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렌지 신전
최류빈 지음 / 보민출판사 / 2017년 11월
평점 :
절판


내가 사는 세상을 그대로 보려면 소설을 읽으면 된다. 시는 냇가 사는 세상의 한 파편을 압축해 놓는다. 내가 보는 세상을 그대로 써내려가지 않고, 관찰하고 또 관찰하면서 그 안에 감춰진 의미와 가치, 느낌을 채워 나간다. 시가 가지는 의미 속에서 시인은 때로는 최대한 줄여나가기도 하고, 최대한 늘리는 경우도 있다. 시라고 부르지만 그것이 시가 아닌 경우도 우리는 흔히 마주한다. 같은 대상을 바라보면서, 같은 개념을 드러내면서, 새로운 관찰을 느낌으로 얻을 때가 있다. 제목은 같은데, 느낌이 다르다는 걸, 시를 자주 접해 본 사람들이면 알 수 있다. 소설이 채워줄 수 없는 걸 그렇게 시를 통해서 채워 나간다.시는 우리에게 독특한 세상과 마주하게 된다.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를 더 풍요롭게 한다.


오렌지 신전

주홍빛 기둥이 서 있고 과육이라 착각한 사람들이 코를 들이밀자
오렌지는 토했다. 들이닥치는 코를 왈칵 씹으며

흰색 테라스 A에 오렌지가 낳은 알갱이 울긋불긋했다.
주홍글씨는 지워지지도 않았다.

세상에 남겨진 설움이 많았지만
신전 1층에서 횡으로 죽은 재물들은 슬픔을 다정하게 부르지 못했다. 

젊음은 초록 마당에 피어났고 가지가 투신하듯 죽었다.
녹음과 주황이 섞여 누렇게 피어나는 한 철 취했었고.(p39)

이 책 제목이기도 하며, 책 속의 한편의 짧은 시 한편이다. 오렌지 속에 우리의 인생을 녹여 놓았다. 삶과 죽음의 끝자락에 놓여진 오렌지, 오렌지에게 주홍글씨란 어떤 의미일까 생각해 보게 된다. 우리에게도 주홍글씨가 새겨져 있다. 그것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우리의 인생의 방향이 결정될 수 있다. 삶으로 나아갈 수도, 죽음으로 바뀔 수도, 그건 온전히 내 의지에 달려있다. 살고 있지만 살고 있지 않은 것처럼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이 시를 통해 되돌아 보게 되었다. 


스트라이크, 더블, 터키

스트라이크를 치면 스페어를 잊게 된다.
더블을 치면 스트라이크를 잊게 된다.
터키를 치면 더블을 잊게 된다.
가끔 볼이 구렁에 빠지게 된다.
그럴 땐 그 모든 것들을 생각하게 된다. (p45)


스트라이크, 더블, 터키는 우리에게 주어진 행운이 아닐까, 행운이 반복되고 좋은 일이 반복되면 과거의 좋은 일은 점차 잊혀지고 만다. 그리고 그걸 우리는 당연하게 생각하고 오만해진다. 구렁에 빠지면 그제서야 지난날의 좋은 기억들이 생각이 날 수 있다. 우리네 인생은 볼링을 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영원이 스트라이크를 칠수 없다는 그 사실을 알고 살아야만 겸손해질 수 있고 내 앞에 놓여진 것에 대해서 감사할 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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