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단식 일기 - 소비를 끊었다. 삶이 가벼워졌다. 자기만의 방
서박하 지음 / 휴머니스트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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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시절 집에 '천리안'이 설치됐다. '천리안'은 PC통신 서비스다. 인터넷을 연결하면 집전화가 안되는 통에 한 시간은 고사하고 몇 분 겨우 할 수 있었다.

'야후'에 접속하면 상단부터 천천히 페이지가 내려오기 시작했다. 모든 페이지가 전부 로드되면 검색창에 궁금한 내용을 넣어 알아 볼 수 있었다. 당시 내가 제일 처음 넣었던 단어는 무엇이었을까.

'Korean GDP'

당시 나이가 초중등 학생 때 였다. 시기가 지났고 ADSL이 등장했다. 지금은 볼 수 없는 당대 인기 가수가 광고했다.

'따라올테면 따라와바'

기술적으로 모르겠지만 한참 진화된 버전이라고 했다. 속도는 엄청나게 빨라졌다. 윈도우 오른쪽 하단에 'ADSL'이라는 글자가 색깔로 바뀌면 연결되었다. 인터넷은 저렴했다. 당시 친구들은 엔씨소프트 사의 '리니지'라는 게임을 했다. 그때도 내가 검색했던 키워드가 있었다.

'수요공급 법칙'

수요공급 법칙은 당시 나에게 충격적일 만큼 매력적이었다. 비가시적인 인간의 탐욕과 심리를 정확히 '숫자화'하여 그것을 '수학의 범주'로 가져오게 했다. 너무 명료하다. 팔고 싶은 사람이 꾸준히 가격을 내리고, 사고 싶은 사람은 꾸준히 가격을 올리다보면 어느 접점에서 딱 맞아 떨어지는데, 그게 가격 형성 지점이라는 것이다.

이로써 '추상적인 개념'으로만 존재하던 '가치'가 '수치'로 정량화 됐다. 모든 것의 가치는 그렇게 정해질 법 했다. 누군가가 머리에 '꿀밤'을 쥐어 박으면 그것의 가치는 얼마인가. 모른다. 다만 공급에 맞는 수요을 하나씩 던져보면 가치는 나온다.

백원이면 꿀밤을 맞겠는가.

천원이라면 맞겠는가.

만원이라면 맞겠는가.

이렇게 무작위로 숫자를 올리다가 꽤 합리적인 심리적 마지노선을 넘어서면 그 댓가를 받고 꿀밤을 맞는다. 꿀밤의 가치가 정량화 됐다.

이런 명료한 법칙은 '주식시장'을 만들고 '부동산 시장'을 만들었다. 아직 출항하지 않는 '무역선'의 미래가치에 투자하는 사람들이 생겼고 미래의 기대가치에 맞는 가격이 형성됐다. 아직 개발되지 않은 땅을 저렴하게 구매했다가 구매자가 구매하고 싶은 욕심이 생기는 적정한 시점에 판매하는 부동산 투자도 만들어졌다.

애덤 스미스는 평생 자신을 '철학가'로 믿고 살았다. '돈'하면 떠오르는 그를 왜 '철학가'라고 부르는지 경제학을 깊게 공부한 사람들은 안다. 보이지 않는 손은 왜 보이지 않았는지 그 표현 또한 철학적이다.

친구들은 실제로는 존재하지도 않는 '검'을 현금을 주고 샀다. 어른들은 '사이버상'으로만 존재하는 '자산'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원리는 단순하다. 사고 싶은 사람과 팔고 싶은 사람의 욕망, 최적점에 가격이 형성되고 그것으로 가치는 정해진다.

비트코인 하나의 가치가 벤츠 자동차 한 대와 버금가는 이유는 단순하다. 더 사고 싶은 사람이 있고 덜 팔고 싶은 사람이 만들어낸 '가치'다. 경제는 나에게 그런 의미였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공부하게 되는 '탐구놀이 대상' 같은 것이다. 나중에와서는 대부분의 어른들이 여기에 목숨을 걸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순수 탐구 대상이 실재를 변화할 수단이었다. 가격이 형성되는 재미난 과정을 시켜보는 일은 흥미로웠다. 돈 한 푼 들어가 있지 않고 출렁이는 그래프를 보며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꽤 세속적인 것에 관심이 있다고 여길 수 있겠지만 집단의 욕망이 출렁거리는 것을 눈으로 보는 것은 '부자가 되고 싶다'는 욕망과 별개의 문제였다.

'탈레스'라는 철학가가 철학의 무능을 비꼬는 사람들을 위해, 막대한 돈을 벌었던 것처럼 '혹시' 놀이로 사용하던 걸, 무기로 사용해도 좋지 않을까. 그러한 생각이 들었다. 정말 개인적인 호기심으로 해외에서 '경영 경제'를 공부했다.

그것은 역시 '돈'과 연관있지만, '돈'에 대한 내용은 아니다. 그것은 '현상'을 연구하는 '사회과학'이었다.

학문으로 접근하기에 경제는 흥미로운 것 투성이다. 다만 세속적인 의미의 '돈'은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돈'은 '라이프스타일'이고 '절제'나 '습관' 같은 것이다. 학문이 아니라 '생활'에서의 돈은 그렇다. 머리로 아는 만큼이 아니라 몸과 마음이 작동대로 나타났다.

다이어트 이론에 대해서 빠삭한 것과 실제로 늘씬한 것과는 별개의 문제다. 그것은 이론이 아니라 '삶'의 방식의 문제다. 이론은 암기하거나 이해하거나 익혀 두거나 단박에 깨달아도 괜찮지만 '삶'의 방식은 지루하게 쌓여야하고 인내해야하고 성찰해야 한다.

모든 것이 그렇듯 이것도 그렇다. 다이어트를 하면 얼마 이후 돌아오는 '요요현상'처럼 출렁이며 방향을 진행하는 사이클이 존재했다. 한 번 출렁일 때, 그 탄력에 저항이 없으면 다시 원상태로 돌아오기도 한다. 그것은 '살'이 아니라 인간의 '인내력'과 같은 '추상적인 것' 때문이다.

공부, 다이어트, 돈.

이들은 모두 하루 아침이 아니라 쌓이는 오늘의 연속에서 발생한다. 보통 습관의 개선이 가장 중요하며 그것은 머리로 아는 바와 다르게 몸으로 익혀야 한다. 몸은 속도가 느리다. 머리가 단번에 깨달아도 몸은 최소한 예순 여섯 번 정도 같은 행동을 반복해야 깨닫는다. 검소하게, 단순하게, 겸손하게.

손웅정 작가의 책을 읽고 겸손과 검소, 단순함 등에 대해 배웠다. 너무 인상이 깊었던지 비슷한 책을 몇 권이나 샀고 읽고 있는 중이다. 신체, 정신, 생활에서 군살을 덜어내고 본질만 남기자. 그게 2024년 가장 크게 깨달은 것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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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리는 즐거움 - 7:5:1 정리 법칙으로 일상이 행복해지는 기술
야마시타 히데코 지음, 박선형 옮김 / 생각정거장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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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는 단어를 알게 됐다. 단샤리(断捨離), '끊을 단, 버릴 사, 떠날 이'

끊고 버리고 떠난다.

일본어 발음 표기로 읽었지만, 단사리(断捨離)는 우리말로 표기해도 무방하다. 최근 손웅정 작가의 글을 보고 깊은 인사이트를 얻었다. 집에 붙어 있는 군살을 모두 덜어내기로 했다.

예전 '유목민'에 대한 글을 쓴 적 있다. '유대인의 하루는 저녁 6시에 시작된다'에서도 언급했다. 어째서 변방 유목민들이 난데없이 세계무대의 주역이 되는지에 관한 내용이다.

어찌 역사의 흐름을 하나의 키워드로만 설명할 수 있겠느냐만, 언급될 수 있는 것 것 중 하나는 '본질'을 꿰뚫는 능력이다.

농경민족에 비해 유목민족은 본질을 꿰뚫는 능력이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은 언제나 떠나야 했고, 짐을 최소화 해야 했으며 무엇을 버릴지 보다 무엇을 남겨야 할지 고민하는 민족이었다.

수양제가 고구려를 침공할 때 300만 대군을 이끌고 출병했다. 300만이 얼마나 황당한 숫자인가하면 현재 몽골에 모든 인구를 다 합쳐봐야 350만이다. 이 숫자가 모두 전쟁에 동원됐다. 수양제가 고구려 침공에 동원한 병력 중 전투병을 보급지원병은 200만이다.

200만.

강원도 전체 인구가 150만이다. 농업국가는 전쟁을 치루기 위해 '전투력'보다 '보급능력'이 뛰어나야 한다. 군살을 잔뜩 달고 달리는 꼴이다. 몽고가 세계를 제패하던 시기, 그들의 무기나 보급은 굉장히 단촐했다. 그들은 말과 말에 실을 수 있는 간단한 것만 챙기고 대륙을 누볐다.

기동력은 그들의 최고 무기였다. '속도'와 '기동력'하면 1000년 전 만큼이나 지금도 중요하지 않은가. 엉덩이 무거운 군살덩어리가 재빠르게 포지션을 변경하며 유유리한 고지를 점령하는 것은 쉽지 않다.

잘못됐다 싶으면 재빨리 번복하고, 맞다 싶으면 망설임 없이 달려 들어야 한다. 그것인 '초개인화시대'에 '개인'의 특장점이다.

만화작가이자, 유튜버인 '침착맨' 이병건 님이 한 말 중 아주 핵심을 관통하는 말이 있다.

'대충 견적보다가 각 나오면 미처라'

그게 다윗이 골리앗을 이기는 방법이다. 이런 기동력을 갖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가벼워야 한다. 끊고 버리고 떠나는 것은 무정하게 낭비하고 파괴하라는 말이 아니다. 가벼워지라는 의미다. 어떤 의미에서 '디톡스'를 닮았다.

디톡스는 '해독'을 말한다. 쌓여 있는 독소를 내보내지 않고는 정화되지 않는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경제적으로'

본질만 남기고 모두 덜어내야 한다. 군살을 덜어내고, 발목을 잡고 있는 비생산적인 시간낭비를 덜어내고, 얽매여 있는 다양한 관계에서 떨어져 나와야 한다.

집안을 완전히 들어 엎었다. 버릴 것 하나도 없다고 여겼다. 다만 버릴 것은 엄청나게 많았다. 개중 쓸만한 것도 있었다. 그럼에도 덜어냈다. 쓸만하다는 것은 '그것'의 가치를 말할 뿐이지, 나와의 관계에서 형성된 '의미'는 아니다.

지금 당장 불필요하다면 그것은 '쓸데없는 것'이다. 쓰레기의 어원은 '쓰임이 없다'에서 시작했다. 비록 그것이 황금이라도 쓰임이 없다면 그것은 쓰레기다. 영어에서 waste 또한 비슷하다. 이는 본래 '쓸모 없다'라는 어원을 갖고 있다. 동서양은 모두 쓸모 없는 것에 '쓰레기'라는 명사를 만들어썼다.

'언젠가 쓰이겠지'

우리가 버리지 못하는 이유다. 다만 언젠가 쓰인다는 말은 현재 자체는 쓰임이 없다는 말과 같다. 쓰임이 없는 것은 쓰레기다. 실제로 꽤 멀쩡해 보이는 대부분의 것도 중고로 팔거나 쓰레기로 버렸다. 버리고 분명해진 것이 있다. 무엇이 남았는지 훤해 졌다.

나는 20대 초반부터 30대까지 '재고관리'를 업으로 삼았다. '창고'에 재고가 쌓이면 그 회사는 반드시 망한다. 그것은 철칙이다. 직원이 일하지 않는 시간이 재고로 쌓이고 창고에서 팔리지 않는 악성재고가 쌓이고 관리자가 불필요한 에너지와 시간을 재고로 쌓으면 반드시 그 회사는 망한다.

'재고를 쌓지 말자'

그것은 20대 초반 한참 창업 후 성장가도를 달리던 회사의 철칙이었다. 그 회사의 모토에 완전히 스며들었다. 물건은 들어오자마자 무지막지하게 분출했으며, 그것이 창고에 쌓이게 될 것 같으면 손해를 무릅쓰고 털어내야 했다.

흔히 마트에서 하는 '원 플러스 원', '특가 행사'는 '고객 사은이벤트'가 아니라, 재고 순환, 재고털이다. 그것은 마케팅보다 재고관리에 가깝다.

내가 관리하던 물건은 만 가지가 넘었다. 그러나 들어오는 즉시 분출하고 싹 정리해 버리는 일을 반복하다 보면 창고는 계속해서 텅텅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매장'에 무엇을 진열하느냐,가 아니라 창고에서 무엇을 덜어내느냐가 소매 사업의 성패였다.

가만 돌이켜보니, 나의 삶 또한 한참을 그랬다. 그러다 악성재고가 하나 둘 쌓였다. 점차 관리되지 않는 재고는 저도 모르게 쌓인다. 의식하지 못하게 쌓이다 보면 어느새 그것에 짓눌린다.

모두 분출해 버려야 한다. 들어오면 써버려야 한다. 현금이 들어오면 현금으로 두는 것이 아니라 자산으로 사용하던 기부를 하던 고이지 않도록 해야 한다. 고이면 썩는다. 이것은 진리다. 결과적으로 20대 초반 내가 하던 업무는 꾸준하게 덜어내는 일이었다. 덜어내다보면 이상하게 그 규모는 점차 커진다.

몸은 그것을 기억했다. 몽땅 덜어내고 분출하기를 반복하다보면 어느새 내가 돌리는 파이가 점차 커진다. 고이지 않고 돌고돌고 나를 스치고 돈다. 쌓는 것이 아니라 크게 돌려야 한다. 그게 '무소유'하면서 '크게 소유'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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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속 노부인이 던진 네 가지 인생 질문
테사 란다우 지음, 송경은 옮김 / arte(아르테)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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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시트콤 '프렌즈'에 다음과 같은 대사가 나온다.

"Really, Really you want? Then that's okay."

피비의 대사다. 그냥 별의미 없이 지나간다. 배경으로 약간의 웃는 소리가 들릴 뿐이다. 특별한 설명도 없다.

앞뒤 상황을 말하면 이렇다. 친구인 '조이'는 연기 수업을 진행한다.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에게 복서 배역의 오디션 기회가 온다. '조이'는 정작 자신이 그 배역을 맡고 싶어 한다. 욕심에 '조이'는 학생에게 '동성애자 복서' 역할을 지시한다. 학생을 떨어뜨리고 싶은 마음으로 지시한 내용이다.

이때, 자신을 자책하던 '조이'에게 친구 '피비'가 말한다.

“If you really really wanted it, then it’s okay!

"진짜 진짜, 원했으면 됐어, 괜찮아."

정황상 '괜찮다'라고 말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이 상황에서 친구, 피비는 말한다. '진짜 진짜, 원했으면 됐어, 괜찮아."

괜찮다라는 '위로'를 끄집어내는 전개 방식이 너무나 단순 명료하다.

진짜 진짜, 원했으면 괜찮다니...

스치고 지나가는 그 장면이 왜 그렇게 인상적이었는지, 영상을 본 지, 십수년이 지났지만 그 장면이 계속 머리에 남았다. 가만히 물어보자. 어떤 논리와 책임, 의무를 배제하고 '정말 정말, 그것을 원하는가' 그것은 가슴이 시키는 일인가, 혹은 머리에서 결정한 내용인가.

주인공는 일상을 피해 휴식을 취한다. 도중 숲속 노부인을 만난다. 노부인은 네가지 인생 질문을 한다. 완전히 소진되어 번아웃 된 주인공에게 던져진 질문은 이렇다.

'정말 내가 원한 것인가.'

'정말 그렇게 중요한가.'

'정말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1년 후에 죽는다는 사실을 알면 정말 지금처럼 계속 살고 싶은가'

네 가지 질문에 공통점은 '정말 그러한가'하는 물음이다. 가슴과 다른 해답을 가지고 있는가. 단순하다. 내린 결정이 '정말' 그러한가, 하고 되묻는다. 단 한번의 되물음으로 우리는 제길을 찾는다. 선택은 대체로 '이성'을 따를 때 합리적이다.

그러나 어떻게 사람이 '합리적인 선택'만 하고 살겠는가. 때로는 합리적이지 않아도 '선택'하고 싶은 순간이 있다.

우리의 인생을 채워가는 '합리적인 선택'은 점점 비중을 늘리다가, 어느 순간 맞지 않는 옷을 벗어 던지듯 던져 진다. 즉, 어차피 이성적인 판단으로 한참을 진행하다가 되돌아 올 것이라면 처음부터 비이성적인 판단으로 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 사회가 정형화 되면서 합리적인 판단은 '해답'처럼 되어간다. 사회가 만들어낸 정답은 마음과 반대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합리성'에 따라 계속해서 진행된다. 그렇게 발생하는 것이 '인지부조화'다. 우리 삶에 '진심'이 사라지고 '합리성'만 남는 경우다.

어린이의 선택은 꽤 진실하다. 별것 아닌 것에도 골똘한다. 모든 선택을 처음 내려보는 것이며 그 본질에 대해 신중히 접근한다. 다만 어른들의 선택은 '진실하지 못하다.' 어른들은 과거에 대략적인 선택을 내린 바가 있으며 그 데이터를 근거로 대체적인 '합리적 판단'을 내린다. 즉, 진실로 자신의 마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데이터에 따른 '득실'을 따져 들게 된다. 고로 우리의 판단은 거의 자동적이다. 우리는 선택하길 싫어한다. 골똘해 하지 않기 위해, 어떤 순간에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하는지 결정 지어 놓는다.

'짜장과 짬뽕' 중 어떤 것을 골라야 하는지,

'파랑과 빨강'중 어떤 옷을 입어야 하는지,

'오른쪽과 왼쪽' 중 어떤 방향을 선택해야 하는지,

대체적인 가이드라인이 정해져 있고, 과거에 만든 가이드라인에 따라 그저 움직일 뿐이다. 우리는 거의 고민하지 않는다.

선택이라는 건 굉장한 특권이다. 다만 어떤 경우에는 피로감으로 쌓인다. 선택은 '자유'라고 할 수도 있다.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지 않을까. 근현대사는 자유를 위한 투쟁이기도 하다. 고로 선택을 제한하는 것은 '억압'이나 '억제'로 보인다. 부정적인 단어다. 그렇다면 선택이 제한된다는 것은 꼭 나쁜 것일까. 그렇지 않다. 때로 선택은 '피로도'를 쌓게하고 스트레스를 유발하기도 한다.

'선택 피로도'가 쌓이면 스트레스가 극에 달한다. 아침부터 어떤 옷을 입을지, 어떤 음식을 먹을지, 어떤 일을 할지 정해지지 않은 이들이 있다. 이들은 '선택'에 대한 '자유도'가 높다. 다만 그만큼 '선택 피로도'도 함께 높아진다.

'페이스북'의 창업자, 마크 저커버그는 '선택피로'에 관한 말을 했다. 그는 일상에서 반복되는 선택의 수를 줄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겼다. 사람은 너무 많은 선택을 할 때 피로를 느낀다. 이런 피로는 나중에 있을 중요한 문제에 제대로 된 판단을 하지 못한다는 의미다.

왜 항상 회색 티셔츠만 입느냐,라는 질문에 그는 이와 같이 답했다.

"나는 가능한 한 적은 결정을 내립니다. 내 삶을 단순하게 유지하려고 노력합니다. 같은 옷을 여러 벌 가지고 있어요. 매일 아침 무슨 옷을 입을지 결정하는데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습니다."

중요한 선택을 위해 '선택'을 제어한다. 우리에게는 유한한 에너지가 있다. 한정된 에너지를 가지고 생각하고 선택한다. 고로 더 좋은 선택을 위해, '선택'을 줄이는 것은 필수불가결하다.

에리히 프롬은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이렇게 말했다.

"인간은 자유로부터 도피하고 싶어 한다. 자유란 필연적으로 불안과 고독을 동반한다. 이것이 사람들이 지배받고 복종하는 것을 통해 도피하고 싶어하는 이유다."

생각보다 우리는 '자유'보다 '복종'을 택한다. 주체적인 의지를 갖고 행하는 것보다 정해준데로 움직이는 일을 선호한다. 시키는 일을 하는 것이 정신적 에너지를 덜 소모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는 이미 내려진 해답대로 살아간다. 그것이 편하고 쉽고 빠르기 때문이다. 위험 부담도 적다. 그러나 그러다보니 우리는 필연적으로 '인지부조화'를 만나게 된다. 그러면 되물어야 한다.

“you really really want?

정말 정말 원하는가?

Then that's okay.

그러면 괜찮다.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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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니스의 상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62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최종철 옮김 / 민음사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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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바사니오'의 대사다.

"나는 학창 시절, 화살 하나를 잃게 되면 그것을 찾으려고 꼭 같은 방향으로 다시 쏘았네."

실수에 대처하는 자세.

누군가는 잃어버린 화살에 좌절하고 잃어버릴 화살에 두려움을 느낀다. 그러나 좌절과 두려움은 과거와 미래, 둘 다에 어떤 영향도 끼치지 않는다. 단지 행동하지 않는 오늘에 영향을 끼칠 뿐이다. 실수에 대한 능동적 대처는 중요하다.

첫째,

받아 들인다.

인정한다.

수용한다.

누구나 실수할 수 있고 잘못 판단할 수 있으며 실패할 수 있다.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다시 사용할 두 번 째 화살은 그 두려움에 과감하게 당겨질 수 없다.

잃은 화살을 '담담'히 받아드릴 자신감, 다음 화살을 거침없이 사용하는 행동력이 그것이다. 과거에 대한 능동적인 대처가 중요하다.

몇 번의 큰 실수를 했다. 실수라기도 실패에 가깝다. 사람은 실수하지 않고도 실패할 수 있다. 내가 그렇다. 나는 실수하지 않았다. 그러나 실패했다. 그것이 잘못됐다는 판단은 활이 내 손을 떠났을 때는 알지 못했다. 그것이 나아가는 방향을 공포에 떨며 바라봤다. 잘못된 방향으로 날아가는 화살을 보며 공포에 떨었다.

매몰비용의 오류, 이미 나아간 진행 방향을 그대로 유지했다. 그것은 화살 뿐 아니라, 화살을 바라보는 나의 감정도 마찬가지다. 이미 사용된 감정에 '본전 가치'를 찾았고 다시 뒤로 무르기엔 지나치게 나갔다.

일단 진행하고 '실패'라는 끝을 알고 달려갔다. 그리고 그 끝이 닿는 극점에서 공포의 극한을 보았다. 무수하게 쪼개지는 극한의 극한. '적분값'은 내가 흘린 눈물과 쏟은 시간, 그리고 모든 감정의 총합이었다. 단순한 실패나 성공을 넘어, 내가 걸었던 모든 발자취와 그과정에서 겪은 모든 경험의 집합체였다. 그것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두 눈으로 지켜봤고 그 끝을 알고 그 끝을 경험했다.

매몰비용의 오류를 범하면서도 나는 그것이 단순히 비합리적인 집착이 아니라고 여겼다. 끝에 나를 기다리던 '실패'가 '실수'가 아니라 어쩌면 내가 가고저 했던 '성공'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결국 나는 실수로 실패를 한 것이 아니라, 실패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그 적분값 만큼을 도돌이표로 돌려 없애는데는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바사니오'의 두 번째 화살처럼 즉각적으로 능동적인 대처를 했으면 어땠을까. 두려움에 아껴둔 두 번째 화살은 한참이나 지나도록 사용하지 못했다. 나의 시간과 노력은 첫번째 화살을 찾느라 소모됐고 결국은 찾지 못했다.

결국 매몰비용의 오류를 통해 얻은 교훈은 실패를 통해 배운다는 것이다. 실패를 통해 내가 배운 것은 이렇다.

담담히 받아 들인다.

무감정하게 다음 행동을 실행한다.

결국 그 실패는 내 깨달음으로써 가치를 얻었다. 실패가 헛된 것이 아니라고 현재는 증명하고 있다.

'베니스의 상인'은 단순한 희극이 아니다. 인간의 복잡한 감정과 관계를 깊게 다룬다. 바사니오의 대사는 이런 깊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부분이다. 가벼운 마음으로 읽다가 묵직하게 들어오는 대사 하나를 급하게 스마트폰으로 촬영했다.

기껏해봐야 몇 그램되지 않는 작은 종이와 활자지만 나의 공포의 적분값이 고스란히 쌓여 있었다.

거울을 보고 똥이 묻었는지, 겨가 묻었는지 확인할 수 있다. 책을 보고 자신이 보였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다시 도전하는 용기, 신뢰와 우정의 중요성, 그리고 사랑을 위한 결단과 희생. 이 메시지는 작품이 왜 시대를 초월하는지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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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의 순간, 치트키 독서 - 실패의 순간에 나를 일으켜준 것은 언제나 ‘책’
이혜주 지음 / 모모북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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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략 5~6년전, 한 블로그를 방문한 적 있다. 어떤 이유였는지는 모른다. 한 여성의 블로그였다. 생각 없이 스크롤을 내리다가 제목을 발견했다.

구백 몇번 째 독후감 이었던가...

게시글을 봤더니, 수년 전 글이다. 최근 글을 살폈다. 이미 일 천 번째 글을 작성해 둔 뒤였다. 대단해 보였다. 그 기록. 그 시간.

천 권이라는 가시적인 성과는 주인장의 지적 능력을 증명해 보였다. 부러웠다. 물론 도서 갯수를 늘렸다고 지적능력이 향상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당시에는 그렇게 보였다.

원래 책을 좋아했지만 기록이 없었다. 얼마나 읽는지도 몰라고, 어떤 책을 좋아하고, 스스로어떤 생각을 하는 사람인지도 몰랐다.

'갖고 싶다.'

저 기록과 시간이 쌓은 '결과물' 말이다. 네이버가 임의로 생성한 나의 블로그를 보았다.

메뉴를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블로그 제목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글은 어떻게 써야 하는지.

아무것도 몰랐다.

그날 블로그 초기 메뉴에 있던 '낙서장'이었던가, 거기에 글 하나를 남겼다. 초라한 한 자리 숫자가 자리수를 그대로 하고 단계를 올렸다.

아득한 1000이라는 숫자를 갖고 싶다. 꿈꾸고 잊었다. 시간이 지났다. 하루 하나, 어쩌면 둘... 그렇게 쌓은 기록은 어느덧 일천 구 백개를 넘었다. 독후감도 천 편이 넘었다.

그냥 그렇게 했다. 스쳐진 동경은 잊혔고 기록은 상대가 아니라 나를 향해 있었다. 이제는 안하는 것보다 하는 것이 더 쉬운 일상이 된 글쓰기는 숫자가 아니라 의미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도서인플루언서'

특별하게 뭐가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누군가가 내 블로그를 본다면 내가 느꼈던 감정을 느끼진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봤다.

1000이라는 숫자는 불타는 열정으로 쌓여지는 결과는 아니다. 블로그를 하며 깨달은 바는 그렇다. 때로는 불타는 열정보다 식지 않는 꾸준함이 더 큰 성과를 쌓는다.

의식 없이 쌓은 기록은 '로그' 형식으로 남겨졌다. 시간의 순서로 항해했다. 기록은 과거의 방향을 말했고 지금은 연장선에 있었다. 책은 '책'이 아니라, '나'를 설명했다. 그것은 '빅데이터'가 되어 나를 설명했다.

벌써 6년 전, '인공지능'은 소설에서 나오던 개념이었다. 현재 ChatGPT 서비스가 출시됐다. 2000권이 넘게 쌓여 있는 나의 빅데이터, 그것을 ChatGPT에게 넣었다.

인공지능은 나의 MBTI를 추론하고 대체로 어떤 생각을 하는 사람인지 알려 줬다. 스스로를 갈아 넣은 글이 '빅데이터'가 되어 대체적인 '자아'를 보여줬다. 거울에 나의 모습을 비춰 보듯.

인공지능이 평가한 나를 찬찬히 들여다 봤다.

읽고 잊힌 기억들. 쓰고 잊힌 기억이 정보로 짜집어지고 다시 나를 표현해 냈다. 같은 샘물을 마셔도 독사는 독을 만들고 젖소는 우유를 만든다. 내가 씹고 뱉은 정보는 나를 나타내게 했다.

'해우소'라는 이름답게 누군가의 배설을 씹고 삼켰다. 다시 소화했고 다시 배설했다. 그러니 그 배설은 누군가가 아니라 나를 닮았다. 내가 읽은 책은 다른 누군가가 읽은 책과 그 활자 배열이 정확히 일치했으나 다른 걸 만들어 냈다.

'코딩 해줘'

'소설 하나 만들어줘'

'그림 그려줘'

'노래 만들어줘'

간단한 명령으로 인간보다 더 그럴싸한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인공지능의 시대다. 명령을 이해하고 빠르게 해결책을 내놓는 시대가 지났다. 대체 불가능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일등'이 아니라 '첫번째'가 되어야 한다.

인공지능은 명확한 해답을 내놓을 지 언정, 스스로 주체적인 질문을 만들어 내진 못한다. 명령에 복종하는 철학 없는 똑똑이들의 최고의 적이 될 것이며 해답을 찾는 질문자들에게 더할나위 없는 수족이 될 것이다.

'도서인플루언서' 이름을 지어 두었지만 그냥 '책 좋아하는 쌍둥이 아빠'일 뿐이다. 독서는 '나'와 '쌍둥이'에게 향해 있을 뿐이다. 다만 쓰여지는 글의 배설이 누군가의 양분이 되고 다시 그것이 돌고 돌아 나의 양분이 된다. 그 순환의 매커니즘에서 '사회'를 느끼고 살아있음이 느껴진다.

이 순환 속에서 나는 스스로를 이해하고 타인을 이해하며, 나아가 사회와 연결된다. 이 연결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독서와 글쓰기의 힘이며, 인공지능이 결코 대체할 수 없는 인간만의 고유한 능력이다. 그리하여 나는 오늘도 책을 읽고, 글을 쓴다. 이 모든 것이 나와, 나를 둘러싼 세상을 더 깊게 이해하기 위한 여정이다.

이 책은 '도서인플루언서'로 활동 중인 '우아한밍블' 님의 출간도서다. 평범한 공무원에서 책과 글을 만나며 글의 일상과 생각이 바뀌는 과정이 가감 없이 들어가 있다. 스스로 질문하는 사람의 성장은 역시 기대가 된다.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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