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떠올릴 때, 그의 글을 읽을 때 드는 인상은 복잡하다. <야콥 폰 군텐>에서의 화자는 도스토옙스키의 지하수기, 함순의 굶주림, 루쉰의 아Q를 떠올리게 만들다가도 현대성이라 부를 수 있을만한 것들이 깃들어 있는 듯 보인다. 현대 중에서도 특히나 요즘같이 이성적이고도 과학적인 사고방식, Yes정신이 저물고서 등장한 No정신이 보편화된 시기에서의 현대인이 지닐 법한 정신이 두드러진다. 공감이 가다가도 뭐지 싶은 문장이 불쑥 튀어나오고, 낮은 시선이 보이다가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람들에 대한 경멸감이 숨겨진 게 보인다. 의도한 구성인지, 무의식으로 쓴 글인지는 알 수 없다. 추측으로는 후자에 가까운 것 같다. 한편으론 낭만과 순종으로 가득했던 유년기를 지나 여러 경로를 통해 지독한 사회를 직시하게 됐고, 몸소 부딪히면서 진짜 삶을 맛본 청년이 생의 기로에 서서 갖기 마련인 솔직한 심정으로 비쳐 보이기도 한다.

<산책자>에 실린 그의 산문에서 알 수 있듯 그는 백치를 읽었고 백치에 매혹되어 스스로 백치가 되기로 작정했거나 그게 아니라면 진짜 백치 같은 사람일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어쨌거나 그의 삶은 굴곡으로 가득했고 마지막마저 극적이다. 아프리카로 떠난 랭보를 떠올리게 하듯 하인학교에 작별을 고한 주인공을 그렸었던 발저는, 끝내 세상이 견디기 어려워 제 발로 찾아간 정신병원에서 여생을 보냈다. 그리고 크리스마스 날 산책 도중 맞이한 눈 위에서의 죽음은 한 편의 동화 같다. 그는 아주 솔직했던 것 같고, 그래서 미워할 수 없는 사람이다. 내가 느낀 그는 부자가 되고 싶었었고, 가난을 혐오하다가도 그것을 긍정했고, 하인처럼 살았지만 스스로를 귀족처럼 대했었고, 사람을 싫어하고 좋아하기를 반복했고, 신을 의심하다가도 존중했고, 자연을 찬미하면서도 도시를 사랑했다. 여느 누구와도 다를 바 없이. 어쩌면 여기에 그의 위대함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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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무섭고 매섭고 잊고서 살다 문득 떠올릴 때면 어딘가 불편해지는데도 이상시리 자꾸 찾게 되는 루쉰 선생님..

<발췌>

- 생의 기로에서 청년들에게

나도 지금 기로, 혹은 좀 더 희망적으로 말하면 네거리에 서 있습니다. 기로에 서 있으면 발을 내딛기가 어렵지만, 네거리에 서 있으면 갈 수 있는 길이 여럿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습니다. 생명은 나의 것이고, 내가 갈 수 있다고 여기는 길로 스스럼없이 나아가도 무방합니다. 앞에 깊은 연못이 있든, 가시덤불이 있든, 계곡이 있든, 불구덩이가 있든 나의 책임입니다. 하지만 청년들을 대상으로 말할 때는 다릅니다. 눈먼 사람이 눈먼 말을 탄 것처럼 남을 위험한 길로 끌어들이게 되면 나는 많은 인명을 죽음으로 내모는 죄를 짓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청년들에게 내가 걷는 길을 함께 가자고 권하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는 나이나 처한 상황이 다르기에 사상의 도달점도 다릅니다. 하지만 나더러 청년들이 어떤 목표를 향하여 나아가야 하는가에 대해 꼭 대답하라고 한다면 나는 어쩔 수 없이 남을 위해 생각해둔 말, 즉 첫째는 생존해야 하고, 둘째는 입고 먹어야 하며, 셋째는 발전해야 한다고 말하겠습니다. 이 세 가지를 가로막는 자가 있다면 그가 누구이든 우리는 반항하고 박멸시켜야 합니다.

〈베이징 통신(北京通信)〉, 《화개집(華蓋集)》


- 서민과 멀어진 지식인

유럽의 유명 작가 중에는 서민 출신이 많습니다. 서민들의 고통을 그들도 같이 느끼기 마련이어서 서민들을 대변하는 글을 시원스럽게 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서민들은 지식인 계급이 자신들에게 도움이 된다고 여기게 되지요. 그래서 그들에게 지지를 보내고 그들을 환영합니다. 하지만 지식인 계급이 이런 영예를 누리고 지위가 높아지면서 서민들을 잊게 되고, 특별한 계급이 되지요. 이제 그들은 자신들이 대단하다고 여기며 부자들 집으로 가 파티를 하고, 돈도 많아지며, 집도 좋아집니다. 결국 서민들과는 아득히 멀어집니다.

그들은 고귀한 생활을 누리면서 예전 가난했던 시절을 더는 떠올리지 않습니다.—그러니 여러분은 박수를 치지 마십시오. 박수를 보내 저의 지위를 올리게 되면 제가 할 말을 잊어버리거든요—지식인들은 서민들을 더는 동정하지 않게 되고, 서민들에게 압박을 가하기도 하며, 서민들의 적으로 변하게 됩니다. 지금은 귀족 계급이 존재할 수 없으니 귀족적 지식인 계급도 당연히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지식인 계급의 결점 가운데 하나입니다.

〈지식계급에 관하여(關於知識階級)〉, 《집외집습유보편(集外集拾遺補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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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하느님 - 권정생 산문집, 개정증보판
권정생 지음 / 녹색평론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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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삼십 평생껏 교회라곤 발붙여 본 적 없는 사람이다. 아마 앞으로도 그렇겠지만, 근래 들어선 이십대 초중반 때의 객기 어린 시선으로 느끼고 생각하던 신에 대한 관념이 다르게 다가오는 와중이다. 그러다 우연히 북플을 통해 권정생 선생님의 책을 접했고 예전의 나 같았으면 ‘하느님‘이라는 단어 자체만 보고서 지레 질린 마음으로 찾지도 않았을법한 제목 ‘우리들의 하느님‘이라는 산문집을 도서관에서 빌리게 됐다. 책제목의 편집과정이 영 석연치 않게 느껴지긴 했지만 한 꼭지 한 꼭지 읽어갈 때마다 우리나라에, 아니 세월을 통틀어 이런 분이 계셨던가 하는 심정이 일었다.

늘 그래왔겠지만 요즘도 국내외로 세상이 소란스럽기만 하다. 이런 나날들 속에서 선생님의 삶, 사상, 유언 이후 남은 사람들의 행보를 되새김질해 본다. 선생님의 모든 견해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선생님의 삶과 사상은 지금 같은 시기에 더없이 소중한 게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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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앞에서 삶을 돌아보던 그는 우리네 인생과 닮은 탁월한 비유 하나를 들려주는데 설명하기 까다로워 본문 중 일부를 그대로 발췌해 옮긴다.

˝ 동양의 옛 우화 중에 스텝에서 맹수와 마주친 나그네 이야기가 있다. 나그네는 맹수를 피하기 위해 오래전 말라버린 우물로 뛰어들었는데, 우물 바닥에는 그를 단숨에 집어삼키려는 듯 용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다. 불행한 나그네는 밖으로 나가 맹수에게 목숨을 빼앗기고 싶지도 않고 우물 바닥으로 내려가 용에게 잡아먹히고 싶지도 않아서 하는 수 없이 우물 벽 틈에 난 덤불 잔가지에 매달려 버텼다. 차츰 손의 힘이 빠지자 그는 양쪽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죽음에 몸을 던질 수밖에 없으리라 느꼈다. 그래도 악착같이 매달려 있었는데, 어디선가 검은 쥐와 흰 쥐가 기어오더니 그가 매달린 덤불 가지를 갉아먹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가지가 뚝 부러져 용의 아가리로 떨어질 것 같았다. 나그네는 죽음을 피하지 못 하겠다고 체념했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다 덤불의 잎에 꿀이 몇 방울 묻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혓바닥을 내밀어 핥았다. ˝ 34p

‘안수정등‘이라 불리는 설화에 대한 단상

절박한 상황에서의 꿀 몇 방울은 당장에 견뎌낼 힘을 준다. 하지만 벌들의 것인 벌집을 가지려 들 순 없다. 무엇보다 시급한 건, 매달린 가지를 갉아대는 쥐들을 내몰지 않고서는 용에게 먹히고 말 운명. 그런 쥐들에게 악의란 없을지도 모른다. 시기의 차이일 뿐, 생명이 아닌 죽음으로 내모는 그 쥐들, 사자, 용에게는 어쩌면 표정이 없을지도 모른다. 단지 ‘신‘이라고도 불릴만한 무언가에서 비롯된 자기명령에 복종하고 그에 따라 제 삶의 몫을 다할 뿐일지도. 혹시라도 그들이 화난 표정을 지어보이는 와중이라면 탈출은 더 쉽지 않을 것이다. 밖을 나선다 한들 언젠가는 대면할 수밖에 없는 사자. 나서든 나서지 못하든 물을 찾기 위해서라면 주기적으로 우물 안을 들여다볼 수밖에 없는 팔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고자 하는 의지가 남아있고 체력이 뒷받침된다면, 끝내 우물 밖으로 나와 새삶을 꾸려볼 수도 있을 것이다. 운이 좋다면, 누군가 도움의 손길을 건네줄지도 모르겠다. 기약 없지만, 사랑의 힘을 믿는 누군가였으면. 역으로 내가 그런 사람일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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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올바른 의미 안에서 사회주의 정신과 예수 정신은 융합될 수 있을까? 본디 차이란 있을까? 주체만 바뀔 뿐, 신로마제국의 건설이 여전히 현재진행중이라면 이 둘은 그 세계를 지탱하고 서로 상호보완하는 가치로써 빛을 발할 수 있을까? 그런 시대가 과연 도래할 수 있을까?

2
두 얼굴의 신 야누스는 왜 하필 로마시대 때 창조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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