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점점 초조해진다. 이제 아기를 맞이하는 집은 승리의기색이 바랬다. 내시 부인이 또다시 아이를 가졌을 때, 남편은 조그만 야구글러브를 사 와서 아내의 부풀어 오른 배에 대며 아들로 태어나라고 종용한다. 앤이 세상에 나왔을 때 그들이 마땅히 느꼈을 실의를 상상해보라. 아이에게는 가족 중 누군가의 이름을 대충 붙여준다. 예쁜 이름을 위해 따로 ‘e‘를 추가하는 식의 번거로운 수고는 사서 하지 않는다.
그러다가 바비가 이 세상에 나왔으니, 신의 가호에 경배를! 앤을 낳고 낙담한 지 3년 후, 부부가 최후의 정기를 발휘한 건지 마침내 바비가 태어난다. 바비는 아빠의 이름을 물려받았다(로버트의 애칭이 바비임-옮긴이). 사내아이는 맹목적인 사랑을 받고, 어린 소녀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별 볼일 없는 존재인지 문득 깨닫는다. 특히 앤이 그랬다. 아무도셋째 딸을 원하지 않았다. 그 아이는 이제 와서야 약간의 관심을 받게되었다. - P30

"놈들이 아이를 붙잡았다니 무슨 말씀이신지요?"
"놈들이든, 한 놈이든 뭐든 간에요. 짐승 같은 놈들이 그랬단 말입니다. 아이들을 잡아 죽이는 정신병자죠. 우리 가족이 자고 있는 동안, 기자님이 취재를 하려고 차를 타고 돌아다니는 동안 살해할 아이를 찾아다니는 놈이 있다는 겁니다. 기자님도 나도, 어린 내털리가 그저 단순히 길을 잃은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지요."
그는 남아 있던 주스를 단숨에 들이키고는 입을 훔쳤다. 좀 과하게 포장한 감은 있지만, 그의 대답은 훌륭했다. 이런 일은 흔했다. 말하자면 사람들은 텔레비전을 얼마나 많이 보는지와 같은 질문에 청산유수처럼 대답한다. 얼마 전 남자친구에게 살해당한 스물두 살 딸의 어머니와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그녀는 내가 전날 밤에 우연히 보았던 법정 드라마의 대사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답변으로 내놓았다. 말로는 그가 참 안됐다고 하고 싶지요. 하지만 지금은 누구라도 안됐다고 생각할 일이 다시 있을지 걱정이 돼요. - P3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엄마는 고마운 줄 알아야 한다고 했다. 나 때문에 가진 돈을 다 썼으니, 기니 여사가 아니었으면 내가 어디 있을지 모른다고 했다. 하지만 난 내가 어디 있을지 알고 있었다. 시골에 있는 대형 주립 병원에 있겠지. 이 개인 병원 바로 옆에 있는 병원에.
기니 여사에게 감사해야 한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런 감정이 생기지 않았다. 그녀가 유럽행 티켓이나 크루즈 왕복표를 줬다 해도 다르지 않았으리라. 내가 어디 있든—배의 갑판이든 파리나 방콕의 거리 카페— 나 자신의 시큼한 공기 속에서 속을 태우며 벨 자 밑에 앉아 있을 테니까. - P245

강 위로 둥글고 푸른 하늘이 열렸고, 강에는 배가 많이 떠다녔다. 마음의 준비를 했지만, 곧 엄마와 동생이 손으로 양쪽 문을 잡았다. 뜨겁게 달궈진 다리 위를 지날 때 타이어에서윙 소리가 났다. 물, 배, 푸른 하늘, 갈매기 떼는 비현실적인 엽서를 떠오르게 했고, 우리는 강을 건넜다.
나는 회색의 호사스러운 좌석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벨 자의 공기가 내 주변을 메워서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 P246

물론 우리 대학의 저명한 여자 시인은 여자랑 살았다. 뚱뚱하고 머리를 치켜 깎은 고전 전공 학자였다. 내가 결혼해서 아이를 많이 낳을 거라고 말하자 시인은 끔찍한 표정으로 날 노려봤다. 그러고는 쏘아붙였다.
"하지만 커리어는 어쩌고?"
머리가 아팠다. 왜 수상한 늙은 여자들이 내게 관심을 퍼부을까? 그 유명한 시인, 필로메나 기니, 제이 시, <크리스천 사이언티스트> 여자 상사 모두 마찬가지였다. 다들 날 옆에 두려 했다. 보살피고 영향을 주어서 자기를 닮게 만들려고 했다. - P291

"우리, 떠나온 곳에서 시작하는 거야. 이 모든 게 나쁜 꿈이었던 것처럼 행동하자꾸나."
나쁜 꿈.
벨 자 안에 있는 사람에게, 죽은 아기처럼 텅 비고 멈춰버린 사람에게 세상은 그 자체가 나쁜 꿈인 것을.
나쁜 꿈.
난 모든 걸 기억했다.
해부용 시신, 도린, 무화과 이야기, 마르코의 다이아몬드, 광장에서 만난 해병, 닥터 고든 병원의 사시 간호사, 깨진 체온계, 두 종류의 콩 요리를 가져다준 흑인, 인슐린 투약으로 9킬로그램이 늘어버린 체중, 하늘과 바다 사이에 회색 두개골처럼 튀어나온 바위. - P315

어쩌면, 망각은 친절한 눈처럼 그것들을 무감각하게 하고 덮어버리리라.
하지만 그것들은 나의 일부였다. 그것들은 나의 풍경이었다. - P316

"어떤 남자분이 찾아왔는데요!"
흰 캡을 쓴 간호사가 웃는 얼굴을 문틈으로 내밀었다. 순간적으로 내가 대학에 돌아왔다고 착각했다. 흰 전나무 가구, 나무와 언덕 위로 펼쳐진 하얀 풍경, 휑한 마당 정경.
‘어떤 남자가 찾아왔어!‘
기숙사 당번인 선배가 전화로 그렇게 말했다.
브리지 게임을 하고 소문에 대해 떠들고 공부하는, 내가 돌아갈 대학의 여학생들과 벨사이즈의 우리와 무엇이 다를까?
그 여학생들 역시 어떤 종류의 벨 자 밑에 앉아 있는 것을. - P31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부탁이에요. 시하를 사랑하고 싶어요. 진정한 사랑을요. 진짜를 느끼고 싶어요. 진짜 시하를 만나고 싶어요. 한순간이라도 좋아요. 제 뇌를 꺼내서 산산이 분해해 버린다 해도 상관없어요. 시하에게 닿을 수만 있다면."
"세계의 끝을 건너고 싶어 하는 아이구나. 알아. 관계는 늘 아득하지. —도 한때는 영원히 —을 이해할 방법이 있을 거라 오해하고 있었지."
빛은 쓸쓸히 고개를 떨구었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해. 존재는 하나의 세계니까. 네 안에 다른 존재를 받아들이게 되면 그의 세계는 필연적으로 구겨지고 찌그러져. 이전과는 다른 존재가 되어 버려. 영원히, 마주하는 순간 망가져 버리는 거야. 너도 그도." - P25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거봐요, 정상인데 뭐하자고 계속 재는 거죠?"
몸에 문제가 있다면 괜찮겠다고, 차라리 머리가 잘못된 게 아니라 몸이 잘못된 거면 좋겠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복잡하고 따분한 말이어서 입을 다물었다. 침대 속으로 더 파고들었다. - P24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익사가 가장 친절하게 죽는 방법이라면 최악의 방법은 불에 타 죽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버디 윌러드는 그때 본 병속에 든 태아 중에는 아가미가 있는 아이도 있다고 말했다.
물고기랑 똑같은 단계를 거친 아이들이라고. - P209

"못 가겠어요."
그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알았어요. 당신은 돌아가요."
나는 헤엄쳐서 돌아가지 못할만큼 녹초가 될 때까지 수영할 작정이었다. 앞으로 나갈 때 내 심장박동 소리가 답답한 모터 소리처럼 들렸다.
나는 살아 있다 나는 살아 있다 나는 살아 있다. - P210

그때 내 몸이 온갖 종류의 속임수를 쓴다는 걸 알았다. 중요한 순간에 양손이 늘어졌고, 그러면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내 의도대로라면 순식간에 죽는 거였는데,
남은 감각을 지닌 채 기다리기만 하면 될 터였다. 혹은 함정에 빠져 무감각하게 오십 년 동안 우리에 갇혀 있게 되겠지. 사람들은 내가 정신이 나간 걸 알면 엄마가 반대해도 날 요양원에 넣어 치료받게 하라고 엄마를 설득하리라.
내 경우는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게 문제였다.
잡화점에서 비정상적인 심리에 관한 문고판 책 몇 권을 사서 책에 나온 내용과 내 증상을 비교해보니, 나는 가장 가망없는 경우와 맞아떨어졌다.
스캔들을 다루는 신문 외에 읽을 수 있는 것은 이런 심리학 서적뿐이었다. 작은 출구가 남아 있어서, 인생을 적절하게 끝내기 위해 알아야 할 것들을 배울 수 있을 것 같았다. - P212

최근 나는 가톨릭 신자가 될까 고민했다. 가톨릭에서는 자살을 엄청난 죄로 본다는 걸 알았다. 정말 그렇다면 자살을 만류할 방법을 알고 있을 터였다. - P218

금고를 열어 수면제 병을 꺼냈다. 수면제가 기대보다 많이 있었다.
적어도 쉰 알은 될 것 같았다.
엄마가 밤마다 조금씩 주는 약을 모으며 기다렸다면 오십일은 걸렸을 터였다. 오십 일 후면 대학이 개강을 하고 동생이 독일에서 돌아올 터였다. 그러면 기회를 놓치게 되겠지. - P223

부드러운 나방 같은 거미줄이 얼굴에 닿았다. 검은 우비로 그림자처럼 몸을 감싼 채 약병을 열었다. 재빨리 수면제를 한알씩 입에 넣었고 중간중간 물을 삼켰다.
처음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약을 다 먹었을 즈음에는 눈앞에 울긋불긋한 빛이 번쩍이기 시작했다. 약병이 손에서 미끄러졌고, 난 누웠다.
정적이 꼬리를 늘이니 조약돌과 조가비가 드러났다. 초라하게 부서진 내 삶 전부도 그 순간 그것이 하나가 되더니, 밀려드는 파도 속에서 날 잠으로 밀어 넣었다. - P22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