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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식 이야기
베르나르 키리니 지음, 임호경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9월
평점 :
무어라 말할 수 없는
오랜만에 즐겁다. 책 한번 덮었다고 그걸로 끝나는 것이 아닌 다시 펼쳐 들어야 하는 서평자의 입장에서 이런 식의 작품과 이런 류의 작가를 만난다는 건 내면적인 독서일상에 일종의 '외출'한다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이른바 성의껏 '서평'을 해보고 싶다는 흥분된 욕구를 불러 일으킨다고 할까. 의욕을 한없이 망가뜨리는 책들도 많으니 문학성, 감동과는 별개로 필력筆力의 의지를 자극한다는 것은 분명 문학이 가지는 문학을 향한 긍정의 힘일 것이다. 세상에는 참 많은 작가가 있는데 세상 반대편의 누군가는 자신의 글을 읽고 커피 한잔이 더욱 활기차게 느껴진다면 그 작가 얼마나 행복하겠는가. 다만 그가 내 이런 일상의 미소를 알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까울뿐. 서두가 너무 지루하다. 이 작가, 한달 밖에 남지 않은 올해에 내가 수확한 최고의 행운으로 오래 기억하고 싶다. 제대로 건졌다.
앨런 포와 보르헤스를 잇는 작가라는 평가를 받는다 했다. 내 주제는 그런 대가들을 입에 올릴 자격이 되지 않기에 그저 내가 읽어온 한국의 작가와 많은 단편(단편은 좀 읽었다)들 속에서 그를 한번만 올려놓을 기회를 허락해 준다면 '한국적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 나는 이 작품을 읽는 중간에 나도 모르게 몇 사람의 한국작가를 떠올릴 수 있었다. 그는 최근에 만난 젊은 작가(우연히 그와 출생연도도 같다) 배명훈을 생각케 한다. <안녕, 인공존재>의 몇몇 작품들을 연상케 하는 서사와 우주적 상상력은 무언가 동시대를 살아가는 동연배의 젊은 작가들을 무리짓고 싶은 어른된(?) 습관일지 모르겠다. 그런데 이 작가, 배명훈에게서 살짝 부족하게 느껴졌던 (그들의 작품에 주인공으로 등장하는)'이상한 사람들'에 대한 인간적 통찰 혹은 배려마저 철학적 고민화하는 고전적 면모까지 갖추었다. 그런가하면 서사를 이끌어가는 환상개념들에 대한 사회적 질문까지 잃지 않는 기자된 책임 또한 엿볼 수 있다. 흡사 김훈의 날카롭고 예리한 시선을 마주하듯. 그런데 한술 더 떠 간혹 신예작가들에게서 느껴지는 문체의 터프함이 도시적 세련미로 가공되는 안정감(이것은 번역의 탁월함도 한몫했음을 배제할 수 없지만)은 무엇인가. 김영하식의 뜨거운 냉소가 자꾸만 겹쳐지는 놀라움은 급기야 초현실적인 상황을 묘사할 때 서늘해지는 편혜영의 그로테스크함으로 마무리 되고 있었다. 결론적으로 정리하면 그는 문학적 상상력과 인간과 사회에 대한 통찰력, 문체의 안정감과 표현의 독창성까지 갖춘 한국에서 보기 드문(많은 작가들의 장점을 고루 버무린) '무어라 한마디로 말할 수 없다'는 그 한마디로 대신하고픈 작가라 할 수 있었다.
우리는 벨기에 태생의 그러니까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문화권에서 강렬하게 주목받고 있는 이 작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나는 이 작품을 읽으면서 전혀 번역문학에서 오는 문장의 어색함이나 문화적 시각의 차이 같은 것을 느낄 수 없었다. 내가 위에서 제기한 정갈하고 안정된 문체라는 것은 실은 번역의 공이 반 이상 일 것이다.(물론 이 작가를 평할 때 단아한 문체라는 평도 놓치지 않았다) 그것은 어쩌면 우리의 불어불문학 실력이 그네들의 한국어, 한국문학 실력보다 월등히 우수하기 때문일지 모른다. 통한 스럽다. 우리의 젊은 작가들이 많은 단편에서 인물과 서사가 주가 되는 선굵은 작법을 구사하지 않고 문체와 스타일위주의 전략적 글쓰기에 주력한다면 그 훌륭하고 멋 드러진 문체와 스타일을 과연 누가 어떤 한국어, 한국문학 전공자가 유려한 불어로 번역해 줄 것인가. 내가 서두에 우리 작가들의 장점을 버무린 보기 드문 작가라고 칭한 것은 그만큼 우리 작가들이 나름의 자신만의 뚜렷한 특질과 매력을 가진 작가였기에 나는 우리에게서 우리로부터 그의 장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는 말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는 처음으로 유럽에 먹히는(유럽에 먹히면 세계에 먹히는 거다)젊은 작가의 작품을 보고 역으로 우리작가들이 그를 뛰어넘는 자질을 가지고 있음에도 (아직은)먹히지 못함이 땅을 치듯 아쉽고 안타까운 심정이었다. 외람되지만 한국문단에서 아주 좋아라 할 것 같은 이 작품을 글공부를 하는 많은 젊은 친구들이 우리 젊은 작가들의 작품과 비교하며 꼭 읽어보아야 할 것이라 추천하고 싶다. 무엇이든, 어떤 의미로든 자극이 될 것임에 틀림없다.
방식을 이야기하는 방식
이 작품에는 표제가 된 <육식 이야기>를 비롯해 총 열 네 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각 편의 밀도와 스토리 장악력이 고른 수준으로 포진되어 있어 흡입력은 있지만 쉽게 넘어가는 작품은 하나도 없다. 시장바구니에 예상목록보다 넘치는 장거리를 가득 채우고 돌아온 심정. 책을 덮고 머릿속에 정리되던 하나의 키워드는 '방식'이었다.
우리는 내가 살아가는 길을 마이 웨이(My Way)라 노래 부르고 내가 옷 입는 방식을 스타일(Style)이라 규정한다.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방식을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이라 말하기도 한다. 그림을 그리는 화풍은 브러쉬(Brush)라 말하고 노래를 부르는 창법은 보이스(Voice), 소설을 쓰는 방식을 작법(Techniques)이라 칭하기도 한다. 방식을 이름하는 방식은 다르지만 소설가든 예술가든 각자 자신이 살아가는 방식을 추구하며 삶이라는 행로를 걸어가는 것이다. 방식은 일상을 이루는 작은 습관에서부터 사람과 대화하고 사랑하는 방식, 예술을 창작하고 감상하는 방식, 어쩌면 태어나고 죽는 방식에 이르기까지 곧 그 사람의 정체성을 설명하는 중요한 포인트이자 놓쳐서는 안 될 기회일 것이다.
베르나르 키리니는 사람들이 태어나 살고 죽는 것에 일률적인 방식이 아닌 무언가 색다른 방식에 대해 기발한 상상력을 도저히 멈추지 못하는 사람으로 생각된다. 여지껏 살아온 익숙한 방식에 별다른 불편함을 못 느끼는 대다수의 독자(이런 류의 생각을 해볼 필요조차 없는)들은 그의 이야기가 마냥 즐겁고 색다를 것이며 만약 이런 류의 소재와 이야기를 찾아 고민해온 사람들이라면 그의 재능에 좌절하거나 심각한 질투를 느낄 것이다. 내가 주목한 것은 이야기의 마지막 바느질 한 땀, 마무리 끝선의 마감처리였다. 이야기가 기발하고 독특한 단편일수록 마지막 마무리의 부담이 훨씬 크다고 본다. 이것은 쉬운 예로 디자인과 텍스쳐의 패턴이 독특한 자켓을 떠올리자. 소맷단 박음질이 깔끔치 못할 때 느껴지는 불신과 실망감을 생각하면 된다. 이토록 초현실적인 상상력 위에서 매 이야기 마다 그토록 깔끔하고도 통쾌한 엔딩으로 마무리 할 수 있다는 것은 오랜 훈련의 결과인지, 타고난 재능인지 작가의 스타일인지는 잘 모르겠다. 자신도 모르는 새 이루어진 그만의 능력일 것이다. 예전에 내 상사는 주로 일본말로 현장을 지휘하는 분이었는데 그분의 말투를 잠시 빌리겠다. 기깍기가 딱딱 들어 맞는 기분, 히야시 제대로 된 맥주, 단도리 잘쳐진 부하...그분이 불어를 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이쯤에서 긴 찬양의 건배를 마치고 그가 이야기를 꾸며대는 방식을 이야기해보자. 물론 내 방식대로다.

- 사랑, 소통, 예술, 소설하는 방식
...사랑하는 방식 / 밀감, 뒤섞인 사랑, 육식이야기
이 작품의 첫 수록작인 <밀감>은 마치 어느 대형콘서트에서의 걸그룹 오프닝을 연상케 했다. 나머지 무대들도 다채롭고 흥분될 것 같은 기대감을 한껏 부풀려주었기 때문이다. '오렌지 주스에 피를 섞어 마시는 남자'라는 주인공의 사연이 주된 서사인 이야기가 오렌지처럼 신선하면서도 피처럼 소름끼치는 양면성이 그 표현과 주제의 핵심이라 할 것이다. '오렌지 여인'을 사랑하게 된 한 남자는 그녀의 피부 대부분이 오렌지껍질로 덮여있는 그녀의 본질을 확인하지만 자신의 사랑을 멈추지 않고 그녀의 오렌지 껍질을 하나씩 벗겨나간다. 이야기의 표면에는 껍질을 벗기는 행위와 껍질속 속살의 여인과 나누는 사랑을 감각적으로 표현했지만 이야기를 덮고 나면 온몸에 돋던 소름이 뇌리 한구석을 때리며 이내 마음 한구석을 아프게 한다. 상대의 본질을 파괴하면서까지 자신의 사랑을 추구 하는 일은 결국 자신을 파괴하는 것과 다르지 않음을 깨달았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들은 작품속 화자 역시 자신의 욕망을 이기지 못하고 그의 행위를 모방하며 여인들의 피를 주스에 섞어 마시는 성적환타지에 그의 방식을 차용했다는 것, 그것에의 흠칫함이었을 것이다. 작가는 이 작품 외에도 줄곧 이야기의 결론과 그것을 듣고 말하는 화자의 결론(질문이나 의견)을 부연시켜 독자인 우리로 하여금 들키고 싶지 않은 속내나 궁금한 의문들을 미리 알고나 있었던 것처럼 답해주거나 약 올리는 방법을 사용한다. 세상의 온갖 종류의 음료에 섞어 마실 성적인 흥분을 촉진하는 최음제가(그것이 피가 되었건 독이 되었건) 무엇인지 한번쯤은 궁금하기는 했었던 독자들을 조금은 비웃어 주면서 말이다.
사람을 사랑하는 방식이 그 사람의 도덕성을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하면 우리는 곧바로 결혼과 배우자라는 조건부 개념들을 떠올리곤 한다. 배우자가 있는 사람이 사랑을 하는 방식은 애석하게도 배우자에게만 유효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뒤섞인 사랑>에서는 아내 외에도 세여인의 정부를 둔 어느 육십세 은행원의 바람둥이 행각을 통해 그 '사랑하는 방식'도 결혼을 유지하는 방식이 될 수 있음을 역설한다. 사랑하는 마음을 잘 정돈된 7단 서랍장에 골고루 정리해 놓고 일주일을 보내던 바람둥이는 어느날 호텔의 화장대 거울에 여자들이 섞여 나타나는 초자연적 현상에 놀라 자신의 문제점을 생각해본다. 바람둥이는 해결방법으로 자신의 문란하고 파렴치한 마음속 7단 서랍장을 해체할 것이 아니라 대상을 반영하는 표면으로서의 거울을 없애는 방법을 택한다. 세상의 모든 거울을 없앤 줄 알았는데 그만 자신의 아내가 골동품 거울을 사다 들여 놓은 날, 그는 자신의 정부들이 등장할까봐 황급히 거울을 치우지만 실은 그 거울은 아내의 부정을 알려주려는 거울이었던 것이다. 바람둥이가 자신의 마음을 고쳐먹었다면 누구에게나 공평한 거울이 선사하는 진실을 알아 챌 수 있었을텐데 이 얼마나 억울하고 우스운 결말인가. 거울처럼 반사하는 반전의 마지막이 참 통쾌했던 작품이었다.
사랑을 하는 데 있어 그 대상이 꼭 사람이라는 법은 없다. 이 책에서 가장 충격적이면서도 이야기로서 가장 화려하고 흥미진진했던 <육식이야기>는 사람이 식물에 집착하며 그 속에서만 자신을 찾는 외로운 사랑의 이야기이다. 파리지옥이라는 식충식물에 매료된 식물학자의 처참한 최후와 그 진실을 밝히려고 하는 조수의 편지가 마치 비밀을 한꺼풀씩 벗겨나가는 추리소설처럼 관음적 쾌감을 불러 일으킨다. 이단과학자라 불린 라투렐은 식물을 단순히 학문적 연구대상으로 인식한 것이 아니라 숭배해야 할 군주이자 두려워하고 사랑해야 할 여주인, 혹은 연인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파리지옥은 그 사랑을 배신으로 되갚는 부도덕한 면모를 보여주었기에 편지를 보낸 조수는 식물도 사악하고 비열할 수 있음을 세상에 고발한다. 그런데 이 모든 이야기를 듣고 전달하는 경찰관으로서의 화자는 식물학자를 살인한 사람이 자수를 했으며 고인이 사망한 채로 발견된 식물원에서 문제의 파리지옥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으로 결론을 내리며 파리지옥은 식물학자의 죽음을 목도하고 스스로 자살한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 한다. 여기서 조수의 고백과도 같은 (진실이라고 여겨지는)편지는 어쩌면 세상에서 벌어지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사건들의 남겨지는 영역이고 경찰관의 (사실이라 여겨지는)객관적인 사건처리는 그러한 사건들을 이해할 수 있는 범주에 배치시켜 진실을 표준화하고자 하는 조금은 무책임한 현실의 영역일 것이다. 이처럼 작가는 어떤 이야기든 환상의 끝에 도달해 무엇을 보고 오면서도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결론을 모호하게 하는 방식을 채택하지 않고 이것이 틀렸건 터무니 없건 우리가 이해할 수 없건 어떤 형태로든 결론을 내버리는 착실한 행보를 보여준다. 더 반가운건 그 결론마저도 이야기 속에 녹아들어 이야기 자체에 대한 반전이나 역설을 지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끝간데 없는 환상 끝에 결국 오늘의 위치를 더 통렬하게 인식시켜주는 극대비의 쾌감을 전해준다. 이는 이야기를 꾸며내는 작자(?) 로서 그 완성된 이야기를 완벽하게 자기만의 방식으로 전달하는 마무리 방식으로 느껴지며 그 신선함은 많은 이야기꾼들과 이야기꾼에 속아줄 충분한 준비가 되어있는 독자들에게 자신의 이름과 스타일을 확실히 각인시켜주는 독창적인 장치임이 분명해 보인다.
-한 CG회사에 육식식물(carnivore plants)을 소재로한 포토샵 컨테스트 수상작
(Feed me, Seymour! / krigios, 2009)
사람의 껍질을 벗기고, 사람의 표상에 속고, 사람을 유혹하는 식물에 죽는 이야기였다. 정도를 넘는 physical한(완벽히 육체적, 성적, 물질적이므로 다른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묘사가 압권인 이야기, 상대가 아닌 자신을 더 사랑한 사람들의 자아파괴를 이토록 반어법으로 묘사하는 작가의 능청스러움이 어느새 부럽다.
... 소통하는 방식 / 착각의 나라 (야푸족은 어떻게 말하는가), 귀 있는 자는 들을 지어다, 아르헨티나 주교
늘 문제 없어 보이던 방식에 이의를 제기 한다거나 그 사례를 제시하며 동의를 구한다는 것은 그 분야에 상당한 전문성을 습득치 않으면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작가는 이 쉽지않은 명제를 착각, 착란, 착시라는 인간의 착오현상을 캐취하여 이야기속에서 소통하고자하는 상대(개인, 사회, 종교등)와의 관습적 고정관념을 뒤집어보고자 했다. 다르게 말하고 다른 것을 들으며, 다른 것을 보는 것은 종종 기존의 방식에 대한 신념을 뒤흔드는 상투적인 속성이 있지만 작가는 그토록 변함없어 보이는 신념을 이야기로 무너뜨리는 신기함을 선사한다.
작품을 통털어 가장 논리적이라 느낀 설득형의 서사를 지닌 <착각의 나라 (야푸족은 어떻게 말하는가)>는 기획특집 기사를 시리즈로 읽어나가는 듯했던 르포형 소설이다. 가설과 사례조사, 이어지는 결론이 명확하여 꾸며낸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였다. 이 역시 결론부의 극적인 반전을 위한 꽤 의도된 장치였음을 끝에 가서 아차하고 느낄 수 있었다.
야푸족이라는 야생 부족의 언어를 연구하는 언어학자들은 오랜 연구 끝에 그들의 언어는 도무지 이해불가한 '부조리한' '미친' 언어라는 결론을 내린다. 하지만 ‘나’는 피에르 굴드라는 학자가 주장한 야푸족의 특수한 담화유형, 즉 '달콤한 시체 시작법'을 관심있게 지켜보며 그들사이의 언어소통의 비밀을 풀어보고자 한다. 그들은 천성적 시인이 아니라 오히려 '무의식적인 희극배우'라며 착오와 오해야 말로 그들 사회를 지탱하는 방식이라 결론내린다. 언어의 혼란이 가져오는 매력과 즐거움, 다채로운 해석이 가져오는 그들 삶의 자유를 기존의 잣대로만 판단해 그들을 폄하하는 것은 인간사회의 다양한 '소통에의 방식'을 존중하지 않는 일방적인 소통의 결과라 역설한다. 한 사회가 자신의 사회를 유지하게 만든 일정의 규칙과 약속이 다른 사회의 규칙을 평가할 수는 없는 것이다. 여기까지 참 맞는 말만 한다고 생각된 논리적 서사는 비로소 마지막에 그러한 매력 때문에 결국 ‘우리’라는 이름의 야푸족 여자와 결혼을 하여 쌍둥이를 낳았고 착각의 나라 야푸족의 마을로 떠날 의지를 내비침으로써 마침내 소설로 받아들이게 되는 허탈아닌 허탈의 국면을 맞게 된다는 것, 결국 나는 소설을 무엇으로 착각하였단 말인가.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는 '신적인 재능을 가진 자의 비참한 재능박탈'이라는 소재면에서 흡사 김영하의 <악어>를 떠올리게 했다. 어느날 갑자기 나에게 보통사람은 가지지 못할 초현실적인 능력이 생겼다면 그리고 그것으로 사람들의 과분한 사랑이나 행운을 얻을 수 있다면 나는 그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인가 내 능력을 사랑하는 것인가. 그런데 그러한 능력으로부터 내가 끊임없이 두렵다면 내가 살아가는데 있어 그 능력을 발휘할 필요가 있는 것인가. 이 작품은 회사, 친구, 가족들을 향해 과연 '그들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혹시 나를 흉보거나 뒤에서 욕을 하지는 않을까?'하는 궁금증에서 출발한 이야기이다. 다른 사람들의 대화를 수신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된 에두아르는 상사들끼리 자신을 험담하는 이야기, 어머니와 친구간의 대화, 알지 못하는 여자들의 이야기를 듣게 되면서 그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 지 무엇이 불만이었는지 알게 된다. 미리 알게 된 정보로 그들의 오해를 풀어주고 적절한 시기에 사과를 하는 등 인간관계에 도움을 느끼다가 어떤 여자가 자신을 열렬히 짝사랑 하고 있음을 알게 되면서 그 기쁨은 점점 집착으로 바뀌게 된다. 아무리 애를 써도 현실에선 그녀와 마주할 수 없게 되자 그는 그녀의 삶을 지배하고 있다는 희열이 사라지게 될까봐 두려워지며 그 두려움이 절정에 이를 때 마침내 그녀는 자살하며 에두아르의 초능력을 빼앗아 가버린다. 그녀는 그녀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 자신의 능력만을 사랑한 에두아르에게서 유일한 그녀의 경쟁상대를 앗아간 것이다. 진정 마음으로 소통하려 하지 않은 자에게 내려지는 소설적 최후였을까. 어떤 가련한 진실은 치명적인 죽음을 의미하기도 하는 걸까. 생긴대로 살아가야 한다는 진부한 진리, 듣지 말아야 할 것은 들으려 하지 말아야 한다는 상투적인 결론이 떠나지 않아 한참 여운이 길었던 작품이다. 또한 가장 한국작가들의 단편에서 많이 보아온 서사의 흐름과 유사한 작품이기도 해 익숙하면서 반가운 작품이기도 했다.
<아르헨티나 주교>는 인간끼리의 소통이 정신적인 내면의 것 이외에 육체를 매개체로 할 수도 있음을 보여준 기발한 이야기였다. 매일 아침 주교님의 방을 투명인간처럼 치워야 하는 아르헨티나 교구청의 한 청소부 여인은 주교의 방에 침실이 두 개인 것을 의아해 하는 장면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바로 주교님은 한 몸에서 다른 몸으로 영혼이 건너가는 메커니즘을 자신의 짐으로 가지고 온 '두 몸, 한 영혼'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이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닌 불완전한 존재로서 주교는 육체와 영혼에 대한 명상이 곧 종교의 개인적 역할이라고 했을 때 종교인으로서 그 당면한 문제를 이승과 저승이 아닌 현실이라는 한 장소에서 공평하게 시뮬레이션해주는 어떤 재연극처럼 느껴졌다. 그동안 하나의 육체에 두 개의 영혼(인격)이 존재하는 류의 이야기(즉 육체보다 영혼이 우위에 위치해 보이는)가 일반적이었다면 이 작품은 그 반대의 상황을 종교적 관점과 연계해 육체와 영혼을 동일한 입장, 유사한 자격으로 배치하는 병렬태도를 취함으로써 우리에게 여분으로서의 육체가 행운인지 불운인지 정중하게 질문한다. 인간은 저마다 각자 몫의 십자가를 지고 태어나듯 종교인으로서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 무거운 짐이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의 육체가 되었다는 희극은 비종교인인 내게 종교적이지 않은 방법으로서 종교적 성찰을 가져오게 하였음이다. 특히나 마지막 결론 역시 살다보니 세 번째의 몸이 나타나 자신의 삶은 더 복잡해졌다는 웃지 못할 주교의 한마디는 짐(고민)이 많아지면 결국 정신이든 육체든 그 결과치로 또 하나의 새로운 자신안에 영혼이 갖히게 된다는 뜻으로 여겨졌다. 어쩌면 보이진 않지만 그러한 내 영혼이 내려앉은 다양한 내 삶의 짐짝들(육체)과 처음의 영혼이 매번 타협하고 이해하는 소통을 해온 건 아닐까.
작가는 (상호)대화불가능한 사람들과의 소통, 수신자로서의 반칙적인 방식의 일방적 소통, 내면에서 일어나는 자신과의 소통에서 기존의 방식을 뒤집는 서사와 그 서사를 또 뒤집는 유머로 가장 멀리 다녀온 사람이 가장 오늘을 소중히 여기도록 부추기고 있었다. 젊은사람치고 참 노련하지 않은가.
... 예술하는 방식 / 기름바다, 살인청부업자의 추억, 수첩, 희귀조
예술가는 기본적으로 자유로운 영혼을 가졌다고 생각된다. 아니 자유로운 영혼이야 말로 예술가의 필수조건이라 느껴진다. 그런데 그들이 예술하는 방식이 만에 하나 반사회적, 비도덕적이라면 우리는 금새 예술가에게 일반적 규범의 잣대를 들이댈 것이다. 그런데 또 예술가에게 예술의 영역과 범위를 규정지어 주고 그 이외의 것들은 예술이 아니라 말한다면 우리는 나머지 것들에게서는 예술성을 느낄 수 없는 것일까. 작가는 어떤 종류, 무슨 장르건 아름다움을 간파한 사람들이 주장하는 미학적 관점과 그것을 즐기고 감상하는 자들의 도덕성에 대한 균형을 이야기로 질문한다.
일반인에게는 환경오염으로 인식되는 기름유출사고를 미학적 관점에서 본다면 황홀한 지경의 세상 다시 볼 수 없는 아름다움이라는 것이다.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한 비관계자로서의 무력감 대신 아름다운 범죄에 대한 감상권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기름유출 사고 전문가협회'라는 야릇한 단체의 예술비평가였다. 그 결과로서 재앙과 다름없는 현실속에서 그들은 사고가 유발한 폭력적 이미지를 사랑하며 유일한 색감에 흥분하는 변태적 취향의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목격한 화자는 듣는 내내 불편을 감수하다가 막상 인간의 미감을 만족시키는 쾌락으로서의 호기심에 지배당하며 그들과 같은 감동에 전염되는 배반의 행보를 보여준다. <기름바다>는 이렇듯 예술이라는 테두리가 가지는 도덕적 느슨함, 미학적 자유를 이용해 자신들의 쾌락을 정당화하는 무리들의 이기심을 웃기지도 않은 이야기로 잘 꾸미었다. 그런데 작품속에서 미친 아름다움에 미친 피에르 굴드의 존재감이 막강해서인지 어쩐지 모두가 이해되는 서사의 매끄러움이 돋보였으며 숨막히게 표현되는 기름바다의 관능적인 묘사는 모든 도덕을 잊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이런 걸 홀린 기분이라 하던가. 나조차도 태안 앞바다의 기름유출사고가 예술적, 장관이기는 했겠다 싶으니...말이다.
<살인 청부업자의 추억>은 살인을 예술의 한분야로 생각하는 살인청부업자의 추억에 오래 저장될만한 에피소드를 그리고 있다. 다섯 개의 에피소드가 나열되는데 화자인 청부업자에게 살인을 부탁하는 사람들은 모두 창의적이고 독특한 사연이 있으며 그것을 해결하는 화자는 언제나 살인을 행하는 일련의 과정에 자신만의 미학적 기준을 적용한다.
인생의 단맛만 보고 살아온 어느 중년의 은행가는 도망다니는 자신을 살인해 달라고 의뢰하는데 화자는 전에 없던 게임의 독창성에 매료되어 의뢰를 깨끗이 수행한다.(권태) 두 번째는 어처구니 없게도 암살대상뿐만 아니라 그 옆의 정치적 거물도 같이 처리하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는 바람에 그 영향으로 정부는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군부는 정권을 탈취하게 된다. 그러니까 화자는 자신처럼 신중하지 못했던 역사속의 암살자들 때문에 전쟁같은 비극이 일어난 것은 아닌지 되묻는다. 예술적 시각으로 본다면 미완성 작품이나 비난을 받았던 작품이 사회적 반향을 일으켜 예기치 못한 파문을 불러온 경우라 할 수 있다.(야보로프 사건)
세 번째는 딜란이라는 여섯 살 남자아이를 의뢰한 우아한 노부인의 이야기이다. 노부인은 자신의 손주가 악마이기 때문에 그를 죽여 달라하고 화자는 어린아이를 죽이지 않는다는 원칙 때문에 갈등하지만 아이를 지켜본 후 악마를 단죄하고 싶은 공감에 휘둘려 아이를 살해한다. 결국 그 예술적 원칙이라는 것도 자신의 본능을 뛰어넘지는 못하는 솜방망이에 불과했던 것이다.(딜란) 네 번째 이야기는 악마같은 예술가로 알려진 어느 화가가 자신의 베르니사주에 참석하여 '자화상'이라는 자신의 작품의 한 주인공으로서 자신의 살인을 의뢰한 이야기이다. 화가는 화자에게 작품과 인간이 하나가 되는 퍼포먼스로서 화폭을 배경으로 자신을 처치해달라고 한 것이다. 화폭위에 뿌려진 예술가의 피와 뇌수가 화가의 '자화상'의 색조가된 이 작품은 화자의 예술적 사건(살인)이 엄연히 포함된 예술품이라는 점에서 화자를 더욱 뿌듯하게 하는 걸작이었다.(자화상)
마지막 이야기는 예술적 도구로서 총이 아닌 폭발과 독약으로 사람을 죽인 이야기인데 그중 독약을 사용한 이유가 웃지 못할 논리를 가지고 있다. 암살 대상이 너무나 미녀였기 때문에 화자는 그녀의 미모를 망가뜨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살인이라는 예술을 다양한 방식으로 수행한 이 예술가는 마치 다양한 화풍을 시도한 화가처럼 인식된다. 누구보다 독창적인 의뢰인을 두었고 실수마저 역사가 되는 행운을 누렸고 사악함에 행동하는 광기를 보여주었고, 실제 예술작품에 기여했으며 살인대상의 외양적 품위를 배려하였으니 진정, 수준높은 예술가가 아닐까.
<수첩>이라는 작품도 작가를 꿈꾼 적 있는 나에겐 누구보다 동감하는 이야기였다. 나름대로 인정받은 같은 분야의 전문가들은 과연 서로의 재능에 어떤 질투나 시기도 느끼지 아니할까. 같은 글쟁이, 같은 그림쟁이라 하더라도 자신이 가지지 못한 영역이 늘 부럽고 경외스럽지 않을까. 이 작품에선 문학에 대한 열정은 있으나 그 재능은 그다지 신통치 않았던 한 작가지망생의 문학하는 방식을 이야기 하고 있다. 당대 가장 유명한 대작가의 모임에 드나들면서 이 작가지망생은 대작가의 가죽수첩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늘 수첩을 지니고 다니면서 매순간 무언가를 끄적이는 그의 습관을 관찰하곤 그의 수첩이 곧 그의 아이디어 창고라 생각한 작가지망생은 어떻게든 수첩을 손에 넣기 위해 혈안이 된다. 그 훔쳐내려고 하는 열정과 시간, 노력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만든다면...좋았을텐데 그는 수첩에 적혀있을 작품의 아이디어를 놓치기 싫어 결국 몇 개월만의 고생끝에 고대하던 수첩을 손에 넣고만다. 과연 그곳에 대작가의 작품 아이디어가 들어 있었을까? 물론, 없었다. 수첩엔 늙은 수전노로서 꼼꼼히 빼먹지 않은 상세한 지출내역뿐...그런데 인생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키리니는 그 뻔한 허탈감을 방치하지 않고 지출내역속의 대작가의 사생활에 대해 그동안의 위선과 도덕, 신앙에 대한 위선을 폭로한다. 남의 아이디어를 좇아 비도덕적인 행위를 감행한 작가지망생만큼이나 그로인해 만신창이가된 대작가의 우습지도 않은 허세를 날카롭게 지적하는 이 공평함이란...누가 누구에게 가르치는 문제가 아닌 것이다. 작가지망생의 문학하는 방식이나 대작가의 살아가는 방식이나 정말 짜릿한 진실아니겠는가.
<희귀조>는 타조, 계란, 종달새와 같은 알에 그림을 그리는 예술가의 이야기이다. 화자는 미술잡지 기자로 이 알에 그림을 그리는 화가를 인터뷰하면서 작품에 대한 설명을 정리하는 구성이다. 이야기의 핵심은 '괴물'이라는 작품에 관한 사연인데 '알을 낳지 않는 종의 알'이라는 비밀의 진실성 여부에 있을 것이다. 화가는 괴물의 알의 주인공이 미셀이라는 여학생이라 알려주며 사기꾼같은 이야기를 마치 알에서 깨어난 왕의 이야기를 하듯 자연스럽게 포장한다. 알에 대한 진실을 알게 되는 것이 두려워 호기심을 멈추고 예술작업을 하였다는 것, 그 알이 인간의 것인 것은 확실하나 증거가 없기에 비밀을 간직해달라는 고백이 이어진다. 우리는 알을 낳은 것이 여인인지 새인지 의문을 품는 사이 정작 알에 그려진 괴물이라는 작품의 내용을 놓치게 되는 우를 범하게 된다. 예술품으로서 괴물의 의미는 중국의 상징인 신화 속 새를 그린 것이며 그 새는 요람에서 아기들을 잡아먹는 괴물이었던 것이다. 어쩌면 예술가가 알려준 알은 그림에 의해 다시 재탄생된 신화적 상징으로서의 결과물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림속의 새는 다시 신화적으로 인간의 (알속의)아기를 가져가 버린 것은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여인의 몸에서 태어나고 신의 손으로 빚어져 화가의 붓으로 장식될 괴물'이 무엇이란 말인가.
... 소설하는 방식 / 지금은 모두 죽어버린 몇 작가에 대하여, 유럽과 기타 지역의 음악비평 몇 편,
기상천외한 피에르 쿨드, 영원한 술판
마지막 이야기는 바로 작가로서 문학의 장르인 '소설'을 하는 방식이라 할 수 있겠다. 이번 소설집에는 소설로서 그 형식이 흡사 비평가의 논문이거나 기자의 기사 혹은 보고서 형식을 띠는 글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야기속에 이야기를 배치한 액자소설의 형식도 볼 수 있다. 이야기를 위한 제품설명서나 기기 매뉴얼이 등장하는 배명훈의 단편들(안녕, 인공존재 / 매뉴얼)을 떠올리기도 했고 실제 존재했던 문학작품을 소재로 우리에게 익숙한 서사를 현재적 의미에서 재해석하는 '다시쓰는'류의 소설(최제훈, '괴물을 위한 변명')도 생각이 났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유명인을 소설의 소재로 하여 현실과 허구간의 혼란자체를 환기하는 작품(이장욱, '변희봉')도 작가나 음악가를 서사의 줄기로 택한 작가의 방식과 겹쳐지기도 했다.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서부터가 허구인지 모호한 경계지대를 참신한 형식이라 한다면 그다지 새로울 것도 없지만 분명 소설의 테두리 안에서 작가가 도전하는 지향점은 있어 보인다. 풀리지 않는 의문점, 자신조차 긴가민가한 이른바 믿거나 말거나한 이야기를 꽤 이성적으로 포장하였다는 것이다. 이야기가 터무니 없을수록 이 논리의 포장과 체계는 확실한 장치로 이용된다. 그를 보면서 이야기로 만들지 못할 이야기가 싶을까 싶었다. 그냥 우리끼리 떠들고만 수다도 그럴싸한 논조의 사설이 되는 듯한 신기함, 타고난 이야기꾼이라는 우리식의 표현말고 문학이라는 퍼포먼스로 자신의 영역을 구축한 옴므파탈? ...웃긴가...
<지금은 모두 죽어버린 몇 작가에 대하여>에도 피에르 굴드는 계속된다. 여기서 화자가 가장 좋아한다는 작가는 모두 하나같이 기인같은 방법으로 문학을 하는 작가들이다. 포크나 구두에 글을 쓰는 작가에서부터 유명인물과 동명이인의 전기를 쓰는 작가까지 모두 그럴만한 사연과 있을 법한 작법을 구사한다는 점에서 잘 정리된 한편의 부록집같았음이다. 이 책의 서문의 제목이 '고인들의 목록'인데 그것은 책에서 자주 언급되는 피에르 굴드의 <권태의 일반적 역사>라는 작품의 부록임을 명시하고 있다. 그런데 그 부록은 피에르 굴드가 수학자인 아버지의 수의 불확실성에 대한 반대 급부로서 집필하게 되었다 주장하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키리니는 세상에 도대체 그러한 사람들이 있을까 하는 사람들을 향해 소설로서 답을 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괴상했거나 실패했거나 엉뚱했지만 재능은 있었던 작가들을 향한 재능있는 작가로서의 일종의 제의로 느껴진다. 새삼 젊은 작가의 시선이 따스하게 느껴지는 텍스트들이었다. 행간에서 그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들, 성공이나 완성보다 시도나 미완을 격려하는 기운이 느껴진다.
<유럽과 기타 지역의 음악비평 몇 편>은 단연 전위예술, 실험공연 같은 단어가 떠오르는 작품이었다. 다섯 가지의 기상천외한 음악을 만나볼 수 있는 이야기 였는데 이들중 가장 인상깊었던 이야기는 '가우디의 발명품'이었다. 안토니오 가우디라는 건축가와 같은 이름의 작곡가는 가우디오폰이라는 전위적인 음악장치를 발명했는데 이 괴물과도 같은 매머드급의 악기가 울려내는 소리는 기적과도 같아 여지껏 인간의 귀가 들어보지 못한 연주음이었다. 그런데 연주회는 가우디오폰이 격렬한 파열음을 외치며 해체하는 것으로 막을 내리게 되니 이 놀라움을 기적이라 할지 재앙이라 할지 그 시대의 음악비평가는 난감할 지경인 것이다. 반사적으로 백남준을 떠올렸다. 예술인지 장난인지 발명인지 엉터리인지 천재인지 사기꾼인지는 지금 말할 수 없다는 것. 프랑스 언론에서는 이 이야기가 환상회화의 거장 독일화가 에른스트(1891-1976)의 코끼리 그림을 연상시킨다며 극찬을 마다하지 않았다.(그림을 보고 이야기를 구상했는지 알게 무엇인가) 그 부분에서 나는 또 그림 한 장을 보고 멋진 단편을 엮어낸 편혜영의 <저녁의 구애>를 떠올려 보기도 했지만.
<유럽과 기타 지역의 음악 비평 몇 편>에 소개되는 가우디의 발명품,
이른바 '가우디오폰' 의 이미지는 환상회화의 거장 독일화가 에른스트(1891-1976)의 코끼리 그림을 연상시킨다.
Max Ernst. Célèbes or Elephant Célèbes (1921) / Oil on canvas. 125.4 x 107.9 cm. Tate Gallery, London
어찌보면 한 인물에 대한 고자질과도 같은 <기상천외한 피에르 쿨드>는 피에르 쿨드와 내가 어떤 관계인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내가 피에르 쿨드를 관찰하고 설명하는 이야기 이다. 실은 작가의 분신으로 여겨지는 피에르 쿨드란 어떤 사람일까. 그가 사년동안 한편의 '연속극 꿈'을 꾼다는 이야기를 서두로 하여 좌우명을 마지막으로 끝이 난다. 그가 체중을 재는 방식, 도서관에서 책에 미친 영감을 바라보는 시선, 시계를 보는 방법, 피부에 글이 적힌 책여인에 대한 당위성, 눈알로 저글링을 하는 신부님의 묘기, 그가 적었다는 시, 문학적인 계획, 출생에 관한 이야기, 여자 이야기가 산발적으로 소개된다. 피에르 쿨드를 작가인 키리니의 상상력을 대변하는 상징적 존재체라 가장한다면 그를 관통하는 꿈이라는 것에는 인간의 영혼과 육체에 대한 공평한 시각이 깃들어 있는 듯하다. 마음의 무게를 재거나 육체를 물질화하는 상상력 근원에 인간에 대한 고정관념을 뒤집어 관점자체를 반대방향에서 보고자 하는 욕구를 느낄 수 있다. 우리 안에 내재된 무의식으로서의 여분의 에너지를 잘 인출해내는 발굴능력이 탁월하다고 할까. 피에르 쿨드의 주장이라고 한 모든 사람은 동일한 양의 운을 갖고 태어난다는 의견역시 한 대 얻어맞은 듯한 발상이었다. 운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각자에게 분배되는 방식이 일정치 못할 뿐이지 인간은 각자 동일한 양으로 주어진 행운을 전부소모한 후 죽는다는 생각은 신선하기도 했고 옳다는 생각도 들었다. 스스로 기상천외하다고 말하는 이 작가의 피에르 쿨드가 되고 싶은 이유는 무엇일까. 누구나 행운이 아니면 불운이라는 동등한 삶을 살아간다는 믿음 때문일까.
<영원한 술판>은 한 시절 내 영혼을 위로했던 이청준의 <병신과 머저리>를 생각나게 하는 작품이었다. 화자는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비밀을 추적하기 위해 앞부분에는 죽음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여겨지는 '즈벡'이라는 알콜성 음료에 대한 자료와 아버지가 실종된 경위를 소개한 후 나머지를 아버지가 자신을 회고한 소설을 이야기속에 배치하고 있다. 액자소설 형식이긴 하지만 여기선 그 형식보다 작가가 이야기를 꾸려나가는 방식(소설하는 방식)이 또 하나의 형식을 만들고 있다는 점을 주목했다. 1. 참고문헌의 빈약함-2. 아버지와 관련된 몇가지 사실-3. 원고-4. 영원한 술판으로 이어지는 상위 프레임이 흡사 자료조사-사례분석-실험내용-결론도출로 대표되는 과학적 연구방식을 연상케 한다는 것이다. 보고서 목차에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배치한 방식도 신선했고 목차에 따른 서사전개도 지침을 따르고 있어 잘 짜여진 기획안의 느낌이 들 정도로 상쾌한 구성이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내용으로서의 시사점은 '즈벡'이라는 술이 한번 마시면 영원히 취한 상태로 죽음에 이르게 된다는 가정하에 아버지의 실종은 타의가 아닌 자의에 의한 선택이었음을 결론으로 하고 있다. 영원한 술판의 축복받은 죄수의 길을 선택했다고 확신하는 화자는 아버지의 죽음을 부정하기 위해, 그 죽음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실종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어쩌면 짜맞추기식의 사건조사를 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런 것은 다 중요하지 않고 남는 것은 술판이다. 인간은 그렇게 자신의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영원히 깨어날 수 없는 만취상태로 자신을 고민자체로 만들어 버림으로써 고민을 해결하지 않아도 되게끔 할 수 있는 꽤 영리한 바보임을 이 작품은 차근차근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작가의 소설하는 방식이 이것을 방증한다. 작품자체를 상상력으로 구속하기에 더 이상 상상이 필요치 않은 서사의 장악력은 새로운 형식의 시도와 함께 병행되는 텍스트의 결속력 덕분 일 것이다. 한마디로 빡빡한 상상, 그의 문학적 성취는 한국문단에서 어떤 문학상을 거머쥘지 쓸데없이 궁금해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열네편을 그냥 넘기지 않은 덕에 리뷰가 열페이지가 넘어가는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작가를 평한다는 자격으로 괜스레 글공부를 한 기분이다. 첨에 잘 이해가 되지 않던 서문의 내용은 맨 뒷장으로 가는 것이 어떨까 싶다. '현실과 진실의 불의의 일격에 급작스런 노출'을 당한 나는 제대로 된 권태에 벗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작가는 아마도 수수께끼를 찾아 그것을 풀어 나가는 것을(없으면 만들어서라도) 자신의 작가된 운명으로 여기는 듯 하다. 더불어 수수께끼가 풀리는 그날, 현실의 그곳엔 언제나 치명적 공포에 사로잡힌 우리들이 입을 다물지 못한 자세로 꼼짝을 할 수는 없을 듯 하다. 진실은 때로는 무섭고 두렵지만 진실이 좋은건 언제나 진심을 외면하지 않는다는 것, 그러므로 진실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 아닐까. 누구나 다 알만한 진실은 진부하고 권태롭다. 누구도 생각지 못한 진실, 누구라도 생각해야 할 진실, 누구라도 생각할 수 없었던 진실을 기다려 보겠다. 부록같이 따라오는 죽음에 직면하는 공포는 우리의 몫이기에 마땅히 감수하고자 한다. 때론 부록 때문에 본 책을 얻고 싶을 때도 있는 법, 우린 공포영화가 무서운지 알면서도 그를 기다리는 알 수 없는 인간들이기에 권태를 이겨내는 부록으로서의 공포는 설레임의 다른 말이겠지.
설마 죽기야 하겠는가. 허긴 설마가 사람잡는 이야기가 그의 진실이지만 서도.
<덧붙임>
그림 출처:
http://www.pxleyes.com/photoshop-contest/11395/carnivore-plants-html
http://mazel-livres.blogspot.com/2009_03_01_archive.html
http://artetlitterature.blogspot.com/2009/02/contes-carnivores-de-bernard-quiriny-le.html
http://www.abcgaller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