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작가가 등장해 세상의 주목을 받으면 보통은 ‘쳇‘ 하는 마음으로 일단 색안경을 끼고, 새 책이 나와도 데면데면, 안 읽고 읽은척, 남들이 열광하며 그 책 이야기할 때 입 꾹 다물고 가만히 있기・・・・・・ 등의 스킬을 구사하던 이비였다. 하지만 몽식이의 글은 매번 순수하게 이비를 감탄시켰다. 동경이 너무 커서 질투나 시기 같은 부정적인 감정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 P235

이비는 글을 쓰며 화를 냈고, 화를 내다 그 거리의 이야기를 죄다 망쳐버렸다. 냉정하게 보아야 할 곳에서 겁을 내며 눈을 게슴츠레 떴고, 너그러워져야 할 곳에서는 진심도 아닌 위악을 떨다 죽여서는 안될 사람을 죽이거나, 멀쩡한 아이의 몸에서 피가 철철 흐르게 하기 일쑤였다. 몽식이는 똑같이 더러운 거리를 묘사하면서도 감정에 휘둘려 실수를 하지 않았다. 게다가 거기에 태양이 떠오르고, 눈으로 문장을 훑는 독자가 그 위로 스며나오는 아침 수프 냄새를 맡으며 군침을 삼키게 할 수 있었다. 그처럼 토사물 범벅인데도 말이다! 그건 숙성이었다. 그의 글에서는 오랜 시간을 견딘 향기가 배어나왔다. 특히 최근 작품들은 대단했다. 대체 태양이 떠오르기를 얼마나 간절히 소망하면, 비참한 상황 속에서도 수프의 따뜻함을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은 마음을 얼마나 오랫동안 가다듬으면 그런 문장이, 이야기가 나오는 것일까. - P236

"헐, 뭘 또 그렇게까지 말하냐."
"모른다니까, 너는…………… 내 여자친구도 모르고, 부모님도 몰라. 하여튼 난 내가 무서울 때가 많아. 그래도, 아니 그래선지, 나의 비겁함이나, 나의 오염된 부분, 수없이 많은 편견이나, 미움이나, 미친 듯한 적대감이나...... 내 속에 들어 있는 그런 끈적끈적하고 기분 나쁜 것들보다는 나은 무언가를, 보고, 느끼고, 만들어내고 싶다는 마음이 있어. 너도 그렇고, 나도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도 그렇지 않겠어? 그런데 나는 아름다움을 볼 수도 느낄 수도 없으면서 손으로는 아름다운 글을 쓰려고 했어. 속엔 딴판인 게 들어 있는데 내가 짜증나는 인간이라는 걸 알리고 싶지는 않으니, 손가락만 다르게 움직여서 대충 예쁘장한 것들로 치장을 했던 거지. 호감을 사려고 말이야. 꽤 오랫동안 그랬는데 못 느꼈어?" - P252

"저거 혹시 좀더 긴 글도 되니?"
"응, 장편소설을 넣으면 장편소설이 나와. 물론 매우 다른 형태가 되어서 나오지. 주제도 바뀌고, 구성도 바뀌고, 인물이나 사건 같은 건 변하지 않는데, 조금씩 다른 색채가 가미돼서 나와. 말이 안 되는 경우도 꽤 많지만, 나로서는 절대로 쓸 수 없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해."
"헐, 미치겠네."
"설정들이 이것저것 더 있는데, 아까 본 건 ‘울타리 뛰어넘기‘
‘가시 뽑기‘ ‘장미와 농담하기‘ 이 세 개 필터를 깔아둔 거고, 다른 필터들도 있어. ‘향기에 집중하기‘, 이건 묘사를 세밀하게 만들어줘. ‘머리에 장미를‘, 이건 살짝 미친 것 같은 문장들을 만들어주지.환각소설이라든가 그런 유 있잖아? 버로스 같은. 우리나라에선 마약이 불법이잖아. 그래서 그런 상태를 맨정신으로 상상하기도 힘들고. 근데 그걸 까니까 그런 게 나오더라고. 상처를 내는 환각이 아니라, 미친 듯 폭주하는데 무지 행복한 환각이야. ‘모두에게 장미차 한잔씩은‘, 이건 좀 긴 글에서만 활성화되는 필턴데, 어떤 인물도 소외당하지 않게 해. 작가가 작품 속에서 어쩌다 인물을 다치게 하는 경우가 있잖아. 그런데 굉장히 교묘하게 수를 써서, 그런 인물이 하나도 나오지 않게 하더라고. 나는 지금 아주 일부만 말한건데, 그런 필터들이 팔십개 정도 있고, 그걸 조합하는 방식도 상당히 다양해서, 잘만 하면 같은 글은 나오지 않겠더라고. 일단 작가마다 재료를 다 다르게 넣으니까 말이야." - P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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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경찰은 줄리에트가 비행기 사고에 연루되었다는 사실을 전혀 입증하지 못했다. 법정은 검찰의 기소를 취하했고, 줄리에트에게는 공무집행 방해 혐의를 적용해 천오백 달러의 벌금형을 선고했다.
줄리에트는 개인 소지품들을 되찾기 위해 경찰서로 넘겨졌다가 추방수속절차를 밟기 위해 이민국으로 인도되었다. 강제 송환을 기다리고 있는 동안 일반인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내부 안전 조사위원회-9.11 이후 설립-가 그녀를 조사할 일이 있으니 이틀간의 특별 비자를 내주라고 이민국에 통보했다. 그 날 12시에 그녀의 추방은 유예되었고, 조사위원회에 참석하기 위해 연장된 비자를 받아들고 그 건물을 나왔다. 정말 이상한 운명의 아이러니였다. - P235

난 미친 것일까? 아마도 그렇다. 하지만 무엇이 날 이렇게 만든 것일까?
대머리독수리는 그 의문에 대해 오랫동안 숙고한 끝에 마침내 그럴듯한 결론을 내렸다. 인간들에게 악의 존재를 분명하게 깨닫게 하기위해, 악에 대한 경종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위대한 범죄자들은 반드시 필요한 존재들이라 생각했다. 질병이 없으면 의사도 없고, 화재 사고가 없으면 소방관도 없고, 싸울 적이 없으면 군인도 없을 테니까.
그래, 오직 악만이 선의 문을 열게 할 수 있다.
대머리독수리는 그런 결론을 내리며 퍽이나 흡족해했다. - P348

"죽음 이후? 당신을 실망시켜 미안하지만 난 아무것도 기억나는 게 없어요."
"말도 안 돼. 당신 말을 믿을 수가 없어요."
"하지만 분명 진실이에요."
"그 세계에서 보낸 10년의 세월에 대해 정말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말인가요?"
"내 머릿속에 그 10년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시간이나 마찬가지예요."
"그럼 죽음이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고, 인지하지도 못하는 거대한 블랙홀인가요??
"아니, 그렇지 않아요. 나에게 그 10년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건 그 세계에 아무것도 없어서도 아니고, 내가 거기에 없었기 때문도 아니에요. 난, 죽음의 사자로 지상에 보내졌지만 죽음의 신비만큼은 온전하게 유지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인간은 살아 있을 때, 사후에 어떻게 될지 결코 알 수 없어요. 마땅히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해요. 난 단지 인간이 그저 우연하게 삶을 살아가는 게 아니라는 것만 알아요." - P383

"자네는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는 것에 감사해야 하네. 만약 어떤 절대적인 힘이 자네의 삶에 개입해 자유의지를 억압하고 행동반경을 제약한다면 어떤 생각이 들겠나?" 소샘은 그 말은 자신에게 아무런 위안도 되지 않는다는 뜻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셰이크는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인간은 자유의지에 따라 최고가 될 수도 있고, 최악이 될 수도 있어. 자유를 많이 가질수록 선택은 더 복잡해지는 게 사실이지. 하지만인간은 그 자유에 대한 책임을 신에게 떠넘겨서는 안 돼." - P416

이런 결정을 내릴 권리가 과연 나에게 있을까요? 난 전혀, 아무것도 몰라요. 하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결국 그것 역시 예정된 운명일테니까. - P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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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인생의 어느 지점에 와 있는 것일까? 이대로 계속 추락할 것인가? 날마다 점점 더 떨어져 내려 마침내 완전히 바닥에 내동댕이쳐질 때까지……
그는 두려웠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자신이 어떻게 생을 마감하게 될지 잘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술을 끊는다고? 하지만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 P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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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목숨을 구한다는 것, 그건 사랑에 빠지는 것과 같아.
그것보다 더 좋은 마약은 없지. 누굴 구하고 나서 한 며칠 동안은, 길을 걸을 때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달라져 보여.
나 자신이 불멸의 존재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하고.
마치 내가 구해낸 게 바로 나 자신이었던 것처럼 말이야.

-마틴 스콜세지의 영화 <비상근무> 중에서 - P27

그 분은 정말 형언하기 힘든 슬픔에 잠겨 있는 것 같았어요.
저는 그 분이 여러 번 이렇게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어요. 에스투 콤사우다데스 데 투.
그녀 : 당신이 그리워‘ 라는 뜻이죠?
그: 맞아요. 거의 그런 뜻이죠. 제가 위로하자 그 분이 이런 말을 해주시더군요. 포르투갈에서는 멀리 떨어져 있는 것에 대한 그리움과 갈망을 ‘사우다드‘라고 표현한답니다. 고향을 떠나 먼 곳에서 살고 있거나 고인이 된 사람들에 대한 진한 애정과 슬픔 같은 것도 사우다드겠지요. 그런데 그 말은 다른 언어로는 뉘앙스까지 정확하게 옮길 수 없다더군요. 그건 설명할 수 없는 영혼의 상태, 모든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순수 그대로의 슬픔, 한 같은 것을 의미한다고 해요. - P67

줄리에트는 자신이 줄리에트 보몽 변호사가 아니듯 현재 누리고 있는 행복 역시 온전하게 자신의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도둑질한 이 순간의 이미지를 끌어 모아, 고독한 저녁마다 결코 싫증나지 않는 오래 된 영화를 보듯 되풀이해 떠올리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단 몇 시간일지라도 짜릿한 행복의 광휘는 이따금씩 삶이 우리에게제공하는 환멸과 권태의 일상을 충분히 견디게 해준다. - P102

비행기는 엄격한 관리규정에 따라 모든 안전점검을 완벽하게 마친 상태였다. 게다가 제작한 지 8년밖에 안 지난 최신기종이었다. 보통 3백 시간 비행 후에 실시되는 체크A, 4천 시간 후에 실시되는 체크C 그리고 마지막으로 2만 4천 시간 비행 후에 실시하는 대점검까지 무사히 마친 비행기였다. 대점검은 6년마다 한 번씩 6주 동안 운항을 중단시키고 기계공과 엔지니어들에게 기체의 철저한 분석과 점검을 맡기는 과정으로 그 비행기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는 결론이 내려진 바 있었다. - P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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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애오."
할멈이 마땅찮다는 표정으로 금손이를 살펴보더니 한마디 했다.
"말랐다이."
누가 봐도 포동포동했다.
"말라서 볼품이 읍슴메. 갖다 버리야지..." - P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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