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우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46
미나토 가나에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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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훗날 숲속에서

기억의 숲속에서

뜻밖에 나타나서

손을 뻗쳐서

나를 구해주오.

 

 

-프레베르, [이 사랑]중

 

미나토 가나에의 신작 [경우]를 읽다가, 이 작품에서 중요한 모티브로 사용되고 있는 '파란 리본'은 프레베르가 말한 '뜻 밖에 나타나서 구원해주는 손'과 같은 존재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사람과 사람사이에 우주 어딘가에 연결되어 있는 고리말이다. 이 파란 리본은, 어머니가 남겨준 혈육에 대한 징표인 동시에, 두 명의 고아원 출신 여 주인공들 사이를 이어주는 혈육보다 더 질긴 끈을 의미한다. 

[경우]는 결국 '관계'에 관한 이야기다.

 

 

 

 

'이야미스'라는 말이 있다. '싫음(혐오)'라는 말과 '미스터리'라는 말을 합친 조어(造語)인데, 보통 뒷맛이 개운치 않고, 싫은 기분이 되는 미스터리 소설들을 이 괄호 안에 집어 넣는다. 이 '이야미스'의 매력은 인간의 진흙탕같이 어둡고, 부정적인 부분을 철저하게 묘파해 내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인간의 묘한 이중 심리랄까. 좋은 사람이 등장해서 따스한 결말에 이르는 훈훈한 이야기를 바라는 독자들이 있는 반면, 눈살이 절로 찌푸려지는 인간의 악이나 어두운 그늘을 보고 싶은 독자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참담한 전개와 그로테스크한 심리 상태의 묘사가 이어지는 내용의 책을 끝까지 집중력을 잃지 않고 붙잡고 있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2011년 3월 대지진이라는 거대한 트라우마를 경험한 일본인들에겐 '해피엔딩'이 어쩐지 거짓처럼 느껴지는 사람들이 늘어서 이러한 이야미스 소설이 히트를 치게 되었다는 견해도 있다.

이 '이야미스'라는 장르의 꼭짓점 위에 미나토 가나에의 [고백]이 있었다. 이야미스의 주된 독자층이 30대 여성이라고 하지만, 혀를 내두를 정도로 많이 책이 팔린 것을 보아서는 [고백]에는 고정독자 이상을 빨아들이는 무엇인가가 있는 듯 보인다. 나 역시 그녀의 대표작인 [고백]으로 작가를 만났고, 그 후에 출간된 [속죄]를 읽으면서 어째서 그녀를 '이야미스의 여왕'이라 부르는지 확실히 알게 되었다.

 

 

 

 

 

그런데, 최근에 국내 출간되는 미나토 가나에의 작품 속에서 작가의 변모를 감지하게 된다. 가령 비채에서 작년에 공개된 [왕복서간]의 경우 그러한 변화는 두드러진다.  일본 독자들이 이야기하는 '독(毒)이 있는 미나토 가나에'와 '독이 없는 미나토 가나에' 사이에서 작가는 이작품을 통해 후자에 발을 담그게 될 것임을 보여준다. 특히 두 번째와 세 번째 이야기의 결말 부분을 읽어보면, 이러한 작가의 변모를 쉬이 수긍하게 될 것이다.예전에 발표했던 초기 작품들은 그녀가 '악의(惡意)'의 까발림에 전력을 기울였기에 읽은 후에 부대낄 정도의 어두운 뒷맛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작가는 사랑과 화해를 모색하고 있다는 점에서 기존 작품들과는 확연히 유리된다. 그리고 가장 최근에 공개된 [경우] 역시, 검은 미나토 가나에 보다는 하얀 미나토 가나에에 가까운 작품으로 휘몰아치는 갈등 속에서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결을 끊지 않은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일본 뿐 아니라 국내 독자들은 대부분 [고백]에서 독을 뿜어내던 어두운 미나토 가나에의 이미지에 경도되어 있는 듯 보인다. 그래서일까. 밝은 분위기의 가나에 작품은 어딘지 심심하고, 담백하다고 평가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작품을 좀더 진하고 걸죽하게 그려내었으면 하는 아쉬움을 토로하는 독자들도 있다. 처음에 독자와 마주했던 이미지가 앞서 말했던 '이야미스'적이라서 그 첫인상의 강렬함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독자들이 많이 까닭이다. 가나에의 작품들의 평가 기준점은 언제나 데뷔작 [고백]이다. 자신이 만들어온 스타일의 익숙함에서 벗어나려는 작가에게 이것만큼 걸림돌로 작용하는 것은 없을 것이다. 그녀가 전략적으로 정면 돌파해야할 지점은 바로 이 곳일 것이다. [고백]이 주었던 충격을 담으면서도 그것의 아류나 변주가 아닌 독창적인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 [경우]는 비록 [고백]을 잠시 잊을 만큼, 전폭적인 갱신을 일궈내지는 못했지만 (번갈아가면서 화자가 바뀌는 방식을 사용한 것은, 가나에의 전형성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반증한다), 자신의 작품을 '답습'하지 않으려는 그 노력의 산물임에는 틀림없다.  

 

  

 

소녀시절부터 공상을 좋아했던 작가는 결국 그녀의 상상력을 작품으로 치환하여 독자들에게 선사해주었다. 국내에 출간된 7권의 책.

([경우]가 가장 최근에 나온 작품이라 맨 앞으로 빼서 사진을 찍었다. 그외는 순서없음.) 

거짓말 이야기를 좋아하고, 집에 컴퓨터가 있어서 글을 쓰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밝히는 미나토 가나에.

자신있는 장르가 없었기에 여러장르를 도전해보자는 마음으로, 우선 청춘소설을 쓰게 되었고, 두번째 도전한 작품이 '고백'의 1장에 해당하는 [성직자]였다. ([성직자]는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하여 2주만에 썼다고 한다)

 

 

 

 

미나토 가나에의 국내 출간작을 모두 읽어본 결과, 모든 작품이 균등한 질(質)을 유지하고 있지는 않다고 느꼈다. 사실 그 자체가 거의 불가능 한 일이 아닐까. 초특급 뮤지션이라고 해서 매번 모두의 환영을 받는 음반을 만들 수는 없지 않은가.

특히 가나에의 경우 일급 데뷔작 [고백]으로 인해, 독자들의 기대치가 하늘을 찌르기 때문에 다른 작품들이 어쩔수 없이 비교되고 평가절하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작품 면면을 살펴보면, (데뷔작의 임팩트에는 미치지 못할 지라도) 어느 선 이상의 수준을 유지하는 작품들이 다수라는 점을 느꼈다. 그리고 자기 색을 유지하면서 다양한 방식으로 글을 쓰려는 노력들이 보인다.([왕복서간]은 서간체 형식, [N을 위하여]는 인터뷰 형식을 차용했다. 이번에 나온 [경우]는 [파란 하늘 리본]이라는 동화와 함께 나와 독특한 맛을 선사한다.)

그렇기 때문에 가나에의 작품이 나올 때마다 독자들은 관심과 애정을 갖고 읽게되는 것이다.  

여담인데 미나토 가나에 사인을 할때는 저렇게 쓰다가는 금방 기진맥진해지는 것이 아닐까 걱정이 될정도로 한자 한자 정성들여서 쓸정도로 다정다감하고, 애니메이션 성우 목소리 처럼 귀여운 목소리의 소유자라고 한다. (실제로 인터뷰 목소리를 들어보니, 애띤  목소리!) 작가 개인은  본인이 쓰는 작품과는 상당히 다른 느낌을 선사해서 재미있다. 

 

 

 

 

 

 

 

미나토 가나에의 최신작[경우]는, 초판 한정 특별판으로 소설 본문에 등장하는 [파란 하늘 리본]이라는 동화집이 포함된 [경우 선물세트]가 제작되었다. 스야마 유카가 그린 예쁜 그림들과 미나토 가나에가 직접 쓴 동화가 가나에 팬들의 소장 욕구를 높여준다.

동화책의 일부를 스캔해 보았다.

 

 

 

 

내가 비채 편집부에 감탄했던 것은 바로 이 파란 리본 모양의 책 갈피용 끈!

파란 리본은, 작품 속에서 가족의 혈액을 넘어선 그 이상의 더 깊은 연결의 끈을 상징하는데, 그 부분을 놓지지 않고, 책갈피 끈으로 만든 편집부에게 박수를 쳐주고 싶다. [경우]를 드라마화 감독은 이 작품의 주제를 '인간은 외로움으로 연결되어 있다'것을 주제로 하고 있다고 보았는데, 두 주인공 모두 버려진 아이들이라, 성장과정에서 외로움을 떼어낼 수 없었다. 그런 그녀들을 묶어 준 것이 바로 '파란 하늘 리본' 인 셈이다.

 

 

 

 

 

 

먼저 [파란 하늘 리본]이라는 귀여운 그림의 동화를 먼저 읽은후, [경우]의 첫 장을 펼쳤는데 (함께 온 동화가 소설과 이어진다는 사전 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다음의 문장을 만나고 살짝 놀랐었다.

 

제5회 일본 그림책 대상 신인상을 수상한 [파란 하늘 리본]이 전국의 서점에 깔린 것은 지난달 9월 20일. 아무리 신인상 수상을 알리는 띠지를 둘렀다고 해도, 이름 없는 신인작가의 그림책이 이렇게 폭발적으로 팔리는 일은 없다. 하지만 아주 드물게 작은 계기가 앞바다까지 밀어주고, 커다란 파도가 다시 대해로 데려가줄 때가 있다. (p.9)

 

 

파란 리본으로 연결되듯, 두 책이 이어져 있었다.

[경우]가 기존 작품들과 다른 점은, 애시당초 영상화(드라마-이 작품은 ABC 아사히 방송 창립 60주년 기념 스페셜 드라마로 영상화 되었다)를 목적으로 두고 글을 썼다는 점일 것이다. 이 전에 시나리오를 썼던 경험이 있고, 드라마는 소설과 영화와는 달리 표현에 제약이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썼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추상적 이미지에서 좀 더 구체적인 이미지들이 작품 속에 펼쳐지기에 필치에 생동감이 느껴진다.  

 

 

(파란색 책갈피 끈을 리본모양으로 묶고, 동화책과의 연결을 강조하여 찍은 사진. 파란색이 두드러지도록 그 부분만 색을 남겨 보았다.)

 

미나토 가나에는 한 인터뷰에서 '지금의 시대는 누구나 사소한 것으로 악인도 선인도 될 수 있고, 가해자도 피해자도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밝히고 싶었고, 작품 내에도 그런 장면이 등장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사람은 태어난 환경에서 그 인생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은 스스로 만들어 나가는 것이라는 전언을 보내온다. 

 

 

등장인물에 생생함을 넣어주기 위해 고심한다는 미나토 가나에. 디테일한 캐릭터를 살리기 위해 집필 전에 주요 인물들의 이력서를 쓰는 것으로 유명하다. 처음에 캐릭터 설정을 해 놓지 않으면 이야기가 움직이지 않는다고 믿고 있는 듯 한데, 그런 버릇은 [고백]부터 [경우]까지도 초지일관한 것처럼 보인다. 그녀의 작품에 공통적으로 보이는 전반적인 특징은, 후던잇(whodunit)이나 하우던잇(howdunit)과 같은 전통적인 추리소설의 포팻을 따르지 않는다 점일  것이다. 그것보다는 어떤 사건과 관련된 등장인물들의 내면 심리를 탐색하는 와이던잇(whydunit)에 가깝다.

 

 

열세 살 살인자, 그보다 더 어린 희생자...

허물어진 현대의 상식을 차가운 시선으로 담아낸 서점 대상 수상작!

 

"내 딸을 죽인 사람은 바로 우리 반에 있습니다"라는 엄청난 고백을 던지고 법인인 학생들에게 믿을 수 없는 가혹한 복수를 실행하는 담임선생님! 너무나도 충격적인 내용에 출간 즉시 독자들의 열띤 찬반양론을 불러일으킨 충격의 화제작.  (비채 도서목록 발췌)

 

 

2012년에 읽은 책중 가장 빠르게 읽은 책이다.

책이 두껍지 않은 이유도 있지만, 주인공들이 주고 받는 편지를 탁구 구경하듯 오른쪽 왼쪽 오른쪽 왼쪽..., 읽다 보면, 어느새 끝.

몰입도의 게이지를 MAX로 만들어 버리는 책.

게다가 각 작품마다 반전을 숨겨놓아, 끝부분에서 '아아..끄응'하고 신음하게 된다.

이번에 읽은 [경우]도 참 빨리 읽었는데, 가나에 소설의 가독성은 역시 알아 줘야 할 듯 싶다.

 

 

[왕복서간]은 서간체 소설의 매력을 듬뿍 보여준 작품. 잠깐 걸작 [고백]을 잊었을 정도로 개인적으로 맘에 들었던 작품집이었다.

 

 

 

 

체한 듯 걸려 있는 기억, 풍선처럼 부푼 죄책감...

그때 나는 누구를 구해야 했을까요?

 

편지라서 하게되는 거짓말, 편지라서 허락되는 죄, 편지라서 가능한 고백! 사건의 전말이 봉투 밖으로 흘러나온다. 충격적 결말 그리고 밀려드는 감동! 편지 형식으로만 전개되는 연작 미스터리! 미쓰다 류헤이, 미야자키 아오이 주연 전격 영화화!  (비채 도서 목록 발췌)

 

 

 

고백과 같은 색깔의 어두운 미나토 가나에를 만나고 싶다면, 바로 [속죄]를 권한다. 속도감있게 읽히는 점은 가나에가 갖고 있는 장점!

 

 

 

살인자는 어머니, 희생자는 아버지...그날 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고급 주택들이 즐비한 도쿄의 주택가. 유난히 무더운 여름밤, 이 아름다운 동네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난다. 의사 아버지에 우아한 어머니, 의대생 큰아들, 유명 사립학교에 다니는 딸, 잘생긴 막내 아들. 그림같이 완벽한 다카하시 가족들에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비채 도서 목록 발췌)

 

 

[고백],[야행관람차]나 [소녀]같은 작품들을 보면, 미나토 가나에가 10대 학생들의 심리나 말에 대단히 사실적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게 된다. 많은 독자들이 그 이유를 과거에 가나에가 가사 선생님이었던 이력 때문이라고 생각하는데, 작가 스스로가 패스트 푸드점에 가서 중학생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는 등의 남다른 노력도 그 이유 인듯 보인다. 이러한 각고의 노력을 하는 작가이기에 그의 작품이 나오기만을 고대하게 되는 것 같다.

그녀가 응시하는 어둠의 깊이를 가늠해 보려는 마음에 자꾸 다음 작품을 출간하라고 채근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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