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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마
이상민 지음 / 푸른물고기 / 2010년 8월
평점 :
절판
세상이 변한 걸까, 내가 변한 걸까. 예전 같았으면 이런 작품을 접하곤 '그러니까 남의 눈에 피눈물 나게 하지 말아야지'...하는 지극히 '권선징악'적인 착한 교훈을 품으며 가슴을 쓸어 내렸을텐데, 이상하다. 당장이라도 억울하게 죽은 영혼들이 어디선가 환생의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가 복수의 드라마를 꿈꾸고 있지는 않을 지...그나마 그동안 남에게 해꼬지 하며 살아오지 않았다는 생의 이력에 안도의 한숨을 쉬어보기는 커녕, 복수의 영혼들은 지금쯤 어떻게 칼날을 갈고 있을지...마치 복수의 그날을 은근히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내 마음은 좌불안석이었다. 그만큼 사회가 흉흉해지고 이유도 없이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들이 많다는 반증인가. 그렇게 본다면 이 소설은 결코 소름끼치는 공포추리소설이라기 보다는 결의를 다지는 도덕적 사회소설(?)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 작품이 굳이 의미상 '업(業)'이라는 단어를 채택하지 않고 산스크리트어로 카르마(karma)라는 종교적 단어를 제목으로 한 것은 역으로 종교적 색채를 띠게 하지 않으려는 의도로 보인다. 카르마는 불교의 우주원리이자 윤회의 법칙으로 업장(業藏), 업보(業報), 인연(因緣),숙명(宿命)등과 유사하게 사용되는 꽤 근사한 용어이다. 일례로 어떤 일의 결과를 놓고 '그것은 우리들의 업보입니다' 하는 것과 '그것은 당신과 나의 카르마 때문입니다'하는 것을 비교해본다면 같은 뜻이라도 종교적 색채의 유무를 결정짓는 선택이 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생에서의 고통은 우리 자신의 카르마이거나, 사랑하는 사람의 고통스러운 카르마를 대신 지려는 각오의 결과이다. 당신의 행위를 돌이켜 보거라. 그것이 어떤 결과로 돌아오는 지를, 오늘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내일, 또는 모레에는 깨닫게 될 것이다. 이것이 인과응보의 우주적 법칙이다."
영혼의 마법사라 불린 다스칼로스의 견해는 좀 더 인간적이고 매력적이다. 특히 '사랑하는 사람의 고통스러운 카르마를 대신 지려는 각오'는 한번이라도 사랑을 해본 사람이라면 심금을 울리는 대사가 아닐 수 없다. 꼭 남녀관계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부모, 자식, 친구로서 사랑을 주고 받는다. 그 말은 누구라도 사랑한다는 것은 살아있는 동안 사랑하는 사람의 죄값에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음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이 말은, 내가 아무리 방어운전을 한다 해도 교통사고는 언제 어디서든 발생할 수 있다는 논리와 같을 것이다. 즉, 사람은 언제 어디서든 불공평하게 억울할 수 있다는 공평함을 깨우쳐 주는 진리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는 '내가 억울할 수 있다는 사실'에 세상은 잔인하게 불공평한 곳이라는 결론을 내리고만 싶다. 적어도 전생이나 후생을 생각지 않고 오늘 내가 살아 있는 현생에서만큼은 죽도록 열심히 살아온 사람이라면 내가 억울한만큼 남도 억울하지 않음이 늘 억울한 존재들 일 것이니까.
이 소설의 작가는 다행히도 아무 잘못 없는 사람의 억울함이 아닌, 과거에 치명적인 잘못을 해버린 사람들의 억울함을 보여주고 있기에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그리고 그 잘못에 대한 죄값을 확실하고 뒤끝있게 치루어 준다. 원인도 모르고 결과도 알 수 없는 과정만 극대화된 작품들 속에서 그런 것들이야 말로 오늘을 사는 방식이며 현대인의 자화상이라는 이 시점에 '전설의 고향'식 복수코드와 드라마틱한 연출방식은 어쩌면 정석대로 진부해서 희소성을 획득하고 마는 우연적 행운마저 묻어 가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나는 이 작품이 선사한 착한 전개와 그 결말에 성실한 박수를 보내고 싶다. 극적인 차별화 요소 없이 차별하기란 쉬운 일이 아닐테니 말이다.
그렇다고 이 작품이 공포추리 소설로서 진부하다거나 인물, 서사의 전개가 흥미롭지 못하다거나 문학적으로 차별화되는 요소가 없다라는 뜻은 아니다. 몇 가지 극적인 성취를 꼽자면 탄탄한 구성과 이야기 자체의 오락성, 그에 수반하는 어줍지 않은 주제전달과 몰입도 일 것이다. 이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은 아마도 멈출 수 없는 속도감일 것이다. 공포영화를 보다보면 몇 가지 법칙을 접하게 되는데 그중에 하나가 아마도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될 만한 장소에 그것도 벌벌 떠는 겁쟁이 배우가 혼자 나서는 죽어 마땅한 발걸음일 것이다. 도대체 왜? 그냥 있거나 다른 사람과 같이 갈 것이지...나는 이 작품의 시놉시스를 접하고 밤에는 읽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어렴풋이 한 꼭 그날 밤 바보처럼 책장을 펼쳤다. 그리곤 시시각각 엄습하는 공포감 때문에 중간에 책을 덮을 수가 없어 그냥 앉은 자리에서 다 읽고 책을 덮고 마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독서를 하고 말았다. 사람들과 동떨어져 으슥한 곳을 혼자 걸어가던 얼치기 배우와 무서워 책을 덮지 못한 내가 다를 건 없었다. 그치나 이치나 미칠 것 같은 두려움에도 너무나 궁금한 호기심은 똑같았나 보다. 다행인건 나는 죽지 않았다는 것, 그리곤 책을 덮으며 이렇게 밖에 말할 수 없었다는 것. 무서워 죽을 뻔했네 !
등장인물이 적지 않다. 먼저,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의 대립구조가 크게 나누어 진다. 졸업을 앞두고 추억을 만들기 위해 단행한 폐교여행(나로선 절대 이해불가한)의 참가자들인 효진, 정희, 인경, 현숙, 민선의 아릿따운 아가씨들과 상류층 자제들로 구성된 골프 동아리 모임의 회장선출 기념 여행을 떠나게 된 젊은 귀족집단의 영석, 환곤, 종욱, 성태, 윤철이 그 주인공이다. 소설은 효진을 비롯한 여학생들이 폐교에서 한명씩 돌아가며 공포이야기를 하던 중 우연히 자신들 외에 한명이 더 있다는 사실을 알고 비명을 지르는 것으로 시작된다. 비슷한 시각 젊은 귀족들은 우연히 '영흥산장'이라는 으슥한 곳에 도착하고 때마침 폐교에서 봉변을 당한 한 여학생이 그들에게 납치된다. 물론 이 여학생은 그야말로 억울하고 참혹하게 살해 당할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 이 여학생의 죽음이 그리 간단치가 않았다는 것, 여학생의 죽음의 앞뒤로 비밀스런 사연들이 얽히고 설키게 된다. 여학생이 폐교에서 산장으로 오기까지의 비밀스런 배경(출생의 비밀), 산장에서 여학생이 당한 일(권력자의 폭력), 그 후 처리를 위해 폐차장으로 도착한 후 그곳 사람들과의 우발적인 사건들(사건의 확장)이 등장인물의 기억의 홍수를 터뜨리는 동안 우리들은 여학생의 영혼이 얼마나 한스러웠을지 열심히 공감하게 된다.
또 하나의 대립구조는 효진과 영석부부를 축으로 한 사건의 중재 및 해결역할을 하게 되는 인물들이다. 정신과 상담의 신도와 같은 병원의 미선이 복수를 막아 보려 애쓰는 측이라면 여학생의 혼을 10년 동안 키우는 숙주로서의 영매 원희는 복수를 시행하려는 상대측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작가는 그 마지막 결투를 온전한 인간 대 원한을 가진 혼으로 하지 않고 참신하게도 미선이라는 채널러(channeler)를 내세워 살인사건 당일 또 하나의 희생자가 여학생의 혼을 막아야 하는 당위성을 부여하면서 소설을 한층 더 복합적이고 품위있게 위치시킨다. 그리고, 불륜남편이면서 불임부부였던 영석과 효진 내외에게 임신이라는 소망이 결국 그들에겐 내세의 불행을 암시하는 카르마였음을 깨닫게 한다. 자칫 '나는 네가 지난 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식의 청춘호러물이 될 뻔 한 서사가 인연이나 업보같은 보편적이고도 무거운 주제를 얹으면서도 너무 빤하지 않고 세련되게 전개됨, 그 자체가 상당히 파워풀하게 느껴졌다. 전방위 글쓰기를 해왔다는 작가의 이력과 영상관련 컨텐츠, 스릴러 장르에 대한 창작열이 이루어온 결과라 생각되고 이야기 꾼으로서의 탁월한 재능을 실감할 수 있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인연과 그것을 숨가쁘게 좇아가는 카메라 장면묘사는 한여름밤의 서늘한 추억으로 남을 듯하다. 또 하나, 이렇게 끔찍하고도 소름끼치는 공포감을 느끼면서도 무섭게 버티고 앉아 책장을 넘길 수 있었던 건 죄를 지은 자들이 죄값을 치르는 꼴을 끝까지 보겠다는 의지와 기대감도 한몫 했음을 이제야 실감한다.
카르마...내 인생은 지금 어떠한 업보로 고통받고 있는지, 현세에 내가 저지른 업보가 또 후세엔 어떠한 업보로 이어질지...잠시 큰맘 먹고 거울 앞에 앉아보아야 할 듯하다. 이 작품을 읽고 나서도 거울을 똑바로 볼 수 있다면 그것 역시 대단한 용기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