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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의 자유 - 해직기자 김종철의 젊은이를 위한 한국 현대언론사
김종철 지음 / 시사IN북 / 2013년 7월
평점 :
품절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책 <폭력의 자유>는 '해직기자 김종철의 젊은이를 위한 한국 현대언론사'라는 부제에 걸맞게 일제시대부터 이명박 정권 시기에 이르기까지 한국 언론의 모습을 시기별로 나누어 추적하고 있다. 저자 김종철 씨는 그 자신의 삶이 곧 한국현대사의 일부분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그는 1967년도에 처음 동아일보사의 기자로 들어가서 1975년 강제해직 당했으며, 그 이후 몇 차례의 옥고와 더불어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대변인과 사무처장을 지내다가 한겨레신문 창간에 동참하여 1998년까지 논설간사 및 편집부위원장으로 일했다. 그리고 현재에는 동아일보사 해직언론인 모임인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의 위원장을 맡고 있다. 즉 그의 경력 자체가 권력의 개입과 굴종, 또한 그에 맞선 언론인의 양심적인 투쟁으로 점철된 우리의 파란만장한 언론 현대사의 모습을 드러내보인다고 말할 수 있는데, 그런만큼 그는 때로 이 책에서 시대별로 일어난 사건들을 그대로 나열하는 것에만 머물지는 않는다. 1960년 4월 혁명에서는 고등학생 신분으로 겪었던 혁명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고 1975년에 있었던 동아일보사 기자 및 직원들의 강제해직 사건, 80년대 전두환 정권에 맞선 해직언론인들의 투쟁, 1988년 국민 모금에 의한 한겨레신문의 창간 등에서는 자신의 목소리로 생생한 경험을 들려주기도 한다.
책의 구성 및 내용에 있어서 두 가지 점이 눈에 띄는데, 먼저 하나는 책의 이야기가 ('네오'님도 지적하셨듯이) 1910년도 일본의 강제 조선 병합과 제국주의 일본의 소위 '문화정책'부터 시작하고 있다는 점이다. 일본은 강제병합 후 강력한 경찰력을 바탕으로 무단통치를 자행하다가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정책의 방향을 바꾸었는데, 그것은 이른바 '문화통치'로 사실상 그 이름의 의미와는 다르게 훨씬 더 교묘한 방식으로 조선을 통제하는 것이었다. 그 한 부분이 '합법적 언론'의 허용이었는데, 그것을 계기로 탄생한 것이 김성수의 '동아일보', 예종석(후일 방응모)의 '조선일보', 민원식의 '시사신문' 등이었다. 즉 근대 언론의 시작에서 흔히 언급되는 서재필, 윤치호 등의 '독립신문'을 건너뛰고, 일제의 사실상의 간섭과 통제 하에서 창간된 동아일보나 조선일보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 흥미로운데, 이는 아마도 특히 권력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언론의 역사를 보고자 하는 저자의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저자의 관점으로 본다면, 현재까지 위세를 떨치고 있는 동아일보나 조선일보를 포함한 한국의 근대 언론의 시작은 자유로운 의지의 탄생이 아닌, 사실상 관과 합작하여 탄생된 반쪽짜리 언론이었다. 동아일보나 조선일보는 현재까지도 자신들이 일제의 탄압을 받은 민족지였음을 자랑스레 내세우지만, 그것은 '일장기 말소사건' 등 일부의 경우 뿐이고(책에 따르면 이 역시도 젊은 기자들이 주도한 거사일 뿐, 사주와 고위간부들은 전전긍긍할 뿐이었다), 탄생부터 일제 말기까지 친일의 모습을 보인 '反 민족지'에 가까웠다. 저자는 책의 첫머리에서 밝히듯 한국언론의 역사를 '민중의 벗인가 공공의 적인가'라는 관점으로 살펴보려 했다고 밝히고 있는데, 이러한 구분에 따르면 한국언론의 역사가 결국 어디에 더 가까웠는지를 밝히는 것은 뒤를 굳이 읽지 않아도 자명한 일이다. 썩은 씨앗에서 올곧은 줄기가 나오기는 힘든 법이다.
다른 하나는 일제시대부터 이명박 정권에 이르기까지 각 정권 별로 챕터가 나뉘어 구성되어 있으며, 각 챕터가 다른 비중 및 분량으로 다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책에서 가장 큰 비중 및 분량으로 다루고 있는 것은 박정희 정권과 이명박 정권의 시기인데, 책의 성격 및 내용으로 비추어 볼 때 이것은 이 시기가 언론이 가장 큰 통제 및 고난을 겪었던 때였으며, 또 그에 따른 언론의 투쟁 역시도 가장 격심했던 때로 볼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박정희 정권 시기에는 기관원이 신문사 편집부에 상주하여 신문의 편집과 발간에 일일이 간섭을 하고, 동아일보사 및 여러 언론사에서의 대량 해직 및 그에 맞서는 기자들의 노조 창립과 복직 투쟁이 잇따르던 때였다. 또한 이명박 정권 시기에는 전례 없었던 방송사들에 대한 낙하산 사장들의 투입 및 마음에 안드는 언론인 솎아내기, 그리고 그에 대한 언론사 총파업 및 대 정권 투쟁이 불같이 일어나기도 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다른 정권 시기에 정부가 언론에 개입하거나 언론이 정부에 맞서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다른 정권 시기에도 여전히 언론과 정부는 충돌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그것은 폭압적 독재정권 시기에는 정부의 회유 및 간섭, 그에 따른 굴종이나 투쟁의 양상으로 또한 소위 진보정권 시기에는 보수언론과 정부의 대결이라는 양상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즉 한국현대사에서 언론은 사주 및 구성원들의 성향에 따라 다른 얼굴을 보여줬으며, 또한 동시에 각 시기별로도 재빨리 가면을 바꿔쓰는 경우가 많았다. 그것은 단지 대형 보수매체들의 문제만이 아니었으며, 소위 진보언론도 때로는 여론을 호도하기도 했다. 저자의 관점대로라면 지금까지 한국현대사에서 언론은 민중의 벗이라기 보다는 공공의 적에 가까웠으며, '압제를 극복하는 자유언론'도 아직은 멀다.
물론 그것은 언론인이나 이 책이 타겟으로 하고 있는 '언론인이 되려는 젊은이'들이 조금 더 고민해야 할 문제고 다시 책으로 돌아오자면 몇몇 아쉬운 점이 눈에 띈다. 먼저 한 가지는 책이 너무 정치와 권력과의 상호작용적인 관점에서만 언론을 보고 있다는 점이다. 언론이 정부와의 관계에 대한 부분만 있는 것도 아니고, 언론이 다루는 모든 내용이 정치에 대한 것만 있는 것도 아니다. '한국현대 언론사'라는 거창한 타이틀을 달고 있지만, 거의 모든 내용이 언론에 대한 정부의 통제, 그에 따른 투쟁, 또는 각 정치 사안에 대한 여러 언론사의 반응들로만 채워지다 보니 너무 한 쪽으로 치우친 느낌이다. 전체적인 사회의 감시자로서 여러 다양한 시각에서 각 언론들의 모습을 다루는 것이 보다 더 '한국 현대언론사'를 조망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각 시기별 주요 사건들이 너무 수박겉핥기 식으로 다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한국현대언론사의 격랑 한 가운데에서 여러 사건을 넘나든 저자의 이력으로 비추어 볼 때 아쉬운 점이라고 할 수 있는데, 저자가 너무 전체 사건을 편년체 형식으로 기술하려다 보니 특정 사건들에 대한 자세한 분석이 결여되는 측면이 있다. 예를 들어 한겨레신문의 창간 과정에 있어서도, 당시 시작부터 깊숙이 개입했던 저자로서, 당시 내부의 이야기나 어려운 점들, 혹은 창간 과정의 문제점 같은 것을 자세히 들려줄 수도 있을 텐데, 저자는 너무 알려진 사실들로만 이야기를 이어나가고 있다.
그것은 여러 사건들에 대한 각 언론의 보도 양상을 다루는 부분들 같은 데에도 마찬가지인데, 정작 중요한 것은 어떤 사건에서 어떤 언론사가 어떤 보도를 하였는가가 아니다. 그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고, 보다 중요한 것은 그렇다면 '왜' 그런 보도를 하였는가의 문제일 것이고, 그것에는 언론사 내부의 경제,권력구조 및 여러 역학관계, 정부와의 관계, 사주의 성향, 기자들의 취재방식, 언론사 간의 관계 문제 등등 우리가 실상 잘 모르는 여러 문제들이 개입되어 있을 것이다. 언론사 내부에서 오랫동안 일했던 저자라면 이 '우리가 실상 잘 모르는 여러 문제'에 대한 이야기들을 (내부자의 목소리로) 자세히 들려줄 수도 있지 않았을까. 각 현안들에 대한 여러 언론의 상반된 리포트는 이미 수없이 알려진 내용이다. 이를 반복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읽다보면 이것이 한국현대'언론사'인지, 아니면 강준만의 '한국현대사 산책'인지 잘 모르겠다.) 즉 이 책은 사실 조금 어중간하다. 한국현대언론사라고 부르기에는 언론의 모든 내용을 세밀하게 다루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책에서 중점적으로 다루고자 하는 내용, 즉 한국현대사에서의 권력과 언론의 관계를 그리 깊숙이 추적하고 있지도 못하다. (부록에서 보여주는 미국의 머독과 이탈리아의 베를루스코니 총리와 같은 권력과 결탁한 언론을 다루는 부분은 본문 내용의 반복에 가깝고, 위키리크스를 다루는 부분은 '압제를 극복하는 자유언론'을 보여주고자 하는 의도는 알겠지만 좀 쌩뚱맞다.)
결국 중요한 것은 <왓치맨>에서 나온 것처럼 '감시자들을 어떻게 감시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언론이 사회의 감시자라고 했을 때 그 감시자들을 감시하지 않는다면, 감시자들은 곧 또다른 권력자가 되어버린다는 점을 지난 역사는 여실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것은 소위 진보언론들은 물론이거니와 책에서 하나의 예처럼 제시된 위키리크스도 마찬가지이다(어쩌면 그들의 힘이 꽤나 강력하다는 점에서 보다 위험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감시자들을 어떻게 감시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결국 각각의 개인들이 감시자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보수언론들의 잘못된 보도 행태를 꾸준히 지켜보고 스스로 걸러내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지난 이명박 정권이나 현 박근혜 정부 하에서 정부에 대한 언론인들의 투쟁에 지지를 보내는 것 역시 마찬가지이다. 지지를 보낸다는 것은 그들을 격려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들을 지켜본다는 것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언제까지나 민중의 벗인 언론은 없다. 그것은 그들이 나빠서가 아니라 그들의 생리이다. 꾸준히 그들을 감시하지 않으면 언제 감시자들이 우리를 억압할지 모를 일이다.
덧.
책 제목은 참 아리송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