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과 변명의 인질극 - 사할린한인 문제를 둘러싼 한.러.일 3국의 외교협상 전쟁과 평화 학술총서 2
아르고(ARGO)인문사회연구소 지음 / 채륜 / 2018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들을 사할린 한인이라 부른다. 재일 한국인에 비해 관심조차 받지 못한 사람들,  광복 이후 고국의 관심조차 받지 못하였고, 러시아, 일본,미국에 외면당해야 했던 사할린 동포는 그렇게 방치되고 있었다. 이 책은 왜 그들이 타향에서 방치되어 살아와야 했는지, 고국은 왜 그들을 외면했는지, 1945년8월 15일부터 지금까지의 역사의 흐름을 짚어나가고 있다. 


1945년 8월 17일 사할린 가미시스카 한인 학살사건이 있었다. 일본 경찰은 패망직후 일본 본국으로 돌아가면서 어린이 6명을 포함한 헌인 27명을 학살하게 된다. 그들을 학살하면서 내세웠던 명분은 소련스파이였다.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에 패망했지만, 미소 협정에 따라 사할린에 머물러 있었던 일본인들은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28만명의 일본인이 고국으로 돌아간 다음 사할린에 남아있는 2만여 한인들은 이제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소련 정부는 여전히 그들을 필요로 하였고, 미소 협정을 어기고 말았다. 고급 엔지니어를 인질로 잠았으며, 그들을 무임금 벌목노동자로 활용할 가치가 충분했다. 광복 이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고국은 사할린 한인들을 신경 쓸 수 없었고, 고국 송환에 대해서 미온적인 입장을 취하였으며, 소극적이고, 형식적인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그들이 차선책으로 택하였던 건 한국이 아닌 일본이었으며, 일본으로 간 뒤 한국으로 돌아갈 방법을 모색하게 된다. 책에는 그 들이 어떻게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었는지, 일본 정부가 그들을 바라본 시선에 대해서, 한국 정부의 입장을 들여다 볼 수 있다.


사할린 한인의 대부분이 남한에서 왔지만, 남한으로 되돌아갈 수 없었던 또다른 이유가 북한에 있다. 사할린 동포를 남한과의 협상 카드로 쓸려고 했던 북한의 정치적인 목적, 이념적인 목적은 1970년대에 반복적으로 자행되었고, 남한은 경제 개발에 몰두 하면서 사할린 한인들의 소원은 점점 더 잊혀지고 말았다. 또한 미소 냉전으로 인해 미국의 입장과 소련의 입장이 충동하면서, 우방국 미국을 두고 있었던 남한은 그들의 송환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게 되었다.


사할린 한인이 남한으로 돌아오지 못한 이유는 바로 일본, 미국, 소련, 북한의 이해관계가 맞물리면서 자연스럽게 나타난 현상이다. 일본에 도착해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었던 사할린 한인의 입장과 달리 한국 정부는 일본에 머물러 있는 사할린 한인이 그곳에 정착해 살아가길 원했고, 그들이 남한에 돌아오게 되면 파생되는 사회적 갈등, 실업자 발생, 경제적인 손실을 우선 고려하게 되었다. 사할린 한인이 고국에 올 수 있었던 건 미소 냉전이 끝난 1989년 이후 한국과 소련간의 국교가 회복되면서 부터였다. 정부가 아닌 민간단체를 중심으로 사할린 한인 송환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으며, 사할린 한인들은 안산에 정착해 한국 사회에 적응하면서 살아가게 된다.


그동안 궁금했던 것들이 조금씩 풀리게 되었다. 고려인이라 불리었던 그들의 삶은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들이 송환되기 위해서 필요한 재원을 준비하기엔 한국 정부의 재정은 너무나도 부실했다. 광복 이루 2만의 사할린 한인들이 고국으로 되돌아 올 수 없었던 건 그 시대의 상황과 맞물려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한국의 특수한 상황이 겹쳐지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