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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 가진 것마저 빼앗기는 나에게 던지는 질문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안규남 옮김 / 동녘 / 201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유동하는 근대' 시리즈로 잘 알려진 지그문트 바우만의 새 책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는 123페이지라는 짧은 쪽수와 사륙판이라는 작은 사이즈, 그리고 비교적 작지 않은 폰트를 가진 간단하게 읽을 수 있는 팜플렛이나 선언문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내용만큼은 결코 간단하지가 않다. 질문은 명확하다.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왜 우리는 가지고 있는 작은 것마저 빼앗기면서 가만히 있는가(혹은 그 '빼앗김'을 도리어 옹호하고 있는가)? 그러나 원래 질문이 간단하고 명확할수록 대답은 조금 더 긴 사색을 요하는 법이다. 바우만의 방법은 이렇다. 먼저 우리가 얼마나 경제적 불평등 상태에 놓여 있는지를 객관적인 수치로 보여줌으로서 우리의 사실적인 판단력이 작동하도록 한다. 그리고 그 불평등의 옹호에 내재한 4가지의 '부정의의 교의'를 살펴보고, 그 '부정의의 교의'를 깨부숨으로써 우리가 논리적 정당성을 갖추고, 이것이 행동의 의지를 일으키도록 한다. 그리고 마지막은 사실에 의거한 판단과 논리가 결합된 행동을 촉구하는 것이다.

바우만이 먼저 제시하는 것은 여러 자료들에서 찾아낸 불평등의 양상들이다. 경제적으로 '20대80의 사회'라는 이야기는 이제 아주 먼 옛날의 이야기가 되었다. 자료들이 보여주는 것은 현재는 거의 1대99의 사회이거나 0.1대99.9의 사회, 혹은 그 이상의 사회라는 사실이다. 대략적으로 '전 세계 최고 부자 1000명의 부를 모두 합하면 가장 가난한 25억 명의 부를 모두 합한 것의 거의 두 배가 된다.'(p.18) 혹은 전 세계 인구 중 상위 20퍼센트가 생산된 재화의 90퍼센트를 소비하고 있는 반면, 가장 가난한 20퍼센트는 불과 1퍼센트만을 소비하고 있다(p. 19). 문제는 이것이 계속 악화되고 있으며, 급격하게 가속도를 붙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1960년에 미국 최고 대기업들 최고경영자의 세후 평균 보수는 공장 노동자들의 평균 임금의 12배였다. 1974년에는 이것이 35배가 되었고, 1990년대 중반에는 135배, 1999년에는 400배, 2000년에는 531배가 되었다(이와 비슷한 수치들은 다른 부분에서도 수없이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이는 세 가지 사실을 말해준다. 하나는 중산층이 붕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비단 우리나라의 경우만이 아니고, 전세계에서 중산 계급들은 점점 '프리카리아트(불안정한 고용이나 노동 상황에 놓인 비정규직, 파견직, 실업자, 노숙자들을 총칭하는 말)'로 전락하고 있다. 다른 하나는 이런 경제적 불평등은 비단 경제 부분만이 아니고, 사회의 전부분에 걸쳐서 거의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악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다. 점증하는 경제적 불평등은 점증하는 사회병리와 큰 상관관계가 있음을 관련한 연구들은 보여준다. 마지막 하나는 아마도 가장 중요한 것일텐데, 그것은 이 마지막에는 파국이 기다리고 있으며, 이 파국은 매우 가까이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불평등은 왜 감소하지 않는가? 아니 감소하기는 커녕 왜 도리어 가속도를 붙여가고 있는가? 그것은 단적으로 말해 '소수의 부가 우리 모두에게 이익이 된다'는 기이한 믿음이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를 용어로는 '낙수효과'라고 부를 수도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라면 비슷한 다른 표현들이 있는데, 예를 들어 이러한 것들이다. 부자들의 감세가 경제를 발전시킨다. 삼성이 잘 되어야, 우리나라가 잘 된다.) 바우만이 이러한 기이한 믿음을 부수기 위해 채택한 전략은 이 표면에 자리잡은 '교의'를 직접 공략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그 '교의'에 내재한 '부정의의 교의'의 기만들을 살펴보도록 하는 것이다. '부정의의 교의'는 큰 소리로 선언되는 확신들을 뒷받침하고 '타당한' 것처럼 보이게 하는 암묵적인 전제들로서, 지금까지 숙고되거나 검토된 적이 거의 없다. 그것들은 언제나 암시만 될 뿐 분명하게 표현되는 적이 거의 없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믿음들을 가지고 생각한다(p. 35~36). 다시 말해서 우리가 믿고 있는 이 '기이한 믿음'에는 몇 가지의 암묵적인 믿음들이 내재되어 있으며, 이 믿음들을 살펴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 바우만의 말이다.

바우만이 보여주는 네 가지의 내재된 믿음, 즉 부정의의 교의는 다음과 같다(p.49).

1. 경제성장은 공생에서 생기게 마련인 과제들을 처리하고 어떤 문제든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2. 영구적으로 늘어나는 소비 혹은 더 정확히 말해 새로운 소비 대상들의 가속적인 교체는, 인간이 추구하는 행복을 충족시키는 유일한 길이거나 혹은 적어도 중요하면서도 가장 효과적인 길일 것이다.
3.  인간들만의 불평등은 자연적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 삶의 가능성들을 삶의 불가피성에 맞춰 조절하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반면, 삶의 원칙들을 함부로 변경하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손해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
4. 경쟁(가치 있는 사람들은 올라가고 가치 없는 사람들은 배제되거나 추락하는 양면을 지닌)은 사회 질서의 재생산과 사회 정의의 필요충분조건이다.

정리하자면 불평등과 경쟁은 사회에 어쩔 수 없이 존재할 수밖에 없거나 필요한 것이고, 그러한 것을 감수하고라도 우리 모두의 행복을 위해 경제성장과 그에 따른 소비가 필요하다는 교의, 혹은 믿음이다. 그러나 바우만은 이 교의들이 거짓말이거나, 혹은 더 큰 거짓말을 불러올 수 있는 믿음임을 다음의 이야기로서 보여준다.

1. 경제성장은 사회의 모든 이들에게 더 나은 미래를 약속하지 않는다. 낙수 효과는 없고, 경제성장은 이미 많이 가진 사람들의 부만 더 늘려주고 있음을 수치들은 보여준다. (예를 들어 2007년의 신용 붕괴 이후 미국의 GNP 증가분의 90퍼센트 이상이 가장 부유한 1퍼센트의 미국인들에게 돌아갔다.) '경제성장'은 소수에게는 부의 증가를 의미하지만, 수많은 대중에게는 사회적 지위와 자존감의 급격한 추락을 의미한다(p.59).
2. 행복에 이르는 것이 소비라는 말은 현재의 부정의를 잊게 하는 당의정에 불과하다. (9.11 다음날 당시 대통령 부시가 제시한 최선의 행동 수칙은 '쇼핑으로 돌아가라'는 것이었다.) 현재 공공연하게 제시되는 소비 권장 메시지는 소비를 놓고 대중들이 서로 경쟁하게 만듦으로써 대중들의 협력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소비사회에서 (슬로푸드 운동과 같은) 공공의 협력으로 나아가야 한다.
3. 불평등이 당연한 것이라는 오랜 믿음은 사회적 불평등을 무리없이 수용하게 하면서, 오히려 그 불평등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불평등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사회의 질서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옆에 사람이 조금 더 가지거나, 자신의 생활수준이 조금 더 나빠지는 것을 부정의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즉 우리는 작은 불평등에 분노하지만, 커다란 불평등은 정상적인 것, 혹은 자연의 섭리라고 받아들이고 있으며, 이는 오랜 교육과 훈련으로 만들어진다.
4. 소비사회에서 소비자와 물건이라는 주체와 객체의 관계를 우리는 인간사회에마저 적용하고 있다. 상대방을 주체로 대하는 정당한 인간관계는 상대방을 객체로 대하면 되는 경쟁관계보다 더 피곤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항상 협력과 공생보다는 경쟁이 우선 순위가 된다. 이는 소비사회의 특징이며, 그것을 쇼핑몰들은 보여준다. 우리는 안전을 위해 인간의 선의와 친절보다는 입구에 있는 CCTV나 무장경호원에 더 의존한다.

...
어쩌면 이 글을 읽는 당신은 맥이 풀렸을지도 모르겠다. 당신은 이렇게 얘기하고 싶을지 모른다. 아니 겨우 그런 얘기하려고...그거 별로 안 좋은 거는 우리 모두 잘 알잖아요. (혹은) 별로 좋은 건 아니지만, 그거 어쩔 수 없는 것이잖아요. 그런 말 많이 해왔지만, 여전히 사회는 이 모냥, 이 꼴이잖아요. 모두들 다 불평등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경쟁하고 소비하면서 사는데, 나 혼자 협력하고 선의와 친절을 보여주고 소비를 줄이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후....맞는 말이다. 그것은 바우만도 인정한다. "우리가 소망하거나 없애버리기에는 너무 강력하고 벅찬 것들을 지칭하기 위해 '현실'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p.111) 그러나 여전히 포기해서는 안되는 두 가지의 이유가 있다. 그것은 두 가지의 이유라기보다는 하나의 모순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첫째, 이제는 끝났다. 이제는 다가오는 파국을 멈출 기회도 희망도 없다. 둘째, 그렇다고 해도, 우리는 말하고 생활방식을 바꿈으로써 말과 행위의 간극을 줄이려, 파국을 막으려 노력해야 한다.

바우만은 말한다. "세계에 대한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비합리적인 행위이다. 하지만 결정에 대한 책임과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모두 감수하면서까지 세계에 대한 책임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하는 것이야말로 세계의 논리가 초래하는 맹목으로부터, 타자와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결과로부터 세계의 논리를 구원할 마지막 기회다."(p.114) 어느 작가는 1939년 8월 23일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끝났다. 내가 진짜 작가라면, 나는 전쟁을 막을 수 있어야 한다.' 문제는 '끝났다'는 진술이 아니라, 그가 이 진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가 이 진술을 진지하게 말하고 있는 한, 아직 끝나지 않았다. 작가를 '진짜'작가로 만드는 것은 현실에 대한 말의 영향력이고, (진술을 한다는) 행위를 한다는 것은 말이 현실이 되도록 노력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후...당신이 이것으로도 마음이 조금이라도 동하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다. 혹은 차라리 파국이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면 또 어쩔 수 없다. 그러나 1925년생으로 나치와 소비에트 공산주의를 겪은 노학자는 파국을 막기 위해 글을 쓰면서 애쓰고 있다. 나도 파국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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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0-16 17: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0-17 14: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이리시스 2013-11-04 0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금 지나긴했는데 일본 사법고시에서 교포가 아닌 한국 일반여성이 처음으로 합격했는데 부산여자인 거예요. 정확하진 않지만 아시아최초, 외국인최초 뭐 그렇게 났던 것 같아요. 지역신문에서 봤고요. 국제변호사가 되겠다고 중퇴한 학교는 제가 사는 구에서 갈 수 있는 다섯 개 여고중 하나였고, 교포가 아니니까 언어가 안돼서 서너시간만 자고 공부했대요. 나이도 20대라 관심있게 읽었는데, '처음으로'가 맘에 걸려서 제가 나름 분석끝에 한 소리가, 누가 일본에서 변호사를 하겠다고 하겠어, 하겠다고 시험 볼 확률이 적으니 당연히 합격률도 낮겠지 생각했었는데 이 리뷰 보면서 그때 생각났어요.

20%:80% 이런거, 갈수록 심해지는 경쟁이나 불평등 이런 게 저는 특히 심한 나라가 우리나라라고 늘 생각했거든요. 우리나라가 이상한거지, 나는 괜찮아. 그런데 이렇게 생각한다고 해결되는 건 없잖아요. 다른 사람이 가난하다고 내가 부자가 되는 것도 아니고. 겪지않은 걸 두려워하기는 어려운 것 같아요. 우린 공산주의도, 전쟁도 모르니까 그것들이 만들어놓은 불합리도 이해할 수도 없고 어떻게 우리 잘못이 아닌지도 잘 모르고요. 이런 와중에 TV 틀면 상속자들이 드글거리는 [상속자들] 같은 거나 하고.. 맨날 재벌2세는 가난한 여자를 사랑해요. 으흐흐흐.

강남에 있는 (장사하는)건물들 90%는 우리나라 자본이 아니라고 들었어요. 건물이 아니라 업체가 우리나라껀 아닌 거겠죠. 그게뭐든. 요즘은 제주도도 그렇대요. 중국이 야금야금 사들이고 있다고. 우리나라도 우리 게 아닌데, 이 나라에 내껀 없어요. 갑자기 슬퍼요 ㅠㅠ (저 지금 뭐하는 거임?-_-;;)

맥거핀 2013-11-04 22:19   좋아요 0 | URL
처음에는 뭔가 진지한 댓글인 척 하다가, 갑자기 마지막에 슬퍼지는 이 댓글은 앞뒤가 안맞습니다. 다음 번에 조금 더 진지한 자세로 응모하시기 바랍니다.ㅋ

..는 뻘소리구요. 읽다보니까 과연 불평등이 어디까지인지, 이것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 여러 생각이 들기는 했습니다. 예를 들어 기회를 평등하게 해주면 평등한 것인가...국제중 입학 전형에서 같은 시험기회를 주면 공평한 것인가, 하고 묻는다면 꼭 그런 건 아니잖아요. 어렸을 때부터 가정교사 붙고, 엄청난 과외받고 한 아이들이 더 유리할 것은 당연한 이치고, 그렇다고 어느 정도까지 평등하게 만들것인가라고 묻는다면 원시공산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할지도 모르는 문제죠.

그리고 (책에 집중하는 것은 경제적 불평등이지만) 경제적 불평등만 있는것도 아니고, 심리적인 부분이나, 사회적인 부분은 더 크고, 더 심각하다고 할 수 있죠. 차라리 파국이 나을까요? 알라딘 서재의 배너에도 '자본주의의 파국'과 같은 이야기가 나오던데, 파국이 무엇이 될 것인가, 즉 그 '파국'이라는 것은 어떠한 형태가 될 것인가의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은 정말 중요한 문제라고 봐요. 자본주의의 비행은 이미 글렀고, 그럼 이제 연착륙 시켜야 하는데, 그 연착륙마저 어렵다면 가능한 모든 방법(동체착륙이라든가, 수상착륙이라든가)을 시도해봐야겠지요. 물론 여기서 지금이 연착륙을 포기할 시점인가?,의 문제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구요.

아이참..나도 <비밀> 끊어야하는데...그러니까 재벌 2세를 만나려면 먼저 가난해져야만 하는 거군요..응?

아이리시스 2013-11-05 13:04   좋아요 0 | URL
..가난한데 미국에 가서 언니한테 버림받고 잘 곳이 없어지거나, 가난한데 재벌2세가 사랑하는 가난한 여자를 실수로 죽여야죠..

1시다, 대낮에 알라딘하니까 좋다, 맨날 밤이나 새벽에만 하다가.. 이제 맛난 거 먹으러 갑니다..안녕..

맥거핀 2013-11-06 18:38   좋아요 0 | URL
근데 드라마에 나오는 재벌2세들은 왜 다 이렇게 잘생긴거임? 돈이 있어서 성형한건가..돈이 많으면 못생기기라도..아님 돈이 많고 잘 생겼으면 성질이 엄청 더럽기라도 해야지..돈이 많고 잘 생겼는데, 성질 더러운 것 같았지만 알고 봤더니 착해!, 왜 다 이런 애들 뿐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