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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왼손 ㅣ 그리폰 북스 3
어슐러 K. 르 귄 지음, 서정록 옮김 / 시공사 / 2002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지구상에 딱 한 사람만 살고 있다면, 그 사람의 고독의 깊이는 어느정도일까?
외계인을 향한 인류의 갈망은 어찌보면 그런 상황에 처한 사람과 같은 심정에서 나온 것일지도 모른다. 빛의 속도로 10억년을 가도 끝에 닿을 수 없는 광활한 우주. 이 상상조차 못 할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넓은 시공간 안에 지적인 생명체가 인간밖에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가슴 한쪽이 쿵 내려앉을 정도의 고독감을 느끼곤 한다.
어슐러 르 귄은 영미권에서 'SF의 3대 거장' 이라 불리우는 아이작 아시모프와 로버트 하인라인, 아서 클라크 바로 뒤에 위치하는 작가이다. 당대의 SF소설들은 철저한 과학적 지식에 기반한 미래의 세계관을 풀어내는데 집중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어슐러 르 귄은 단지 지구와 지구의 미래 뿐 아닌 완벽한 '외계' 그 자체에 집중했다. 지구와 다른 환경, 다른 모습, 다른 역사를 가진 사회는 어떻게 발전해 왔을지, 그 안에 사는 지성체들은 어떠한 사고방식과 외모를 갖고 있을지에 집중했다. 그녀는 그야말로 놀라운 상상력과 깊이있는 통찰력으로 무척 뛰어난 리얼리티를 보여준다.
이렇듯 어슐러 르 귄은 당시 SF장르를 지배하던 남성들이 만들어낸 패러다임을 과감하게 역행하며 수많은 작품들을 끊임없이 발표했고, 그녀의 작품들이 내포하고 있는 인문학, 사회학적 통찰력은 수많은 독자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결국 그녀의 노력과 재능은 SF는 물론 판타지 장르를 통해서도 가감없이 발휘되며, SF 쪽에서는 '헤인 시리즈' 라 불리는 장편 연작으로, 판타지 쪽에서는 '어스시 시리즈' 라 불리는 장편 연작으로 결실을 맺으며 장르를 초월해 문학사 자체에 깊은 발자국을 남겼다.
그녀는 당시 남성중심 사회에서도 그 누구보다 찬란하게 빛났던 별로써, 작품 전반에 페미니즘적인 성격도 짙게 묻어있다. 그녀의 페미니즘은 남성을 적으로 상정하는 공격적인 성향이 아니라, 남성과 여성의 '다름'을 직시하고, 사회적인 불평등, 부조리함을 인지시킴으로써 진정한 의미의 남녀 평등을 추구했다.
[ "같은 종족이긴 합니다만 그 차이는 매우 크지요. 저는 사람의 일생을 결정하는 가장 큰 요인이 남자로 태어났는지 여자로 태어났는지에서 결정된다고 생각해요.(...)"
"평등은 보편적인 규칙이 아닌가요? 아니면 여자들은 정신적으로 열등한가요?"
"(...)여자들의 지성이 모자란 것은 아닙니다. 몸도 근육질은 아니지만 남자보다 인내력은 강하지요. 그리고 심리적으로도..."
그는 난로의 불꽃을 한동안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머리를 흔들며 말했다.
"하스, 여자에 대해서 도무지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모르겠군요.(...)왠지 여자란 존재가 당신보다 더 외계인처럼 느껴지는군요. 당신은 어쨌든 나와 같은 성이고..."]
p. 299~300. 지구인 겐리와 게센의 원주민인 세렘의 대화.
[어둠의 왼손] 은 1969년에 발표된 작품으로, Sf-판타지 문학상의 양대산맥인 네뷸러와 휴고 상을 동시에 휩쓴 작품이다.
어슐러 르 귄의 대표적인 연작 시리즈물 '헤인 연대기' 에 속하는 작품으로 83개의 행성과 3000개의 국가가 맺고있는 일종의 상호협력기구인 '에큐멘' 에서 지적인 생명체가 살고 있는 행성 '게센' 을 새로 발견하여 일종의 사자로 파견한 '겐리 아이' 라는 인물이 겪는 일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게센은 에큐멘에서 '행성 겨울' 로 불리우는 극한의 자연환경을 갖고 있지만, 지구인과 거의 비슷한 외모를 가진 원주민들이 독창적인 사회체제를 갖고 문명을 이루고 있었다. 이 행성에는 특이하게도 게센인들 외에는 다른 종의 동물이 거의 없었고, 자연 환경상 날짐승이 전혀 없었다. 무엇보다도 게센인들은 양성兩性이었다. 이들은 남성성과 여성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이들에게는 '케머' 라고 불리우는 기간이 주기적으로 찾아오는데, 일종의 임신가능기로써 게센인들은 바로 이 기간동안에만 상대에게 성욕을 느끼게 된다.
에큐멘에 속해있는 인간 종족 가운데서도 양성을 가진 종족은 게센인이 유일했기에, 겐리 아이는 게센의 사회에서 뜻밖의 상황들에 맞닥뜨리게 된다.
이 작품은 타자他者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에 관한 구체적이고도 명확한 이야기인 동시에, 남성과 여성을 차별하는 사회의 부조리와 불합리를 설명해주는 이야기이다. 나아가, 인류의 사회구조와, 문명 그 자체에 '남성'과 '여성'이라는 성별에 따른 역할 구분이 얼마나 근원적인 문제를 유발하는지에 관해 깊이있는 통찰을 보여준다.
작품은 놀라운 스토리 텔링을 통해 게센인들의 삶과 사상을 보여준다.
성욕이 담보되지 않은 사람과 사람간의 우정과 사랑의 미묘한 경계, 지극히 지구인적인 관점에서 동성과 이성을 넘나드는 자유롭고도 미묘한 연인관계, 가족관계, 그리고 역시 그로 인해 파생되는 독특한 정치구조와 국가 구조, 그와 함께 게센인들만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통찰력으로 인해 탄생한 종교 등 경이로운 상상력들이 깊이있는 통찰과 안목을 통해 생물-인문학적인 개연성을 끊임없이 획득해간다.
게센인과 그들의 사회에 관한 이야기도 참으로 흥미로웠지만, '에큐멘' 이라는 범 우주적인 협력기구 또한 매우 인상적이었다.
이들은 행성을 묶어주는 네트워크이지만, 구속하는 시스템이 아니다. 순수하게 행성간의 우호적인 교류를 위해 만들어진 협력기구인 동시에 체제로써 고도로 성숙된 이상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다. 특히 사자를 파견할 때 단 한명이 행성으로 내려간다는 사실도 파격적이고도 놀라웠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한 연락용 위성을 행성 궤도에 띄워놓고, 11명의 선원이 수면대기중인 우주선이 위성궤도에 체류중이지만, 행성에 내려가 동맹임무를 수행하는 사자는 단 한 명. 그것은 상대 문명에 대한 지극한 존중이자 배려로써 에큐멘이 '진정한' 협력기구라는 점을 증명한다. 88개의 행성에 3000개의 국가가 가입해 있는 초 거대 단체이지만, 상대 행성을 굴복시켜 억지로 가입하게 하지 않는 것이다. 진정한 '협력' 이란 그런 것 아니겠는가.
겐리 아이는 자신의 진심. 에큐멘의 진심을 게센인들에게 보여주며 동맹 가입을 설득하려 한다. 그가 타고 내려온 우주선은 아낌없이 게센인들에게 내어주어 분해하게 하고, 가지고 있는 첨단 기술들을 대가없이 나눠주려한다.
사실, 양성인이 등장하는 외계 행성에서 벌어지는 일을 다루는 작품이지만, 이 작품 안에서 가장 이해하기 힘들었던 것은 사실 에큐멘이라는 협력단체였다. 어떠한 이익도 바라지 않으며, 구체적으로 행정적인 업무를 수행하는 기구가 있는 것도 아니다. 에큐멘은 협력단체이며 협력기구이지만 동시에 거대한 체제이고, 88개의 행성과 3000여개의 국가가 공유하고 있는 평화에 대한 거대한 갈망이다. 이런 단체가 정말 가능할까?? 상식적으로 기능적인 면에서 불가능에 가까울터다.
좀 더 생각해보면, 에큐멘에는 이미 충분한 행성들과 충분한 인간들이 있다. 단체 자체가 충분히 성숙될 만큼 성숙되어 있는 상태이다. 무려 88개의 행성이다. 게센과 같은 외딴 행성의 자원이나 인력이 필요하지 않다. 전쟁은 공멸이지만, 교류는 공생이다. 88개의 행성과 3000여개의 국가가 가입되는 동안 분쟁이나 전쟁이 없었을 리 없다. 무수한 전쟁과 숱한 희생 속에서 당연한 진리를 깨우쳤을 것이고, 그로 인해 생겨난 여러가지 체계가 성숙될 만큼 성숙된 협력체계가 바로 '에큐멘' 인 것이다.이런 맥락에서 '에큐멘' 은 어슐러 르귄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성숙한 형태의 협력기구이며, 가장 갈망하는 협력체계이자 평화에 대한 갈망이 구현된 것으로 '헤인 시리즈' 전체를 관통하는 어슐러 르귄의 희망의 상징으로 볼 수 있다.
에큐멘의 입장에서 지적인 생명체들이 살고 있는 외딴 게센 행성은 고독하고 외로운 존재로써 빨리 이 친구를 우리 무리 안에 편입시켜서, 수많은 다른 친구들이 있음을 알려주고 싶은 것이다. 외롭지 않게 해주고 싶은 것이다.
"당신네 종족은 이 세계에서 소름 끼칠 만큼 외로운 동물입니다. 다른 포유동물도 없고 양성을 가진 다른 동물도 없으니까요. 심지어 애완동물로 기를 만한 정도의 지능을 가진 동물도 없지요(...)철학적으로, 정서적으로 보면 당신들은 너무도 고독하고 적의에 찬 세계 속에 살고 있어요 "
p. 297.
[어둠의 왼손]은 여러번 읽은 책이다.
어슐러 르귄의 소설은 너무나 다양한 안목과 놀라운 통찰력들이 깃들어 있어서 한두번 읽어서는 그 맛을 충분히 만끽할 수 없다.
처음 읽었을 때는 단순히 양성인 게센인들이 신기할 따름이었지만, 두번 읽을땐 게센인들이 가지고 있는 사회 구조의 논리적 개연성, 게센의 자연환경으로 인한 게센인의 생활 양식과 그로 인해 파생되는 사회 구조, 정치구조, 그리고 중간중간 들어있는 게센의 전설과 종교들 등 매 번 놀랍고 새로운 발상들이 나를 깜짝깜짝 놀라게 만든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이 이야기는 지극한 외로움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당신은 혼자이면서도 실은 혼자가 아니군요. 아마도 당신은 우리가 이원론에 사로잡혀 있는 것 못지않게 전체성에 빠져 있는 것 같아요."
"우리 역시 이원론자입니다. 이원론은 본질적인 것이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나' 와 '타자' 가 있는 한 말입니다."
"나와 당신... 그렇군요. 그 편이 성性보다는 더 넓은 범주이겠군요."
p.298~299
인간은 스스로를 자각하는 존재이다.
이 말은 인간은 누구나 본질적으로 외로운 존재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작품의 제목인 [어둠의 왼손]은 작품 내에 등장하는 게센인의 노래에서 유래한다.
"빛은 어둠의 왼손
그리고 어둠은 빛의 오른손
둘은 하나, 삶과 죽음은
케머 연인처럼
함께 누워 있다
마주 잡은 두 손처럼
목적과 과정처럼"
p.298
즉, 이 책의 제목인 '빛' 인 것이다.
어둠과 빛, 삶과 죽음, 목적과 과정.
남자와 여자, 그리고, 나와 당신.
어쩌면 인류와 지구, 외로움마저도.
함께 누워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