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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롱뇽과의 전쟁
카렐 차페크 지음, 김선형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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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게 들릴 지 모르지만 나는 이 책을 독파하자마자 침을 꿀꺽 삼키었다. 그제서야 재미가 종결된 시점에 찾아오는 본전같은 허기, 정신이 부른 대신 고파지는 육체의 신호, 하지만 이번엔 절대감에 맞닥뜨린 방어적인 본능으로 포장하련다. 내 짧은 소견으로 이 사람은 문학하는 작가라기보다는 예술하는 천재라는 생각이 드는데 카프카와 쿤데라가 체코사람인지 바로 생각나지 않는 나로서는 체코라는 나라를 다시 보게 되었다. 우리만 해도 김연아이후 스케이팅하면 어디서라도 좀 아는 체 하고 싶어지듯 체코국민은 카렐 차페크 때문에 적어도 노벨문학상 수상기회를 놓쳤다고 무슨 올림픽 금메달이나 되는 듯 야단법석을 떨어 댈것 같지는 않기 때문이다. 별거 아니다라는 생각은 속성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의 견지인데 이 사람의 농담은 고만고만한 동시대 각 분야의 전문가들을 이미 뛰어넘은 월반수준으로 느껴진다.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게 함으로써 고개숙임보다 더 큰 깨우침을 준다.

나는 아주 옛날부터 감히 범접할 수 없다고 생각되는 경외스런 절대자를 대할 때면 이상하게도 일단 내 배부터 채우고 싶다는 자포자기 심정이 들고는 했다. 일종의 정신적인 항복의 의미로 그것을 메우고자 내 속에선 육체적인 보상을 구하는 시스템이 활동을 재개한 것일까. 인간이란 아무리 관념적인 세계에 빠져있다가도 결국 때가 되면 목구멍을 달래주어야 하는 단순한 생명체인데 나는 이 자가반응 시스템 자체가 이 소설의 메시지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든다. 이 소설을 읽은 끝에 결국 내가 보존하고 있는 내 생명이라는 것의 보편성에 어떤 위태로운 속성을 발견했다고나 할까. 생명은 위대하지만 인간은 그 생명을 지키기 위해 한없이 초라한 개체이구나, 하는 생각이 더 커졌기 때문이다. 생명이 소중한 것은 그것의 위대함 때문이 아니고 너무나 어이없는 이유로도 사라질 수 있는 위기감때문이라고. 언제 죽을지 모르지만 그렇기에 살아있는 동안이 소중한 것, 이것이 책 한권 읽고 격심하게 배고파진 내가 내린 결론이다.

하지만 이 진부하고 상투적인 결론을 내리기까지 도롱뇽이 이토록 큰 역할을 하게될 지 누가 알았던가. 제목만 보고 나는 80년대 미국외화 시리즈의 한 장면, 미녀 파충류의 입속으로 들어가던 쥐 한 마리와도 같은 이야기일까 초등생처럼 의심했다. 그때 나는 중학생이었지만 파충류가 지배하는 지구세상이라든가 인간생명에 대한 소중함 같은 인류적(?)인 생각은 거의 기억나지 않고 그저 인간의 피부를 벗겨내면 초록색 변온동물의 울퉁불퉁한 표피가 드러나는 충격의 그 장면만 뇌리에 각인되었을뿐 더 이상 말초적 기억이 발전될 기회는 없었다고 본다. 올 여름 냉소가 만연된 어느 마을에 파충류의 바다괴물이 나타나 사람들의 냉혈이 아닌 온혈을 얻어간다는 판타지 장르의 『우울한 코브 마을의 모두 괜찮은 결말』이라는 소설을 읽기는 했지만 여기서 등장하는 도마뱀(Lizard)은 그야말로 유쾌한 상상력의 매개체로서 성적환상을 자극하는 감각적 소재로 화하였다. 그러니 내가 아는 파충류는 말초적이거나 환상적이거나 였지 절대 철학이거나 관념이 되지는 못하였던 터이다.

그런데 카렐 차페크는 도롱뇽으로 말초신경을 건드리거나 환상을 말하지 않고 지극히 이성적으로 현실을 이야기 한다. 현실은 오늘 하루가 가고 또 내일이 다가오듯 그렇게 천천히 티끌처럼 쌓여 가는데 어느날 되돌아보니 전쟁이라는 태산이 되고 말았다는 이야기다. 웃길까? 그가 처한 시대에서 자신의 현실과 전쟁을 말하는 방식은 곧 그 시대 작가들의 문학하는 방식이었을 것이다. 이 사람의 방식은 굉장히 스페셜한데 다 모아 놓고 보면 또 막대하게 제너럴하다. 나는 사실 어느 한 분야에 전문적이면서도 전 분야를 아우르는 사람들을 존경하는 편인데 이 절대영역은 같은 인간으로서 어지간한 열패감을 느끼게 하는 터라 궁극에 내가 성취하고 싶은 인간의 장르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사람은 경력을 보아하니 소설가는 기본이고 희곡작가, 동화작가, 전기 작가, 유머작가, 수필가, 삽화가, 번역가, 그리고 기자로서도 엄청나게 다재다능했다고 그러니 사람이 글로 할 수 있는 분야에서는 이른바 득도를 하신 게 아닌가 싶다. 스페셜리스트를 모두 이수해 낸 제너럴리스트인 것이다. 책을 덮고 외람되지만 평생 아주 훌륭한 작가가 되고자 불철주야 노력한 사람같지도 않아 보인다. 생의 최대 목표가 작가는 아니었지 싶다. 다시 말해 본인은 꼭 이러한 소설을 쓰고자 한 것은 아닌데 어쩌다 보니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방식으로 이런 류의 소설이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작품이 출간된 시기도 꼭 그가 운명하기 2,3년 전인데 작가로서 생의 후반부에 거의 모든 생의 이력이 집결될 수 밖에 없는 시점이었고 작품의 결론도 슬며시 다음세대를 향한 질문으로 유보하는 뉘앙스를 풍기기에 '나는 지금 시대의 사람으로서 이것이 내 최선이었다' 말하는 것으로 느껴진다. 나는 이런 일을 해왔고 이렇게 생각하는 바이니 이렇게 정리하는 것이다. 문제될 것이 있는가? ...아무말 못하는 이 심정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우선 소설에 주인공이 없다. 네덜란드 상선의 선장이면서 타나마사라는 섬에서 진주조개잡이를 하던 중 도롱뇽을 최초 발견한 반 토흐 선장일까. 반 토흐의 어린 시절 친구이면서 도롱뇽을 노동자원으로 활용해 결국 지구상에 도롱뇽의 번식을 초래한 재력가 G. H. 본디일까. 아니면 자신의 주인인 본디를 방문한 반 토흐 선장에게 문을 열어준 문지기 포본드라일까. 아니면 원시시대 도롱뇽의 화석인 안드리아스 스케우크 제리나 인간을 웃기고 울린 우두머리 도롱뇽일까. 표면적으로는 '그저 이 아이들(손자)이 나를 용서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마지막을 장식한 문지기 포본드라로 여겨지지만 나는 어쩐지 소설을 이렇게 밖에 끝낼 수 없음을 인위적으로 강조한 에필로그속의 작가, '그 다음은 나도 잘 모르겠다'는 혼잣말의 작가, 즉 그 자신이 주인공으로 분한 것이 아닌가 생각되는데... 마치 누구도 이룩할 수 없는 역사적인 발명품을 만들어 놓은 과학자가 그런데 이것이 무엇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고 말하는, 어려운 시험에 수석합격한 한 학생이 왜 내가 제일 성적이 좋은지 잘 모르겠다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모르겠다는 그 말이 겸손이나 회피가 아니라 심각한 진심으로 들리는데 그것은 나만의 착각일까.

그렇다. 나는 이 소설의 주인공이 도롱뇽이나 인간이 아닌 두 입장을 분석하고 정리한 중립성격의 아나운서 혹은 양쪽의 상반된 의견을 수렴, 전달하는 토크쇼 진행자로서의 작가자신이라 생각한다. 이로써 그는 그 시대 지식인으로서의 책무에 비교적 자유로와 질 수 있었으리라는 생각이다. 그는 아버지가 의사이고 형제들이 예술계로 진출하였으며 배우자로는 여배우를 택한 것으로 보아 늘 우등생으로서 그다지 열등감을 가질 생의 이력은 없어 보였다. 성공이나 야망을 성취하겠다는 개인의 목표보다는 자신이 가진 능력을 한데 모아 집결시킨 행위로서의 문학이 시대에 가지는 영향력을 상당히 우월적으로 고민한 듯하다. 비슷한 시기에 선진국 이웃나라에서 양심과 죄의식에서 벗어나려 문학을 하였던 조지오웰을 떠올려 보면 그가 행하는 문학 방식은 격조높은 고상함의 결정이라고 느껴지기도 하는데 그 시대로 본다면 문학으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것이 아닐까 싶다. 선량한 시골의사라도 인류구원의 보편적 난제에 봉착하게 된다면 누구보다 뜨거운 피가 돌듯 대 유럽 열강틈의 지식인이 감지한 인류문명의 위기란 더 객관적이고 더 치밀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이 작품에서 등장하는 세 명의 주요인물은 각각 기존의 인간문명에 새롭게 도착한 新문명을 발견, 개척, 수용하는 대표적 인물로 그려진다. 먼저 반 토흐 선장은 누구나 적개심과 두려움을 품었던 도롱뇽이라는 미지의 존재를 인간과 관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유능한 타자로 인식하는 위대한 '발견자'를 표상한다. 반 토흐 선장 이전에도 도롱뇽을 발견하는 인간들이 있어는 왔겠지만 선장의 허풍과 사기치는 능력이 어찌보면 인간이기에 흐르는 붉은 피와 더운 심장을 상징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인간은 외부의 온도에 따라 몸의 체온이 변하는 변온의 냉혈동물이 아니고 늘 따뜻하게 포용하는 심장을 가진 온혈동물인 것이다. 반 토흐 선장은 발견에서 그치지 않고 도롱뇽에게 칼이라는 도구를 쓰는 법을 가르쳐 진주를 캐게 하는 동화적 판타지를 실현해 보이는데 선장의 국적이 네덜란드라는 점이 흥미로왔다. 바다보다 낮은 땅을 개척하며 살아야 했던 나라, 한때 해상왕이었던 유랑인 기질의 국민성, 자신 속에 머물지 않고 다른 세계로 뛰쳐나가는 모험심... 반 토흐 선장이 도롱뇽을 보고 계산기를 두드린 심정이 가슴과 머리가 동시에 작동한 유능한 네덜란드인을 떠올리게 했다.

또 한명 사업적 아이디어를 실현시켜 줄 사람을 찾다가 고향친구를 생각해 낸 선장을 문전박대하지 않고 직관에 의해 주인과 만남을 허락해준 문지기 포본드라는 다음 세대를 향해 인류의 지속적인 고민을 남겨놓은 인물이다. 그는 훗날 도롱뇽이 인간을 지배하는 형국이 된 세상에 이르러 그 시절 선장을 집에 들여보내 줌으로써 인류역사에 진취적인 공을 세웠음을 자각하듯이 똑같은 이유로 인류멸망의 위기를 초래했음에 자책하는 선량한 소시민을 표상한다. 도롱뇽에게 인간세계의 문을 열어 준 것이 전세계를 망하게 하는 시작이었다는 포본드라의 자책은 우리가 다같은 인간임을 자각케 하는 뼈있는 농담이기도 했지만 아무도 잘못했다고 여기지 않는 인간들 속에서 어렵사리 밝혀진 촛불심지를 발견하는 다행의 순간이기도 했다. 포본드라는 작품속에서 도롱뇽에 관한 온갖 기사를 스크랩하는 집착을 보여주는 사람이기도 했는데 결과적으로 그는 도롱뇽에게 인간세계의 문만을 열어 준 것이 아니고 그들의 사료를 인간들의 책꽂이에 차분히 꽂아두는 인류문명의 시행착오에 증인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만 것이었다.

바로 이 책을 전혀 환상소설로 볼 수가 없는 이유가 포본드라의 책꽂이에 기인한다. 전체 3부 중 2부에 해당하는 <문명의 사다리를 오르다>에 동원된 컬러풀한 라이브러리는 이 책의 백미이기도 하지만 그렇게 다른 작품에서는 평생가도 만나지 못할 독보적인 분량이었다. 포본드라가 도롱뇽으로 인해 새로운 육지와 섬들이 건설되고 있다는 기사를 읽고는 그때부터 신문기사를 수집하기로 결심한 장면으로 시작되는 2부의 이야기는 글쟁이로서 카렐 차페크가 가진 역량을 모두 보여준 실험무대였다. 그는 오랜 기자생활과 학문연구, 번역작업, 여행경험, 극작가로서의 연출경력을 동원해 소설이 아닌 보고서, 신문기사, 인터뷰 취재글, 사회적 구호글, 각종단체의 호소문, 회의록등을 죄다 지어서(?) 종합선물화 하였는데 이 깊이와 넓이에 혀를 내두르지 않을 독자는 진정 도롱뇽 그들밖에 없을 거라는 확신이 들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반 토흐 선장의 동화적 판타지에서 시작해 저널리즘적 글쓰기가 소설로 분한 격조높은 사기행각이 그저 문학이라는 하위장르에 그만 우연히 정박하고 말았던 것은 아닌지. 바로 아무도 그처럼 다시 살아갈 사람은 없을 것이기 때문에 다시는 그와 같은 작품은 세상에 나올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지만.

그는 도롱뇽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한 것일까. 아니 왜 인간을 통해 도롱뇽을 말하려 한 것일까. 어렵지 않게 인간의 이기심이 불러온 탐욕의 결과로서 결국 인류가 멸망할 수 있음을 충고하는 것이겠지만 나는 그러한 알려진 거시적인 교훈외에 좀 꺼내기 미안한 생각을 해보았다. 도롱뇽이라는 신문명이 인간세상에 출현했을 때 사람들은 저마다 각자의 위치와 역할에서부터 그들을 고민하고 결론짓는 행태를 볼 수 있었다. 영화배우는 도롱뇽과의 스펙타클한 영화촬영을 생각하고 과학자는 열심히 논문을 작성한다. 경제쪽은 열심히 통계치를 뽑아내고 법률가는 도롱뇽과 같이 살기위한 세상의 법을 만들고 장사꾼은 노동력으로서, 상품으로서 그들을 궁리한다. 정치인은 국가의 이익을 위해, 군인은 무기로서의 활용에 대해 신문기자는 모종의 특종을 위해  도롱뇽을 철저히 연구, 분석한다. 이렇듯 우리들 모두는 자신들이 살아가는 방법대로 대상이 되는 문명적 존재를 사유하고 수용할 수밖에 없는 존재들인 것이다. 인간이 살아가는 방법은 이렇게도 철저히 내 본위이고 내 중심인 것이다. 누군가 도롱뇽 입장에서 그들을 위해 발언을 하는 사람이 있었다면 그는 아마도 동물단체 회원이거나 그들의 변호사이었음이 틀림없다. 이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아주 분명하면서도 무서운 현실이 아닐까. 나는 그래서 이 작품은 지극히 잔인한 현실문학이라 생각하며 인간이 살아가며 독서라는 것을 멈추지 않는 한 영원히 유효한 현실로 남을 것이라는데 한 치의 이의가 없는 바이다.

내가 서늘한 것은 인간이 도롱뇽과도 전쟁을 할 수 있음이 아니라 그 무엇이라도 전쟁을 할 수밖에 없는 인간에 있었다. 차페크는 다행히도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에 망명하지 않아 질병으로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별히 애국자이어서 나라를 버릴 수 없었던 것일 수도 있지만 나는 전쟁이라는 시간과 공간에서 절대 자유로울 수 없었던 그 시대 지식인으로서 자신의 죽음에 자존을 지킨 행위였다고 느껴진다. 자신이 써온 글과 이루어온 문학에 약속을 지킨 것이라 생각된다. 투사나 열사만이 저항의 문학은 아닐 것이다. 차페크는 이미 그 위에서 자유로왔던 것은 아닐까.

다만, 인간이라는 존재가 정말 별 것도 아니라는 이 벌거벗은 느낌만은 오랜동안 소중히 간직해 볼 생각이다. 이데올로기와 산업화가 창궐했던 그 시절 천재적인 작가를 만나보아 뜻깊은 시간이었다. 모래알에 소중하게 떨어진 진주 한 알을 발견하듯 운좋게도 뼈아픈 진리 한 줌을 잡아 올린 느낌이다. 읽는 내내 적들이 절대 파충류 혹은 양서류 혹은 미지의 초록 동물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깨끗하고 반듯한 작품이었다. 역겨운 건 그들이 느낀 우리 인간들이라는 걸 재차 설명할 이유가 없을 터. 도롱뇽과의 전쟁은 악마와의 전쟁도 괴물과의 전쟁도 아닌 그저 우리끼리의 전쟁이었다. 그것이 도롱뇽이 되었건 공룡이 되었건 우린 아마 살아있는 한 숨이 끊어질 그날까지 전쟁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인간이길 깨닫기 위해 우린 상대를 발견하고 적대화할 수밖에 없는 소심한 존재들인 것이다. 그것은 슬프게도 시간이 되면 다시 허기가 살아나는 우리네 본능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그럼에도 아니된다 그만하자 소리치는 것이다. 아무리 소리쳐 보아도 도롱뇽의 신음소리 만큼도 메아리가 돌아오지 않을 때 우린 이렇게 멋진 천재를 그리워하지 않을까. 그 다음은 잘 모르겠다 말하는 천재, 다만 이번엔 용서해 달라는 천재의 짜릿하가도 반가운 목소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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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0-12-14 2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까지 살면서 난생 처음 이런 별종(?) 소설을 재미있게 읽은 것은 처음이에요.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나서도 소설이 준 인상이 강하게 남았었고요.
이번에 선정도서가 되어 소장하게 되셔서 부럽기도 하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