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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토 랩소디
애덤 셸 지음, 문영혜 옮김 / 문예중앙 / 2010년 10월
평점 :
품절
실은 와인을 많이 좋아했다. 처음엔 잠이 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한잔씩 훌쩍 거리다가 어느날인가 부터 와인맛을 알게 된 경우인데 심각하게 소믈리에 공부를 해볼까도 생각했었다. 늦게 배운 도둑질이 날 새는 줄 모른다고 나는 급기야 와인 장사도 했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이탈리아의 토스카나 지방은 와인생산지로도 유명한데 바로 이탈리아의 자존심이라고 하는 토착품종인 산지오베제(Sangiovese)를 그 품종으로 재배하는 곳이다. 중장년층은 프랑스의 카베르네 소비뇽 위주의 풀바디한 와인을 즐겨 찾지만 패셔너블한 젊은 층은 과일향이 독특한 이탈리아산 산지오베제를 많이들 찾는다. 남자손님보다는 여자손님에게 더 반응이 좋은 편인데 뭐라고 할까...맛이 상당히 관능적이라 목으로 넘기기 전에 느껴지는 미감이 살짝 마음을 들뜨게 하는 경향이 있다. 이건 19금이긴 한데 와인을 마시고 키스를 하면 입안이 텁텁한 느낌 때문에 썩 유쾌하지(?) 않은 경향이 있으나 산지오베제는 향수같은 과일향이 나는 덕에 시간이 지나도 안심(?)할 수 가 있다. 그래서 나는 사귄 지 얼마 되지 않아 보이는 커플인 경우 산지오베제를 주로 권해왔다. 또 프랑스와인은 마음을 가라앉혀 대화를 심각하게 하는 반면 이탈리아 와인은 사람을 수다스럽게해 분위기를 화기애애하게 만드는 특성이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지난 일년 간 잊었던 와인이 어찌나 당기던지 잠시 죽어 지내던 미각이 기적적으로 되살아나는 듯 했다. 하필 내가 운영하던 가게는 이탈리안 음식들로 낮장사를 했기 때문에 스파게티를 지겹도록 삶아야 했는데 주방장이 도망을 가는 바람에 한 삼개월 토마토 소스를 뽑느라 고생한 적도 있다. 그래서 책을 읽는 내내 홀에서, 주방에서 시끌벅적했던 지난 시절이 떠올라 와인과 토마토의 추억에 젖느라 시간가는 줄 모르고 책을 덮었다. 인생이란 참 알 수가 없다. 울다가 웃으면 어디가 어떻게 된다고 하던데 나는 와인레스토랑을 하면서 웃다가도 울고 울면서도 웃어버린 적이... 더럿 있었다. 이 책은 그렇게 울다가 웃는, 아니 웃다가도 우는 책이다.
요즘도 이런 책을 쓰는 사람이 있는지 살펴보니 작가가 나와 갑장인데 모르긴 해도 이 사람 아마 대가족속에서 '재미난 이야기 시끄럽게 떠들기'를 취미와 특기로 가진 가족구성원들과 습관처럼 화끈한 삶을 살아온 사람이지 싶다. 최근에 이렇게 서사의 밀도가 높은 소설을 만나본 지가 꽤 오래되었는데 시나리오로서도 완성도가 높아 극영화를 염두해 둔 작업으로도 느껴진다. 언뜻 보기엔 영화로도 유명해진『달콤 쌉싸름한 초콜릿』(라우라 에스키벨, 1989)과 같은 요리문학의 장르로도 볼 수 있는데 요리자체에 페미니즘이나 에로티즘을 반영해 여성의 자아를 부각하는 것에서 진일보해 하나의 식자재가 나라를 이동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인종과 종교, 문명의 충돌및 역사적 배경을 남녀간의 금지된 러브스토리와 잘 조합해 훌륭한 문학적 레시피를 완성했다는 고전적 성취를 거뜬히 이룬 듯하다. 영화로 본다면 비극적 요소가 결국엔 희극이 되는 해피엔드의 로맨틱 코미디 장르를 벗어날 수는 없어 보이나 작가의 연출은 다분 중세 이탈리아 시골마을을 배경으로 하는 블록버스터형 드라마를 지향하고 있다. 등장인물의 캐릭터도 이야기와 표정이 섬세하게 살아있어 개성강한 조연들이 남녀주인공 못지 않게 활약이 클 듯하다. 이력에는 영화를 전공하고 CF감독과 시나리오작가, 주방장, 요가강사등의 꽤 다양한 직업을 두루 거친 것으로 보아 영화감독의 크레딧에서 그의 이름을 확인날도 멀지 않은 것 아닐까.
이야기는 논노라는 유대인 노인의 나귀가 고독하고도 처량한 울음소리로 마을의 새벽을 깨우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 나귀는 16세기 중반 에스파냐의 종교박해를 피해 토마토를 이탈리아에 가져온 유대인의 파란만장한 인생과 당시시점의 고독과 회한을 상징하는 동물일 것이다. 요즘의 판타지 영화로 치자면 주인공의 수호정령을 의미하는 데몬의 성격을 가지는데 소설의 후반부에 이 나귀가 손자를 위해 큰 역할을 하고 근사하게 죽자 바로 노인도 유사한 모습으로 죽게 되는 삶의 연계성을 시사하고 있다. 결국 이야기는 生을 자극하는 나귀의 울음소리와 死를 받아들이는 나귀의 울음소리 사이에 위치하는데 처음 울음소리를 듣고 주인공 모두가 각자 자신의 인생에 감지되는 불편한 심기를 느꼈다면 마지막 울음소리에선 비로소 사랑과 용서로 인생의 의미를 깨우친다는 서사적 대칭구조를 취하고 있다. 늙은 군주를 떠올리게 하는 나귀와 동일시되는 노인은 이 나귀의 새벽울음소리에 카톨릭교도의 마을에서 유대인으로 산다는 것에 회한을 느껴 같이 눈물을 흘리지만 죽을 때는 나귀가 그러했던 것처럼 함박웃음을 머금고 기꺼이 행복한 죽음을 맞이한다. 가장 슬픈 순간에 가장 기쁠 수 있는 삶의 아이러니가 이 작품의 주제라고도 할 수 있는데 노인은 소설속의 가장 기쁘고 다행스러운 순간에 어이없게도 죽음을 맞이하면서 작품의 주제를 가장 멋들어지게 실천하는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유대인 노인의 손자 다비도는 토마토를 재배하고 토스카나 마을의 카톨릭처녀 마리는 올리브를 재배한다. 청년과 처녀는 모두 땅을 사랑하고 토마토와 올리브에 있어 전문가로 등장한다. 다비도에게 있어 토마토는 빨강의 풍요와 생명의 기운을 의미하며 마리에게 올리브는 아버지와의 초록빛 추억과 조상에 대한 경의를 상징한다. 청년의 토마토가 자신의 심장이라면 처녀의 올리브는 혈관에 흐르는 피와도 같아 보인다. 이 두 사람은 하나의 심장에 같은 피가 흐르는 사랑을 성취할 수 있었을까. 표면적으로는 토마토청년과 올리브처녀의 로미오와 줄리엣식 금지된 사랑이라는 서사의 큰 줄기가 핵심인 것은 틀림없지만 막상 이들이 만나는 장면은 그리 빈번하지 않으며 첫만남과 첫키스, 마을의 축제, 그리고 심판의 날이 되기까지 이들을 지탱해주는 더욱 탄탄한 스토리는 오히려 마을사람들의 웃기다가도 짠한 사연들에 있다고 보여진다. 즉, 토스카나 마을의 대공이면서도 마음편하게 농사를 짓는 것이 꿈인 코시모 대공과 분노를 요리할 줄 아는 그의 요리사 루이지, 마리의 의붓아버지이면서 온갖 음모와 계략으로 두사람의 사랑을 방해하는 주세페, 주세페의 가엾은 똘마니 베니토, 대공의 어린 시절 친구이면서 남장으로 바보행세를 하는 보보, 가장 공정하면서도 지혜로운 마법사 굿 파드레 신부와 복사 베르톨리, 그리고 무카와 시뇨레, 벤체초를 비롯한 왁자지껄한 시장사람들의 유머러스하고 생생한 목소리, 이들의 잡음과 소음이야 말로 이 작품의 가장 진솔한 매력으로 생각된다.
작가는 이들 개성강한 주변 인물들의 사연을 하나씩 늘어 놓으면서 과연 우리네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일 지 스스로 생각을 유도해 내는 작법을 시도하고 있는데 그 답으로 토마토 청년과 올리브처녀를 바라보게 하고 있다. 그런데 구태의연하게 선은 좋은 것이요 악은 벌을 받는 것이라는 권선징악으로 인생을 마무리하지는 않고 산다는 건 토마토처럼 상큼발랄하다가도 올리브처럼 쌉싸름한 것이라 이 두 가지가 절묘하게 하나가 되어 그럭저럭 누구도 견뎌볼 만한 것이라는 꽤 서글픈 그러나 끄덕이고 싶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인생을 견디는 이유는 포도로 포도주를 만들고 올리브로 올리브유를 만들고 토마토로 소스를 만드는 이야기로 설명이 되어 진다며 이 과정은 꼭 기쁨과 슬픔이 늘 공존하는 우리네 인생과 같다고 말하고 있다.
인물의 역학구조를 보면 가장 대립되는 인물은 다비도의 할아버지 논노와 마리의 의붓아버지 주세페로 볼 수 있으며 이들을 중간에서 조율하는 중립의 역할이 가짓빛 피부를 가진 신비의 인물 굿 파드레 신부라 할 수 있다. 다비도의 할아버지는 원래 에스파냐의 재무장관출신으로 뛰어난 두뇌덕에 콜럼버스의 신대륙 항해에 참여했다가 신세계 원주민들과 10년을 산 후 유럽으로 돌아온 기적의 생환자였다. 논노는 수학과 언어가 뛰어난 유대인 지도자를 표방하며 이기고 쟁취하는 것 보다는 지고 빼앗기더라도 살아남는 생존이 곧 미덕이라 생각하는 현실주의자 이기도 했다. 논노는 원주민으로부터 토마토 씨앗을 선물로 받아 이탈리아의 비옥한 땅에 열매를 맺는 '헌신'과 '사랑'을 실천하게 되는데 그는 극중에서 가장 연장자이면서 많은 상처를 겪은 현자賢子로서 우리에게 의미심장한 조언을 남긴다. 씨앗을 사랑하는 사람은 없으나 심고 가꾸면 열매를 맺게 되고 많은 노력과 희생을 치루고 나면 열매를 먹을 수 있으며 축복받았다면 그 열매의 맛까지 달아서 사랑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손자에게 전해준다. 즉, '노력없이 단맛을 원하지 말라'는 논노의 인생원칙은 그대로 다비도와 마리의 삶의 원칙에 복제되기도 하며 토마토가 온갖 희생을 치르며 이탈리아에 정착하게 되는 고단한 과정을 암시하기도 한다. 나는 책을 덮고도 다비노와 마리보다는 노인의 말과 행동이 더 오래 남았다. 그는 주연보다 더 멋진 조연이었다.
이에 반해 주세페는 마리의 아버지를 죽이고 올리브 농장을 빼앗아 마리에게 노동을 착취하며 논노의 땅까지도 넘보는 파렴치하고도 탐욕적인 인물로 작품속 악의 축이라 할 수 있다. 마을 사람들은 이러한 주세페의 비열한 인간성을 익히 알고는 있지만 재력을 가진 그에게 행여 피해를 입을까 입바른 소리를 하지는 못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군중심리에 편승한 우매한 농민들의 마녀사냥식의 열띤 토론은 흡사 연극무대의 한 장면처럼 한명 한명의 대사에 강렬한 힘이 실려 있어 작가의 인물에 대한 애착을 느낄 수 있었다. 주세페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끝까지 베니토와 보보, 시장 상인들을 뒤에서 조종하고 사주하는 사기꾼으로 악역으로서 성실을 다했다. 원래 포도주를 양조하는 사람들이 아주 지혜롭거나 사악하거나 극단적인 행보를 보이곤 하는데 비밀이나 진실을 알아버린 사람들은 그 비밀과 진실을 약으로도 혹은 독으로도 사용할 수 있는 양날의 칼을 손에 쥐게 되는 것은 아닐까.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는 그 충격으로 뇌졸중에 걸려 반신불수가 된 상황에서도 아버지의 올리브 농법을 더 창의적으로 개발해 자신만의 레시피를 가지게 된 마리는 이탈리아의 생활력 강한 진취적 여성상을 표방한다. 실제로 이탈리아 국민성이 우리와 비슷해 다혈질의 여성들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이런 마리에게 시종일관 유대인이라는 열패감으로 적극적이지는 못했던 다비노가 마을의 '술취한 성인의 축제' 나귀경주에 참가해 늠름하게 우승하는 모습이나 마지막 심판의 광장에서 모든 것은 유대인의 마법과 책략으로 여자를 농간한 것이니 마리를 살려 달라 애원하는 장면은 누가 주인공이 되었건 영화라면 반드시 하이라이트 장면이 될 것으로 보였다. 작가의 스토리텔링이 워낙 구조가 탄탄해 매 순간 매 단락 극적인 스토리가 진행되는 서사의 흐름이 약간의 피곤을 유발하는 경향은 있으나 신기하게도 캐릭터 모두에게 몰입하게 하는 이야기 추진력도 무시할 수 없어 적지 않은 조연급의 인물들이 또 매 신(scene)에서 주인공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그래도 그 가운데 가장 극적인 연출을 꼽으라면 아마 선술집에서 한판 벌어지던 보보의 시칠리아 인형극과 박진감 넘치던 나귀경주 장면이 아닐까. 이 두 장면은 시나리오 작가출신 답게 빼어난 영상미와 현란한 카메라 촬영기법을 적절히 취사하여 글을 읽으면서도 머릿속에선 어느 허리우드의 영화를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키곤 했다. 우리가 영화를 많이 본 것인지 작가가 상상력이 뛰어 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대사의 호흡과 주인공의 액션등은 분명 극본의 형식을 많이 취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만찬에 참석한 고위직 손님들 앞에서 공연되는 오페라인형극은 귀족의 약점과 어리석음을 신랄하게 꼬집는다는 점에서 우리의 박첨지놀이와 같은 풍자와 해학이 가득한 인형극놀이를 연상케 했다. 특히 다비도가 경주의 출발선에서 논노의 늙은 나귀를 타고 할아버지의 자존심을 알아채는 장면, 경주 당사자가 아닌 낯선 이로서 루이지의 시선으로 군중과 경주자들을 바라보는 광경, 축제속에서 한데 어울려 포도주를 나눠 마시며 각자의 상처들을 씻어 내리는 모습, 마지막까지 접전을 벌인 다비도와 베니토의 시선으로 숨막히는 경주를 중계하는 부분은 이 작품에서 가장 화려한 성찬을 선사한 절정의 코스에 해당된다 할 것이다. 중요한 장면이니 만큼 겉으로 드러나는 대사외에 인물들의 내면 심리를 입체적으로 크로스 시키는 능력은 이 작품의 백미라 해도 좋았다.
또 하나 소설속에서 화자는 마치 변사라도 되는 듯 이탈리아 극작가 포초 멘초냐의 <극작법에 관한 신뢰할 만한 논문>을 예로 들며 논문에서 밝힌 원칙을 자신의 소설작법을 완성해 나가는 원칙으로 사용하여 그것을 재차 설명하는 아주 영리한 기법을 시도하고 있는데 나는 이 작법을 가시적으로 활용하는 작법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주인공의 삶에 장애와 고통을 부여하라'는 아주 기본적인 원칙에서부터 '급류와 소용돌이', '낯선 이의 시선을 통해 바라보기', '강물은 흘러서 바다로 가야한다'등의 작법을 언급하며 자신의 의도에 논리를 부여하며 동의를 구하는 센스가 미리 연출된 계산임을 알면서도 계속 설득당하고 싶은 매력을 느끼게 하였다. 신선했다. 형식을 서사와 일치시킨 작가의 재치와 기지에 박수를 보낸다.
올리브처럼 짭쪼롭하고 토마토처럼 물컹한 독서였다. 덕분에 책을 덮으며 느닷없이 철지난 토마토가 먹고 싶어졌다. 사실 어릴 때는 어머니가 토마토에 설탕을 쳐주시는 바람에 진짜 토마토의 맛을 모르고 자랐고 학생때는 햄버거에 뿌려진 토마토 케첩이 내가 아는 토마토의 전부였고 이제 건강에 좋다고 토마토를 갈아 먹기 시작한 것도 십년 정도 될까. 토마토는 고추처럼 맵지도 않고 딸기처럼 달지도 않다. 그런 만큼 메인요리에 스며들어 어디든지 잘 어울리고 다른 음식의 풍미도 자극하는 과일이다. 감수성이 풍부한 이탈리아 사람들처럼 사교적이고 관능적인 과일임에 틀림없다. 우리의 주인공 다비도와 마리는 토마토가 가득 버무려진 가마솥에서 사랑을 나누고 그것으로 자신들만의 사랑스런 소스를 만들지 않았던가. 이보다 더 로맨틱하고 에로틱한 소스는 없을 것이다.
작가는 글쓰는 작업만큼이나 음식을 요리하는 과정을 무척이나 사랑스러워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인생이란 달콤한 토마토에 절인 올리브처럼 짠 눈물이 떨어지는 것이라 말한 것을 보면 단맛도 신맛도 쓴맛도 골고루 실패해보고 또 거짓말처럼 성공도 해보았으리라. 그러고 보니 울다가 웃은 이야기가 하나 생각난다. 그날 주방장이 도망간 날 우린 가게문을 닫을 수 없어 할 수 없이 내가 주방으로 들어갔다. 도망을 갔다는 괘씸함보다 레시피를 하나도 알려주지 않은 사실이 원망스러워 눈물이 왈칵 쏟아지려 했지만 왜 그런지 그날 따라 손님이 끊이질 않아(토요일이었다)실은 울 시간도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열시쯤 되었을까. 주말인데도 식사를 못할 사정이 있었던지 초로의 신사 한분이 스파게티를 한 그릇 주문했고 나는 야박하게 거절할 수 없어 다 정리하고 들여놓은 소스통을 다시 꺼내고 면을 그제서야 삶아 거의 엉망으로 스파게티를 내놓았다. 너무 급한 나머지 불조절에 실패해 위에 기름이 뜨기까지 했다. 그런데 그 신사는 너무나 맛있다며 자기가 먹은 스파게티중 가장 최고였다고 거짓말로 인사를 하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배를 채웠으니 또 한끼 때웠다고 늦게 와서 식사를 주문하는 실례를 범해서 자기가 미안하다고 하는 바람에 나는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집에가서 맥주와 먹게 피자를 한판 구워달라고 추가주문을 하는 것이다. 오늘은 자신이 부인과 이혼한 날이라 집에가도 혼자라는 것이다. 또 마음이 약해진 나는 급히 주방에 들어가 피자도우를 꺼냈는데 거짓말처럼 주방장이 피자를 만들던 모습이 하나씩 기억이 나면서 나도 모르게 피자토핑을 올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스파게티 신사의 처량한 말한마디에 콧날이 시큰해졌다가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마지막 토핑인 방울 토마토를 올려놓고 보니 꼭 도망간 주방장 얼굴로 보이는 것이다. 너무 웃겼다. 웃음을 참을 수 없어 키득키득 소리가 새어나왔다. 웃음으로 피자를 겨우 포장하고 손님은 퇴장했다. 그런데 그릇을 치우다가 바깥에 손님이 서있는 모습을 목격하고 말았다. 전화기 폴더를 열었다가 다시 닫는 순간이었다. 손님은 한참을 그 자리에서 떠나지 않았고 나는 그제서야 참았던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그 손님이 집에 가면 너무 외롭지 싶어 눈물이 났다. 그 순간 왜 내 설움이 같이 터진 것일까...
웃어 넘겨야 할 슬픔이라고 했다. 울 일을 감수하는 것이 인생이라 했다. 그러다 보면 웃을 일도 생기는 것이 인생이기 때문이다. 왜 아니겠는가. 실컷 울고 나면 그게 그렇게 웃길 수도 있는 것이지. 말 못해서 울고 말하다가 웃고 남이 우니까 울고 남이 웃으니 웃는다. 두려워서도 울고 두렵지 말라고도 웃는다. 어쩌면 인간이 태어나 가장 잘하는 일은 날 때부터 울었던 일과 잘때도 웃었던 일일 지 모른다. 어짜피 울을 거 어짜피 웃을 거 사는 동안 실컷 울고 실컷 웃어야 하지 않겠나. 어떻게 살 수 있을 것인가. 이 모진 세상 한 번도 울지 않고. 어떻게 죽을 수 있을 것인가. 이 좋은 세상 한 번도 웃지 않고. 울지 않으면 웃지 않으면 우린 살 수 없는 것이다. 당신이 웃으니 나도 따라 웃어 볼테다. 내가 운다면 당신도 날 안아달라. 혹시 내가 울 때 당신 웃거나 내가 웃을 때 당신 울더라도 역시 웃거나 울어 넘겨 보겠다. 그렇게 더 할 수 없이 웃고 여한이 없을 만큼 울었을 때 우리 그때도 또 한번 웃자. 누군가는 그런 나를 위해 울어줄 사람 있다고 믿자. 달콤해도 쌉싸름한 당신과 나, 그 맛은 우리 다같은 인간의 맛, 공평한 비극의 희극맛, 산다면 꼭 보아야 할 우리 자신맛, 소설보다 맛있는 리얼 성찬맛, 그것은 인생, 인생이라는 최고의 만찬 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