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은 구름을 탓하지 않는다



아무 자취도 남기지 않는 발걸음으로 걸어가라.
닥치는 모든 일에 대해
어느것 하나라도 마다 하지 않고
긍정하는 대장부(大丈夫)가 되어라

무엇을 구(求)한다,
버린다 하는 마음이 아니라
오는 인연 막지 않고 가는 인연 붙잡지 않는
대수용(大收容)의 대장부가 되어라

일체(一切)의 경계에 물들거나
집착(執着)하지 않는 대장부가 되어라



놓아 버린 자는 살고 붙든 자는 죽는다
놓으면 자유(自由)요,
집착함은 노예(奴隸)다

왜 노예로 살려는가?
살아가면서 때로는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도 있고
설상가상(雪上加霜)인 경우도 있다.
그런다고 흔들린다면
끝내는 자유인이 될 수 없다



이 세상에 빈손으로 와서
빈손으로 가는 데 무엇에 집착할 것인가?

짐을 내려놓고 쉬어라
쉼이 곧 수행(修行)이요.
대장부다운 살림살이이다

짐을 내려놓지 않고서는
수고로움을 면할 수 없다.
먼 길을 가기도 어렵고
홀가분하게 나아가기도 어렵다.
자유를 맛 볼 수도 없다



쉼은 곧 삶의 활력소(活力素)이다.
쉼을 통해 우리는
삶의 에너지를 충전(充塡)한다

쉼이 없는 삶이란
불가능할 뿐더러 비정상적(非正常的)이다

비정상적인 것은 지속(持續)될 수 없다.
아무리 붙잡고 애를 써도
쉬지 않고서 등짐을 진채로는 살 수 없다



거문고 줄을 늘 팽팽한 상태로 조여 놓으면
마침내는 늘어져서 제 소리를 잃게 되듯이..

쉼을 거부한 삶도
마침내는 실패(失敗)로 끝나게 된다
쉼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것은 삶의 정지가 아니라
삶의 훌륭한 일부분이다



쉼이 없는 삶을 가정(假定)해 보라.
그것은 삶이 아니라 고역(苦役)일 뿐이다

아무리 아름다운 선율(旋律)이라도
거기서 쉼표를 없애버린다면
그건 소음(騷音)에 불과하게 된다



따라서 쉼은 그 자체가
멜로디의 한 부분이지 별개(別個)의 것이 아니다

저 그릇을 보라
그릇은 가운데 빈 공간(空間)이 있음으로써
그릇이 되는 것이지
그렇지 않다면 단지 덩어리에 불과하다



우리가 지친 몸을 쉬는 방(房)도
빈 공간을 이용하는 것이지
벽을 이용하는게 아니다

고로 텅 빈 것은 쓸모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유용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삶의 빈 공간 역시 그러하다.
그래서 쉼은 더욱 소중하다



붙잡고 있으면 짐 진 자요.
내려놓으면 해방된 사람이다

내려놓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자유와 해방을 쫓아내는 사람이요.
스스로 노예(奴隸)이기를 원하는 사람이다.
하필이면 노예로 살 건 뭔가?



"산은 날보고 산 같이 살라하고
물은 날보고 말없이 물처럼 살라하네."
하는 말이 있다.

산은 거기 우뚝 서 있으면서도 쉰다
물은 부지런히 흐르고 있으면서도 쉰다.
뚜벅뚜벅 걸어가면서도 마음으로 놓고
가는 이는 쉬는 사람이다

그는 쉼을 통해 자신의 삶을 더욱 살찌게 한다.
그는 쉼을 통해 자신의 삶을 더욱 빛나게 한다.
풍요(豊饒)와 자유를 함께 누린다



쉼이란 놓음이다.
마음이 대상(對象)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마음으로 짓고 마음으로 되받는
관념(觀念)의 울타리를 벗어나는 것이다

몸이 벗어나는 게 아니고 몸이 쉬는 게 아니다.
마음으로 지어 놓고
그 지어놓은 것에 얽매여 옴치고
뛰지 못하는 마음의 쇠고랑을 끊는 것,
마음으로 벗어나고 마음이 쉬는 것이다



고로 쉼에는 어떤 대상이 없다.
고정된 생각이 없고 고정된 모양이 없다
다만 흐름이 있을 뿐이다.
대상과 하나 되는 흐름,
저 물 같은 흐름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쉼은 대긍정(大肯定)이다
오는 인연(因緣) 막지 않는 긍정이요
가는 인연 잡지 않는 긍정이다
산이 구름을 탓하지 않고
물이 굴곡을 탓하지 않는 것과 같은
그것이 곧 긍정이다



시비(是非)가 끊어진 자리
마음으로 탓할 게 없고 마음으로
낯을 가릴 게 없는 그런 자리의 쉼이다.

자유(自由)와 해방(解放)
누구나 내 것이기를 바라고 원하는 것
그 길은 쉼에 있다 물들지 않고
매달리지 않는 쉼에 있다.



영원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 세상에서 영원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어떤 어려운 일도
어떤 즐거운 일도 영원하지 않다.

모두 한 때이다.
한 생애를 통해서 어려움만 지속된다면
누가 감내하겠는가.
다 도중에 하차하고 말 것이다.

모든 것이 한때이다. 좋은 일도 그렇다.
좋은 일도 늘 지속되지는 않는다.
그러면 사람이 오만해진다.
어려운 때일수록 낙천적인 인생관을 가져야 한다.
덜 가지고도 더 많이 존재할 수 있어야 한다.

이전에는 무심히 관심 갖지 않던 인간 관계도
더욱 살뜰히 챙겨야 한다.
더 검소하고 작은 것으로써 기쁨을 느껴야 한다.

우리 인생에서 참으로 소중한 것은
어떤 사회적인 지위나 신분, 소유물이 아니다.
우리들 자신이 누구인지를 아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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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학 (Beyond The Years, 2007)

 

감독 임권택
출연 조재현, 오정해, 임진택, 장민호
*이미지 출처 : 네이버 영화/씨네21+캡쳐좀 했습니다. 봐주면 안될까

 

  무지하게 정신없는 7월을 보내느라 또 잠시 깜빡하여 故이청준 선생의 기일을 쉭~지나쳤다. 하물며 어제 영화 보러 가서야 광복절이구나 그렇군, 8월이구나 했으니 정신이 없긴 없다.

 

 우리에게는 「천년학」보다는 「서편제」로 더 가까운 이청준의 원작소설 「남도사람」. 이미 한번 만든 서편제를 리메이크 한것임둥 상이 또 받고 싶었냐는 둥 온갖 무식한 악플들이 판치고 있지만 내가 서편제가 아닌 「천년학」을 선택한 이유는 개봉 소식과 함께 본능적으로 무엇인가 '직감'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 직감과 틀리지 않게 개봉 1년 후 즈음하여 그의 부고가 언론에 대서특필 되었다. 서편제의 포부와는 달리 너무나 조용하게 개봉되고 인터뷰하는 배우들도 참으로 말을 아꼈던 천년학. 아마도 그들간의 유대감과 우정을 바탕으로 하여 한장의 기념사진을 남긴것 같다.

 

 지금보다 더 어릴 적 임권택 감독 이야기가 나오면 '저 살자고 권력에 아첨한 변절자'라고 뭐 아는듯 지껄였던 적이 있다. 사람은 배워야 된다고 대학물 먹고 예술계의 더러운 이면이라던지 생존의 방법이라던지. 곧은길 가다가 엄청난 실력을 뒤로하고 실종되거나 조국을 떠난 비극의 천재들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담담히 그의 선택을 받아들이게 되었다(무슨 자격?). 까라면 까야지요. 반공하라면 해야지요. 벗으라면 벗지요.가난한 좌익의 자식으로 태어나 못배움에 무시당하고 허덕인 진짜 한이진 삶이 아니던가. 본인의 신념과 재능은 고사하고 그냥 속사포같이 정부휘하의 영화만 찍어내다 요절한 이만희 감독처럼, 그저 욕으로 일관하거나 함부로 말로 뱉을 일이 아니다.  지금 다시 보면 손발이 오그라들도록 민망한 계몽영화들이나 국민의 우민화에 일조하던 일제시대 현대소설들의 영화화등 한 발 담그고 있었지만 결국 '강한 자가 이기는 것이 아니라 오래 살아 남는 자가 이간다'고 그의 연륜과 함께 나름의 '취향'과 포부를 가진 작품들이 나왔다. 서편제는 아마도 그 늦은 신호탄이었을 것이다.

 

 

 

 



 

 서편제의 이 장면을 잊지 못해 대학교때 혼자 청산도에 간적이 있다. 그때는 '유명해질까 말까? 조금은 알려졌지만 아직은 관광객이 덜한?' 상태라 조용하고 개끗하고 그야말로 아름다웠다. 완도로나오는 뱃길에서 큰 것을 깨달았지만 말이다."이런..필름 3통을 잃어버렸다."

 지금은 언어영역에서, 그리고 여러 영화채널에서 교과서 처럼 읊어주니 그 줄거리를 모르는 사람 없을 것이다. 다만「남도사람」을 읽은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서편제와 천년학, 원작 소설 사이의 미묘한 차이와 감정 이입이 있다. 천년학을 '기념사진'이라고 말하고 싶은 이유는 함께 영화를 만들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임권택 감독이 '상타려는 영화만 만든다'는 비난 아닌 비난을 받고 항상 무슨 영화든 집중조명에 한국적인것과 외신의 반응에 관심을 두게 했는데 왜 천년학은 유독 조용했을까. 원작자와 돈독한 우정을 과시했던 감독은 '정말 순수하게'영화를 만들고 싶었을지 모른다. 책을 읽고 읽고 또 읽어서 '햇덩이'소리꾼 아버지는 더욱 구체적으로 관람자에게 이야기되고 아버지의 거대한 숙명이 아닌 송화의 목소리가 동호의 두려움을 잡고 그리움이 되었다. 「서편제」와 「천년학」의 갈등과 그리움은 더욱 구체적이고 화선지에 배어나온 물처럼 축축하지만 절대 찢어지지 않는다.

 

 

■ 영화로 구체화된 소설의 관념

 



 

동호의 동거녀 홍단심으로 나오는 오승은. 자식을 잃고 정신병원 갖히고 자살하는 비운의 여인이다.

 

 소설에서는 동호의 생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청준의 심오함이 그렇듯 소설에서 동호의 두려움은 영상으로 표현하기에는 무언가 추상적이다. 운명의 압박, 아버지에 대한 위압감. 극에서는 경제적 궁핍이나 소리에 대한 미래가 없어짐에 대한 환멸로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있고 동호의 삶도 있다. 소설에서 특별한 직업 없이 그 아버지의 숙명과 한에의해 떠도는 동호와 달리 영화의 동호는 보통 사람의 삶에 뛰어들어 유랑하고 여자를 만나고 가정을 가진다. 누이에 대한 그리움으로 사무쳐 약재상 영업을 하며 계속 떠돌아다니면서 자신의 가정에는 소홀하기 까지하는 역마의 포로가된다. 「서편제」에서 소리꾼 아버지와의 만남과 성장과정, 송화의 한과 소리길이 중점이었다면 「천년학」에서는 철저하게 화자인 동호의 시선이 느껴진다. 아버지와 누이를 떠난 뒤 동호의 삶. 그리고 송화의 이야기를 입에서 입으로 전해듣게 되고 계속되는 방랑과 아내(동거녀)와의 마찰은 더욱 구체적이고 직접적으로 다가온다. 소설에서 더욱 개인의 한과 숙명에 대해 깊이 접근하려 했다면 이는 영상으로 표현되면서 눈으로 보여질 수 있는 갈등으로 교체되고 관람자의 이해와 설득을 돕는다. 영화는 소설의 리메이크라기보다는 연작소설이 시선을 달리한 두편의 영화와 만나면서 하나의 완벽한 구조를 이룬 것 같다.

 

 



 

뿌리를 찾아 제주까지 간 송화.  부모는 4.3사건으로 몰살당했다. 감독의 쓰라린 어린시절이 함께 오버랩된다.

 

 소설에서 송화와 동호는 혈연관계다. 영화에서 송화는 주워온 남, 소리꾼아버지와 동호 어머니 사이의 딸은 사산되는것으로 나오는데 이로서 피 한방울 섞이지 않은 남매가 가지게 되는 서로에 대한 그리움과 표현되지 못하는 가슴아픈 사랑이 느껴진다. 직접적으로 표현되는 것 하나없이 북채와 소리로 그 한을 그나마 '짐작'만 했던 「서편제」보다  「천년학」에서의 그리움이 조금 더 절절하다. 「남도사람」2부에서 송화와 동호의 만남은 거의 훑어가는 수준이지만 「천년학」은 찾는 과정과 함께 그들의 만남을 더욱 기다리고 완전하게 만든다.

 

 

■ 욕심없이 익은 소리

 



 

  「서편제」를 통해 공주처럼(?)데뷔한 오정해. 그녀는 소리를 하면서 명창 김소희, 배우를 하면서 임권택 감독의 고마움에 대해 인터뷰때마다 침이 마르도록 이야기하곤 한다. 소리를 하면서도 송화처럼 한을 끌고 가지 않고 배우를 하면서도 과도한 욕심 부리지 않는, 요즘 말로 하자면 "대충 해서 편하게 살고자 하는거냐?"라는 소리 듣기 십상이지만 사람이 참 웃기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처럼 보이는 법. 공부도 하고 있고 연극도 진행중이고 마당놀이도 하고 사실상 매해 할일 잘 찾아하고 계신다. 이것저것 잡다한거 하고 과로로 쓰러져야만 연예인이 일을 하는것 처럼 보인 다는것도 우스운 일이다. 그녀의 과도한 욕심없고 항상 의리가득 찬 그 마음가짐이 좋다. 92년 미스춘향 선발대회를 보고 임권택감독의 삘에 딱! 꼳힌 것 처럼 다른 배우는 교체해도 송화만은 바꿀 수 없었을 것이다. 16년 전과 비교해도 큰 변화없이(물론 켜놓고 보면 차이는 좀 있지만)한결같이 송화의 모습으로 그 자리에 있다. 나이가 먹은 덕에 오히려 그때 보다 소리는 더욱 무르익었고 아버지의 사후 떠도는 인생역정도 더욱 몸에 배어들어온다. 연기에 초짜였던 그녀가 훨씬 연기도 잘하게 된 2007년의 「천년학」은 오정해의 짠밥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지금은 오정해같은 얼굴로 미인대회에 누가 나오겠냐마는 실로 그만한 미스춘향이 또 나올까 싶다.

 - 그러고 보니 소설엔 없는 인물이지만 낙산거사도 그대로 나온다.

 



 

백사노인의 횡재하는 최후. 지옥이 문전이니 살아서 무릉도원을 느끼고자 함이었을까. 오정해는 김홍도의 그림같다.

 

 백사노인의 소실이 되어 사랑받고 맹인학교에서 공부도한 송화. 병약한 백사노인은 어떤 욕정이라기 보다는 그가 좋아하는 매향리 처럼 매화에 어울리는 한폭의 그림같은 송화를 무척이나 아낀 것이리라. 일정 때 친일하여 재물을 얻었으나 그 모든것이 얼마나 부질없는지 백사노인이 숨을 거둘 때 흥타령을 부르는 이 장면에서는 눈물이 콸콸 쏟아졌다. 오정해가 명창 김소희선생의 내제자로 있을 때 '흥타령'같은 노래는 배우지도 못했다고 한다. 나이가 어려서 그런것은 제대로 부를 수도 없거니와 '인생이 그렇게 흘러간다'는 이유에서였다고.  얼마 전 '붕어빵'에 나와서 돌아가신 아버지 이야기를 하면서 당신이 돌아가실때 꼭 막둥이(오정해)가 상여소리를 해주었으면 좋겠다고 하셨단다. 살아서 정작 아버지앞에서 소리를 잘 하지 않아 마음에 걸렸는데 돌아가실 때 본인이 직접 상여소리를 했단다. 왠지 상여나갈때의 그 마음과  목청에서 뿜어나올 한이 느껴져 나도 눈물이 났다. 그녀의 아버지가 '흥타령'을 그렇게 좋아했다고 방송중 한곡조 뽑아내는데 버라이어티 분위기 숙연해지고 같이 출연한 어린 아들도 눈물 찔끔해서 내가 '왜이래엉엉' 했었다.

 

 



 



 

 

  이제 임권택+정일성 영화에서의 아름다운 화면은 더이상 말로 할 필요가 없을 정도이다. 백사노인의 죽음과 함께 흩날리던 벛꽃(인듯)과 흥타령은 영화를 흡족하게 본 사람이든 욕을 하는 사람이든 가슴에 깊이 박혔을 것이다. 송화를 예뻐하던 백사노인이 온갖 패물을 주고 다이아, 루비, 진주 반지중 하나를 고르라는 장면이 있는데 제일 싼 진주를 고르는 송화를 보고 '그 큰 욕심보가니고 긴 앞날을 어찌 헤쳐갈까나?'라고 한다. 그나마도 노인의 사후 전부 두고 군바리시절 동호가 탄피로 만든 중금속 반지를 다시 끼고 나오는데 말 그대로 '모든게 꿈이로다' 가진 재물도 자신에게 소용이 없고 사실은 백사노인의 삶이 얼마 남지도 않은것을 잘 알기에 소실로 들어앉았을 것이다. 눈이 멀어 한이오 떠돌아 한이오. 영화를 누리는 듯하다 지아비를 잃고 한이오. 역마에 무슨 도화살인지 그이에 반하는 이들은 많으나 그에 휘둘리지 않고 스스로 떠나니 그 떠도는 한이 있다하더라도 그녀 얼마나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하고 운명과 함께 걸어가는 의연한 모습인가.

 

 왠지 모든것을 '의리'로 하고있는듯 느껴지기 까지하는 과도한 욕심없는 오정해의 모습이 비추어 지기도 한다. 그녀의 삶은 송화의 모습에 비해 무척이나 풍족할테지만 소리를 할 때만은 남편도 자식도 자신의 모든 다른 일도 없이 오롯히 혼자일 것이다. 유행가처럼 곧잘 따라 부르기도 힘들 거니와 '내가 불러 망치느니' 안부르는게 훨씬 나은것이 또 소리아닌가(ㅋㅋㅋ). 송화의 도화살 만큼은 아니겠지만 한번이라도 소리공연을 본 적이 있다면 자기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우뚝 서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내제자로 고생하던 시절의 기억도 있을 것이고 나름 자기만이 가진 한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소리를 잘 하는 사람들은 궁금하다 어떤 감정이 자신을 휘감고 있는가.

 

 

■ 우정과 애정, 혼이담긴 완성

 

  지난 5월 故이청준선생의 고향 장흥에서 장흥군과 순천대 주최의 추모 학술제가 있었다. 문학현장 답사와 판소리 공연에 영화제까지 그야말로 모든 흔적을 한자리에서 볼수있는 투어까지 나름 알찬 학술제였던 것 같다.  생전에 순천대학교 석좌교수로 계셨고 문창과가 우리과와 같은 층이기에 바로 강연회소식들이 쏙쏙 들어왔었지만 청강 한번 해 본적이 없다. 어린시절 너무 지긋지긋한 가난에 시달려 고향과 연을 끊고 싶을 정도 였으나 나이가 들어갈 수록 글에서 삶에서 고향이 자꾸자꾸 묻어만 나왔다고 하던 고인. 「당신들의 천국」이나 「병신과 머저리」같이 이청준의 이름을 한박에 알려주는 대표작들이 무수하지만 본인도 그렇거니와 친구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이 「남도사람」연작과 영화로 그의 이미지를 완성하고 기억할 것이다.

 

 네티즌 평에서 뭐하러 서편제를 또 만들었나 라고 욕을 엄청나게 써 놓은 것도 보았지만 그 글을 읽고 영화를 보고 하루하루 뭔가 배우는 것이 생기고 아는 것이 생긴다면 결국 다들 알게 될 것이라 생각된다. '한국적인 것'내세워서 상욕심을 부리는 노인네라던지 '한국적인것이 아니라 재미있는 영화로 인정받겠다'던 모 젊은 영화감독의 비아냥같은(사실은 아닐지라도 그것을 의식한듯한)인터뷰가 있었다 하더라도 적어도 이 「천년학」에 대해서만은 모든것을 버린 여유가 느껴진다. 군정시절 국민을 바보로 만들고 조롱하던 그냥 그런 계몽영화나 군인영화를 만들고 명성에 비해서 생각보다 긴시간 자신의 색을 제대로 나타내지 못한 감독. 지금은 명성도 어느정도 안정도 연륜도 갖고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 마음에 맞는 친구와 혼신을 다해 하나의 완성작을 내 놓았다는 것이 그대로 느껴졌다. '아무래도 이 사람 죽으려나보다'라는 나의 우스개 아닌 소리는 개봉 1년 쯤 뒤 바로 현실이 되어 이청준 선생은 세상을 떠났고 「천년학」은 소설을 읽지 않은 사람도 그를 기억할 수 있는 문학과 영상의 완벽한 결합이 되었다.

 

꿈이로다 꿈이로다 모두가 다 꿈이로다
너도 나도 꿈 속이요 이 것 저 것이 꿈이로다
꿈 깨이니 또 꿈이오 깨인 꿈도 꿈이로다
꿈에 나서 꿈에 살고 꿈에 죽고 가는 인생 부질없다.

 

 

 

<그래도 지나칠 수 없는 짤방>

 



 

영화의 시작에서 바로 우정출연 하신 故이청준 선생.

엔딩크레딧이나 영화정보에 거론되지는 않았지만

그만큼 본인도 이 영화에 엄청난 애정을 쏟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각본도 선생이 직접 참여 하심-

 

 



 

서편제에 잠시 출연하신 주요 무형문화제 故 백경 김무규 선생

영화 개봉 이듬해인 1994년 작고하셨다. 담백한 단소 연주로 더욱 이름을 날렸으며

거문고, 판소리, 산조에도 조예가 깊은 그야말로 예술가

거문고는 역시 남자가 퉁기는 멋이 그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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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는 B.C. 4세기 중국 춘추시대 말기, 전국시대 초엽 오(吳)나라의 장군이며 유명한 군사전략가이다. 그는 원래 제나라 사람으로서 동향인 오자서(伍子胥)의 추천으로 오왕(吳王) 합려(闔閭)를 섬기면서 그의 패업(覇業)에 공헌했던 장군이다.

손자는 전투현장의 일선지휘관으로서 보다 불후의 군사전략 명저, 손자병법(孫子兵法)으로 더 유명하다. 그러나 그의 저서외 그의 사람 됨됨이라든가 활약상을 확실히 전해주는 자료는 거의 없다. 손자병법 연구자들이 소개하는 손자의 인물평은 간단하다.


군령이 곧 군의 생명임을 강조

그의 본명은 손무(孫武)로서 제(齊)나라 출신이다. 오나라는 오늘의 소주(蘇州)근처에 도읍을 정했고 제나라는 산동성 근방을 가르킨다. 그는 병법에 통달했는데 오왕 합려가 그의 저서를 통독한후 그를 불러 병법의 몇가지 실제를 물어본다음 그를 군 지휘관으로서 임명했다. 합려가 손무에게 면접삼아 군지휘요령을 물었다.

그러자 그는 궁중의 미녀 180명을 차출해 이들을 2개대(隊)로 나눠 훈련을 시켰다. 그리고 손무는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를 처벌하기 위한 도끼를 들고 전원이 알아듣도록 구령을 했다. 그는 북을 치면서 전후좌우 동작을 요구하는 구령을 몇번씩 되풀이했는데도 궁녀들은 킬킬거리면서 웃기만 했다.

손무는 이런 동작에 대한 구령을 되풀이했는데도 궁녀들이 계속 말을 듣지않자 왕의 제지를 무시하고 대장 두사람을 훈련장에서 처벌하고 새로이 대장을 임명했다는 것이다. 이때 손무는 "이부대의 장수는 신(臣)이며 장수가 군을 지휘할때는 임금의 명을 따르지 않는수도 있아옵니다"라고 단호한 태도를 취했다. 그는 이 훈련에서 군령이 곧 군의 생명이라는 교훈을 깊이 심어주었다.

이런 일이 있은후 궁녀들은 구령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기침소리 하나 없이 군사훈련을충성스럽게 해냈다는 일화가 전해오고 있다. 이때 합려는 손무가 빼어난 용병술을 가졌다는 사실을 현장 확인하고 그를 휘하 장군으로 썼다. 오나라는 그후 강국인 초(楚)나라를 격파하고 북쪽으로는 제나라와 진(晉)나라를 제압했는데 이는 모두 손무의 공으로 이룩된 업적이었다.


최고의 병서로 인정받는 '손자병법'

그후 오나라가 손자의 군사전략으로 강대국으로 비약하자 오왕 합려는 마침내 교만해지고 정사는 돌보지 않고 주색에 빠져 국정이 날로 문란해졌다. 손자는 이에 실망한나머지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와 흰구름과 들의 학을 벗삼아 여생을 유유자적했다고 한다. 손자병법은 특히 대적(對敵)정보심리전과 간첩전을 중요시 하면서 여러 가지 속임수와 적 내부갈등조장, 적군 동맹국간의 이간질등을 많이 열거하고 있으나 이것은 병법일뿐 그는 세파에 흔들리지 않고 원칙을 지키는 고고한 인격을 갖춘 인물이었다.

손자병법에서 손자는 저서명인 동시 저자의 이름이기도 하다. 여기서 자(子)라고 하는 것은 옛날 동양에서는 남자에 대한 미칭(美稱)으로서 고인의 글을 빌리지 않고 자신의 창작에 의해 일가를 이루면 그 글을 ‘자서(子書)’라고 불렀다. 예컨데 장자(莊子), 노자(老子), 순자(筍子), 한비자(韓非子)등과 같은 것이며 성인(聖人)의 저서는 경서(經書)라고 부른다.

손자는 전략전술을 담은 병서(兵書)인 동시에 국가 및 기업경영과 처세수양(處世修養)을 위한 기본 독본이기도 하다. 근자 우리나라를 비릇해서 일본, 미국, 유럽등지에서 손자병법이 정치, 경제, 외교에 있어서도 하나의 비법으로 높은 평가를 받는것도 이 때문이다.

중국인들은 손자병법을 군사전략의 성경(聖經)이라고 칭찬하고 일본인들은 세계 제1의 병서이며 동방병학(兵學)의 비조(鼻祖)로 받들고 있다. 2차대전후 국공내전(國共內戰)에서 승리, 천하통일에 성공한 마오저둥도 정보심리전과 게릴라전을 위해 손자병법에 탐익했고 통일 베트남의 국부(國父)호치민(胡志明)과 베트남 게릴라전의 영웅 보구엔지압장군, 나폴레옹등이 모두 이 손자병법을 활용했다.

6·25때 의용군으로 참전한 중공(中共)군의 전투행태를 봐도 마오저둥을 비릇 중공군 지휘관들이 손자병법을 최대한 활용했다는 것을 알수 있다. 낮에는 쉬고 밤만 되면 인해전술로 북과 징, 꾕과리를 치고 피리를 불면서 돌진하는 전투행태가 모두 손자병법에 나오는 전술이다.

손자병법을 이용하는 북한

우리나라에서는 고구려의 을지문덕, 이순신장군등이 이 병서의 전략전술을 많이 활용했다고 한다. 손자병법의 전략전술 효과를 극대화하고 있는 측은 북한이다. 처음에는 김일성, 그후에는 김정일 국방위원장등이 해방후부터 지금까지 대남적화전략목표 달성을 위해 이 손자병법에 주로 의존해왔다고 할 수 있다.

손자는 적이 강하고 아군이 약할때 쉬면서 적과 담판하고 적이 약하고 아군이 강할 때 공격하며 몰아부칠 것을 권고하고 있다. 특히 적이 강할때는 군사력동원보다 정보심리전과 간첩전을 극대화해서 적내부에 갈등을 조장하며 분열을 일으키로 적과 적의 동맹국을 이간질해 적내부의 힘을 분산, 무력화 하도록 손자병법은 기술하고 있다.

북한측이 근자에 마침 핵문제를 둘러싸고 남북간, 북미간 마찰과 갈등이 고조되고 있는 때‘우리민족끼리 통일’구호아래 ‘민족자주’, ‘민족공조’를 날마다 내돌리며 극력 선전하는 것도 손자병법에 따른 우리 내부분열과 갈등조장용이며 한미동맹의 이간질용이다.

북한이 작년 느닷없이 부산 아시안게임 참가를 통보하고 대규모 미녀군단을 응원단으로 파견하고 인공기가 한국텔레비전을 통해 전국방방곡곡에 방영되도록 한것도 ‘민족감정’을 자극하고 북한을 미화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대남정보심리전인 것이다.

미국도 육군사관학교 교과목으로 손자병법을 활용하고 있으며 지금 이라크전쟁 준비과정에서 사담 후세인의 항복을 받아내기 위한 대 이라크 정보심리전을 활발하게 전개하고 있다. 미국 정부 최고위당국의 대 이라크 대량살상무기 무장해제 요구와 이라크 주변지역에 대한 미군병력과 항공모함파견, 부시대통령과 럼스펠드 국방장관, 콘도리자 라이스 백악관 안보보좌관, 파월 국무장관등의 일일발언등이 모두 후세인을 굴복시키기 위해 주도면밀하게 짜여진 대 이라크 입체 정보심리전의 하나다. 최근 후세인의 망명설이 잇따라 흘러나오는 것도 미국이 손자의 최상책인 부전승(不戰勝)을 거두려는 전략전술에 다름 아니다.

손자병법은 전부 13편 2만5천자로 돼 있다. 중국에 여러 가지 병법저서가 있지만 첨단과학이 발달된 오늘까지 여전히 실용성있는 이론적 병서는 이 책이 유일하다. 손자병법은 전쟁계획과 전투방법을 기술한 가장 오래된 명저이기도 하다. 손자는 극히 단순명쾌한 것이 그 특징이다. 그럼에도 몇천년 전쟁사에서 교전국들은 이런 단순한 기본병법 원리조차 번번히 따르지 않았다는 것이 기이할 정도다.

그 전략전술 이론의 두가지 교리는 어떤 침공도 격퇴할 수 있도록 적합한 방위태세를 갖출것과 적을 패망시킬수 있는 전략전술을 개발, 준비하라는 것이다. 적을 패배시키고 승리하는 방법 즉 전략전술은 쉽지않다.

손자는 적을 이기는 전략전술은 적과 실제 전투를 하지 않고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라고 기술했다. 손자는 무력사용은 최하책이며 무력은 오직 최후 수단으로 남겨두어야 한다고 했다. 어디까지나 정보심리전과 간첩활용을 통해 무혈 부전승을 거두도록 충고하고 있다.

손자는 능숙한 전략가들은 적과 교전하지 않고 적의 항복을 받아내고 적국의 도시들을 포위하지 않고 점령하며 칼에 피를 묻히지 않고 적국을 전복하는 것이라고 갈파했다. 이 모두가 손자병법 13편 간용(間用)편에서 강조하는 정보심리전과 간첩전을 최대한 활용하라는 뜻이다.

손자는 간첩전과 정보심리전을 위해서는 천문학적 경비가 들어도 반드시 지출해야 한다고 말할정도로 이 전법의 긴요성을 역설했다. 북한의 최근 대남행태에 비춰, 그들의 전략전술도 핵(核)협박 벼랑끝전술에다 정보심리전과 흑색선전, 간첩전을 배합, 부전승을 노리고 있다고 봐야 한다. 손자는 무력을 사용하기전 먼저 반드시 딴 방법을 사용하라는 것이다.

그것은 먼저 적국내에서 흑색소문을 광범하게 퍼뜨리고 뒤흔들어 혼란에 빠뜨리며 사기를 저하시키는 것이다. 또 적국의 고위관료들을 될 수있는대로 많이 매수해서 자기편으로 포섭함으로써 평소 적내부를 손바닥 들여보듯 훤히 파악할 수 있도록 하라고 권고했다. 월맹의 보구엔지압도 이런 정보심리전과 간첩전을 구사, 최종 승리를 거두었다. 즉, 70년대초 사이공 독립궁에서 고위전략회의가 끝난직후 회의내용 전부가 곧바로 하노이 수뇌부에 전달돼 월맹군은 월남군의 뒷통수를 망치로 치듯 역공을 하곤했다. 정보심리전과 간첩전의 중요성이 여기서도 극명하게 실증되었다.

요컨데 손자는 싸우지 않고 이기고 승산 없는 전쟁은 절대 않는다고 했다. 승리를 거두기 위해서는 우선 "지피지기(知彼知己), 즉 상대방을 알고 나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모공편· 謀攻篇). 손자는 전쟁을 할 때에는 " 남을 조종하되 내가 남에게 조종받으면 안된다(치인이불치여인·致人而不致於人-虛實篇)"고 했다. 즉 주도권을 잡지않으면 안된다는 뜻이다. 상대방 병력을 분산시켜 수세에 몰아넣은 다음 실(實)한 것을 피하고 허(虛)한 것을 공격하는 전략전술을 권고했다.

또 적의 무방비한 곳을 공격하고 적이 미쳐 대처하지 못한 곳을 노리라고 했다. 상대방의 의표를 찔러야 한다는 것이다. 96년 98년 두차례 북한의 동해 무장 잠수함침투와 작년 서해교전등도 바로 이런류의 속임수 전술이다. 그는 궤도편(詭道篇)에서 전쟁은 속임수라고 했다. 즉 위장평화나 지키지 않을 허위협정과 합의로 상대 적군을 방심케 해놓고 기습공격, 적을 제압한다는 것이다. 전쟁은 속전속결로 하고 지구전은 어리석은 우책(愚策)이라는 것이다. 북한의 대남전략전술이 모두 손자병법의 이런 속임수와 속전속결로 짜여있다.

손자병법이 나온지 2,400년의 긴 세월이 흘렀지만 속에 담긴 국가경영 및 처세술등 기본적 도(道)와 전략전술은 핵과 미사일등 첨단무기가 최고도로 발달한 지금도 여전히 녹슬지 않고 유효한 전략전술로 살아있다는 것을 알수 있다. 새로운 정보와 지식을 무턱대고 많이 축적하고 비싼 첨단 무기만 사잰다고 적을 이기는 것은 아니다. 손자병법을 배우고 익히는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이 그 어느때 보다 중요한 때다. 핵심은 전체 국민들의 민감하고도 철처한 안보국방의식과 정부의 빈틈없는 경계와 방위태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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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와이트 데이비드 아이젠하워 장군은 2차대전때 노르망디 연합군 상륙작전을 승리로 이끈 전쟁영웅이다. 그는 전후 군을 떠나 잠시 컬럼비아대학 총장으로 있다가 트루만 대통령에 의해 1951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사령관으로 다시 군에 복귀했다.

아이젠하워 장군은 1952년 트루만 대통령의 불출마 선언에 따라 공화, 민주양당의 후보추대 대상에 올랐다가 공화당후보로 출마, 압승을 거두었다. 52년 제34대 미국 대통령 선거전때 내세운 케치프레이스는 "나는 아이크를 사랑해"였다.

<아이크>는 그의 대중적 애칭이다. 그는 공화당 대통령으로서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후 다시 교착상태에 빠진 한국전을 휴전으로 마무리 지었다. 그가 선거전에서 국민들에게 한 약속을 지켰고 일생 동안 두 개의 큰 전쟁을 자기 주도로 지휘하고 끝낸 셈이다.


맥아더 장군과의 인연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과는 묘한 인연을 맺었다. 1935년 아이젠하워는 맥아더 장군이 육군참모총장 시절 총장실에서 근무했고 필리핀에서 3년간 맥아더 장군의 부관 노릇을 하기도 했다. 그런 그가 맥아더 장군이 지휘하던 한국전의 휴전을 성사시킨 것이다.

아이젠하워 장군은 세계 역사상 전례가 없었던 초대규모 전쟁에서 최대규모의 다국적 군대를 총 지휘했다. 2차대전 노르망디 작전때 그는 육해공 4백만명의 대군을 장악, 연합군의 총공격을 계획 지휘, 독일 이탈리아등 추축국들을 패망시켰다.

여러나라 군대들로 구성된 다국적군과 고집센 예하 지휘관들을 통솔한다는 것은 지난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비범한 능력을 발휘해 연합군을 통솔, 어려운 승리를 일궈냈다.


아이젠 하위의 성장기

그는 1890년 10월 14일 택사스주 데니슨에서 출생, 양친과 함께 칸사스주 아비렌으로 이주해서 그곳에서 성장했다. 집이 넉넉지 않아 대학을 갈수 없었기 때문에 미국 육군 사관학교인 웨스트 포인트를 선택했다.

그는 웨스트 포인트 육사시절 축구선수였으며 1915년 졸업동기생 중에는 50여명의 장군을 배출했다. 164명 졸업생중 61번째 성적을 받은 그는 보병소위로 임관되었다.

아이젠하워는 초임 장교로서 보병과 신설 탱크부대 합동작전 훈련계획을 개발해서 이 름을 얻었다. 맥아더와는 달리 1차대전에 참가하지 못하고 본국근무를 하면서 1920년 고속승진, 소령계급장을 달았다. 그러나 다음이 문제였다.

그는 20년간 소령으로 제자리 걸음을 하는 바람에 적은 군대월급으로 가족들을 부양하느라 무척 고생을 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좌절하지 않고 묵묵히 인내하면서 때를 기다렸다.

그는 앞날에 인생의 거대한 도전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예감했다. 그때 만약 참지못하고 화풀이로 군대를 떠났더라면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대성공도, 2대에 걸친 8년간의 미국 대통령의 찬란한 영광도 놓치고 말았을 것이다.

칸사스 포트 레벤워스에서 군사참모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마친 그는 1929년 존 조제프 퍼싱장군 밑에서 1차대전에 대한 안내서를 저술했다. 아이젠하워 장군은 여러분야에서 완벽한 참모역할을 수행함으로써 계속 좋은 평가를 받았다. 미국이 2차대전전 대외 확장정책을 쓸 시기 그는 마침내 중령으로 승진했다.

그후 2차대전때 3년간의 짧은 기간, 그가 5성장군으로 도약, 유럽 연합군 최고사령관 직책을 맡을줄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 멀티플레이어 선수처럼 다재다능한 그의 우수한 능력을 인정한 사람들도 똑 같은 생각을 했다. 아이젠하워 장군은 퍼싱, 맥아더에게 우수한 업무추진 능력과 적극적이며 호감어린 인상을 주었다. 그 덕택으로 마샬 참모총장은 일본의 진주만기습 직후 그를 육군 작전사단장에 임명했다.

그는 태평양 전장에서 일본군을 견제하면서 유럽에서는 나치군을 섬멸하는 연합군 종 합작전전략을 수립했다. 마샬은 그를 직접 소장으로 발탁했고 1942년 7월 중장진급과 동시 북아프리카 침공작전인 ‘휏불작전’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초기 케서린 통로작전에서 독일의 에르윈 롬멜 아프리카 군단에게 밀리자 그는 예하부 대장들을 자신이 직접 선택한 부대장들로 전면 교체했다. 아이크의 부대장 교체와 지도력은 롬멜장군 부대에 대한 열세를 압도적 우세로 역전시켜 결국 나치와 이탈리아 군의 대규모 항복을 받아내는데 성공했다.

북아프리카 침공작전에서 대승한 그는 버나드 몽고메리 장군과 조지 S. 패튼 장군 같 은 고집세고 거만한 휘하 부대장들을 철저하게 장악하는 능력을 인정 받았다. 4성장군으로 진급한 아이크는 1943년 7월 시시리 상륙상륙을 지휘한데 이어 이탈리아 반도에 입성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지휘

아이젠하워는 43년‘유럽정벌 연합군’최고사령관으로서‘오버로드 작전’(과부하 작전)아래 노르망디 상륙작전 수립과 집행을 총지휘했다. 그의 직접 작전지휘와 행정능력 덕분으로 연합군은 유사이래 최대의 상륙군사력을 한곳에 집결시켰고 기습시간과 장소를 작전순간까지 독일군조차 소름끼칠만큼 극비에 부쳐 철벽보안에 성공했다.

아이젠하워 장군은 1944년 6월 6일 프랑스 북부해안 노르망디에 상륙한후 수백만 연합군을 이끌고 독일로 진격해 들어갔다. 노르망디에는 미국 제1군, 영국 제2군, 캐나다 제1군을 주축으로 한 연합군이 상륙했다. 영국 몽고메리 장군이 상륙군의 실전지휘를 맡았다.

이 날 수송기 2,316대와 수많은 글라이더로 공수부대를 독일군 배후에 투하시켜 프랑스 내륙에 거점을 확보한 연합군은, 그와 거의 동시 항공기 총 13,000대와 함선 6,000척을 동원, 노르망디 해안을 초토화하면서 7개 사단을 상륙시켰다.

‘사상 최대의 작전’이었다. 이 날부터 7월2일까지 연합국측은 인원 약 100만명, 물자 약 57만톤, 각종차량 17만량을 프랑스에 상륙시켰다.

상륙 후 첫 3주동안 연합군의 손실은 공식적으로 사망자 8,975명, 부상자 51,796명에 달했고 작전 과정에서 독일군 41,000 명을 포로로 잡았다. 전쟁 초기 서부 전선에서 순식간에 패배해 유럽 대륙으로부터 퇴각한 연합국측은 이 작전을 통해 비로소 독일 본토로 진격하기 위한 확실한 발판을 마련했다.

프랑스 북서쪽에 자리잡고 있는 노르망디 해안은 험한 절벽이었고 상륙작전 전날 밤은 폭우 안개 등으로 도저히 작전을 수행하기 어려운 극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 고민하던 연합군 지도자들은 이 결정적인 작전의 성공을 위해 각각 기도했다.

루스벨트 대통령, 처칠 수상도, 아이젠하워 사령관도 모두 전쟁의 승리를 위해 지극정성으로 기도했다. 특히 루스벨트 대통령은 집무실에서 17시간이나 기도 했다는 에피소드도 남겼다. 아이젠하워는 오랫동안 전략을 수립했고 가장 치열한 전투가 전개된 이 작전은 결정적 타격을 나치 독일군에게 안겨주었다. 이 작전은 90일간의 전투라고 일컬어 진다. 그만큼 집중적인 전투가 전개돼 피아간 희생자도 많았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성공배경은 연합군이 물샐틈 없는 전략전술을 잘 구사한 탓도 있지만 독일 롬멜 사령관이 남부 독일 우름시에 있는 아내 생일선물을 전달하느라 프랑스 기습현장을 비웠다는 사실을 지적할 수 있다. 또 연합군은 44년 봄부터 영국 남부 해안 지대 각항구에 수백만명의 미군들이 북적거리게 하고 보급품과 무기탄약들을 실어날아 프랑스 북부 칼레지방이 상륙지점인 것 처럼 독일군을 속였다.

연합군 양동작전팀이 이따금 칼레지방에 출격, 노르망디로 부터 나치군의 주의를 분산 시켰고 고무로 만든 가짜 탱크들을 수없이 배치해 칼레지방 침공이 임박한 듯 속임수 심리전을 썼다.

노르망디상륙 전쟁영웅으로 공화당 대통령후보로 나선 아이크는 민주당 아들라이 스티븐슨 후보의 풍부한 행정력과 지식, 재치, 세련된 언변, 화려한 공약등을 두차례나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대통령 아이젠 하워와 한국전쟁

그는 39세의 젊은 캘리포니아 출신 상원의원 리처드 닉슨을 부통령 러닝메이트로 선택함으로써 62세로 상대적으로 나이가 많은 자신에 대한 국민들 우려를 불식시켰다. 압도적 다수로 당선된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긴급과제는 많은 사상자를 내면서 질질 끌어온 한국전쟁의 종결이었다. 이것은 선거공약이기도 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 당선자는 52년 11월 29일 극비리에 뉴욕을 출발, 한국으로 향했다. ‘명예로운’휴전타결을 위한 직접 한국전선 현장 시찰여행이었다. 찰스 윌슨등 예비국방장관과 제임스 헤거티 공보비서, 허버트 브라우넬 범무장관 지명자들과 비밀선서를 한 기자들 일행만이 동행했다.

그는 72시간 한국에 머무는동안 대부분 시간을 마크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과 밴 프리트 8군사령관등 주요 일선 군지휘관들과 만나 현황파악을 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아이크가 1주일간 머물면서 국회연설과 대규모 군대사열을 하고 자신과 장시간 한국전 수행에 관해 협의하기를 바랐지만 그런 소망은 이뤄지지 않았다. 아이크는 사흘간의 한국체제기간 이(李) 대통령과 두차례 만났지만 시간은 한시간 뿐이었다.

이(李) 대통령의 생각은 한국군과 유엔군이 압록강까지 쳐올라가 공산주의자들을 몰아내고 한국을 민주국가로 통일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제한전을 하면서 공산측과 적당한 선에서 휴전으로 전쟁을 끝내려는 아아크의 계획에는 처음부터 절대 반대였다.

이 대통령은 북한측 도발로 시작된 한국전이 막대한 피만 흘리고 원래 분단선인 38선과 대차없는 전선에서 휴전한다는 발상에 비통함을 억제하지 못했다. 그러나 아이크는 53년 7월 27일 한국전을 휴전으로 끝냄으로써 그의 선거공약을 지킨 셈이다.

맥아더는 처음부터 끝까지 전쟁의 실전업적으로 성공한 장군이라면 아이젠하워는 행정력과 기획력, 참모역할로 성장한 군인으로 좋은 대조를 이룬다.

아이크는 두 번째 대통령 임기를 마치고 펜실베이니아 게티스버그 농장에서 은퇴생활을 하다가 1969년 3월 26 일 7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군인출신 대통령인데도 재임중 국제평화의 전도사로서 냉전해소와 세계평화 달성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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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남을 위해서도 살고 싶어요”








2007년 5월22일 오후 12시 엄홍길, 변성호, 셰르파 한 명과 함께 로체샤르 정상능선에 올라선 모상현(牟相賢·34·컬럼비아스포츠웨어코리아 마케팅팀)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발이 무척 시렸다. C4를 구축하기 위해 C3에서 닷새간 텐트 플라이 하나로 비박하며 지내는 사이 발가락에 동상증세가 나타나 물집이 잡혔으나 베이스캠프에서 이틀 쉬면서 가라앉아 괜찮으려니 했으나 문제가 생긴 것 같았다.


선배 두 사람에게 자신의 상황을 얘기하면서도 지금 이 자리에 서기까지 석 달이 걸렸다 생각하니 그냥 내려선다는 게 너무도 억울하다 싶었다. 이제 두세 시간이면 석 달간의 등반을 끝내고 그토록 염원해오던 로체샤르 8,400m 정상에 올라설 수 있다는 생각을 떠올리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살려달란 소릴 듣고도 움직일 수 없었어요”


산소와 로프는 이미 다 떨어진 상황. 밑에 설치했던 40m 로프 두 동을 거두었다. 평탄하리라 싶었던 설릉은 20~30m 높이의 벽이 3개나 나타나 애를 먹였다. 그런데도 즐거웠다. 설악산 용아장성을 오르는 기분으로 정상에 올라섰다. 모상현과 변성호에게는 석 달간의 등반이었지만 엄홍길 대장은 2001년 이후 네 번 도전 끝에 이루어진 등정이었기에 그 기쁨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그리고 얼마 뒤. ‘아니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단 말이야.’ 모상현은 시계를 쳐다보는 순간 깜짝 놀랐다. 칠흑같은 어둠이 밀려오고, 엄청난 추위와 강풍이 몰아쳤다. 변성호가 갑자기 앞이 안 보인다며 당황하는 표정을 지었다. 정상에서 캠코더로 파노라마를 촬영하기 위해 잠시 고글을 벗은 게 설맹을 불러일으킨 것. 그런 상태로 안부까지 가는 동안 모두 지쳐갔다. 상현은 C4 도착 이튿날 엄홍길과 변성호가 쉬는 사이 셰르파와 둘이서 400m 로프를 까느라 힘을 쏟아부었던 터라 두 사람에 비해 더 빠른 속도로 체력이 고갈되어갔다.


“비박하자!”








8,000m 고봉 등반 중 여러 차례 비박을 경험한 엄홍길 대장이 안부에서 밤을 넘기고 내일 하산하자고 했으나 상현과 성호 두 대원은 자신도 없고, 하룻밤 지냈다가는 열 발가락 모두 잘라내는 상황이 생길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니 불안감에 1분 1초라도 빨리 내려서고 싶었다. 너무 정신없이 등반하다보니 배낭 안에 물이 있는데도 마시지 못했고, 떨어진 지 이미 오래인 산소통도 그대로 멘 상태였다.


꽁꽁 얼어붙은 수통과 산소통을 벗어버리고 다시 하산길에 들어섰다. 자일 한 동으로 하강하거나 클라이밍다운하고 고정로프를 만나는 지점에 내려서자 안심이 되었지만 엄홍길과 변성호가 내려오지 않자 초조해졌다. 잠깐 기다리다 마지막 캠프로 향했다. 너무 힘들어 잠시 쉰다 생각하다 깜짝 놀라면 졸고 있었고, 정신이 돌아오면 위에서 내려오는 사람들을 걱정하다 혹시 죽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공포감이 밀려왔다.


그래도 살아 내려가야 한다는 의지를 버리지 않았다. 졸음이 쏟아지면 얼어붙은 장갑으로 뺨을 후려치고 머리를 설벽에 처박았다. 그렇게 한 발 한 발. 마지막 캠프가 내려다보였다. 살았다 싶었다. 22시간만에 돌아온 캠프였다. 지퍼를 열고 상체를 집어넣는 순간 그대로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 눈보라와 깊은 눈을 헤치며 로체샤르 정상을 향하는 모상현씨.



“상현아~, 상현아~. 살려줘~.”


잠결에 성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10여 년 동안 형 동생하며 지내온 변성호의 살려달라는 절규였다. 2003년 탈레이사가르뿐 아니라 국내의 여러 산에서 목숨을 걸고 등반한 사이건만 눈보라가 몰아치는 텐트 밖으로 나간다는 게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아니 손끝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내가 형한테 어떻게 이럴 수 있나 하는 생각에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이튿날이 돼도 변성호의 눈 상태는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자 모상현은 그와 함께 C4에서 하루 더 쉬기로 했다. 그런데 지원차 올라온 셰르파와 함께 하산하던 엄홍길은 C4 바로 아래 로프가 끊어져 위에서 줄을 거두어 깔아야한다는 황당한 상황을 알려주었다. 변성호는 눈도 눈이지만 손과 발에 동상이 심해져 몸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는 처지였다. 때문에 상현은 위에서 회수한 자일을 캠프 아래쪽으로 늘어진 줄과 이었다. 그런데 그게 죽음의 나락으로 잇는 줄이 될 줄이야.


“저희 팀 C4가 80년대 초 체코팀의 캠프 자리였어요. 그래서 주변에 고정로프와 하켄이 눈에 띄었는데, 그 줄에 저희 줄을 묶었던 거예요. 하루 쉬고 난 뒤였는데도 정신이 없었나 봐요. 20년 넘도록 8,000m에 매달려 있던 줄에 이었으니 툭 하는 느낌을 받는 순간 40m쯤 떨어진 것 같아요. 수천m 아래 빙하로 내리꽂나 싶어 순간적으로 끔찍했는데 눈턱에 걸리면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거죠.”





▲ 엄홍길 대장(오른쪽)과 함께 올라선 로체샤르 정상. / 로체샤르 등반 후 BC에서 헬기를 기다리며.



어린 시절부터 넉넉하지 못한 채 산을 다니다보니 장비를 소중히 생각했던 상현은 마지막 내려서기 전 캠프에 올려놓은 침낭 2개에 산소마스크 8개와 레귤레이터 2개 등 값이 나가는 장비는 몽땅 챙겨 배낭이 머리보다 높이 올라올 정도로 짊어지고 내려오던 터였다. 눈턱에서 어렵게 멈춰선 상태에서 배낭을 풀러 피켈만 손에 쥔 다음 몽땅 버렸다. 그리고 살얼음 걷듯 설벽을 한 발씩 내려서 고정로프 끝지점까지 내려섰다.


“얼마 뒤 성호형이 클라이밍 다운으로 내려왔는데, 눈물이 글썽하지 뭐예요. 너 그렇게 혼자 가버리면 난 어떻게 하란 말이냐면서요. 그 전날 새벽 제가 먼저 내려오면서 느꼈던, 수직고 3,000m 벽에 나 혼자만 있다는 불안감을 느꼈던 것 같아요. 이렇게 어렵게 베이스캠프로 내려섰는데, 힘이 너무 드니 도와달라는 무전을 받고 올라온 후배의 입에서는 술냄새가 풀풀 나고, 캠프의 대원들은 철수준비에 정신이 없지 뭐예요. 저희 두 사람의 상황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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