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거짓말을 먹는 나무
프랜시스 하딩 지음, 박산호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7년 9월
평점 :
품절
사람이 공포감을 느끼는 이유는 굉장히 다양하다. 귀신처럼 실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에 공포를 느끼기도 하고, 반대로 범죄자처럼 실체를 가지고 있어 더욱 생생하게 다가오는 존재에 공포를 느끼기도 한다. 또는 어릴 적의 경험으로 인한 트라우마나 현재 겪고 있는 질병 등의 문제로 인해 공포를 느끼기도 한다. 무의식 속에서 일어나는 공포도 있어 무엇에 의해 공포를 느끼는지 모르는 경우도 있다.
한 사람이 하나의 공포만을 느끼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공포의 대상과 이유에 대해 이야기 하자면 끝이 없다. 나 역시 무수히 많은 대상과 이유로 공포를 느끼는 사람이라 끊임없이 떠들어댈 자신이 있다. 하지만 누군가 내게 지금 이 순간 가장 공포스럽게 느껴지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딱 하나, <거짓말을 먹는 나무> 속 인물이 되는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거짓말을 먹는 나무>는 14살 소녀인 페이스를 주인공으로 하는 미스터리 판타지이다. 페이스의 가족이 외딴 섬 베인에 들어가 살게 되면서 일어나는 사건에 대해 페이스가 나서서 범인을 찾는 이야기로, 주인공을 따라 추리하는 과정은 물론 그 중심에 있는 거짓말을 먹는 나무가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이렇게만 보면 모험으로 가득 찬 화려하고 신비한 이미지를 기대하게 되는데, 실상은 전혀 아니다. 오히려 음울하고 불편한, 어두운 이미지가 쭉 펼쳐진다.
먼저 시공간적 배경이 빅토리아 시대, 즉 19세기 영국이라는 것에서 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19세기 영국은 산업사회의 발달과 함께 다양한 갈등이 일어났던 시기로, <거짓말을 먹는 나무>는 그 시기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내며 불편함을 야기한다. 신앙에 대한 믿음과 과학에 대한 믿음이 부딪치며 격렬하게 다투는 신사들의 모습, 그 신사들에 의해 자행되는 여성에 대한 지독한 편견과 차별, 그리고 그러한 환경에 학습된 여성들의 모습…. 심지어 믿었던 인물들까지 그와 다르지 않음을 깨달을 때는 불편하다 못해 공포감이 느껴진다. 무시와 경멸, 억압으로 점철된 그들의 삶은 활자로 읽는 것만으로도 섬뜩하게 느껴질 정도다.
이야기의 중심 소재인 거짓말을 먹는 나무 자체도 어둠을 부각시킨다. 햇빛을 양분으로 삼는 일반적인 식물들과 달리 이 나무는 빛을 받으면 그대로 타버리기 때문에 옷에 떨어진 나뭇잎 부스러기까지도 조심해야 한다. 오로지 빛이 들지 않는 어두컴컴한 곳에서만 살 수 있는 나무는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거부감을 불러일으킨다. 게다가 이 나무가 양분으로 삼는 것은 사람의 거짓말이다. 나무에게 거짓말을 속삭이고 그것을 사람들이 믿게 만들면 거짓말의 정도와 사람들의 믿음의 정도에 따라 나무가 자라나 열매가 만들어지고, 이 열매를 먹는 사람은 숨겨진 비밀을 알 수 있게 된다. 거짓말만으로도 어딘가 불편한 느낌인데, 그런 거짓말을 먹고 자라나 오로지 열매를 먹은 사람만이 비밀을 알게 하는 나무라니. 만약 내가 이 나무를 눈앞에 목도하게 된다면 분명 손가락 하나 까딱 못하고 얼어붙었다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을 것이다. 그만큼 불길하고 음습한 나무라고 할 수 있다.
거북함을 느끼게 하는 것은 이 뿐만이 아니다. 장면을 떠올릴 때면 비가 내리거나 바람이 불고 파도가 치는 이미지뿐일 만큼 어두 칙칙한 배경, 세상과 완전히 연결되지도 단절되지도 않은 베인 섬의 모습, 모순과 이기심, 악의, 시대적 분위기가 묻어나는 인물들의 생각과 말과 행동 하나하나, 주인공이 아버지에게 가지는 신앙에 가까운 맹목적인 믿음…. 글을 읽고 이야기를 따라가는 것에 거부감이 느껴질 정도로 그 모든 것이 섬뜩하게 다가온다. 결말에 대한 호기심을 부추기는 작가의 노련함이 아니었다면 책을 다 읽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만약 내가 주인공이었으면 어땠을까’하는 상상은 시도조차 하지 못하고, 그저 작가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이끌려 끝을 향해 달려 나가는 것이 전부였던 책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추천하고 싶은 것은 이 책이 가진 매력 때문이다. 어둡고 음울하며 공포심을 자극하는 ‘다크 판타지’로써의 매력, 독자를 안으로 끌어들여 주인공과 함께 하도록 만드는 ‘미스터리’로써의 매력, 부정적인 것부터 시작해 긍정적인 것까지 온갖 감정을 느끼게 만드는 이야기의 매력, 그리고 끝에 가서 사람의 머리를 탁, 하고 치는 깨달음의 매력까지. 이 모든 것을 담아낸 작가의 역량에 혀를 내두를 정도로 강렬한 작품이 바로 <거짓말을 먹는 나무>다.
끝으로 이 책을 읽을 때는 범인이 누구인지 꼭 찾아봤으면 좋겠다. 만약 당신이 생각한 사람이 범인이 맞다면 나는 함몰되지 않은 당신의 깨어있음에 기꺼이 박수를 보낼 것이다. 지금까지 읽어본 책과는 전혀 다른 색다른 유형의 책을 읽을 수 있는 기회를 잡기를, 스스로가 학습된 무지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닌지 확인해보기를, 이 책 <거짓말을 먹는 나무>와 함께 권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