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마음 - 달라이 라마의 성경 강의
달라이 라마 지음, 류시화 옮김 / 불광출판사 / 2017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래전부터 의문스러웟던 단 한가지가 있다. 종교는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도덕적 가치가 존재하고 있다. 불교도 그리스도교도 이슬람교의 보편적 자치,근저에는 '선한 마음'이 존재한다. 하지만 공롭게도 우리 앞에 놓여진 종교는 세속적이며, 갈등과 분쟁의 씨엇이 되고 말았다. 서로가 추구하는 종교관을 인정하지 않고 전쟁의 원인을 제공하였으며, 특히 그리스도교와 이스람교의 뿌리 깊은 종교전쟁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그들의 보편적인 가치는 상실되어진 지 오래 되었다. 티벳 불교의 영적 지도자 달라리 라마도 마찬가지다. 그는 티벳 불교의 상징이 되었지만, 중국의 티벳 침탈로 인해 그가 살았던 터전 마저 잃어 버리고, 인도에 거쳐를 옮겨 놓은 상태이다. 티벳 불교의 14대 달라이라마 텐진 갸초, 1935년에 태어난 그는 2살이 되건 해 달라이 라마로 인전ㅇ받았으며, 지금까지 티벳 불교의 상징이 되었다.


이 책은 1994년 런던 미들섹스 대학의 강의실에서 그리스도교인들과 불교 수행자가 만난 자리에서 3일간의 특별강연에 대해서 나오고 있다. 존 메인 신부가 만든 '그리스도교 명상 공동체'에서 주최하는 세미나에 텐진 갸초가 초대 된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가치와 불교의 가치. 서로 다른 듯 보이지만 그들이 종교관은 비슷한 점이 있다. 종교로서 외형적인 것에서 벗어나며, 그들의 내면을 들여다 보고 있으며, 서로의 종교관의 융합, 성서의 복음서와 예수 그리스도가 남겨놓은 보편적인 가치를 얻을 수 있다. 그리스도교 명상 수행자들이 추구하는 종교적인 윤리, 영성, 경전 해서그 다른 종교와의 대화, 기도에 대한 특별강연이 3일 동안 펼쳐지고 있다.


그들은 질문하였고, 달라이라마는 불교적 가치관에 근거해 대답을 하고 있으며, 달라이라마는 그들에게 '따뜻함, 명확함, 웃음'을 선물하고 있다.  그리스도교에서 언급하는 우리가 보편적으로 추구해야 하는 근본적인 실천, 자비와 형재에, 용서를 강조하면서 그것이 그리스도교인과 불교 수행자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와야 하는지, 그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무엇인지 새로운 관점과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또 눈애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갚으라는 말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를 괴롭히는 자에게 대항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빰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고소하여 속옷을 갖고자 하는 자에게는 겉옷도 갖게 하라. 떠 누구든지 너를 억지도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라.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마태복음 5장 38절 ~42절)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던 그날, 예수그리스도는 원수를 하랑하라고 언급하시었다. 불교에도 예수그리스도 깨서 남겨 놓은 씨엇과 비슷한 '보살의 계율'이 현존하고 있다. 고통을 인내하고, 비폭력과 자비의 마음을 가지고 대응하는 것, 그것은 바로 우리가 살아가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며, 모든 이에게 차볗ㄹ하지 않고 편견으로 대하지 않는 길이다. 예수 그리스도 께서느 보편적인 사라을 추구하였으며, 그것이 제자들에게 고스란히 되물림 되어졌다.


'어떤 문제가 있는데 만약 그것에서 벗어날 방법과 해결책이 있다면, 그것에 대해 아무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반면에 벗어날 길도 해결책도 없다면, 이 또한 걱정할 게 없지 않은가!' (p69)


불교경전 <입보리행론>에 나오는 구절이다. 우리 앞에 놓여지느 걱정은 문제를 바라보는 시선,관점에 따라 달라진다. 지붕이 무너지는 그 순간,좌절하지 않고 다시 일어나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 대다수의 사람은 후자에 속한다. 하지만 좌절을 딛고 일어나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의 위대함이 보인다. 실패하지 않고 성공을 추구해 왔던 이들보다 실패를 했음에도 다시 일어나 성공을 추구하는 사람이 있다. 마냥 걱정만 하면 ,문제에서 벗어날 방법과 해결책은 그저 주워지지 않으며, 벗어날 길이 없다할지라도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진리를 우리에게 일깨워 주고 있었다.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다. 왜냐하면 그 슬픔의 경험을 통해 자신이 지금 하느님으로부터 떨어져 있다느 사실과 마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슬픔은 외부의 고통 뿐 아니라 완성을 향해 노력해야만 하는 인간의 숙명을 말한다.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요'는 구원 혹은 해방을 얻은 상태를 의미한다. (p20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