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하라
스테판 에셀 지음, 임희근 옮김 / 돌베개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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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유월이다. 내가 기억하는 대한민국의 유월은 언제나 항쟁의 계절이었다. 우리 민족은 3월엔 독립을 4월엔 혁명을 5월엔 운동을 6월엔 항쟁을 이끌었다. 87년 6.10 민주항쟁이 내가 고등학교 때 일어난 역사적 그 날이었다면 그로부터 꼭 24년 후, 그러니까 강산이 두 번하고도 반 정도 바뀐 시간이 흘러 다시 또, 유월인 것이다. 세월로 치자면 꼭 나 같은 군대 안간 여학생이 재수(再修)없이 4년제 대학을 졸업하고 일자리를 한창 알아보고 있을 만큼의 시간인 것이다. 우리는 성장했을까?, 하는 비약적인 질문이 눈앞을 가린다. 공교롭게도 2011년의 유월은 대선을 일 년 반 남긴 시점에 때 아닌 ‘반값 등록금’ 투쟁으로 팽팽하게 긴장된 시국을 맞고 있다. 이러한 시기에 마치 알고나 있었다는 듯이 이 책은 젊은이여 일어나라, 분노하여 항거하라, 며 독자들의 엉덩이를 들썩이게 만든다. 절묘하고도 기가막힌 타이밍이다. 광화문에서 열린 촛불집회에 시민들은 통닭과 피자 등의 간식거리를 현장 지원한다고 하는데 이 책은 그 곁에서 몇몇 진보인사로 보이는 누군가가 열정적으로 나누어 주기에 딱 안성맞춤인 책인 듯하다. 무엇보다 이 책은 앉은 자리에서 마음이 동하게 되는 선동의 성격을 가졌고 드물게 짧은 관계로 그 자리에서 바로 덮을 수 있다. 오래 가르치지 않으면서 진부하지도 않다는 장점을 지녔다. 유럽에선 4500원(커피 한잔 값)에 이 책을 마치 집회 팜플랫처럼 구입하고들 있다한다. 저자의 나라 프랑스 역시 2012년 대선을 앞두고 이 책이 사르코지 보수파 정권에 저항해 사회당을 지지하자는 코드로 읽히고 있다 한다. 우리 역시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이 책은 어딜가도 거리로 뛰어들게 하는 매력을 지녔으니 말이다.

  먼저 이 짧은 책의 구성은 저자인 스테판 에셀의 원고 분량 삼십여 페이지와 저자와의 인터뷰, 조국 교수의 추천사, 그리고 옮긴이의 말로 이루어져 있다. 모두 더해 90 페이지도 되지 않는다. 2009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헤르타 뮐러를 소개하는 샘플북, ‘헤르타 뮐러에게 다가가기’의 분량이 111 페이지이다. 공짜인 샘플북보다 짧은 이 책은 물론 커피 한잔하면서 가볍게 넘겨볼 수 있는 최상의 미덕을 가졌다. 그런데 이 책을 제 무게만큼 가볍게 후식처럼 곁들이고 말기엔 어쩐지 내키지가 않는다. 책 덮은 다음이 문제인 책인 것이다. 저자는 지금 일어나 어디로 향할 것인지, 물어 보는 것만 같다. 책을 덮고 내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이 책을 읽었다는 ‘인증식’이었다.(나는 다른 책에선 그런 일을 해본 적이 없다) 조국 교수는 이 책을 저자의 공개유언(저자는 현재 93세 이므로)이라 칭했는데 내가 느끼기에 이 책은 독자의 서명을 요구하는 공개선언서쯤으로 느껴졌다. 그러니까 아파트 부녀회장이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지하철 역 개통이나 고층건물 반대등의)서명을 요구하는 장면을 떠올리기도 했다. 실제로도 유엔 세계 인권 선언문(1948)을 작성하신 분이니 훌륭한 대 국민 유인물로도 손색이 없었다. 나도 당신의 선언서에 동참하겠다는 사인이라도 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다음엔 기회가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인증을 하고 나는 자리를 (박차고)일어섰고 집에 돌아와 뒤늦게 정치, 사회면의 기사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정치에 관심이 없는 나로선 이례적인 일이었지만 무어라도 하지 않으면 스스로 비겁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저자는 독일 출신 프랑스인으로서 반나치 레지스탕스 운동가 출신이다. 영화에서나 등장할 것 같은 인물이 아직까지 생존해 목소리를 드높인다는 소식자체가 놀라웠다. 그런데 내가 감명받은 사실은 그의 역사적인 生의 이력이나 극적인 정치 활동, 혹은 이 책에 소개된 분노의 논리는 아니었다. 자신이 이토록 오래 (그것도 열정적으로)살아온 비결은 다름 아닌 ‘분노할 일에 분노하는 것’ 때문이었다는 명쾌한 대답이었다. 참고 사는 인생이 미덕이며 나이 들면 화 낼 일도 없어진다는 논리에 익숙한 나로서는 뜻밖의 대답이었기 때문이다. 원래 작가들은 얼마 전 어디서 조사한 통계치에 따르면 연예인의 자살이 증가하기 전까진 단연 수명이 짧은 직업으로 1위를 고수한 대표적 단명 직업이다. 스테판 에셀을 보고 아흔 넘어 생존한, 그것도 마지막 순간까지 원고를 교정한 영국의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을 떠올렸다. 평화주의자 러셀도 작가치고는 자주 분노하는 인물이 아니었나 해서다. (분노하는 작가가 오래산다는 통계치를 기다린다) 이 책의 논리대로라면 우리 문단의 대표적 분노작가 조정래작가는 백수를 꼭 하셔야 한다. 격변의 21세기를 모조리 겪어온 93세 정치가의 입에서 마땅히 분노할 일에 분노해야 자신의 존엄을 지킬 수 있고 나아가 행복해질 수 있다는 말씀은 분명 가슴을 두드리는 효과가 있었다. 이것은 사십대의 어느 진보측 교수가 ‘젊은이여, 분노하라’고 목소리 높여 선동하는 것과는 다른 일이었다. 모진 고문도 받고 수용소에서 몇 번 죽을 뻔도 하고 기적인지 운명인지 여기까지 살아왔지만 나는 한 평생 분노한 일에 정당한 참여를 하였으므로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라는 대답은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말씀이었다.  

  이 분의 논리는 간단하다. 1940년대 레지스탕스로 활동했던 그 시기 레지스탕스 운동의 기본 정신은 다름아닌 ‘분노’였다고 말한다. 레지스탕스(résistance)는 ‘저항하다’ (résister)라는 동사의 명사형이다. 즉 정의롭지 못한 것에 저항하는 것이 새로운 미래를 창조한다는 것이다. 이에 ‘인권을 침해하는 주체는 누구를 막론하고 우리의 분노를 촉발’해 마땅한 것이며 ‘인간의 권리에 대해서만은 타협의 여지가 없는 것’이므로 분노하여 참여하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시민의 의무라 말한다. 팔짱끼고 나몰라라 돌아서는 것이 아니고 분노에 참여할 때 우리는 진정한 투사가 되는 것이며 그것은 역사의 흐름을 더 큰 정의, 더 큰 자유의 방향으로 인도한다는 논리이다. 저자는 스승인 사르트르로부터 이러한 ‘참여’를 배웠고 수용소에서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와 자신의 회고록에 “이렇게 삶을 되찾았느니, 이젠 그 삶을 걸고 참여해야 했다.”고 적었다. 이 사람의 참여는 절대 모든 일 다 하고 남는 시간에 우아하게 행하는 선택적 활동이 아니라 어떤 불의의 순간에도 공평하게 목숨을 담보로 의지를 각인하겠다는 필사의 말씀이다. 비슷한 형태로 살아 내온 시절을 목숨걸고 증언하는 작가가 있듯이 그는 다시 찾은 삶을 목숨같이 걸고서 앞으로 한평생 분노할 일에는 가만있지 않겠다는 맹세를 하였던 것은 아닐까.  

  조국 교수도 언급했지만 스테판 에셀이 말하는 분노는 개인적인 억울함에 감정적으로 격분하는 성질의 분노가 아니다. 우리 사회에선 목소리 큰 사람이 상대를 이기는 경우가 많다. 이때 개인 분노의 표출은 간혹 폭력을 야기하기도 한다. 또 어떤 오래된 분노는 묻지마 범죄로 발전하기도 한다. 저자가 주장하는 분노는 불의를 보고 참는 것이 아닌 비분강개의 마음, 즉 공공의 불의를 보고 일으키는 분노로서 공분(公憤)이나 의분(義憤)을 뜻한다. 공적인 일로 느끼는 분노에 창조적인 저항의식을 기르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정당한 분노 표출의 행위로서 비폭력적인 ‘평화적 봉기’를 일으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저자가 말하는 비폭력이란 ‘우선 자기 자신을 정복하는 일, 그다음에 타인들의 폭력성향을 정복하는 일’을 뜻한다. 내 마음부터 폭력의 의지를 없애고 상대집단의 폭력을 뛰어넘는 원칙을 가져야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상대집단이 갑자기 무차별 물대포라도 쏘아대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폭력을 옹호하는 건 아니지만 저자는 어느 집단이건 우월한 무력으로 점령당한 입장에서는 비폭력 적인 대응만 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자고 말한다. 그렇다고 같이 무력으로 대응하자는 것이 아니라(대응할 수도 없고 대응은 결과가 뻔하기에) 무엇보다 희망으로 대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공공에 대한 비폭력 호소가 바로 비폭력적인 희망을 암시한다 말하는 듯했다. 억울하게 맞아 죽어가면서도 희망을 잃지 말라는 말은 다소 철학적으로 들리기도 했고 허탈한 결론이라 느껴지기도 했다. 그런데 이 사람의 결론은 희망만이 답이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한평생 살아온 시간을 돌이켜보니 그래도 분노하였을 때 결과는 달라져 있었다 주장하는 듯했다. 조금씩 천천히 이루어진 것이지만 그래도 세상은 분노했기 때문에 발전하지 않았느냐 반문하는 듯 했다. 자칫 폭력 때문에 긍정적인 결과를 비껴가면 그만큼 역사는 정의로와 지는데 시간이 더디게 흘러간다는 뜻이 아닐까.


“ 분노가 끓어 넘치는 상태를 ‘격분’이라고 한다면, 폭력이란 도저히 용납 못할 상황에 처한 사람들의 입장에서 내린 유감스러운 결론이라고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를 이해한다면, 테러리즘이 격분을 표출하는 한 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이 격분은 부정적 표현이다. ‘도에 넘치게 분노’해서는 안되며, 어쨌든 희망을 가져야 한다. 격분이란 희망을 부정하는 행위다. 격분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고, 당연한 일이라고까지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용납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희망이 긍정적 결과를 낳을 수 있는 경우에, 격분 탓으로 그것을 놓칠 수 있기 때문이다. ”   -31P



  저자가 말하는 ‘사회정의와 공공선의 실현을 위한 정당한 분개’는 ‘진정 행복하려면 제때에 분노할 줄 알아야 한다’는 메시지와 함께 논리적인 시너지를 일으키며 우리의 오늘을 돌아보게 만든다. 저자는 특히 젊은이들에게 사회단체나 국제 기구, 조합의 일원으로서 분노에 참여하라 독려한다. ‘투표하지 않는 자는 암묵적인 찬동자’이며 비난보다 못한 최악의 태도, 무관심이라는 묵인 열차에 편승하는 일이라 일갈한다. 이 책을 덮고 나는 우리의 등록금 이슈에 얼마나 다양한 사람이 연대를 이루어 분노를 행하고 있는지 확인해 보았다. 그러면서 나는 아직 분노가 어떤 형태로 가시화되지만 않았지 우리들 모두는 분노를 쌓고 쌓아 그것을 암덩어리 키우듯 세포화하고 있었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그러면서 자연 개혁야권이나 시민단체, 청년연합과는 거리가 한참 멀었던 나의 가슴에 슬몃 손을 대 보았다. 억누르고 참는 것은 이미 생활속 습관이 되어 버린지 오래였다. 분노한다고 달라질 것도 없으며 나만 손해라는 생각이 팽배해진 결과였다. 범국민적인 풍경으로서 24년 전 유월의 거리에서도 나는 분노하기에 여물지 않은 가슴이었고 그 후로도 오랫동안 분노라는 열매가 한번도 맺어진 적 없이 시들어버린 꼴이었다. 지금의 분노는 냉소적 가슴으로 자체진화한 것이었다.  마치 익지도 않고 시어버린 김치처럼. 결국 나는 (가장 안좋은 케이스로)내 자신에 분노했다.

  문득, 내가 대학생이었을 때(1991년) (하필이면) 지금처럼 등록금 인상에 반대하는 집회에 참여했다가 백골단의 집단구타로 맞아 죽은 명지대 신입생 강경대 학생이 오버랩되기 시작했다. 어떻게 무엇에 맞았는지 강가에 버려진 그의 시신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었던 우리 시대 독재의 영원한 상처로 남았다. 그런데 나와 같은 나이의 젊은이가 미래를 펼치지 못하고 정권의 방망이에 목숨을 잃었지만 나는 그때도 분노하지 않았던 것 같다. 변명을 하자면 분노는 올바르지 않다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세뇌 당해온 학습의 효과였다. 그는 하늘에서 아직도 분노의 눈동자를 감지 못한 것은 아닐까.

  등록금이 일 년에 천 만원인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 땐 그래도 방학 때 놀지 않고 아르바이트를 바짝 하면 다음 학기 등록금은 간신히 벌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등록금 때문에 자살하는 학생도 생겨났다. 등록금을 내지 못하는 학생은 등록금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학생이 열심히 스펙을 쌓고 취업 및 유학준비를 하고 있을 때 (등록금을 마련하느라)세 내 개의 알바에 치여 공부할 시간이 없을 것이므로 장학금을 놓치게 된다. 어학연수나 답사여행, 인맥 쌓기는 제쳐두고서라도 그나마 학교라도 계속 다닌다면 그 학생은 운이 좋은 것. 생계형 휴학은 우리 시절 배낭여행만큼이나 흔한 레파토리가 되었다. 이는 곧 기회의 분배에 따른 불평등을 초래하고 기득권층은 더욱 견고한 기반을 쌓게 되는 연쇄적인 원인이 된다. 이 고통은 대학생만의 문제는 아니다. IMF 사태와 금융위기, 조기은퇴에 내몰린 베이비 붐 세대는 자녀들의 등록금을 해결하느라 전혀 노후를 준비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노후에 생활기반을 마련하지 못한 채로 평균수명만 늘어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래도 대학이라도 나와야 사람구실을 할 것 아니냐는 어느 상인의 넋두리는 대학이라도 못나오면 사람구실을 할 기회마저 박탈당한다는 우리사회의 서글픈 자화상에 다름 아니다. 한국사회에서 교육은 계급과 지위를 전복하는 기회가 아니라 그 격차를 확대 재생산하는 핵심통로가 되었다.

  나는 ‘반값등록금’ 논란의 이면엔 대학생을 중심으로 이처럼 물려있는 한국사회의 양극화, 기회균등의 부조리, 고령화 사회에 대한 불안 등의 복합적인 쟁점들이 함께 투사된 분노라는 생각이다. 이제와 깨달은 것이지만 분노를 쌓으면 결국 암밖에 더 걸리나. 늘어만 가는 중장년층의 암 발생율은 어쩌면 평생 불의를 보고 쌓아온 분노의 객관적 결과일지 모른다. 이 책을 읽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생각한다. 비록 분노의 거리에 동참할 순 없다 할 지라도 저자가 말한 창의적인 저항은 꾸준히 실천해 볼 생각이다. 이 책에서 저항이 바로 창조라는 말씀은 가장 문학적이었고 인상깊었다. 그 두 번째 시도로 나는 리뷰를 작성했고 이 리뷰를 내가 아는 사람들과 나를 아는 사람들과 공유하는데 앞장서고 싶다. (첫 번째는 이 책을 읽었다는 것일 터이니)

  이제는 웃으면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분노해야 행복해진다는 말씀을 오래 기억하고 싶다. 그것이 곧 젊음을 유지하는 비결이라 새겨둘 터이다. 당신도 나와 함께 오래도록 젊음을 유지할 생각은 없으신지.  

   

 

<덧붙임>




 

 

 

 

 

 

 

 

 

 

 

 

 

   <파울 클레, 새로운 천사 Angelnus Novus, 1920 >

  스테판 에셀은 파울 클레의 <새로운 천사>라는 그림을 언급하며 이 그림을 좋아했던 벤야민이 남긴 비평(역사철학 테제, 1940)을 소개했다. 벤야민은 이 그림의 천사를 ‘역사의 천사’로 보고 폐허에 무너져 내리는 파국에 경악하며 그 잔해들을 다시 결합하려고 하지만 천국으로부터 ‘진보’라는 강풍이 불어오기 때문에 날개를 접을 수도 없는 상황인지라 ‘역사의 천사’는 미래쪽으로 떠밀려 가는 형국이라 말했다. 벤야민은 ‘우리가 진보라고 부르는 폭풍'을 밀어내고 있는 천사를 보았다고 말이다. 오늘날 (내 수준에서)이 그림을 보고 벤야민의 깊은 사유에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은 진심으로 부럽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천사가 새로운 천사인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벤야민을 언급한 스테판 에셀이야말로 이 그림처럼 천진난만해 보이는 진보의 천사가 아닐까 싶다. 평생 희망이라는 날개를 접을 수 없었던 오래된 의지를 느끼게 된다. 우리 역시 강풍에 굴하는 날개가 아닌 강풍에 의지해 미래를 기약할 희망의 날개가 절실한 시점이다. 분노로 진보의 시동을 걸어 희망의 날개를 멈추지 않는 천사. 떠밀리고 짓밟혀도 오직 미래를 위해서만 날아가는 천사, 이 책의 천사는 그렇게 우리에게 날개 하나를 살며시 달아준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그 날개를 접지 않는 일이 아닐까. 이 그림을 보라, 이미 날개는 펴져 있지 않은가.


“나는 언제나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 편에 서왔다.”

-2009년 팔레스타인 가자지구를 방문하고 돌아와 그곳 주민의 삶을 증언하면서, 스테반 에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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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11-06-09 1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분노하라는 책을 사놓고 누가 리뷰를 썼는 궁금해서 검색했더니 이렇게 좋은 리뷰를 읽게 됐네요. 안녕하세요? 이렇게 신뢰를 무릅쓰고 놀러와 글을 남깁니다. 리뷰 한 줄 한 줄이 진지하게 내뱉는 한마디 한마디의 말과 같아 경청하며 읽었습니다. 너무 좋은 리뷰를 보며 많은 생각을 합니다. 앞으로도 자주 놀러올 께요 ^^ 비와서 좀 깜깜하지만 즐거운 오후 되세요. ^^

風流男兒 2011-06-09 14: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감사합니다. 저도 잘 읽었습니다.
불만을 불필요하게만 느껴오던 저에게도 참 많은 의미를 던져주네요.
특히나 오늘 불만과 저항, 그리고 에 대한 글들을 읽게 되니,
일하는 중간중간에도 여러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정말, 지금의 상황을 보면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건 제대로 된 불평과 불만이 맞는 것 같아요.
진실한 서평 덕분에 소중한 떨림 받아갑니다.
씐나는 오후 보내세요.

멋진빤스 2011-06-09 14: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2011-06-09 15: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차분한세상 2011-06-09 16: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테판 에셀의 '분노하라'가 화제가 되자 계훈제 선생님이 떠오르더군요.
안녕하세요? 훌륭한 리뷰 잘 읽었습니다. 의로운 분노가 만연한 세상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똘레랑SUE 2011-06-09 1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정말 잘 읽었습니다. 아직 <분노하라>를 구입하진 않았지만 빨리 읽고 공감하고 싶네요- 시사적인 시선까지 다 공감하며 갑니다 :)

달사르 2011-06-10 1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월이 되면 가슴이 뛰었던 적이 있었는데..언제였나..가물거리는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텔레비젼에서 반값등록금투쟁을 보면서, 성공했으면 좋겠다..생각하는 그 정도네요. 이제.
'분노하라'는 말과 내용에 시들어가는 피가 좀 덥혀지는 듯? ^^

posbaedar 2011-07-24 0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고에서 읽었는데 나라를 잘 다스리지 못하면 분노해야 하는 이유. 분노보다는 가만히 구경만하는 저 같은 사람은 뭔가가 해야 한다는 공감을 업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