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의 황제
김희선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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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 - 김희선

 

 

 


 

 

  아, 어떻게 이런 책이! 지금까지 자음과 모음에서 읽은 책 중에 ‘눈알 수집가 Der Augensammler, 2010’나 ‘눈알 사냥꾼 Der Augenjager, 2011’같은 이야기만 마음에 들었고, 그 외에는 그냥 그랬었다. 그런데 이 책, 진짜 마음에 들었다. 표지부터 묘한 인상을 주더니만, 책장을 넘기면서 ‘캬~’하는 감탄사와 킥킥대는 웃음 그리고 마음 한구석이 서늘해지는 느낌이 계속 들었다.

 

  표지는 메마른 어느 별에 눈이 큰 초록색 외계인들이 한 줄로 서있었고, 그들 앞에는 커다란 그릇에 잘 익은 달걀 반쪽이 얹어진 붉은 음식이 들어있다. 제목과 연관 지어 생각해보면 매운 라면인 것 같다.

 

  모두 아홉 개의 이야기가 들어있는데, 각각 따로 떨어진 내용이 아니라 몇몇은 등장인물이나 공간적 배경이 이어져있기도 하다. 그리고 안 그러는 것 같으면서 은근히 또는 대놓고 인간들의 이기심이나 욕망을 보여주면서 비꼬고 있었다. 그런 부분을 읽으면서, ‘맞아, 맞아!’를 연발하기도 했다.

 

 

 

  『페르시아양탄자 흥망사』는 세탁소 구석에서 발견된 오래된 양탄자가 어떻게 그곳에 있게 되었는지 조사하는 과정에서 이란과 한국, 두 나라가 걸어왔던 역사적 사건들과 시대의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대놓고 이게 그 사건이었고 그 사람이 바로 이 사람이라고 밝히지는 않지만, 그 시대를 알고 있는 사람은 척 보면 알 수 있다. 먼지를 뒤집어쓴 양탄자 하나로 두 나라의 현대사를 풀어내는 작가의 구성에 감탄을 했다.

 

 

 

  『교육의 탄생』을 읽다보면 유명한 사진이 하나 떠오른다. 색동옷을 입고 어려운 수학 문제를 푸는 어린 꼬마의 흑백 사진이다. 이 이야기는 그런 능력을 가진 소년이 주인공이다. 뛰어난 계산력 때문에 관심의 대상이 되었고,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NASA에 갈 기회를 가진 어린 소년. 하지만 그곳에서 단순 계산기의 노릇만 하던 소년 앞에 한 러시아 과학자가 나타나면서 이야기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레오니드 몰로디노프 박사는 심리학자로, 인간의 무의식에 영향을 주는 소리의 파동에 관한 공식을 소년에게 알려준다. 그리고 소년은 집에 돌아와서 정부 기관원에게 그가 배운 것을 그대로 보고했다. 시간이 흘러 고국으로 돌아온 소년은 자신이 관여했던 인간의 무의식을 지배해서 뇌에 비가역적이고 영구적인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일종의 주문과도 같은 헌장이 모든 교과서의 첫머리에 인쇄되었고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암송하는 것을 발견한다.

 

  아, 그래서 그 시대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과 향수를 가진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 건가…….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오늘부터 이 작가님의 빠순이가 되겠어!’라는 생각을 아주 잠깐 했었다. 그 정도로 기발한 발상이었고, 이야기는 걸리는 부분 하나 없이 매끄럽게 흘러갔다.

 

 

 

  『라면의 황제』는 관점의 차이가 어떻게 모든 것을 바꾸어 놓는지에 대해 말하고 있다. 20세기 후반쯤부터 라면의 유해성이 대두되더니, 결국 라면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그 유해성 보도라는 것이 참 우습기도 하고 황당했다.

 

  그러니까 이런 것이다. 경제전문가들은 “일인당 라면 소비량이 많은 지역일수록 거주자의 월평균 소득이 감소한다.”며 빈곤의 기저에 라면이 있다고 지적하고, 교육관계자들은 “어린 시절 라면 소비량과 명문대 진학률은 반비례한다,”고 얘기하며, 어느 가난한 나라의 십대들이 구식 소총을 멘 채, 쓰러져가는 담벼락에 기대 라면을 먹는 영상을 보여주며 테러리스트와 라면이 모종의 관계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라면을 먹는 사람들은 잠재적 범죄자이고 빈곤층이라는 인식이 퍼져, 결국 라면은 세상에서 사라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언론이나 여론이 말을 어떤 식으로 교묘하게 바꾸어서 사람들을 농락하는지 제대로 확실히 보여주고 있다. 돈이 없어서 라면을 먹는 것인데, 순서를 바꿔서 라면을 먹어서 가난해진다고 말하는 그 교묘함이란! 엄지손가락뿐만 아니라 열 손가락을 들어 올리고 싶을 정도였다.

 

 

 

  『2098 스페이스 오디세이』는 불사의 비법을 발견한 한 과학자덕분에 미래의 지구가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것 역시 언론이 사람 하나를 어떻게 신격화 시키고 조작할 수 있는지 보여주고 있다. 물론 그와 동시에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어머니에 대한 한 남자의 그리움도 곁들여 말하고 있다. 과연 그는 실험의 끝에서 행복했을까? 아니면 지구가 그렇게 된 것에 대해 일말의 죄책감이라도 느꼈을까?

 

 

 

  『지상최대의 쇼』에서는 한국의 강원도에 있는 W시가 배경이다. 어느 날, 그곳에 거대한 비행접시가 나타난다.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사람들은 긴장하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색종이를 일주일 내내 뿌리거나 시끄러운 음악을 트는 것이 전부였다. 결국 사람들의 관심은 사그라지고, 하늘에 비행접시가 떠있는 것은 그냥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그 와중에 여러 가지 유언비어가 돌면서 결국은 외계인은 자기 별로 돌아가라는 시위까지 일어난다. 비행접시가 사라진 이후, 사람들은 진짜로 그런 일이 있었는지 의심한다. 왜냐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비극적이거나 엽기적인 사건이 아니면 사람들이 관심조차 주지 않는 세태를 반영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그 자극에 무뎌져서, 강도가 더 세지지 않으면 비극이나 엽기로 여기지도 않는다. 작가는 그것을 비행접시라는 존재를 통해 말하고 있었다.

 

 

 

  『경이로운 도시』도 W시가 배경이긴 한데, 앞선 이야기와 조금 다르다. 여기서는 외계인이 떠나지 않았고, 지구에서 머무르기로 한다. 말하자면 외계인 난민이었다. 처음에는 호의적으로 대했지만, 사람들은 인간의 규칙을 지키지 않고 급속히 늘어나는 외계인들을 짐으로 여긴다. 그리고 급기야 식물과 별로 다를 바 없이 엽록체를 가지고 있고 광합성을 하는 그들을 외계 식물로 부르며, 식용으로 사용하기로 한다.

 

  뭐라고 해야 할까. 찰턴 헤스턴이 주연으로 나왔던 영화 ‘최후의 수호자 Soylent Green , 1973’가 연상되었다. 인간이 자기 선 밖으로 내몬 존재들에 대해서는 얼마나 잔인하고 비정해질 수 있는지 작가는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언론과 사람들이 얼마나 허구적인 영웅의 생애에 열광하는지도 보여주고 있다.

 

 

 

  『이제는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 역시 W시가 배경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어딘지 모르게 싸한 느낌을 주었다. 어쩌면 이 부분을 읽을 때, 언론의 허구성과 무책임이 빚어낸 한 남자의 사기극을 다룬 팟캐스트를 들은 뒤였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사건 뒤에 숨은 진실을 밝혀내는 과정에서 그것이 얼마나 왜곡되는지, 진실이란 어쩌면 그 누구도 알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는지 이야기는 말하고 있다. 결국 사람들은 자기들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말하고 싶은 것만 말하며, 듣고 싶은 것만 걸러 듣고 있었다. 진실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입으로는 그렇다고 말하지만 말이다.

 

 

 

  『개들의 사생활』은 자신이 위대한 실험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인류를 프리온의 공포에서 벗어나게 할 것이라 믿는 한 남자의 이야기이다. 그는 개가 인간을 지배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것을 밝혀내고자 개를 잡아다가 해부를 했지만,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 마침내 그는 개의 뇌에서 아무것도 밝혀낼 수 없다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겠다고 결심한다.

 

 

 

  『어느 멋진 날』에는 레오니드 몰로디노프 박사가 스치듯이 지나간다. 비록 출연 분량은 적었지만, 꽤나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그가 연구했던, 파동을 이용한 뇌의 지배와 무의식 조종 수법이 이 이야기에서 일어난 사건의 주축을 이루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쟁이 어떤 참혹한 일들을 만들어냈는지 보여주고 있었다.

 

 

 

  책에 수록된 단편들은 단순히 허황된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그냥 흥미를 유발하는 그렇고 그런 이야기가 아니었다. 현실을 명확히 꿰뚫어보고 적절히 비틀어 풍자도 하고, 비꼬고 있었다. 그래서 읽다보면 처음에는 'ㅋㅋㅋㅋㅋ'하고 웃다가 나중에는 'ㄷㄷㄷ‘하고 떨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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