난 사람이라며 자신의 생각과 사상을 고집하게 된다. 그리하여 마침내 세상은 감염자들에 의해 혼란스러워지고 사람들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 채 싸우다가 멸망한다는 것이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섬모충에 감염된 사람들처럼 자기 생각이 옳다고 고집한다. 고통받은 사람들을 연민했으나 한편으로 불의에 저항하지 못하는 그들과 부조리한 세상을 경멸했다. 대신에 자신은 영웅이 될 것이며 남들보다 뛰어난 존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이는 고립과 단절로 이어졌고 마침내 살인까지 저지르게 되었다. 어쩌면 지금까지의 모든 일들은 단순히 윤리적인 문제에서만 비롯된 게 아니라 자기가 남들보다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태도에서 온 게 아닐까?

감옥에 가기 전에 늙은 어머니가 보여줬던 무한한 사랑, 가난했지만 단란하게 가족들과 살을 맞대며 살았던 그때 그 시절, 그리고 감옥까지 따라와 그를 뒷바라지해주는 소냐의 헌신은 마침내 라스콜리니코프에게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만든다. 인생을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건 이성이니 사상이 아니라 사랑과 삶 그 자체임을.

복잡하게 계산을 할 필요가 없다. 예심판사인 '뽀르삐리'가 말했던 것처럼 두려워하지 말고 '삶을 향해 뛰어들어야' 하는 것이다. 그저 이해하며 살아가는 것, 이런 교훈은 아까 섬모충 얘기도 그렇고 삶에 대한 희망을 잃은 채 개인주의와 자기 독단이 난무하는 21세기에도 여전히 유효한 주장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우리 주위엔 얼마나 많은 라스콜리니코프 같은 사람이 존재하는지! 또 얼마나 많은 허무주의자 스비드가일로프 같은 사람이 존재하는지, 아마 알만한 사람은 알 것이다. 이익과 사상보다는 인류애와 사랑을 추구하는 그날이 언젠가 왔으면 하는 바람으로 이번 리뷰를 마치겠다.



나는 아무것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맹새코. (중략) 여전히 우리는 영원성을 한낱 이해할 수 없는 사상, 무언가 거대하고 거창한 것으로만 상상하고 있지요! 그런데 왜 반드시 거창해야만 할까요? 생각해 보시오, 그런 것들 대신에 그곳에 시골의 목욕탕과 비슷한, 그을음에 찌든 작은 방 하나만 있고, 구석구석 거미들만 가득하다면 말입니다. 이것이 영원의 전부라면 말이오.

어떤 사람들이 세상에서 살아야 할지, 루쥔이 살아서 그런 파렴치한 짓을 계속하게 할지, 까쪠리나 이바노브나가 죽어야 할지와 같은 문제들이 갑자기 당신의 결단 하나에 달려 있다면 말입니다. 그럼, 어떤 결론을 내리겠습니까? 그들 중 누가 죽어야 할까요?

나는 당신에게 절한 것이 아니라, 온 인류의 고통에 절을 한 거요. (중략) 내가 그렇게 말한 건 당신의 수치와 죄 때문이 아니라 당신의 위대한 고통 때문이야. 당신이 큰 죄인이라면, 그건 그렇겠지. 당신이 죄인인 이유는 다른 것은 다 제쳐 두고라도, 당신이 ‘공연히‘ 자신을 죽이고 팔아먹었기 때문이야. 우리의 행선지는 같아! 당신 역시 선을 넘어선 거야... 넘어설 수 있었던 거지. 당신은 자기 몸에 손을 댔고, 스스로를 죽여 버렸어.....

나는 다만 ‘이‘를 죽인 것뿐이야 소냐. 무익하고 추하고, 해로운 ‘이‘ 말이야. (중략) 만일 모든 사람들이 똑똑해지기를 기다린다면,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릴 거야..... 어쩌면 그런 일은 절대로 없을지도 모르지. 사람들은 변하지 않을 것이며, 그들은 개조할 사람은 누구도 없다고. 그러니 애쓸 가치조차 없다는 것을 깨달았어! 소냐, 머리의 정신이 견고하고 강한 사람이라야만 사람들의 주권자가 된다는 사실을 말이야! 더 많이 용기를 내어 일을 감행하는 사람만이 사람들 눈에는 옳아 보이는 거야. 보다 많은 것을 무시하는 자만이 입법자가 되고, 더 많은 일을 해치울 수 있는 사람이 그 누구보다도 옳은 사람이 되는 거야!

네거리에 서서 먼저 당신이 더립힌 대지에 절을 하고 입을 맞추세요. 그 다음 온 세상을 향해 절을 하고 소리를 내어 모든 사람들에게 말하게쇼. ‘내가 죽였습니다!‘라고. 그러면 하느님께서 또다시 당신에게 생명을 보내주실 거예요.

무엇보다도 그를 크게 놀라게 한 것은 그와 다른 사람들 사이에 놓여 있는 도저히 건널 수 없는 ‘무서운 심연‘이었다. 그와 그들은 서로를 신뢰하지 못하고 적의를 품고 바라보았다. 그는 이런 분리의 일반적인 원인에 대해 대체적으로 알고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예전에 이 원인이 정말로 이렇게 깊고 강하리라고는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어떤 새로운 섬모충이 나타났는데, 이것은 현미경으로만 볼 수 있는 존재로 사람들의 몸속에 기생했다. 이 생물은 지성과 의지를 부여받은 영적인 존재였다. 이 생물에 감염된 사람들은 즉시 발광해서 미쳐 버리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감염된 사람들만큼 자기가 진리에 확고히 뿌리를 박은 현명한 사람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은 일찍이 없었다. 이 사람들은 자신의 판단, 자신의 과학적인 결론, 도덕적인 확신과 신앙을 이때보다 더 확고하게 느껴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온 마을이 온 도시가 모든 사람들이 감염되어서 미쳐 갔다. 모두들 불안에 빠졌고,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며, 오로지 각자 자기 속에만 진리가 있다고 생각하며, 다른 사람들을 보면서 괴로워하고, 가슴을 치면서 울부짖으며 손을 쥐어들었다. 누구를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몰랐고, 무엇이 악이고 무엇이 선인지 의견의 일치를 볼 수 없었다. 누구를 고소하고 누구를 변호해야 할지 몰랐다. 사람들은 어떤 무의미한 증오심 속에서 서로를 죽여 갔다.

"로쟈, 내 사랑하는 아들아, 내 아들아. 이제야 네가 어렸을 때처럼 내게 와서 나를 안고 키스하는구나. 아직 네 아버지가 살아 계시고, 우리가 가난하게 살고 있을 때, 네가 우리와 함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넌 우리에게 큰 위안이었단다"

그는 당시에 아무것도 의식적으로 해결할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다만 느꼈다. 변증법 대신에 삶이 도래했고, 의식 속에서 무언가 전혀 다른 것이 형성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오오, 인생을 혐오하지 마십시오!

당신은 창창한데, 감형이 필요 없다니요. 어째서 필요없다는 거지요?"
"뭐가 앞으로 창창하다는 겁니까?"
"삶요! 당신이 선지자라도 됩니까? 그렇게 많은 것을 알고 있어요? 더 찾고 발견하십시오. 어쩌면 하느님이 이 일을 위해 당신을 기다리고 계실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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셜리
모리 카오루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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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 본편만큼이나 재미있다. 셜리의 이야기 외에도 단편으로 나온 다른 캐릭터들의 이야기가 무척이나 흥미로웠던 책이었던 것 같다. 작가님 피셜 초기작이라 부족한 부분이 있을 수 있다는데 전혀 아니다. <엠마>를 본 뒤에 꼭 읽으시길 추천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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