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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ㅣ 미슐레의 자연사 1
쥘 미슐레 지음, 정진국 옮김 / 새물결 / 2010년 10월
평점 :
품절
참으로 진도가 안 나가는 책이었다. 이 책은 왠지 그 자신 '바다'를 닮은 것 같다. 오르락내리락, 오르락내리락. 저자 쥘 미슐레는 거대한 폭풍우의 무서움에 대해서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아름다운 바다생물의 모습을 찬양하기도 하고, 믿기 힘든 인어의 모습을 닮은 바다생물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도 하다가는, 그 모든 가설들에 갑자기 의심어린 시선을 던진다. 그 때마다 책장은 내 손 끝에서 조금씩 부서져 하얀 포말로 변해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 버리고, 여전히 나는 바다 안에 들어가보지 못한 채, 바다 주위에서만 맴돈다. 그리고 바다는 여전히 먼 곳에 떨어진 어딘가에 있다. 알 수 없는 어딘가에 있다.
몇 가지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먼저 단순한 이유 몇 가지. 이 책은 바다의 거의 전부를 담으려는 불가능에 가까운 대담한 시도를 하고 있고, 저자는 그 시도를 완수하기 위해, 당시(이 책이 출간된 것은 1861년) 존재하고 있던 바다와 바다 주변에 관한 상당수의 문헌들을 자유롭게 이 책에 인용하고 있다. 그 자유도는 생각보다 꽤 높은데, 아주 널리 알려진 책들도 있는 반면, 거의 알려지지 않은 책들도 있고, 후에 다른 책에 인용된 내용들이 재인용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더구나 위에서 말했듯이 이 책은 19세기 중반부에 출간되었으며, 당시 최신의 과학적 지식을 담고 있지만, 현대인의 관점에서 본다면 미심쩍거나 아리송해 보이는 부분들도 있다. 그런만큼 책에는 확인할 수 없는, 동시에 확인하기는 어려우나, 그대로 믿을 수 밖에 없는 내용들이 상당수 존재하며, 그것은 책을 읽고 있는 나에게 지속적인 어지럼증을 안긴다. 또한 저자는 계속해서 무엇인가를 묘사하려고 시도한다. 그것은 프랑스의 어느 한 해안가이기도 하고, 때로는 알려지지 않은 바다생물의 모습이기도 하고, 또 때로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동물의 모습을 닯은 무엇인가이기도 하고, 가끔씩은 실체를 말할 수 없는 어떤 것 - 예를 들어 폭풍우의 형상 - 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 책을 읽는 사람은, 아마도 거의 누구나, 끊임없이 머리 속에 어떤 심상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심상의 모습은 항상 흐릿하다. 우리 머리 속에 박힌 몇 가지의 관념들이나 그간 알고 있던 바다생물들의 모습은 그 심상들을 그리는 데에 계속 방해만 줄 뿐이다. 그러므로 때로는 묻고 싶어진다. '그라브의 환한 곶'이란 도대체 어떻게 생겼는지, 뗏목처럼 생긴 '벨렐'은 어떠한 모습인지, '캉크르'는 상대방을 위협할 때 어떤 '폼'을 잡는지 말이다. 조악한 그림이라도 좋으니 그런 모습을 보여줬으면.
사실 보다 근본적인 책읽기의 난관은 다른 데에서 찾아야 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 책의 주된 글쓰기가 그간 우리가 접해왔던 글쓰기와 다른 것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1800년대 중반은 낭만주의가 절정을 지나고, 거의 끝마무리에 이르던 시기였고, 새로운 기술과 과학문명의 발달로 실증주의 및 사실주의가 촉발하던 시기였다. 이 책에서도 그런 사조의 분위기가 여실히 녹아들어가 있다. 즉 이 책 <바다>는 멸종해가는 바다생물에 대한 과학적 보고서이기도 하고, 새로운 지리상의 발견과 과학적 발견들을 전하는 탐험기이기도 하고, 바다를 둘러싼 인간들의 사투와 침략을 보여주는 문명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모든 것들의 예찬이기도 하다. (각 장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1부는 바다에 대한 막연한 공포와 그것의 거대함과 위엄에 대해, 2부는 생명의 원천인 바다의 신비함에 대해, 3부는 바다에 대한 인간의 정복욕과 그것이 불러온 비참한 실패들, 그리고 인간의 탐욕이 불러온 생명(다른 류의 인간을 포함한)의 고갈에 대하여, 4부는 (은유적인 의미가 아닌) 치유의 힘을 지닌 바다에 대하여) 즉 이 책은 양립하기 어려워 보이는 두 가지의 글쓰기 방법론을 동시에 실천하고 있다. 그것은 정밀한 분석과 아름다운 예찬이다. 저자 쥘 미슐레는 대상을 캔버스 가까이에 올려놓고는 아주 극사실주의적인 묘사로 그 하나하나를 정밀하게 묘사하고는, 뭉툭한 유화물감으로 그것을 뭉게고 덧칠해버리고는 우리에게 그것의 아름다움을 볼 것을 주창한다. 그러므로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들은 당연히 혼란에 빠질 수 밖에 없다. 이것은 세밀화인가, 아니면 어떤 인상파 화가의 작품인가, 아니면 그 둘 다 아닌가.
그것의 답을 모른다고 해도, 적어도 한 가지 거의 확실해보이는 사실, 혹은 이 책에서 얻는 교훈은 있다. 그것은 이 책에서 밝히고 있는 내용들에서 우리 인간들은 지금까지 그다지 많은 발걸음을 해나가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현대인의 관점에서 본다면 미심쩍거나 아리송해 보이는'이라는 오만한 표현을 나도 썼지만, 우리가 그 이후에 바다에 대해 알게된 것은 그다지 많지 않아 보인다. 그것은 우리 인간들이 노력을 해오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바다가 그만큼 거대하고, 수많은 것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폭풍의 회전 법칙을 처음으로 찾아낸 쥘 미슐레의 시대보다 폭풍에 대해 무엇인가를 조금 더 알게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폭풍을 두려워하고, 폭풍이 오거나 오지 않는 것은 여전히 인간의 힘을 넘어선 어딘가에서 결정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을 '천재지변'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고, 우리가 그것에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저 수동적인 시도만이 가능할 뿐이다. 우리들은 그저 여전히 예보를 듣고, 그것에 대비하는 것 외에는 큰 방법이 없다. 인간은 여전히 바다의 바깥에서 바다를 바라볼 뿐이다. 예를 들어 이 책의 3부에서도 새로운 바다길을 찾기 위한, 또는 아무도 가보지 않았던 곳에 가보기 위한 인간들의 노력이 나온다. 그러나 그 탐험기들은 사실 대부분이 나약한 인간들이 거대한 바다에 부딪힌 실패의 기록들이다.
그리고 조금 더 엄밀히 말한다면, 우리 인간들이 바다에 대해서 많은 부분을 모르고 지내는 것이 이 바다에도, 그리고 이 지구에도 훨씬 나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믿는다. 이 책을 읽기 얼마전 "내셔널 지오그래픽 사진전"을 다녀왔다. 그 사진전들의 수많은 사진들에서 내가 얻은 교훈은 단 하나밖에 없다. 그것은 자연은 자연 그대로 놔두었을 때 가장 아름답고 완벽한 모습을 보여준다는 사실이다. 인간들의 자연을 향한 많은 시도들은 자연을 망가뜨렸고, 수많은 동식물들을 멸종위기에 빠뜨렸다. 자연은 그 나름의 자정작용으로 근근히 버텨왔지만, 그 한계는 거의 가까이에 보인다. 그것은 바다도 마찬가지이다. 이 책의 저자인 쥘 미슐레는 마지막 4부에서 바다의 치유의 힘에 대해 말하며, 해수욕을 적극 권장했지만, 나는 그것에는 별로 동의하지 못하겠다. 바다의 치유의 힘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 치유의 힘이 너무 강력한 것을 우려하는 탓이다.
그 바다의 거대한 힘을 말하는 미슐레의 문장들을 사진전에서 보았던 몇 장의 사진들의 설명으로 마지막으로 붙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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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세기 동안 엄니 때문에 무차별적으로 사냥당해야 했던, 평균 몸무게 1,000킬로그램의 바다코끼리 떼가 이제는 미국 알래스카 주 인근 추코치 해의 한 작은 부빙 위에서 또 한번의 위기를 맞고 있다. 태양계의 한 작은 행성 위에 앉아 있는 인간 떼의 모습이 이럴까? 지금 당장 가라앉지는 않을 것 같다. ⓒ Alaska Stock Images / National Geographic ('지구를 담은 사진전' 내셔널 지오그래픽 展 도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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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옛날 생물 가운데 가장 자유롭게 바다를 누비던 선량한 해표와 정다운 고래, 대양의 태평한 자부심, 이 모든 것들이 극지의 바다로 얼어붙은 살벌한 세계로 도망쳤다. 그렇지만 놈들은 그토록 힘든 생활을 모두 견딜 줄 안다. 여전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놈들은 완전히 사라질 것이다. (쥘 미슐레 <바다> p.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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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물 한 방울 속에도 생명의 드라마가 가득하다. 약 15배로 확대한 바닷물 속에 벌레처럼 생긴 요각류, 화살벌레, 필라멘트 같은 시아노박테리아, 직사각형 조류(藻類), 물고기 알, 쌀알만한 게의 유생 등이 보인다. 거대한 것에서 미세한 것까지, 인간에서 미생물까지, 모든 생명은 동등하게 찬란하다. ⓒ David Liittschwager / National Geographic ('지구를 담은 사진전' 내셔널 지오그래픽 展 도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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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표면에 젤라틴 성분의 도톰한 박피가 형성되었다. 나는 바늘 끝으로 그 작은 티끌을 떼어내어 현미경으로 들여다보았다. 그러자 이런 모습이 나타났다.
통통하고 작달막하며, 힘차고 악착같은 소용돌이가 생명에 취해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기묘한 바쿠스 축제로 탄생을 축하하는 듯했다.
그 배경에서, 아주 작고 미세한 장어나 뱀 같은 것들이 헤엄친다기 보다는 그냥 앞으로 튀어나오려고 떨고 있었다(이것을 '비브리오' 또는 콤마균이라고 한다). (쥘 미슐레 <바다> p.117-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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