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화의 꿀
렌조 미키히코 지음, 김은모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2년 6월
품절


(유괴라는 소재를 담고있는 소설이라 사진의 배경을 어린이용 탈것을 이용했다. )

아무리 양보하고, 또 양보해도 이 책은 재미있다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어쩔 수 없다.

이 책을 읽고 나서 렌조 미키히코의 전작을 읽어 봐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들끓는 관심으로 렌조 미키히코의 국내 출간작들을 검색하고 있었다. 그 정도로 이 작품이 마음에 들었다는 이야기다. 그 동안 그를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 분할 정도다. 개인적으로 올해 발견한 일본 작가 중에선 단연코 최고라고 칭하고 싶다. 발견이다. 호들갑을 떨며 말하자면, 진화학자가 잃어버린 진화의 고리에 대해 명백하게 답해줄 멋진 화석을 찾은 것 마냥 기뻤다.


([조화의 꿀]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결국 렌조 미키히고의 [미녀],[회귀천 정사],[저녁싸리 정사]를 구입했다.)


책은 두껍지만, 읽지 않은 부분이 더운 날 빨대로 쭉 쭉 빨아 마시는 차가운 콜라처럼 빠르게 줄어든다. 한번 책을 펼치면 읽다가 중단하기 힘들어서 생활이 곤란할 정도다. 이런 속도감의 획득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우선 작가의 대화문 솜씨가 상당히 뛰어난 것도 한 가지 까닭이라 하겠다. 대화는 결국 행동, 묘사, 등장인물의 성격, 이야기가 담겨있는 것이기에 소설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읽은 독자들은 공감하겠지만, 몇 페이지 씩 이어지는 긴 대화들이 지극히 자연스럽다. 이 작품이 드라마 화 된 데에는 작품이 재밌다는 점 외에도 이런 위화감 없는 유려한 대화들이 한 몫 했을 듯 싶다. 스티븐 킹의 표현을 빌자면, 분명 렌조 미키히코는 ‘대화를 잘 듣는 귀를 타고 난 것’처럼 보인다.


(꽃은 조화지만, 사진의 벌은 진짜 살아있는 벌이다...)


유괴는 일본 미스터리물로 누쿠이 도쿠로의 [유괴 증후군], 덴도 신의 [대유괴], 히가시노 게이고의 [게임의 이름은 유괴]를 읽었기에 낯설지 않은 소재였고, 그렇기에 대체로 내가 읽어 온 작품들과 비슷한 분위기의 닮은꼴일 것이라는 선입견이 있었다. 그런데, 이 책은 이런 나의 선입견을 가볍게 돌파하며 따돌린다. 유괴 미스터리의 최고 걸작이라는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렌조 미키히코는, 전통적인 유괴 사건 소설의 낡은 방식을 복사하지 않았다. 독자가 갖고 있는 유괴에 대한 관습적인 인상을 지우고, 정형을 벗어남으로써, 순도 높은 재미를 끝까지 지탱해낸다.

몸값을 요구하지 않는 유괴범이라..범인의 목적이 무엇인지 도무지 알 길이 없다.
이해하기 힘든 범인 이로군. p95

이러한 한치 앞도 알 수 없는 예측불허가 첫 장부터 끝까지 에너지를 잃지 않고, 독자를 빠져들게 한다. 작품의 얼개는 크게 3개의 축으로 되어 있다.

케이타의 유괴를 둘러싼 사건/ 공범자의 시각에서 본 사건/ ‘나(야스미)’라는 새로운 화자.

각 이야기가 각기 다른 색채를 띠면서도 유기적으로 완벽하게 맞물려 있다. 작가는 영민하게도 긴 이야기라 독자의 집중력이 떨어질 때쯤 새로운 국면으로 장면을 전환하여 분위기를 일신한다. 이 작품은 흡입력을 높여 ‘재미’라는 소설의 본령에 충실하면서도, 외도와 이혼으로 인한 가족붕괴가 비일비재 하는 현대사회에서 참된 가족의 의미를 반추하게 만든다. ‘재미’와 ‘작품성’의 밀월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 작품이랄까.



‘(이 꽃은 과연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 진실 혹은 거짓?”(p.358))


벌 그리고 팜므파탈

우선 제목에 ‘꿀’이 들어가기에 자연스레 ‘벌’이 떠오른다. 북홀릭에서 만든 멋진 표지에도 벌이 그려져 있다.

이 작품에서 ‘벌’은 단순한 곤충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렌조 미키히코는 작품의 곳곳에 공들여 벌의 이미지를 새겨 넣었다.
작품 속의 한 등장인물은 자신이 어쩔 도리 없이 꽃의 꿀에 끌려드는 한 마리 벌 같다고 느낀다.

꽃 모양을 찍어 넣은 순백의 카드를 제외한 모든 카드가 의미를 잃고 게임에 결말이 난 것이다. 벌레로 치자면 그는 자신을 어쩔 도리도 없이 꽃의 꿀에 끌려드는 한 마리의 벌 같다고 느꼈다.(p.329)

여왕벌 격인 여주인공은 침을 숨기고 있다. 남자 공범자들은 충성심 강한 일벌이 된다.

미즈에의 눈동자가 날카로운 빛을 발산하는 하나의 점처럼 보였다. 여자의 몸속에 숨겨진 낚시 바늘에 걸린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니다. 그것은 여왕벌이 가지고 있는 호화로운 침이다. 이 여자는 남자 공범자 하나하나를 전부 일벌쯤으로 여기고 있다. (p.381)

앞선 예의 경우, 전통적인 유혹자(꿀)와 피 유혹자(벌)의 이미지다. 그리고 뒤의 것은, 여왕벌의 명령에 순응하고 순종하는 이미지를 표상한다. 이런 의미는 벌들의 생태가 군주적인 조직에 비유되기 때문이다. 유혹자와 명령자를 결합하면, 자연스럽게 느아르(Noir)의 세계를 구성하는 중요 요소중 하나인, 팜므파탈(Femme Fatale)을 떠올리게 되는데 아니나 다를까 이 작품엔 미즈에 (나중에 ‘란’이란 별칭으로 불린다)라는 치명적인 매력을 갖고 있는 여성주인공이 등장한다. 이런 남자 주인공을 어둠의 나락으로 빠뜨리는 여주인공들의 예는 장르 소설에서 여성잡지 안의 화장품 광고만큼이나 흔하디 흔하지만, 이 작품 속의 주인공은 팜무 파탈에 상투적인 이미지가 의식의 뒷전으로 밀려날 만큼 강렬한 존재감을 내뿜고 있다. 따라서 독자인 우리는 피유혹자의 위치에서 피유혹자의 갈등과 고뇌를 맛보며 작품 속에 빠져들게 된다.

문제는 그 여자가 남자를 포로로 만드는 보드랍고 아름다운 몸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가슴과 허리 사이의 물결치는 듯 탄력 있는 곡선, 가느다란 발목으로 이어지는 쭉 빠진 두 다리의 라인. 몸뿐만이 아니다. 상대를 쳐다볼 때 눈동자에서 배어나는 검은 꿀처럼 농후한 물기. 때로는 마른 채. 때로는 젖은 채 침묵하고 있을 때도 음악과도 비슷한 신비한 말을 연주하는 입술. 그 모든 것이 하나로 합쳐져 절대적인 힘을 가지고 그를 복종시키려 했다.(p.394)

한편, 벌은 붕괴된 가족과 모성에의 결핍감을 느끼는 유년의 주인공에겐 벌집이 따스한 분위기를 가진 단란한 가족의 상징이 되기도 한다. 이런 결락감은 남자주인공이 유괴사건에 휘말리며 미즈에에게 빠져드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케이타와 마찬가지로 아직 어렸던 그는 벌집을 보려고 헛간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 시간이 되면 벌이 일제히 되돌아와서 그의 키만 한 커다란 벌집에 단란한 가족 같은 따뜻한 분위기가 감돌았던 것이다. 벌집을 구경하는 것이 그 무렵 그의 유일한 즐거움이었는데, 그 사실을 알던 어머니는 병원을 퇴원해 친정에 가는 길에 몰래 헛간에 들렀다.(p.332)




[죄와 벌]과 [설국]의 오마쥬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과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은 이 책과 연관성이 깊다.)
작가가 말장난으로 벌과 꿀의 이미지를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에 이식시키는 부분은 멋진 연출이었다.(일본어로 ‘벌(bee)’과 '벌(punishment)'은 동음이의어고, 죄는 ‘츠미’,꿀은 ‘미츠’라고 읽는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죄와 벌]을 읽는 남자 공범자가 삽시간에 고리대금업자 노파를 죽인 라스콜리니코프와 포개진다. 원관념을 말하기 위해 보조적인 자료들을 끌어들여 뒤섞고 잇대는 작가의 솜씨는 이것 말고도 여러 부분에서 숱하게 목도된다.

처음에 카와타, 정확하게는 카와타로 행세한 남자가 [죄와 벌]을 방에 남기고 도망쳤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하시바의 머릿 속에서는 얼굴이 닮을 리 없는데도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와 카와타가 겹치고 뒤섞여 하나의 남자가 되었다.(p.289)

[죄와 벌]외에도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 역시 이 작품에선 다른 문양으로 새겨진다. 작가는 위대한 고전이 품고 있는 무늬들을 변용하고 접합시켜 자신의 작품에서 새로운 자리매김을 가능하게 했다. (후반부의 쏟아지는 눈발과 터널 장면은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라는 [설국]의 첫 문장을 자연스레 상기시켰다.)


어두운 거울로 변한 차창에 그의 얼굴이 희미하게 비쳤다. 소설 [설국]의 첫머리에 젊은 아가씨의 얼굴이 기차 창문에 환영처럼 떠오르는 장면이 있었다. 문득 그 장면을 생각하면서 그는 오른 쪽 뺨을 손으로 문질렀다. (p.429)




(벌, 꽃(조화), 꿀.. 이 세가지가 이 책의 중요한 키워드다.)

어째서 조화인가?

꿀과 벌과 꽃..원심분리하기 힘든 이 세 가지가 이 작품의 키워드이기도 하다. 이미 작가는 ‘꽃’을 주제로 한 살인사건을 테마로 ‘화장(花葬)시리즈’로 일가를 이룬 전력을 갖기도 해서 ‘또 꽃인가?’하고 되물을 독자도 있을 듯 싶다. 그런데 기존의 작품과 구별되는 특이한 점은 이 작품에 등장하는 꽃은 특이하게도 ‘조화(造花)’라는 점이다. 왜 하필이면 가짜 꽃인 조화인가? (정확히는 ‘생화에 특수 약품을 발라 2년, 3년이 지나도 마르지 않게 만든 호접란으로 작가는 상정했다. (p.358)) ‘조화’는 진짜와 쏙 빼닮은 ‘가짜’를 표징한다.


렌조 미키히코는 ‘진짜/ 가짜’라는 개념을 작품 곳곳에 새겨놓았는데, 그것들 각각을 한자리로 불러들인 상징이 바로 ‘조화’인 것이다. 빛과 그림자처럼 공존하는 이 책에는 진짜(진실)/가짜(거짓)의 도식이 편재해있다.

진짜/ 가짜 아버지

당신은 야마지 마사히코를 아이 아빠로 인정하지 않잖아. 그렇다면 아이에겐 새로운 아빠가 필요하겠지. 그래서 내가 지난 달부터 그 역할을 자진해서 맡은 거야. (p.100)

경부님이 알고 싶은 건 결혼이 아니라 출산에 관련된 일 아닌가요? 케이타의 아빠가 정말로 야마지인지...., 진짜 아빠가 따로 있지 않은지....”(p.101)

케이타의 진짜 아빠가 누군지 모르겠다는 뜻이야? (p.166)
진짜/ 가짜 어머니

‘어머니가 가짜 어머니에게 진 것처럼'. (p.372)

케이타, 저 엄마를 알아? 진짜 엄마라는 것도 알아? (P.384 )

진짜 공범자를 닮은 가짜

사라지는 남자역할은 진짜 당신이 맡을 수 밖에 없어요..가짜 당신은 홋카이도로 죽으러 가고..(p.404)

진짜 나와 가짜 나

‘진짜 나’는 내년에 모든 계획이 끝난 후 설국에서. (p391)
그때까지는 그 가게의 ‘가짜’로 참아요.(p.392)

이것 말고도 언급할 수 있는 예는 많지만, 이쯤에서 나는 읽지 않은 독자를 위해 침묵하는 편이 좋을 듯 싶다. 이 책을 끝까지 읽은 독자라면, 이것 외에도 작품 전체의 하중을 떠 받치고 있는, 그래서 작가가 철저하게 은닉하고 있는 ‘조화’가 무엇인지 알 것이다. 그 진실을 열어 젖히게 되면 독자는 충격과 짜릿함에 경악하게 된다.
마지막 장을 넘기며 독자는 자신의 예측이 공중 분해되어 산산조각이 나는 느낌을 받게 될 것이다. 작가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꽂힌 곳에는 전혀 뜻밖의 이야기가 잠복해 있다. 독자의 예상을 송두리째 뒤흔든다. 그 전복된 진실에 대면하는 순간 아연해 질 수 밖에 없다. 어떤 일본 미스터리 블로그에서 이 작품을 최고의 반전 2위에 올려놓은 것을 보았는데, 충분히 납득할 수 있었다. 그도 나처럼 작품 말미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을 것이다. 책을 덮으면, 이 책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조화(造花)라는 기분이 든다. 거대한 사기극에 휘말린 듯한 기분이랄까. 가짜 꽃이지만 농밀한 단내가 나서 독자를 유혹한다. 마치 여주인공 ‘란’처럼. 그 끈적끈적 들러붙는 달콤함은 거부하기 힘들다. 분명 독자는 꿀에 취해 책 주변을 잉잉거리며 맴돌았던 한 마리의 벌이 된 느낌을 받을 것이다.
일본 평론가 센가이 아키유키(千街晶之)에 따르면, 렌조 미키히코는 장편을 쓸 때 작은 반전을 집요하게 쌓고 또 쌓는 소설작법을 주로 추구한다고 하는데, 이 작품도 예외는 아닌 듯 싶다. 밝혀지는 진실에 놀라고 또 놀라다 마지막에는 심정적으로 주저 앉게 된다.

(벌 한 마리가 범인 주위를 날아다니는 것 아닐까요?...범인의 몸에 숨겨진 꿀을 필사적으로 찾는 것 처럼.(조화의 꿀-p.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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