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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해지는 기분이 들어 - 영화와 요리가 만드는 연결의 순간들
이은선 지음 / arte(아르테) / 2021년 3월
평점 :
‘정성껏’이라는 단어를 좋아한다. 내게 음식과 요리는 일상적인 행위인 동시에 사람과 삶을 한층 더 정성껏 바라보게 하는 대상이었다. 마음 안에 차오르는 길고 내밀한 언어들을 납작하게 접은 채 ‘좋아요’ 하나로 반응을 보이면 그만인 세상에서, 간편한 경험들이 우선하는 세상에서,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고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하는 요리는 확실히 비효율적인 행동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 안에는 감정의 맥락과 소통의 가능성이 존재한다. 단순히 허기를 달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을 취할 때의 마음을 구별하게 한다. 한 그릇의 요리에 담긴 의미는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 (p.9)
무언가를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마다 셰릴이 먹던 차가운 죽이 생각난다. 동시에 내가 마주한 이 상황에서 벗어나 누리게 될 따뜻하고 간편하고 즉각적인 안락 역시 떠올린다. 그럴 때 차가운 죽을 기억하며 상황을 극복한다는 멋있는 얘기를 하면 좋겠지만, 아직까지는 일시적인 안온함에 지는 경우가 더 많다. ‘내가 그렇지 뭐’라며 자책하기도 한다.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는 각자의 절망과 극복 방법과 속도가 있다. 우리가 당장 차가운 죽만 먹으며 고행길을 걸을 수 없지만, 그 길을 걸었던 이들로부터 언젠가 힘이 될 좋은 자극을 받을 수 있다. (p.54)
시간이 바꿔놓는 풍경들이 있다. 우리가 통과하고 있는 이 시기 이후 무엇이 어떻게 바뀔지, 아직은 누구도 정확히 알지 못한다. 억지로 막아 세워졌던 2020년의 시간들이 우리의 몸과 기억에 무엇을 남길지를 생각한다. 타인과 함께 한다는 말에 내포된 위험성을, 경제적 곤궁을, 필수재가 아닌 것들의 허망함을, 무력감과 패배감을 남길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바꾸어볼 수도 있다. 별것 아닌 일상에 깃든 귀함을, 인생을 풍요롭게 만드는 작은 것들의 아름다움을, 타인과의 따스한 연결의 감각을, 잃지 않았다면 결코 몰랐을 것들의 소중함을 알아차리는 경험을 남겼다고. (p.72)
“좋은 영화를 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사랑하는 사람들과 따뜻한 음식을 나누는 테이블··· 그런 순간마다 문득, 착해지는 기분이 들어.” 영화에 대해 쓰고, 말하고, 그리는 사람, 영화 전문기자 이은선이 전하는 영화와 요리에서 발견한 우리의 매일을 지탱하는 순간의 온기를 담은 책 <착해지는 기분이 들어>. 이 책은 영화 속에서 조용히 스쳐 지나간, 혹은 더 자세히 들여다보고 싶었던 음식들에 대한 이야기다. 리틀 포레스트,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패딩턴,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 걸어도 걸어도, 봄날은 간다···. 영화 속 음식은 그냥 등장하지 않는다. 그 안에는 인물의 마음이 존재한다. 몸의 허기뿐 아니라 마음의 허기까지 어루만질 때 더 완벽해지는 한 그릇의 요리. 그래서 사람들은 언제라도 그 순간을 꺼내어 볼 수 있도록 기억 한켠에 고이 담아둔다.
아직까지 내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있는 영화 속 음식은 바로 <올드보이> 속 군만두! 그 당시 파격적이기도 했고, 주인공 오대수로 열연한 최민식 배우님의 연기가 정말 강렬했던 터라 같이 영화를 보았던 친구가 누구였는지, 또 우리가 무엇을 했는지, 그날의 기억이 아직까지도 선명하게 남아있다. 이날 영화가 끝나고 우리가 점심으로 먹었던 음식은 바로 군만두! 영화를 본 후 우리의 머릿속에는 배우 최민식님이 극 중에서 15년 동안 먹었던 그 군만두의 기억이 아주 강렬하게 남았다. 그리하여 그날 점심은 서로 상의할 것도 없이 군만두였다. 충격과 경악의 경계에서 군만두를 먹으면서도 연신 영화 속 이야기가 오고 갔고 우리가 왜 굳이 이 군만두를 먹고 있는지 까르르 웃었던 기억이 선명하다. 저자가 말하고자 했던 게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그 순간 서로 오고 갔던 대화. 그날의 감정.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그 시간의 우리. 한 편의 영화에서 그려지는 인물의 감정선과 그 상황이 현실과 묘하게 맞물려 우리에게 전해지는 위안과 위로, 그리고 그 위로 차곡차곡 쌓여가는 추억들. 삶의 힘겨운 순간 또는 즐거운 순간에 지나간 시간을 추억하며 그 순간을 다시 한번 떠올려봄으로써 자신과 일상에 더해지는 다시 앞으로 나아갈 힘을, 삶을 지탱하게 만드는 따뜻한 마음의 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