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자의 블랙박스를 요청합니다
세웅 지음 / 팩토리나인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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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 작품 『죽은 자의 블랙박스를 요청합니다』는 처음 실시될 때부터 개인 사생활 침해라는 반대에도 불구하고, 시민 안전을 위한 시설물로서 범죄 예방이나 범인 체포에 엄청난 기여를 할 것이라는 'CCTV'가 모티프로 작용했다. 여기에 '100세 시대'의 뒤안길에서 홀로 사는 노인 등 1인 가구의 '고독사'가 급증하는 등 사회 문제로 부각됨으로써 작품 구상의 동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작품의 배경이 된 시점은 근미래이고 장소는 대한민국이다. 가파르게 증가하는 고독사와 의문사 문제로 골치를 앓던 정부는 〈더 블랙(뇌과학연구소)〉와 손잡고 사람의 뇌에 블랙박스를 이식하는 놀라운 기술을 개발한다. 2050년, 전 세계에서 최초로 전 국민의 뇌에 블랙박스를 이식하는 ‘휴먼 블랙박스 프로젝트’가 실시되었다. 

이 프로젝트로 죽은 사람의 마지막 영상을 이용한 수사가 가능해지면서 미제사건 역시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안전을 담보로 감시받는 삶을 선택한 사람들은 더 이상 사생활 침해나 정보 오용의 위험성에 대해 목소리를 내지 않게 되었고, 모두가 머리에 블랙박스를 달고 사는 데 익숙해졌다. 하지만 어느 날 사망자의 마지막 영상을 확인할 수 없는 사건이 발생한다. 현장에 출동한 ‘별난 경찰’ 큰별은 이례적인 상황이 수상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그리고 블랙박스 이식 기술을 개발하고 운영하는 〈더 블랙〉 본사에서 또 다른 사망 사건이 발생하면서 본격적으로 스토리가 전개된다. 소설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평온했던 일요일을 보낸 월요일 새벽 2시. 막 잠자리에 든 은하를 깨운 것은 아빠의 저노하였다. 새벽에 걸려오는 전화는 언제나 불길하기만 하다. 특히 그 전화가 따로 떨어져 사는 부모님에게서 온 것이라면 더욱 그렇다. 

"은하야, 진 이모가 돌아가셨어. 엄마랑 아빠랑 경찰서에 와 있고, 이모 시신은 내일 아침 비행기로 도착할 거야. 아침에 세인병원 장례식장으로 바로 오거라." 

역시 불길한 예감은 틀리는 법이 없다. 아버지의 목소리는 건조했다.(p.7)

앞서 언급한 CCTV는 오늘날 우리가 차량에 달고 다니는 블랙박스를 말한다. 이 기술이 발달돼 사람의 뇌에 이식함으로써 사람들의 시각 정보를 있는 그대로 재생할 수 있는 기술을 말한다. 자신이 자기 죽음의 증인이자 CCTV가 되는 셈이다. 2050년 상용화에 성공함으로써 1밀리미터보다 작은 기계에 한 사람이 평생 접하는 엄청난 양의 정보를 저장할 수 있다. 이로써 경찰은 사망 사건 피해자나 목격자의 블랙박스 영상을 확인할 수 있게 되어 신속한 수사가 가능해졌고, 목격자를 찾지 못해 해결하지 못하는 사건도 점차 사라졌다. 사람들은 안전한 일상과 명확한 죽음을 위해 자신의 정보를 자발적으로 내놓게 되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 문제없는 평화로운 세상. 하지만 과학 기술의 발전은 범죄자들이 이용할 때는 언제나 오히려 인간을 공격하는 흉기로 돌변할 수 있다. 이미 수십 년부터 예고되고 실제 피해를 본 사람들도 당장 눈앞의 삶이 안전하기를 더 희망한다. 이런 사람들의 욕구는 고통의 결과를 수반한다. 

어느 날 이 세계에 미세한 균열이 발생한다. 사망 사건 현장을 찾은 강력반 형사 큰별은 여느 때처럼 〈더 블랙〉 연구소에 블랙박스 영상 추출을 요청한다. 평소라면 10분도 채 걸리지 않을 일이지만, 이날 큰별은 블랙박스 영상을 받지 못했다. 단순 기계 오류이고 사인은 평범한 심장마비라는 답변에 큰별은 꺼림칙한 기분을 떨칠 수 없고, 며칠 후 〈더 블랙〉 본사에서 발생한 사망 사건에서 또 다시 영상을 줄 수 없다는 말을 듣는 순간, 의심은 확신이 되었다. 분명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생각한 큰별은 피해자 윤현태의 주변인을 조사하다가 예전 연인이었던 은하와 만나게 된다. 

자신의 직감을 믿고 사건을 파헤치려는 ‘별난 형사’ 큰별은 옛 연인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자신만의 이야기를 써내려가려는 ‘작가 지망생’ 은하는 함께 자신들만의 조사를 계속해나간다. 직접 발로 뛰며 범인을 추적하는 ‘진짜 경찰’이 되고 싶은 형사 큰별은 옛 연인과 함께 공조한다. 목표는 사건의 전말을 밝히겠다는 의지다. 하지만 두 사람이 진실에 한 걸음씩 다가갈수록 점점 더 믿기 힘든 음모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두 사람이 현태의 여자 친구 양민아를 만나게 되면서 사건은 더욱 빠르게 흘러간다. 큰별과 은하의 고군분투에도 불구하고 양민아 역시 목숨을 잃게 되고, 마침내 두 사람이 베일을 걷어내고 마주하게 된 진실은 세상을 발칵 뒤집을 만한 것이었다. 과연 그들은 사건의 전말을 밝혀내고 억울하게 죽은 피해자들의 원통함을 풀어줄 수 있을까? 사람들의 머리에 이식된 블랙박스는 안전한 유토피아 사회의 출발점일까, 아니면 우리가 알고 있는 소설 속 ‘빅브라더’ 시대의 청사진일까? 소설 속에서는 인간의 삶이 기록되고 통제되는 부작용을 예고했지만 그때는 너무 먼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닥치고 겪어본 2050년 사람들은 '블랙박스 뇌 이식 기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하기도 하다. 저자의 작품 모티프가 된 블랙박스와 고독사 문제는 과학기술이 해결해 줄까? 이 소설은 미스터리 사건을 추적하는 추리소설처럼 보이지만 첨단과학화된 근미래의 사회 비판적 풍자소설에 가깝다. 

과연 2050년 대한민국 사람들은 그들이 희망하는 대로 안전한 사회에서 안락한 삶을 유지할 수 있을까? 이 소설은 현대사회의 문제와 기술의 발전을 흥미롭게 엮어낸 스토리와 흥미진진한 서스펜스가 독자들의 눈길을 사로잡고, 탄탄한 구성으로 독자들에게 읽는 즐거움과 더불어 생각할 거리를 함께 선사한다. 과연 우리 앞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 것인가?

저자 세웅이 그려낸 미래의 모습은 그다지 낯설지는 않다. 현재 대한민국 사회에서는 고령화와 1인 가구 증가가 가속화되고, 이로 인해 여러 가지 사회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그 중 한 가지는 믿을 만한 ‘목격자’와 ‘증거’를 확보하기 어려워 ‘미제사건’이 다수 발생하는 것이다. 지금도 종종 듣게 되는 미제사건이 많다. 전국적으로 10년 이상된 미제 사건도 수백 건이 된다는 말도 들은 적이 있다. CCTV는 카메라를 돌려 찍은 영상을 재생할 수 있는 기구로 유사시에 재생장치를 다시 돌려 그때의 상황을 눈으로 보듯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필요성이 컸다. 그러나 헤드칩의 기술은 상상을 뛰어넘는다. 사람의 생각까지 모두 영상으로 녹화, 재생 가능하다는 말이다. 저자는 정체된 도로 위에서 ‘지금 보고 듣는 것들을 있는 그대로 남겨진 가족들이 볼 수 있다면?’이라는 해괴한 상상에서 이 소설을 구상했다.

어떤 사건의 피해자가 보고 들은 것을 고스란히 확인할 수 있다면 많은 사건 해결에 도움이 될 뿐 아니라 미제 사건은 거의 남지 않을 수도 있다는 추정은 가능하다. 그러나 '생각을 영상으로 재생한다면'이라는 약간의 의문이 든다. 물론 과학 기술의 발달은 인간의 상상력으로부터 시작된다는 말은 믿는다. 그렇다고 가까운 미래에 생각을 영상으로 재생시킨다는 말은 상상 이상의 몽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오늘날 AI 기술의 가공할 만한 발전 속도를 보고 있노라면,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현재의 기술을 잘 모르기 때문에 나온 의문으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근미래의 기술은 아닐 것이다.

소설 속에는 과도한 상상도 있고, 있을 법한 설정도 버무려진다. 저자의 상상을 따라가려면 '불가능한 공상'이라고 생각하는 현실적인 자신의 벽부터 깨야 할 듯하다. 저자는 구상으로만 끝나지 않고 이를 실현시키고 있다. 그 과정과 광경을 함께 보면서도 공상이라는 늪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 독자는 과학기술 지식 부족을 탓해야 한다. 자신의 생각을 고집하다가는 저자의 속도감 있는 소설 전개를 결코 따라갈 수 없을 것 같다. 영화감독 정진은 〈추천평〉에서 "이 작품의 이야기는 우리를 활자경 안으로 끌고 들어간다”고 말했다. 또 심수미 JTBC 기자는 "나를 둘러싼 블랙박스와 CCTV를 보며 안도감과 함께 묘한 두려움을 느낀다. 안전을 담보로, 감시받는 기분. 그래도 ‘안전’이 우선이라고 조금 더 안도해왔다. 하지만, 뇌에 블랙박스를 심어놓는다면?! 정보는 힘이다. 부도덕한 집단이 정보를 독점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우리는 숱한 사례로 확인했다. 작가의 ‘현실적인 상상력’에 단숨에 소설을 완독하며 바랐다. 부디 진실은 ‘별난 경찰’의 편이길."이라는 〈추천평〉을 내놓았다.(책 뒷 부분) 저자 세웅은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넘나드는 흥미로운 설정 아래 기묘한 살인 사건과 이를 해결하려는 사람들의 줄다리기를 흥미진진하게 풀어내고 있다. 읽는 재미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는 이 작품은 미래의 이야기 속에 현실을 투영해 보여준다는 문학의 역할에도 충실하다. 이야기가 끝을 향해 달려갈수록 독자들은 결말에 대한 궁금증을 느끼는 동시에 우리가 직면하게 될 언젠가의 미래 모습을 상상하게 될 것으로 기대된다.

“윤현태 씨의 통신 기록을 자세히 들여다봤어요. 업무상의 연락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전화 통화 외의 문자나 메신저 등의 내용을 하나하나 살펴보니 일반적인 연인들의 대화 내용도 많더군요. 6개월 정도 사귄 사이로 보이고, 사이는 좋았던 것 같아요.”

큰별은 윤현태와 양민아의 관계를 이야기하면서 은하 눈치를 봤다. 은하의 표정이 변하지 않는 것을 확인한 현태는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마지막 통신 기록이 조금 의심스러운데, 양민아 씨가 보고한 내용에 대해서 윤현태 씨가 ‘그냥 모르는 척하라’고 비밀 메시지를 보낸 내용이 있었어요. 만약 윤현태 씨의 죽음에 정말 무언가 있는 것이라면, 모르는 척해야만 하는 무언가가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럼, 양민아 씨도 무언가 알고 있다는 말이네요.”(p.108) - 「공조1」 중에서


소설 작품이니만큼 소설의 줄거리를 미리 이야기하는 것보다 앞의 시작과 전개 부분만 보여주는 것이 독자들의 구미를 더 당기게 할 것으로 생각한다. 결말을 아는 영화는 재미가 덜 하듯이. 특히 사건이 전개되는 과정의 이야기가 좀 더 세밀하게 드러나야 독자들은 눈길을 주니까 더욱 그렇다. 저자 세웅은 앞서 독자가 표현한 대로 '해괴한' 상상을 하게 된 게 교통사고 당한 피해자(유가족)들이 현장에서 보고 들은 것을 그대로 생생하게 재생해 확인할 수 있다면, 사고를 당하는 순간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도 명백하게 알 수 있게 돼 오히려 도움이 되리라는 상상에서 비롯됐음을 밝히고 있다. 또 가까운 친척 두 분이 고독사를 한 불운한 죽음을 알게 되면서 작품의 모티프가 됐다는 점도 밝히고 있다. 저자가 책 뒷 부분 〈작가의 말〉을 통해 쓴 문장으로서 확인된다. "언제나 새로운 기술은 생겨나고, 그 기술은 또 다른 문제점을 낳고, 기술과 문제에 대한 새로운 법이 나오고······. 변증법 적으로 사회는 발전할 것으로 생각하니까. 늘 그래왔던 것처럼."(p.245)


저자 : 세웅(SeUng) 


서강대학교에서 국어국문학과 경영학을 전공하고, 20년간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공연, 전시회, 영상콘텐츠 등의 문화콘텐츠를 기획하는 일을 해오고 있다. 이번에는 자신이 상상한 이야기로 즐거움을 주고자 『죽은 자의 블랙박스를 요청합니다』를 썼다.

인스타그램 @cromx55



<이 리뷰는 컬처블룸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 받아, 직접 읽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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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 하는 일
조지프 엡스타인 지음, 권진희 옮김 / 사람in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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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소설이 하는 일』은 표제어처럼 소설이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한 사유와 탐구의 담론이다. 과연 소설은 우리에게 주는 긍정적 영향은 무엇일까? 일반 소설 독자들은 당연히 '흥미' '재미' 등에 방점을 찍을 것이다. 당연한 일이다. 학문도 아닌 소설이 재미마저 않다면 공책에 까만 활자만 잔뜩 들어 있는 소설책을 읽을 이유가 별로 없을 터다. 학문은 자신이 알고 싶은 분야의 지식을 함양하기 위해 공부하는 것이니 나중에 직업으로 삼아도 이른바 '밥 벌이'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소설은 밥 벌이용으로 선택한다면 아예 잘못 된 선택이다. 소설 책을 많이 읽는다고 누구나 소설가가 되기는 힘들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대문호쯤 되면 몰라도 소설가가 소설만 써서 밥 벌이가 된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다. 

책의 저자 조지프 엡스타인은 첫 페이지에서 미국 제3대 대통령으로 재임한 토머스 제퍼슨이 같은 시대의 너세니얼 버웰에게 보낸 편지글을 인용했다. "좋은 교육에 있어 큰 장애물은 널리 퍼져 있는 소설에 대한 과도한 열정, 그리고 교육적으로 활용되어야 마땅한 그 독서 과정에서 낭비하는 시간이다. 이 독이 마음을 감염시키면 이는 소설의 격조를 파괴하고 건전한 독서에 반항하게 만든다. 소박하고 꾸미지 않은 이성과 사실은 거부된다. 그래서 화려한 것들로 치장하지 않으면 그 어느 것도 주의를 끌 수 없고, 그 어느 것도 성에 차지 않는다. 이 경우 비대해진 상상력, 병약한 판단력과 현실의 모든 일에 대한 혐오감이라는 결과를 낳는다. 하지만 이 쓰레기 덩어리 또한 교훈을 주는 법인데, 허구임에도 불구하고 현실의 세계에서 일어날 법한 몇몇 소설 속 서사는 현실의 이야기를 흥미롭게 만들고 건전한 도덕성을 위한 유용한 수단이 될 수 있다."(p.6)

소설의 유용성을 설명하는 듯한데 너무 '좋은 교육'의 재료로 끌고 들어가 꽤 장황하게 말을 늘어놓는 바람에 독자 개인적으로는 정확한 지적이라고 말하기에는 거리낌이 있다. 오히려 옆 페이지에 쓰인 소설가 D. H. 로렌스의 「소설은 왜 중요한가」(1936)란 제목의 에세이가 훨씬 직접적인 설득력 있어 공감하기 쉽다. 에세이의 한 센텐스가 인용되어 있다. "나는 살아 있는 인간이다. 가능한 한 계속 살아 있는 인간으로 남을 생각이다······ 이러한 이유로 나는 소설가다. 소설가이기 때문에 나는 나 자신이 성인과 과학자, 철학자, 시인보다 위대하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모두 살아 있는 인간의 각기 다른 부분의 훌륭한 대가이지만, 전체적인 완전함을 절대로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p.7)

저자 엡스타인은 이 책에서 "우리는 모두 소설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책장을 덮고 난 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할지라도 소설은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소설을 읽는 이유는 뭘까? 심지어 인생의 다른 시기에 또다시 읽고, 새롭게 감동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는 이 책에서 세르반테스, 제인 오스틴, 레프 톨스토이, 찰스 디킨스,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조지 엘리엇, 로베르트 무질, 윌라 캐더 등 훌륭한 작가들의 작품을 예로 들어가며 우리가 위대한 소설을 읽어야 하는 이유를 상세하게 풀어낸다. 또한 소설이 우리의 세계를 얼마나 크고 웅장하게 만들어내는지 자신만의 언어로 생생하게 밝히고 있다.

엡스타인은 먼저 훌륭한 작가들의 소설을 읽을 때 우리 내면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질까?에 대해 사유한다. 소설 속 등장인물에 공감하고, 이야기에 정서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넘어서서 또 다른 일을 기대할 수 있을까? 『롤리타』의 저자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독자가 소설의 저자와 ‘동일시’ 작업을 거쳐야 한다고 말한다. 즉, 소설가가 왜 이런 문장을 썼는지 의문을 품으라는 것이다. 이를 통해 독자는 소설을 더욱 깊고 명확하게 이해하게 됨으로써 소설가가 누린 ‘창작의 기쁨’을 다시금 누리게 된다고 말한다. 이뿐만 아니다. 인생의 다른 시기에 ‘다시 읽기’를 시도함으로써 소설의 가치는 계속 재평가된다. 이탈리아 소설가 이탈로 칼비노(Italo Calvino)가 고전을 “아무리 읽어도 끝나지 않는 책”이라고 묘사한 것처럼 말이다.(p.21)

이 책 『소설이 하는 일』은 모두 18장(章)으로 이루어져 있다. 1장 「소설은 인간의 내면을 관통한다」, 2장 「다른 나이에 다시 읽는 소설」, 3장 「소설이 독자의 마음에 남기는 것」, 4장 「플롯, 등장인물의 운명에 빠져들다」, 5장 「현실이라는 새를 가두어 놓은 새장」, 6장 「인간 본성을 이해하기 위하여」, 7장 「등장인물만이 아니라 독자도 변한다」, 8장 「사실을 생각으로 바꾸는 것」, 9장 「소설의 스타일이 주는 기쁨을 넘어」, 10장 「 더욱 크고 웅장한 세계」, 11장 「인간 경험의 풍부함에 대한 탐구」, 12장 「상상력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13장 「소설의 적과 인간 존재에 대한 진실」, 14장 「위대한 소설을 거듭 읽어야 하는 이유」, 15장 「다시 읽기를 위한 작품 목록」, 16장 「소설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의 슬픔」, 17장 「진지한 소설은 올바른 질문을 한다」, 18장 「우리는 모두 소설이 필요하다」 등이다.

1장 「소설은 인간의 내면을 관통한다」에서 저자는 이 책의 〈서문〉 성격의 주장을 꺼낸다. 소설의 속성, 기능, 역할을 모두 포함한 말이다. "어떠한 문학 형식도 소설처럼 독자의 정서적 참여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없을 것이다. 동일시라는 개념, 소설의 구성과 행위에 대한 이러한 참여야말로 틀림없이 많은 독자, 특히나 젊은 층이 소설에서 깊은 즐거움을 찾는 이유다. 고유한 매력을 발산하는 소설이라는 장르는 문학적 동일시라는 감정 이상을 선사한다. 타 문학 형식과 달리, 소설은 문학은 물론 다른 어느 분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중요한 종류의 사실을 제공한다. 이 책에서는 바로 이 사실에 대해 관해 이야기해보겠다.(p.16)

2장 「다른 나이에 다시 읽는 소설」에서는 고전 문학 혹은 위대한 작품의 '다시 읽기'에 대한 이야기한다. 흔히 말하는 '재가독성'을 다루는 것. 1978년에 출간된 훌륭한 에세이 「책읽기에 대하여: 야만인의 사고」에서, 당시 노동경제학자로 하버드대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알렉산더 거센크론이 '좋은 책(소설 카테고리도 포함)의 기준을 제시했다고 말한다. 그는 "좋은 책이란 ① 흥미롭고, ② 기억에 남을 만하고, ③ 다시 읽고 싶게하는 책이어야 한다."라고 썼다고 저자는 전한다. 이 문제는 독자 역시 며칠 전 읽었던 『데미안』의 재독 후 남긴 소감에서 언급했었다. 

이 독후감에서 독자는 다음과 같이 썼다. "독자 개인적으로는 정말 오랜만에 『데미안』을 다시 읽었다. 고전문학은 언제 읽어도 감동적이란 사실을 재확인했다. 뿐만 아니라 헤르만 헤세가 자신의 작품 속에서 시대의 요구를 어떻게 수용하고 표현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독자 가슴에 와 닿는 느낌이다. 자신과 세상 사이의 경계에서 흔들리는 이들에게, ‘나를 찾는 여정’을 함께 걸을 것을 권유하는 헤르만 헤세의 목소리가 담긴 듯하다. 더욱이 새로운 현대 감각의 삽화는 작품의 의미를 오히려 반감시킬 수 있다는 독자 개인적인 우려를 말끔히 씻어낸다. 오히려 더 깊은 곳까지 들여다보는 심미안이 생겼다는 묘한 만족감도 준다. 독자들은 『데미안』과 함께 자신의 내면을 새롭게 발견하는 감동적인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으로 독자는 믿는다."

햇수로 정확하게 헤아리지는 못하지만 독자가 『데미안』을 다시 읽는 게 20년은 훌쩍 넘은 것 같다. 청춘 시절에 읽은 것과 중년에 접어들어 읽는 『데미안』의 감동은 전혀 변색되지 않았다. 그때는 주목하지 못했던 단어나 문구들이 이제는 현실적 느낌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청춘을 지나, 사회에서 풍파를 거쳐 이젠 중년에 접어들어도 고전문학의 가치는 시대성을 뛰어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다만 그때 소설의 내용에 감동과 함께 마음과 몸이 따라 움직였다면 지금보다 '훨씬 나은 나'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감이 있어 아쉽기도 했다고 느낌을 적었었다. 

저자는 이 장(章)에서 재가독성은 소설의 가치를 판단하는 데 중요한 기준이 된다고 제시한다. 또 재가독성은 진지한 소설의 복잡성과도 연관되어 있다고 언급한다. 가령 이런 제대로 된 진지한 소설은 같은 책이라도 책을 읽는 나이에 따라 때로 다르게 다가온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젊은 시절에 존 더스패서스의 3부작 『미합중국』(『북위 42』와 『1919』, 『지금』)을 읽은 후에 받은 충격을 절대 잊을 수 없다고 의견을 내놓는다. 비슷한 시기에 읽은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대표작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를 처음 읽었는데, 이 소설 또한 그저 감탄 그 자체였다고 말한다. 저자의 독서 취향에 따라 감동이 크거나 작을 수 있을 것이지만 저자 자신이 이 소설을 학생들에게 가르치려 할 즈음에 다시 읽은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는 이 소설이 완독하기 어려운 책이라는 것과 더불어 책에 등장하는 지적 허세와 반유대주의적인 묘사 부분에서 웃음의 포인트와 불편함을 느끼는 포인트가 이전과 다르다는 점을 깨달았다고 털어놓기도 한다. 저자가 기꺼이 다시 읽기를 한 소설가를 꼽았는데 대부분 우리 독자들도 잘 아는 소설가들이다. 이른바 고전문학이라고 평가되는 작품들을 많이 쓴 작가들 군이다. 톨스토이, 프루스트, 오스틴, 조지 앨리엇, 안톤 체호프, 요제프 로트, 맥스 비어봄, 캐더, 이디스 워튼 등 앞 부분의 작가들이고 뒤에 미국 작가들을 추가하고 있다.

3장 「소설이 독자의 마음에 남기는 것」에서는 소설이 저자의 마음속에 남긴 것은 내 인생을 넓히는 데 지대한 역할을 했다고 강조한다. 『훌륭한 여인들』, 『축복의 한잔』이 어떤 소설인지 지금 이야기해보라면 할 말이 없다는 저자는 도스토옙스키처럼 간질을 앓는 순박한 성격의 주인공이 미시킨 공작이 전부란 말도 한다. 이와 함께 자신이 읽은 훌륭한 소설 중에 플롯을 거의 기억하지 못하는 작품이 훨씬 더 많다고 밝힌다. 저자는 이 말을 하고 싶어서 이 장을 마련한 것이다. "플롯이 잘 기억나지 않는 수많은 소설을 읽었다는 사실을 증명할 구체적인 증거는 없다. 너무나 매력적인 주인공의 삶에 대한 중요한 디테일을 자세하게 기억하지 못하지만 수많은 소설(『백치』는 두 번이나 읽었다)을 읽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는 점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이 마음속에 남긴 것은 저자의 인생을 넓히는 데 지대한 역할을 했다고 말한다. 나폴레옹전쟁에 관한 역사서를 여러 권 읽은 저자는 톨스토이의 천재성이 드러나는 『전쟁과 평화』의 전투 부분을 읽으면서, 사상자 수를 집계한다거나 전략을 짜고 지정학적 중요성을 따져보는 것과 같은 사실적인 역사 기록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설명한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만큼 19세기 말 프랑스를 일컫는 '벨 에포크'(대부분은 이름처럼 아름답지만은 않은 시기였지만)를 잘 묘사한 작품을 없을 것이라고도 밝힌다. 소설을 읽음으로써 얻게 되는 지식(운이 좋으면 지혜로움까지)은 역사나 전기, 과학, 비평, 학문에 관한 책을 읽을 때 얻는 지식과 다르다고 저자는 이 장에서 역설한다. 첫째, 소설에서 얻는 지식은 덜 정확하다. 둘째, 소설 바깥세상에서는 소용이 없다. 최고의 소설이 제공하는 지식은 열거할 수 있는 지식도, 엄격한 시험을 전제할 수 있는 지식도 아니다. 덜 제한적이고 더 넓고 더 깊은 소설의 주제는 인간 존재 그 자체이며, 아주 각양각색으로, 가끔 혼란스러우면서 겸허한 형태를 갖춘다. 훌륭한 소설을 읽는 것은 내가 알고 있는 교육에 관한 최고의 정의와 궤를 같이한다. 이 대목에서 저자는 시인이자 이튼칼리지 지도교사였던 윌리엄 존슨 코리(1823~1892)가 남긴 '교육'의 정의를 인용해 보여준다.

"당신이 훌륭한 학교에 가는('당신이 훌륭한 소설을 읽는'이라고 쓰고 싶다) 이유는 지식을 배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술과 습관을 배우기 위함이다. 주의를 기울이는 습관, 표현의 예술, 새로운 지적인 지위를 순간적으로 성취하는 기술, 타인의 생각 속으로 재빨리 들어가는 기술, 비난과 반박에 복종하는 습관, 점진적인 용어로 찬성이나 반대를 표현하는 기술, 정확성의 미세한 부분을 고려하는 습관, 주어진 시간 내에 할 수 있는 일을 해내는 기술 그리고 취향, 구별, 용기, 냉철한 정신 말이다.(p.32)

내가 생각하기에 톨스토이는 최고의 소설가이자, 아마 모든 시대와 장르를 통틀어서 가장 훌륭한 작가다. 그가 만든 모든 인물은 살아 숨 쉬고, 그가 집필한 모든 소설과 이야기는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해서 그가 만들어낸 인물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지 너무 궁금해서 책을 손에서 놓을 수 없게 만든다. 도입부는 독자를 끌어들이고, 결말은 절대 독자를 실망시키는 법이 없으며, 도입부와 결말 사이에 있는 모든 디테일은 지속해서 독자의 관심을 끈다. 소설 속 지루한 부분(가령 『전쟁과 평화』에 나오는 역사 부분)조차 흥미롭다. 톨스토이의 책을 한번 읽으면 다른 작가의 책을 읽는다는 건 상상할 수 없다.(p.171)


이 책의 원제인 ‘소설, 누구를 위해 필요한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다음과 같다. 우리 모두가 소설을 필요로 한다. 심지어 소설을 읽을 생각이 없는 사람들도 포함해서 우리 모두는 소설이 필요하다. 그리고 전례 없는 산만함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야말로 그 어느 때보다도 소설이 필요할지 모른다.(p.214)


저자 : 조지프 엡스타인(Joseph Epstein)

야망, 우정, 시기, 가십, 이혼 등을 다룬 책 30여 권을 집필했다. 명예 학술 협회인 파이 베타 카파Phi Beta Kappa에서 발행하는 계간지 《아메리칸 스칼러American Scholar》의 편집인으로 활약했으며, 노스웨스턴대학교 영어과에서 30년간 교편을 잡았다. 《뉴요커The New Yorker》, 《코멘터리Commentary》, 《뉴 크라이티리언The New Criterion》, 《타임스 문예 부록Times Literary Supplement》, 《클레어몬트 리뷰 오브 북스Claremont Review of Books》, 《뉴욕 리뷰 오브 북스The New York Review of Books》, 《포에트리Poetry》 등 수많은 잡지에 기고한 바 있다.


역자 : 권진희

영어·프랑스어 번역가. 미국 몬트레이 통번역대학원과 한국외국어대학교 통번역대학원에서 각각 한영과, 한불과 석사 과정을 졸업한 후, 현재 유럽에서 전문 한영불 통번역사로 활동하고 있다. 글의 힘을 믿는다. 해외 저자와 한국 독자 간의 만남에서 소통자 역할을 할 수 있음에 늘 감사하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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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 - 나는 그였고, 그는 나였다
헤르만 헤세 지음, 랭브릿지 옮김 / 리프레시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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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문학은 읽을 때마다 감동의 확장이나 새로운 감동으로 다가선다는 말을 확인할 수 있게 해주는 책이다. 펜 드로잉 삽화가 대작 『데미안』에서 싱클레어의 고뇌와 선과 악에 대한 갈등, 그리고 사랑의 감정을 더욱 생생하게 묘사하는 데 단단히 한몫을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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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 - 나는 그였고, 그는 나였다
헤르만 헤세 지음, 랭브릿지 옮김 / 리프레시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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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은 1919년 출간 당시 유럽의 젊은이들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청소년들에게 영향을 미친 성장소설의 전범(典範)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심한 내적 갈등을 겪는 '청춘'들의 자아찾기 성장소설로서 세계의 모든 나라들이 이 소설을 꼽았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 작품은 단순한 성장 소설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이 소설에는 자아를 찾기 위한 치열한 내적 탐구는 물론, 그 과정에서 겪는 혼란과 깨달음이 담긴 철학적 여정이 담겨 있다. 첫 구절의 철학적인 성찰은 책 속에서 계속 이어진다. 이 작품은 나로부터 시작하여 나를 향하는, 한 존재의 치열한 성장의 기록이란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이처럼 이 작품에는 진정한 자아의 삶에 대한 추구의 과정이 성찰적으로 또 상징적으로 그려져 있다. 이를 통해 저자 헤르만 헤세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은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며 누구나 나름으로 목표를 향하여 노력하는 소중한 존재임을 상기시킨다.

책의 표제어에 나온 '데미안'은 주인공이 아니다. 싱클레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싱클레어가 주인공이다. 싱클레어는 선과 악, 두 세계 사이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나선다. 그 과정에서 만나게 되는 데미안은 단순한 친구 이상의 존재다. "나는 그였고, 그는 나였다"라는 부제가 존재하는 까닭이다. 이 둘은 서로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이자, 각자의 내적 자아를 일깨우는 상징이다. 『데미안』은 인간 내면의 깊이를 탐구하며, 자신만의 길을 찾아가는 여정에서 독자들에게 강력한 울림을 전한다.

이 책 『데미안』은 '특별판'으로 새로운 삽화가 책 곳곳에 한 페이지씩을 차지하며 시각적 아름다움과 함께 싱클레어의 이야기가 더욱 입체적으로 다가온다. 각 장마다 배치된 펜 드로잉 삽화는 싱클레어의 내면적 고뇌와 성장 과정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하며, 독자들에게 그의 감정과 심리 상태를 보다 생생하게 전달한다. 예를 들어, 싱클레어가 처음 크로머와 마주하는 강가의 장면은 긴장과 두려움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소설의 불안한 출발을 시각적으로 강화한 셈이다. 또한, 베아트리체를 그리워하며 참매를 그리는 장면에서는 그가 갈망하는 ‘자아’와 영혼의 ‘고양’이 드러난다. 이런 삽화들은 소설의 상징성과 철학적 주제를 독자들이 보다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돕는다.

『데미안』은 ‘선과 악’, ‘영혼의 성장’, ‘자아 탐구’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인류가 오랜 세월 동안 고민해온 질문들을 던진다. 독자들은 이 책을 읽는 동안, 싱클레어와 함께 내면의 깊숙한 곳을 탐험하며, 자신만의 길을 찾는 과정에서 많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게 될 것이다. 펜 드로잉 삽화들은 이러한 철학적 질문들을 시각적으로 풀어내어, 독자들이 싱클레어의 경험을 좀 더 구체적으로 느낄 수 있도록 해준다. 사실 우리 나라 청소년들도 '청춘'의 시절에 이 책을 많이들 읽는다. 고전문학으로 완성된 헤르만 헤세의 대표작 중 하나로 칭송받는 데 힘입어서 '청소년 권장 도서'에 늘 상위권에 위치해 있어서다.

"나는 그였고, 그는 나였다"라는 부제는 이 작품의 핵심을 꿰뚫는 문구이다. 데미안과 싱클레어는 서로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 각자가 서로의 일부임을 깨닫는 순간을 통해 인간 내면의 복합성과 그 이중성을 완벽하게 구현한다는 문학평론가들의 평가다. 이로써 이 소설은 단순히 한 개인의 성장에 관한 이야기가 아닌, 인간 존재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로 확대된다. 특히, 싱클레어가 세상의 규범과 자신의 내면적 욕망 사이에서 갈등할 때, 독자들은 그 과정이 곧 우리 자신의 내면에서도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투쟁'임을 깨닫게 된다.

삽화가 더해진 이번 『데미안』 특별판은 기존의 텍스트만으로는 느낄 수 없었던 시각적 경험을 제공하면서 인기를 끌고 있다. 소설 속 각 장면의 감정과 분위기를 시각적으로 증폭시키며, 독자들이 싱클레어와 함께 겪는 혼란, 불안, 깨달음의 과정을 더욱 생생하게 표현했기 때문이다. 이는 특히 예술적 감각이 풍부한 요즘의 청소년 독자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길 것으로 기대된다. 『데미안』은 자아 탐구의 고전으로, 시대를 초월한 가치와 의미를 지닌 작품이다. 이번 펜 드로잉 삽화 에디션은 문학적 감동과 시각적 즐거움을 동시에 제공하며, 새로운 시각에서 이 위대한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선사한다고 출판사 측은 강조하고 있다.

독자 개인적으로는 정말 오랜만에 『데미안』을 다시 읽었다. 고전문학은 언제 읽어도 감동적이란 사실을 재확인했다. 뿐만 아니라 헤르만 헤세가 자신의 작품 속에서 시대의 요구를 어떻게 수용하고 표현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독자 가슴에 와 닿는 느낌이다. 자신과 세상 사이의 경계에서 흔들리는 이들에게, ‘나를 찾는 여정’을 함께 걸을 것을 권유하는 헤르만 헤세의 목소리가 담긴 듯하다. 더욱이 새로운 현대 감각의 삽화는 작품의 의미를 오히려 반감시킬 수 있다는 독자 개인적인 우려를 말끔히 씻어낸다. 오히려 더 깊은 곳까지 들여다보는 심미안이 생겼다는 묘한 만족감도 준다. 독자들은 『데미안』과 함께 자신의 내면을 새롭게 발견하는 감동적인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으로 독자는 믿는다. 

햇수로 정확하게 헤아리지는 못하지만 『데미안』을 다시 읽는 게 20년은 훌쩍 넘은 것 같다. 청춘 시절에 읽은 것과 중년에 접어들어 읽는 『데미안』의 감동은 전혀 변색되지 않는다. 그때는 주목하지 못했던 단어나 문구들이 이제는 현실적 느낌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청춘을 지나, 사회에서 풍파를 거쳐 이젠 중년에 접어들어도 고전문학의 가치는 시대성을 뛰어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다만 그때 소설의 내용에 감동과 함께 마음과 몸이 따라 움직였다면 지금보다 '훨씬 나은 나'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감이 있어 아쉽기도 했다. 

이를 테면 『데미안』의 〈서문〉 격인 맨 앞의 글들이 청춘 때 읽었던 출판본에 있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이렇게 철학적이었나 하는 느낌 말이다. 어쩌면 철학을 모를 때 읽었기에 주의 깊게 읽지 않았는지 모르겠지만 이번 판본을 읽을 때는 글자 하나하나와 단어나 문장들이 예사롭지 않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청춘 때 읽었던 『데미안』에는 '새가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는 문장이 있었는지 잘 기억 나지 않는다. 이번에는 중간에 나오는 문장을 강조하기 위해 상징적으로 맨 앞에 따로 처리된 문장 중에 '투쟁'이란 단어가 유난히 커 보인다. 그때는 우리나라가 민주화를 이룩한 시절이라고 평가될 때라 이전의 군부 독재 시절과 달리 '투쟁'이란 단어에 아무 거리감이 없었을 때인데도 말이다. 어쩌면 번역 상의 차이였을 듯하다. 

과정이 엄혹하고 개인적 환경이 힘들수록 작가의 선택은 '알을 깨고 나온다'보다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는 표현이 훨씬 생생하고 치열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원어로 읽은 적이 없고, 어떤 문장을 번역했는지 모르는 입장에서는 번역에 의존해서 읽기 때문에 이런 단어의 선택이 자칫 '왜곡'으로 비쳐질 수 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독자의 기억으로는 군부 독재 시절 '투쟁'이란 단어는 입에 쉽게 올리지 못했다. '투쟁'이란 단어는 공산주의자들이 주로 쓰는 용어라고 어렸을 때부터 배웠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당시 번역 과정에서 투쟁이란 적절한 단어를 쓰지 않고, 그냥 평범하게 '알을 깨고 나온다'고 적지 않았을까 유추해본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상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해야 한다. 새는 신에게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이다."(p.8) 헤세의 이런 문장들은 이번에 읽을 때 청춘이 지난 이후에 읽었던 니체나 도스토옙스키의 목소리도 함께 들리는 것처럼 되살아났다. 『데미안』은 책의 2장(章)에서 다루는 인물이다. '카인' 〈구약성서〉에 나오는 인물이다. 아벨의 형이다. 카인은 농부, 아벨은 목자(牧者)였다. 카인은 농산물을 야훼신에게 바치고 아벨은 가축을 제물로 바쳤는데, 신은 아벨이 바친 제물은 반기고, 카인이 바친 제물은 반기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아우 아벨을 질투하여 죽이고 말았다. 노한 야훼는 그를 저주하여 떠돌아 다니는 신세가 되게 하였다.(〈구약성서〉 참조)

'데미안'은 카인에 대한 사람들의 상식에 의문을 제기하는 인물로 이 책에서 다룬다. 스스로 타락하는 차라투스트라이자 무신론자 이반인 셈이다. 한 문학평론가에 따르면 이들이 금지된 것 너머를 꿈꾸는 까닭은, 헤세식으로 말하자면, 자기 자신에게 돌아가기 위해서다. 마르크스라면 이를 '혁명'이라고, 워쇼스키 형제라면 '빨간 약'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철학에서는 '진리'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살아가면서 진리라는 말을 얼마나 발음할지 모르겠지만, 태어나서 15년 정도 지나면 그 단어가 너무나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이제야 확실한 모습을 드러낸다. 『데미안』 재독의 효과다.

앞서 언급한 대로 『데미안』의 주인공은 싱클레어다. 따스한 가정, 다정한 부모님 아래서 자라며 '선의 세계'만을 알았던 싱클레어는 동네 소년 프란츠 크로머에게 도둑질을 했다는 허풍을 떨면서 '악의 세계' 또한 깨우치게 된다. 어느 날 싱클레어 앞에 나타난 신비한 소년이 '데미안'이다. 데미안은 싱클레어에게 성서에 등장하는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통해 선과 악의 진실에 대해 하나씩 가르치기 시작한다. 내면의 선악 사이에서 고뇌하던 싱클레어는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거리로 나가 금지된 쾌락을 추구하며 타락하기도 한다. 그러나 싱클레어가 베아트리체를 만나면서 어두운 내면을 이겨 낸다. 소설의 후반부에서 싱클레어는 베아트리체의 초상을 그리지만 그 초상화는 어느새 데미안과 닮아 있었다. 데미안에 대한 동경과 강렬한 그리움이 베아트리체에서 데미안을 보게 한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싱클레어는 길에서 데미안과 그의 어머니 에바 부인을 만나고 그 재회 이후 에바 부인이야말로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던 여인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얼마 뒤 전쟁(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그 전쟁에 참전한 데미안과 싱클레어는 야전 병원에 누워 대화를 나눈다. 자신이 필요할 때면 자기 안에 귀를 기울이라는 말을 남긴 데미안은 다음 날 아침 사라져 버리고, 싱클레어는 어느새 데미안과 똑같아진 자신의 모습을 마음속에서 찾아낸다. 


"꼬마 싱클레어, 잘 들어! 나는 떠나야 해. 언젠가 크로머나 다른 누구에게 맞서 네가 나를 다시 필요로 할지 모르지만 그때 나를 부르면, 나는 더 이상 말을 타고 거칠게 오거나 기차를 타고 오지 않을 거야. 그때는 네 안을 들여다보아야 해. 그러면 내가 네 안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거야. 이해하니? 그리고 또 하나! 에바 부인이 말하길, 네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나에게 그녀가 준 키스를 전해 주라고 했어···"

"눈을 감아, 싱클레어!" 

나는 자연스럽게 눈을 감았다. 나는 내 입술 위에 가볍게 키스하는 느낌을 받았다. 그 입술에는 항상 조금의 피가 고여 있었는데, 그 피는 절대 줄어들지 않았다."(p.266)

헤르만 헤세는 이 소설을 통해 개인의 내면적 성장을 넘어, 인간이 마주하는 운명과 영혼의 각성을 다룬다. 싱클레어는 스스로 선택한 길을 통해 점차 자신 안에 숨겨진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게 되고, 마침내 독립된 인간으로서 세상에 맞설 준비를 갖춘다. 이러한 과정은 곧 현대인이 직면하는 자아 정체성과 삶의 목적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과 맞닿아 있다.


내 꿈속의 모습이 현실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마치 기적과 같았다! 그녀와 닮은 여자가 실제로 존재했고, 내 운명의 모습을 지닌 여자가 실제로 존재하다니! 그녀는 어디에 있을까? 어디에? 그녀는 데미안의 어머니였다!(p.214)


저자 :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

1877년 독일 남부 칼프에서 선교사 부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신학교에 입학했으나 기숙사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도망쳐 나왔으며, 서점과 시계 공장에서 일하며 작가로서의 꿈을 키웠다. 첫 시집《낭만적인 노래》가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인정을 받았고, 1904년《페터 카멘친트》가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1906년 자전적 소설《수레바퀴 아래서》를 출간했고, 1919년 필명 ‘에밀 싱클레어’로《데미안》을 출간했다. 가장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한 1920년에는《클링조어의 마지막 여름》《클라인과 바그너》《방랑》《혼란 속으로 향한 시선》을 출간했다. 1946년《유리알 유희》로 노벨문학상과 괴테상을 수상했다. 1962년 8월 9일 세상을 떠날 때까지 전 세계인들에게 사랑받는 소설과 시, 수많은 그림을 남겼고, 평생을 통해 진정한 자유와 행복의 의미를 찾고자 했다.


역자 : 랭브릿지

Bridge of Language, 랭브릿지는 언어의 다리를 연결하자는 모토를 가진 전문 번역그룹으로, 문화와 언어의 장벽을 넘어 글로벌 소통을 지향합니다. 다양한 전문 번역가로 구성되어 원문에 충실하면서도 자연스럽고 읽기에 편안한 번역을 제공합니다. 언어의 다리를 통해 세계 어디서나 자유롭게 소통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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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안부를 묻습니다
상담사 치아(治我) 지음 / FIKA(피카)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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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사회, 열린 민족 등은 수없이 반복해 들었지만 아직 우리 사회에 성(性)은 성(城)의 기능을 충분히고수하고 있다. '개방된 성 문화'란 단어를 대한민국에서 들어본 적이 없다. 일부 전문가들이나 학자들은 유교의 영향으로 단정짓기도 한다. 그러나 독자 개인적 입장에서는 남녀 간의 성 문제는 개방되고 안 되고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몇몇 친구들은 꽉 막힌 유교 의식이 아직도 머릿속에 그대로 남아 있다고 비난의 말도 하지만 독자가 개인적으로 가진 성 윤리는 '개방해서 좋은 것'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 교육'은 개방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우선 남녀의 '성교' 문제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자신의 몸의 기능과 역할, 부위별 작동 원리 등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성 교육을 빙자한 '성 교육'을 반대한다. 독자의 생각이 잘못이라고 말하는 친구들 중에는 나름대로의 '개방'에 대한 논리가 있다. 남녀 관계에서 '성교(sex)'를 빼놓고 뭘 가르친다는 것은 모두 거짓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현재의 성 교육이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성 교육이 성교를 잘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성교를 하지 말라고 가르친다는 주장이다. 

이 책 『밤의 안부를 묻습니다』에서 저자 치아는 '성(性)'은 아직 우리에게 적극적으로 드러내지 못하며, 열정적으로 원할 수 없는 하나의 금기라고 전제한다. 시대가 많이 변했다 해도 여전히 많은 여성들이 자신의 몸이 가진 특성을, 관계의 주도권을, 연인과의 밤을 고민하면서도 부끄러워서 말하지 못하고 고민만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지적은 남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독자는 지금 중년에 접어들었지만 이 책을 읽었다. 호기심 때문이다. 또 요즘 성 교육이란 말 자체가 사회에서 잘 쓰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했다. 한때 '구성애'란 전문 상담가가 '성 교육 전도사'임을 자처하고 젊은 학생들 교육에 많은 열정을 쏟았다. TV 방송사도 프로그램까지 마련해 방영하고 꽤 오랫동안 적지 않은 인기를 끌었던 기억이 있다. 

저자가 이 책을 쓴 이유는 매우 단순하다. "필요하면 말하고, 원하는 건 참지 않고, 요구하면 해주는 게 아니라 그냥 해버리는 주체적 사랑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저자는 이 말을 전제하고 글을 썼고, 독자들도 이 말을 전제하고 읽기를 기대한다. "잠시 길들었을 뿐, 사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주체적이다."

학교에서도, 친구글과의 대화에서도 잘 사용하지 않던 단어들이 YV 프로그램에서 쏟아졌다는 사실이 우선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학교에서의 성 교육도, TV 프로그램도 자주 봤지만 "아직도 모르는 게 많구나" 하는 생각을 이 책을 읽고서야 알게 되었다. 독자는 성 교육도 일부 받았고, 또 관련 책도 조금 읽어봤지만 의학 공부를 하지 않아서인지 여성 몸의 일부가 기능하는 원리나 모양, 크기 등은 아직 모르고 있었다. 이 책을 읽고서야 구체적으로 알게 된 것들이 꽤 많다. 시대가 많이 변했다 해도 여성들은 물론 남성들도 자존심 때문에 연인이나 아내에게 솔직하게 말하지 못하는 고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상담사 치아는 내숭 없이 솔직한 관계에 대해 조언했던 내용에 많은 독자이 호응했다고 한다. 전작 『밤의 숨소리』를 통해서다. 독자는 그 책을 읽지는 못했지만 이 책의 서술을 미루어보아 모든 것을 솔직하게 기술하려는 의지가 높았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이번에는 남녀가 만나는 모든 '관계'에 대해 이전보다 더 솔직하고 과감하게 이야기한다.

이 책 『밤의 안부를 묻습니다』는 현 시대를 살아가는 성인들의 진짜 고민에서부터 시작됐다고 저자는 말한다. 출간 전 성인을 대상으로 남녀 관계에 대해 설문조사를 진행했고, 수천 명이 설문에 응답했다. 이 책은 그 안에서 남녀 구분 없이 성인들이 공통적으로 가지는 고민을 모아 담았다. 사랑, 성, 이별, 관계에 관한 고민은 각자의 고민이라기보다 보편적으로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상황과 사람에 대한 고민이다. 막 시작한 관계에 대한 고민, 지루해진 사랑에 대한 고민, 성관계에 대한 불만에 대한 저자의 솔직하고 유쾌한 조언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자존감을 바탕으로 한 관계 맺음을 알게 되고, 건강한 관계를 배우며, 예기치 못하게 밤의 기쁨까지 맞이할 수 있다.

주체적인 사랑과 관계, 그리고 이별은 우리를 성장시킨다. 연애는 어떻게 해야 할까? 사랑은 무엇일까? 영화 속 영원한 사랑은 존재하는 걸까? 정답은 없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영원한 사랑이나 운명적인 사랑 같은 판타지에서 벗어나 이제는 솔직하게 말하고, 마음껏 사랑하며, 두려움 없이 헤어질 수 있는 주체적인 관계를 시작하는 것이다. 이 책을 통해 남자와 여자, 친구와 연인, 사랑과 이별, 하룻밤 관계와 오래된 연인 등 단순하게 명명된 이름을 넘어 관계의 본질을 깨달으며 마음껏 사랑하고 마음껏 사랑받는 시간을 경험해 보기를 권유한다.

이 책이 가진 강점은 '솔직하게' 말한다는 점이다. 몸이든, 관계든 솔직하게 말해야 적절한 방법을 찾아갈 수 있다. 성관계라서 숨기고, 일반적인 문제라서 드러내는 식의 선별적 문제 진단으로는 결코 답을 찾아갈 수 없다. 그런 상담이라면 도저히 적절한 답을 찾아낼 수 없다는 것이 저자의 장점인 듯하다. 저자는 책의 〈서문〉을 통해 "한국에서는 아주 오랫동안 유교를 숭상해왔고 여성의 외음부는 당연히 감춰야 하는 부끄러운 부위라고 세뇌당해왔다"고 전제하고 "들여다볼 시도조차 하지 않은 사람이 훨씬 더 많을 것"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그러나 "이 고정관념으로 많은 것을 잃었다"며 "나조차 내 몸을 모르는 사람이 되어버렸고 덕분에 내 연인은 더욱더 내 몸을 알 수 없었다"고 지적한다. 내 몸을 잘 알지도 못하는 내 연인이, 내가 행복해하는 방법으로 내 몸을 애무하는 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라는 주장이다.

"에이, 본 적은 없어도 배운 게 있으니 내 몸은 내가 잘 알죠?"라는 내담자가 했을 반문에 저자는 불쑥 "그런가요? 그럼 클리토리스가 발기하면 얼마나 커지는지 알고 있나요? 손가락 한 마디 정도? 엄지손가락 길이 정도?" 이에 더하여 클리토리스가 음경처럼 발기한다는 사실 자체는 알고 있나요? 내 외음부는 어떻게 생겼고, 흥분하면 어떤 색을 띠는지는 알고 있나요? 독자들이 '잘 아는' 건 아마 몸을 세로로 이등분하면 보이는 단면의 구조와 기능 정도일 것이라고 잘라 말한다. 저자는 우리의 성 교육이 해부학적 이미지를 통해 임신, 출산, 성폭력 예방 등이 주목적이었기 때문으로 풀이한다. 잘못된 성 교육이라는 지적이다. 

저자는 진정 행복하고 싶다면 나부터 내 몸을 알아야 하고 그만큼 상대의 몸 역시도 알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래야 상대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고, 그래야 상대도 나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는 말이다. 많은 사람이 이 부분을 무시한 채 무작정 사랑을 시작한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이 경우 사랑하면서도 쉽게 행복해질 수 없는 이유라고 말한다. 이에 더하여 내 몸의 이미지를 사회 기준에 맞춰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는 것도 중요하다고 밝힌다. 타인의 기준을 바탕으로 높아지는 감정은 자존감이 아니라 자신감에 불과하다고 지적한다. 


심지어 우리는 타인을 비난하는 건 미안해하고 조심하면서도 자신을 비판하는 것에는 엄청나게 잔인하고 혹독할 뿐만 아니라 죄책감조차 없습니다. 세상 멋진 걸 가지고도 그걸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바꾸고 싶어 할 만큼 말이죠. 이건 좀 아니지 않나요?(p.8)

이 책은 3장(章)으로 구성돼 있다. 1장 〈단단한 관계를 시작하는 방법〉, 2장 〈자신을 채우며 사랑하는 방법〉, 3장 〈두려움 없이 이별하는 방법〉 등이다. 1장은 「섹스도 관계다」라는 다소 도발적인 세부 항목을 두고 있다. 저자는 '사랑을 시작하기 전에 반드시 외울 것'이란 단서를 곁에 달아놓았다. 한 내담자의 고민이다. 20대 남성으로 1년 정도 사귄 여자친구가 '섹스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상담을 해온 케이스이다. 저자의 첫마디는 '섹스도 관계다'란 제목을 다시 달아놓았다. "섹스는 몸의 관계이기 전에 근본적으로 인간관계의 연장선상에 있다. 섹스의 우리말이 성관계인 것도 이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서로의 낯선 모습을 마주했을 때나 의견 충돌이 있을 때 그 갈등을 원활하게 조율하는 커플일수록 섹스 만족도는 높은 것 역시 이 논리의 방증이다."(p.16~17) 저자는 이어 섹스를 잘한다는 건 단순히 삽입 후에 오랫동안 왕복운동이 가능하다거나 연인을 오르가슴에 도달하게 하는 기가 막힌 기술을 지니고 있다거나 빨리 흥분하고 충분한 양의 애액이 흐른다거나 잘 조여주는 질 근육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고 말한다. 평소 속 깊은 대화를 나누고, 그 덕분에 상대를 나만큼이나 잘 알고, 가능하면 상대의 입장에서 배려하고, 상대 역시 그 노력을 인지하고 있다는 걸 의미한다는 것. 그런 사이라면 당연히 섹스도 행복해진다고 주장이다. 쉽게 표현하자면 섹스를 잘하기 위해서는 '기술'을 배워야 하는 게 아니라 '관계'부터 배워야 한다는 것.

독자가 이 책을 통해 섹스의 일반론만 배운 게 아니다. 실제 관계에서의 차마 물어보지도, 묻지도 못한 애무의 방법도 그 어느 책보다 적나라한 표현으로 세밀한 심리까지 분석해가며 설명하고 있다. 독자는 이미 중년의 나이로 아이까지 낳아서 기르고 있는 독자로서는 여태 이런 기본적인 사실을 몰랐다는 점에서 오히려 부끄러울 정도다. 

2장 〈자신을 채우며 사랑하는 방법〉 가운데 「더 깊이 사랑하게 해주는, 애무의 힘」은 '이제껏 알던 애무는 버리자. 더욱더 진보적인 애무의 세계로'라는 부제답게 노골적이다. 남자친구가 "애무를 이렇게까지 좋아할지 몰랐다"는 상담에서 저자는 묻는다 "여성 여러분, 혹시 섹스할 때마다 남자 친구의 몸을 평균 20~30분씩 애무하나요?" 이 질문에 "그렇다"라고 대답하는 여성은 아마 많지 않을 것이라고 확언한다. 심지어 여자 친구의 몸을 20~30분씩 애무하는 남자도 절반이 채 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유는 다양하다고 덧붙인다. 남자 친구의 애무를 받는 것에만 익숙해서일 수도 있고, 남자 친구의 몸을 구석구석 애무하는 게 부끄럽거나 어색해서일 수도 있으며, 애무는 하고 싶은데 방법을 몰라서일 수도 있고, 괜히 성 경험이 많은 여자로 오해받을까 봐 자제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 밖에도 이 책에는 많은 단어들이 평소 익숙하지 않은 단어들이 있다. 대부분 저자가 지적하는 '섹스의 기술'에 해당하는 단어들이다. 저자가 앞에서 언급했듯이 "섹스는 기술이 아니라 관계"라고 했다. 그렇다면 이런 단어들은 전부 부정적으로 쓰임새를 가졌을 것이라고 짐작하는 것은 저자가 강조하는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실제 읽어보면 이 모든 기술들이 필요하고 때로는 행복의 밑바탕이 될 수도 있다. 모르거나 어색하다고 포기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다만 관계와 사랑이 정립된 후면 비로소 행복의 양탄자 위에 올라 있다는 말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사랑하고 칭찬하고 자랑스러워해야 한다. 그래야 마음껏 사랑하고 거침없이 다가가고 단호하게 이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쌓아 올린 단단한 자존감은 결국 온전한 ‘나’로 만들어준다. 그 누가 붙잡고 흔들어도 흔들리지 않는 나는 나를 더 사랑하게 만들고, 그 사랑을 바탕으로 누군가를 올곧게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준다.

사랑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상대를 위해 내 모든 것을 내줄 수 있는 헌신? 상대의 모든 것을 따뜻하게 감싸줄 수 있는 포용? 밤의 행복을 위한 정열이나 기술? 오랫동안 사랑을 유지할 수 있는 끈기? 저자는 사랑한다면 공감하고, 공감한다면 이해하고, 이해한다면 홀로 서야 한다고 말한다. 관계는 결국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도권을 주고 싶어도 그 결과와 책임은 온전히 자신의 몫이다. 사랑의 관계든, 남녀의 관계든, 성관계든, 스스로 인식하고 이끌어가며 결정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저자가 그리는 사랑은 두 사람의 사랑을 넘어서는 의미를 포함한다. 진심으로 서로의 모든 것을 사랑해주는 것을 넘어 자신을 온전히 사랑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성장하는 사랑을 꿈꾼다. 


“사랑은 소유가 아닙니다. 내가 어떤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그 무엇이라도 가질 수 있다는 뜻이 절대 아닙니다. 나를 만나기 전에 그가 경험했던 삶과 기억뿐만 아니라 현재 그의 몸이나 생각, 행동, 주변 인물 모두 온전히 그 사람의 것입니다.(p.254)


저자 : 치아(治我)


‘치아(治我: 나를 다스린다)’라는 필명에서 알 수 있듯, 행복한 삶을 위한 ‘심리 다스리기, 올바른 대인관계’를 오랜 시간 연구해 왔다. 2006년부터 온·오프라인에서 ‘올바른 대인 관계’와 ‘행복한 성생활’을 주제로 상담사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대인 관계에서 상처받지 않는 법’, ‘건강하게 성생활 하는 법’ 등을 이메일 상담과 ‘토킹클럽’ 집단 상담을 통해 내담자와 나누고 있다. 1996년 고려대학교를 졸업한 뒤 ‘NLP, 심리치료, 상담’ 자격증을 취득하고 관련 기관에서 전문성을 다져왔다. 저서로는 잘못된 관계로 상처받고 방황하는 이들에게 전하는 위로와 해결책을 담아낸 『관계 수업』, 『관계 사전』이 있다.



<본 포스팅은 네이버 카페 문화충전200%의 

서평으로 제공 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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