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분석 강의 - 개정판 프로이트 전집 (개정판) 1
지크문트 프로이트 지음, 임홍빈.홍혜경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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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실수 행위들


프로이트를 함께 읽기로 한 시간들이 흘러가고 있다. 프로이트는 10년도 전에 왠지 한 번은 읽어야 하는 허영심이 들어서 노란 표지의 프로이트가 프린트 된 [꿈의 해석]을 읽어보려고 했던 기억이 첫 만남이다.

첫 만남은 , 무참하게 깨어졌었는데 꿈을 다루는 방식이 너무나도 생겨앴고 논의 자체가 이해하기 힘들어서 읽다가 덮어버린 기억이다. 좋은 기억일리 없다. 언젠가는다시 한 번 읽어보겠다. 넘어야 할 산이라고 생각했다.

시간이 이만큼 흐를 동안에도 나는 문학과 비문학을 오가며 읽으면서 이해의 근육 같은 것을 단련했다고 생각했을 즈음 다시 프로이트의 책을 한 권 씩 기회가 될 때마다 모았다. 언젠가는 다시 읽게 될 날을 기다리면서 .....

2020년 말 프로이트 전집이 새 판으로 다시 나오고 함께 읽자고 말했을 때 제시 된 책은 세 권 이었다. [꿈의 해석] [정신분석강의] [세 편의 성욕에 관한 에세이 ]였고 내가 가진 프로이트 젅집을 살펴보니 세 권이 다 있어서 나는 가장 얇은 책을 권했다. 세 명이서 함께 읽을 책이어서 의견을 모아 함께 읽을 책은 처음 시작이니 [정신분석강의]가 결정이 되었다. 많은 분량이었고 시간을 정해서 읽을 양을 정해서 읽기로 했다. 어느 날은 조금 더 읽기도 했고 어느 날은 조금 못 읽기도 했다. 시간이 생기면 책을 펼쳐 읽었다.

서론을 읽는다 비문학의 서론을 읽는 일은 지난한 일이지만 , 서론에서 자기가 하고 싶은 중심적인 이야기를 풀어두는 경우가 많으니 허투루 읽을 수 없다.

정신분석학의 기본적인 치료의 방법을 대화로 제시하면서 프로이트는

언어란 원래 마술이었으며 오늘날까지도 이러한 오래된 마술의 힘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언어를 통해서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 수도 있고 저주로 내몰 수도 있는 것이며 언어를 통해서 선생은 자신의 지식을 학생에게 전수할 수도 있으며 강연자는 모여든 청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도 있고 그들의 판단과 결정을 좌지우지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언어는 감정을 불러일으키며 사람들 사이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가장 일반 적인 수단 (18)이라고 말한다.

언어는 끊임없이 감정을 불러일으키며 사람들 사이에 작용한다 그것이 말하기다의 힘이다. 말로 피험자의 마음의 문을 열어 스스로의 감정 속으로 들어가 스스로의 감정에 대면하는 것이 정신 분석의 치료인지도 모르겠다. ​

사실 나는 저 언급에서 치료의 도구이기도 한 언어를 프로이트는 강연자의 입장에서 사용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사실이었다.

프로이트는 아직 반발에 부딪히는 자신의 연구를 청중에게 강연함으로 써 이해시키려고 나온 투사 같은 느낌을 뿜어내기도 했지만 세일즈맨 같기도 했다.

다시 서문에서 정신분석이 세상 사람들의 지적인 편견에 반감을 사는 이유를 두 가지 제시한다

하나

"정신분석은 의식과 정신의 동일성을 인정할 수 없습니다. 정신분석은 정신을 감정 사고 의지와 같은 과정으로 정의하여 무의식적인 사고나 무의식적인 의지가 있다는 입장입니다. 냉정한 과학을 추구하는 모든 사람들의 비호감이 되었고 흐린 물속에서 낚시를 하려 하는 공상적인 신비론일 뿐이라고 의심" 받는다



"정신분석이 그 연구 결과의 하나로 공표하고 있는 또 하나의 명제는 좁은 의ㅣ미에서나 넓은 의미에서 성적인 것으로 지칭할 수 있는 본능충동이 신경증이나 정신 질환을 불러 일으키는데 상상할 수 없을만큼 커다란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런 두 가지 명제 때문에

사회는 정신분석학의 연구 결과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것을 심미적 관점에서는 혐오스러운 것으로 도덕적 관점에서는 비난받아 마땅한 것으로 더 나아가 위험한 것으로 낙인직어 버리고 싶어"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오해에 대해서 자신이 해명할 것은 해명할 것이고 증명하고 톨론하여 정신분석학의 입지를 다지는 임무를 가지고 일련의 강의를 진행한는 것이 서론의 요지일 듯 하다.

서론을 지나면 책이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눠지는데 실수 행위 , 꿈 , 신경증에 관한 일반 이론으로 나눠진다.

실수라는 것이 단순한 실수가 있고 의도적이지만 인지하지 못하는 무의식에서 발현된 실수가 있다는 것이 전체 내용인 듯 하다 실수의 예로는 잘못 말하기 , 잘못 쓰기 망각하기 혹은 읽어버리기다

실수에 대한 강의를 읽으면서 수 많은 태그와 글들과 의문들을 기록했는데 , 섬칫한 것은 실수라고 치부했을 그 당시에는 나의 행동들의 의도를 깨우치지 못하고 있다가 책을 읽고 다시 생각해보니 무의식적으로 그런 것들이 작용하고 있었단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점이다. 기분이 나빴다. 누군가 나의 마음 속을 손바닥 위에 두고 헤집어 보는 것 같다.


제 2부 꿈

프로이트라는 사람을 안다며 연관 검색어로 꿈을 함께 알아 둘 필요가 있다. 꿈은 프로이트이고 프로이트는 꿈이다라고 말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신경증 환자들을 치료하던 중 자기의 증세를 이야기할 때 많은 환자들이 꿈에 대래서 이야기하는 것에 착안하여 꿈 연구를 시작하게 되었다고 한다.

꿈을 꾼다는 것은 분명히 수면 도중의 정신생활로서 깨어 있을 때의 정신활동과 어느 정도의 유사점을 갖고는 있지만 또한 대단히 커다란 차이가 있으며 깨어 있을 때의 정신 활동과 구별(120쪽) 된다고 말한다.

프 선생은 "꿈을 수면에 가해지는 수면을 방해하는 자극에 대한 반응'이라고 결론(126)을 내렸다. 수면에 대한 외부자극이라는 말이다. "수면을 방해하는 외부 자극은 우리에게 꿈의 한 단면만을 설명해 줄 수 있을 뿐이고 꿈의 전부를 설명해주지는 못한다(131)​

꿈은 자극을 단순히 재생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가공하고 넌지시 암시해주며 어떤 관련성 속에 배치 시키고 또 그것을 다른 것으로 대치시키시도 (133)한다. 외적 내적 자극은 어쩌면 단지 꿈의 자극제일 뿐이고 꿈의 본질은 그것으로 설명되지 않는다(133)

꿈 그 전체에 있어서 다른 것 즉 무의식적인 것의 왜곡된 대체물이라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그러한 꿈 해석의 과제는 이러한 무의식적인 것을 찾아내는 일이 되는 것(160)이라고 한다.

무의식이란 말이 등장한다. 이 또한 프 선생과 함께 묶이는 말이다. 꿈은 결국 내제적 무의식을 검열의 단게를 거쳐 외현적 꿈을 형태로 발현 시키는 것이다. 전의와 상징의 방법으로 검열의 감시망을 피해서 드러나기 때문에 드러나는 이미지를 읽을 것이 아니라 그 이미지가 태초에 가리키는 원래의 본질을 찾아 꿈을 해석하는것이다. 여기서 꿈의 모든 이미지들을 성이라는 이미지의 원형을 성적인 것으로 한정시켜서 실수들의 서문에서 언급한 고상한 과학자들의 심기를 건드린다. 과학의 분야에서 비과학의 분야라고 치부하는 꿈을 연구 대상으로 삶는 것이 그 첫번 째이고 이미지들의 원형을 성적인 것에서 연유한다고 선언하므로써 도덕적 비난까지 감수해야 하는 상태에 처한다.

일반 독자도 과학자들의 입장과 별 다를 바가 없다. 책을 읽는 동안 들었던 의문들을 상기해보면 이러하다.

1 다양한 형상으로 드러나는 이미지들을 하나의 상징으로 읽는 것은 무리가 있지 않을까?

2 꿈의 해석을 읽지 않은 상태로 이 글을 읽는다면 다소 억지러운 예시들인데 글을 읽지 않고 이 글을 읽는다며 매우 억지스러운 예시일 뿐이지 않을까?(꿈의 해석을 읽고 이 책을 읽어도 별반 다를 것이 없기도 하니까)

3 모든 상징이 성에 관한 것들이며 모든 꿈은 성과 성애의 상징이라고 말하는데 모든 꿈들이 정말 그러한가?

4 꿈 작업에서 이미지의 압축을 융합과 결합한다고 말하고 있는데 융합과 결합이 압축과 비슷한 말의 되풀이 같아 보이는데 유의어군을 사용해서 스스로의 설명에 혼동을 주고 있는 것은 아닌가

5 꿈을 꾼 사람도 꿈을 해석을 거부하거나 동의하지 않는 것은 꿈의 모든 부분을 성적 요소로 단정하고 압박하고 자백하게 만들기 때문이 아닐까? 위압적 유도심문 같은 것 , 경찰의 자백 유도 질문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프 선생은 무의식을 그 순간 잠재적으로 숨어 있는 것에 대한 이름이 아니라 자신만의 소원충동과 자신만의 표현방식 그리고 보통 때는 활동하지 않는 고유한 정신적 활동 쳬계를 가진 특별한 정신적 영역(303)이며 우리의 의식적인 생활에서 유래한 것 낮의 잔재라고 불리기도 하고 꿈 형성에 작용하는 것이며 꿈 작업부분을 담당하고 낮의 잔재 무의식으로 인해 아마도 퇴행의 조건(303)을 만들어 낸다고 쓴다.

[정신분석 강의]에서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꿈에 대한 논의는 사실 [꿈의 해석]이라는 단행본으로 다루어진 내용을 강의용으로 줄여 취사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꿈 이야기 뿐만 아니라 어린이의 꿈과 성에 대해서 다루고 있어서 [꿈의 해석]과 [성에 관한 세 편의 에세이]를 읽은 후에 [정신 분석 강의]를 읽으면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 물론 두 책을 먼저 읽다가 프로이트와 작별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읽어보니 수월하게 읽히는 책들이 아니었다

역시 그냥 제미삼아 읽을 뿐이다. 수 많은 내용과 말들은 올하르게 이해한 것인지 스스로에게 묻지만 그렇다라고 명쾌하게 답을 내릴 수 없다. 이렇ㄱ게 기록으로 남기는 것은 습기로 가득찬 거울을 손으로 한 번 닦는 행위다 먼지를 털어내는 행위이기도 한데 한 번의 손짓으로 명징해지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 프 선생의 이론도 그러하다. 깊이 알지 못하는 자가 읽어서 설명하는 것은 曲學이며 만용이다.

나는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인가. 나의 무식을 만천하에 드러내고 있는 듯하다. 아는 것도 섣불리 밭지말고 오로지 읽고 생각을 공고히 하여야 하는 것인데 나의 책읽기는 비루하구나


제 3부 신경증에 관한 일반이론

연휴가 지났다. 연휴동안 프로이트 읽은 것을 정리 했어야 하는데 연휴라 연속해서 쉬었다. 쉬는 날이라고 드라이브 가고 쉬는 날이라고 등산가고 쉬는 날이라고 여행가고 트래킹하고 이러는 거 아니다. 쉰다는 말은 몸과 마음을 놓아주는 것이다. 그렇다. 먹었고 잤다. 연휴동안 비가 오기도 했고 날이 맑기도 했다. 창 너머로 겨우 알았다.

[정신분석입문]의 3부는 신경증에 관한 일반 이론이라는 제목으로 되어있다. 신경증이라고 하니 모호하다. 프로이트가 정신 분석을 하는 사람이니 정신에 어떠한 증상일텐데 , 낱말이 너무 생소했다. 강박증 , 노이로제- 이 낱말은 너무 오래된 말 같고 요즘 잘 쓰이지 않는 것 같다.

잘못된 행동이나 꿈에 관한 정신분석학적인 치료방법을 발표했다(147)는 문장을 읽고 목차를 살펴봤다. 나는 읽으면서 치료 방법의 실례를 본 것 같지 않아서인데 또 책을 설겅설겅 읽었나 싶기도 하다. 목차에도 치료라든지 방법이라든지의 키워드는 보이지 않는다. 누락되었나? 내가 설겅설겅 읽고 기록해 두지 않은 것으로 하자

신경증은 실수 행위나 꿈과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347)있다고 말하면서 작년과 다른 방법으로 강의를 하겠다고 하면서 토론식 수업을 지양하고 있다. 그 이유는 신경증이 강연자들에게 매우 생소한 분야라는 이유다. 일방저 강의를 하지만 "나는 여러분에게 새로운 생각의 자극을 주고 편견을 뒤흔들어 놓고 싶을 뿐입니다."(348) 라고 프선생은 말씀하신다. 내가 학교에서 강의를 들어본 적이 있는데 프선생님! 혼자 말씀하시면 집중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아마 80퍼센트는 다른 생각하고 선생님의 강의를 제대로 기억도 못할 겁니다. 휘발하는 음성언어가 아닌 박제된 문자언어를 읽는 저도 읽어도 읽어도 도대체 이해가 안가는데 말입니다. 휘발하는 언어야 더 하겠지요?

상호 대립하고 있는 비판들에 직면했을 때 내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태도는 현재의 입장을 견지하면서 나 자신의 판단에 따르는 도리(351)밖에 없다고 말씀하셔서 저는 대학 때 제 은사님 중에 고시조를 강의하시던 쌤을 떠올렸습니다. 그의 눈은 고시조를 강의할 때 빛났고 목소리는 웅장하고 단단했습니만 저희들은 그의 영역에 진입할 수가 없었습니다. 문을 열어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프선생님도 문을 걸어잠그고 확성기로 떠들테니 들으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아서 , 조금 안타깝고 애잔해 보이기도 했습니다.

망상증에 대해서 이야기하시면서도 망상은 더이상 무의미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아니(361)라고 말씀하시면서 충분한 동기를 가지고 있으면서 망상은 다른 증후들에서 예측할 수 있는 무의식적 정신 과정에 대한 필연적 반응이라고 말씀해 주셨고 질병의 배후에 숨어 있는 환자의 체험으로 인해서 망상은 다른 어떤 망상이 아닌 질투 망상으로 확고하게 규정할 수 있다(362)면서 그 기저에는 성적 욕구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프선생님 실망입니다. 어찌 모든게 기승전 성입니까 망상의 근원이 질투인 것은 이해가 가지만 모두 그 기저에 성적 욕구가 혹은 리비도가 깔려 있다니요. 여기서 숱하게 지적 받으셨겠지만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프선생님의 예시는 정순하고 도식적인 것을 가려 이야기 해준다고 하셨는데 글쎄요 예시라는 것이 3개 이상은 되어야 할 것 혹은 더 다양한 변주들이 가득한 예시들이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없습니다. 하나 아니면 둘이고 제탕이고 삼탕이고 쓰시니 그 예가 여기도 쓰이고 저기도 쓰이는 것 같습니다.

프 선생님은 증상들을 설명하시는데도 2가지 예를 들어주시고 정의를 내리셨습니다. 개별성을 지워내고 대표성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2가지가 아니라 수십가지의 예에서 2가지의 법칙성을 획득해야 하는 것이 아니까요?

프선생은 외상에 대한 고착을 이야기하면서 무의식을 다시 한 번 논의의 정점으로 끌어올린다. 무의식은 "정신분석학에서 무의식적인 마음의 존재를 불가피하게 전제할 수 밖에 없으며 무의식을 마치 감각적으로 늒ㄹ 수도 있는 무엇처럼 취급하는데 익숙해질 수밖에 없었음을 이해"(398)할것이라고 말하는데 , 솔직히 무의식에 좀 더 깊은 설명이 있지 않고서는 무의식을 대전제로 인정하기는 쉽지 않다. 강박증의 치료 방법으로 무의식을 바로 잡아주는 것이 방법이라고 무의식을 교정하는 방법은 어떤 것이 있는가? 언어적 방법 밖에 없을 것인데 외부의 개입으로 무의식이 교정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도 든다.

임상 경험을 말하면서 치료과정에서 환자들의 반응을 설명하면서 저항과 억압을 이야기 한다. 억압일라는 말은 어디서 많이 들어 본 말이다. 아마 프선생과 함께 다니는 해시테그에 이름이 있을 것이다.

저항의 형태는 다양하게 나타는데 보통 지적인 저항이 나타나거나 전이를 통한 방식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전이라는 것은 대상을 다른 것으로 바꾸어 등장시킨다는 것 전이라는 것이 본질은 그대로인데 , 형상만 바뀌어 나타난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저항을 극복하는 것이 분석의 본질적 과제이며 우리가 환자를 위해 무언가 할 수 있었다는 것을 유일하게 확신시켜 주는 작업의 일환(416)이라고 프선생은 말씀하시는데 저항을 극복하는 방법은 어쩌면 환자를 굴복시키고 의사들의 믿음과 의도대로 환자들을 재단하는 것은 아닐까? 답정너라는 말이 있든데 환자에게 답을 정해놓고 그러하다고 인정하게 만드는 작업은 아닐지 한 번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스무 번째 강의와 스물한 번째 강의는 성과 리비도에 관한 이야기다. 이 부분은 솔직히 [성에 관한 세 편의 에세이]를 읽는 것이 좀 더 자세하게 이해 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다.

어린이의 성과 리비도에 성적도착에 관해서 기술 - 나는 지금 여기정도 읽어서 후반부에는 어떤 이야기가 나오는지 알 수 없지만 성적 충동 리비도 성도착 어린이의 성에 관해서는 전반부에 나온다. -하고 있다.

스무 번째와 스물한 번 째 강의를 읽으면서 많은 의문들이 들었지만 영면에 드신 프선생을 혹은 프선생의 추종자들을 깨워 물어볼 수 없으니 의문만을 기록해 둔 것이 있다. 가령 이런 것이다.

"도착적 성행위의 본질은 일탈 해우이가 보여 주는 철저한 베타성에서 찾아야 합니다. 도착의 경우 생식에 봉사해야할 성행위들은 철저하게 배제되기 때문(458)이라고 하시는데 대뜸 드는 반론인지 반론을 위한 반론인지 모르겠지만 생식을 전제하지 않는 성생위는 모두 도착적이라고 봐야하는지 묻고 싶었다. 당신의 성관념과 지금의 성관념이 변해서 생긴 의문이었는데 생식을 위한 성과 놀이를 위한 성은 조금 차이가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어린이의 성을 설명하면서 프선생과 함께 하는 태그가 또 등장한다. 바로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다.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를 설명하고 "인류 전체가 종교와 도덕의 궁극적 원천인 죄의식을 역사의 시발점에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통해 습득하지 않았을까(471)하는 부분은 개인정으로 신박하다고 생각해서 [토템과 터부]를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불러 일으켰다.

신경증의 원인을 탐사하는 강의에서는 리비도의 억제와 퇴행을 병인으로 거론한다. 리비도의 퇴행의 유형으로 성적 대상들로 퇴행하는 것과 성의 처계가 과거단계들로 퇴행하는 것(485)을 제시한다.

정신분석이 어떤 심리저 사태를 성적 충동들이 작용한 것으로 주장한다면 사람들은 화를 내며 자기 방어적이 되면서 다음과 같은 반론을 제기합니다. 이를테면 사람은 성에 의존해서만 살지 않으며 정신 생활에는 성적이지 않은 다른 충동들과 관심들도 존재한다는 것인데 프 선생은 신경증이 성본능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자아와 성 본능 사이의 갈등에서 기인하는 것이라고 전제했다고 밝힌다. 오해의 소지를 명확하게 밝히는 부분이다. (498~499)​

프선생은 말미에 신경증의 형성 원인을 좌절 리비도의 고착 자아의 발달 과정에서 비롯되는 갈등의 경향 세 가지를 제시하면서 자아와 쾌락의 관게를 설명하는 부분도 읽어볼만 하다.

신경증 증상 형성을 설명하면서 리비도의 고착과 리비도의 퇴행을 거론한다. 퇴행해서 고착되는 것이 맞는 것 같다. 병인론을 언급하면서 현실을 경시한 것 현실과 환상의 차이를 무시했다고 자각하는 프선생의 발언들은 조금 유연해진 프선생을 만나 수 있었고 환상에 대해서도 자세한 설명을 한다. (526 이후 참고 )
스물네 번째 강의가 어쩌면 이 책에서 가장 이론적 정보전달적이며 실용적인 부분이 아닐까 한다. 일상적인 현실적 신경질환을 제시하고 스물다섯 번 째 강의에서 신경증의 원인을 불안으로 제시하고 불안을 탐구하고 유형을 제시한다. 프로이트 전집 [ 정신분석학의 근본개념]을 읽어 보면 좀 더 자세한 이야기들을 읽을 수 있다.

끝까지 달려오니 종장 리비도와 나르시시즘이다. 리비도는 앞부분에서 이미 여러번 프선생이 언급했다. 자아가 자신의 성적 욕구의 대상들에 쏟는 에너지의 집중을 리비도(586)라고 부르고 리비도가 한편으로 이런 대상들을 통해서 만족을 획득하려는 시도의 표현으로 간주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이 대상들을 포기하고 그 대사에 자기 자신을 설정할 수 있다는 생각에 서서히 익숙해지는(587)것을 나르시시즘이라고 규정한다. 나르시시즘과 이기주의를 구별하는데 프선생은 나르시시즘을 이기주의에 대한 리비도 보충(589)라고 정의한다.

성적인 대상은 대체로 자아의 나르시시즘 중에서 일부를 자신에게로 향학게 만드는데 소위 대상에 대한 성적 과대평가와 같은 현상으로 드러납니다. 만약 이기 주의에서 벗어나 성적인 대상을 향한 이타주의가 첨가된다면 성적 대상의 힘은 지나치게 강해집니다. 즉 성적 대상은 자아를 흡수해버립니다(590)​

프선생님 제가 이해력이 딸려서 그렇습니다만 좀 친절한 예시를 들어주시면 좋을텐데라는 생각을 또 하게 되는 부분입니다. 어떻게 성적 대상이 자아를 흡수하는지 좀 설명을 더 해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마지막인줄 알았는데 조금 더 남았다. 치료를 하면서 환자들이 의사에게 감정을 전이시키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는 취지의 발언이 한 장을 차지하고 의사선생을 부모나 거역할 수 없고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존재로 인식하는 전이를 주의해야 한다고 프 선생은 말한다.

정말 마지막 분석요법 편에서는 초기의 실패들이 프선생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실패의 대부분은 의사가 잘못했거나 적절치 못한 대상을 선택했기 때문이 아니라 외부의 조건들이 불리(648)했기 때문이라고 말하거나 내가 이제 좀 더 장황하게 설명할 경우 정신분석학을 깎아내리려는 목소리가 높아진 시점에서 내가 정신분석학을 대중들에게 선전함으로써 그런 반론을 상쇄하려고 한다는 오해(647)을 받을 수도 있다고 언급하고 나는 단지 여러분들에게 정신분석학을 이해시키고 자극을 주려고 했을 뿐(655)이라고 설명하시는데 왜 저는 발을 빼는 것처럼 느껴질까요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비겁한 변명이고 자기합리화입니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는 수많은 나라에서 환자들이 나에게 몰려옴으로써 나는 고향 사람들의 평판이 어떻든 별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651)​

왜 저는 프선생님의 강의가 애잔한 것일까요. 반짝 스타가 인기의 정점을 찍고 권좌에서 내려와야하거나 추락했을 때 옛 영화를 그리워하는 것 같은 프선생님의 무서운 눈 속에 감춰진 초로의 인간을 보는 것 같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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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 언니에게 소설Q
최진영 지음 / 창비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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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로주점을 다 읽었고 [죽음에 이르는 병]은 읽은 부분을 정리를 해 봐야 했다. 한 주 전에 읽었던 문장과 의미들은 휘발되어가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와 [죽음에 이르는 병]에 대한 메모를 시작하려다가 가방에 든 소설 [이제야 언니에게]를 마주한다. 작가의 이름만으로 무작정 읽어보고 싶어지는 몇 안되는 최진영 작가의 글이었다. 밀란쿤데라의 [이별의 왈츠]도 읽어야 해서 이별의 왈츠와 이제야 언니에게의 첫 장을 읽어보고 둘 중 하나를 읽기로 했다. 먼저 일은 것은 [이제야 언니에게]였다. 책에 대한 정보는 없었다. 제목으로 봐서 동생이 언니에게 무슨 말인가를 하려는 것 같았다. 최진영 작가의 이야기니까 그 동생이 하려는 말이 예쁜 이야기는 아닐 것이라는 경험을 통한 확신 같은 것이 있기는 했다.



첫 문장을 읽었다.



"오늘을 찢어버리고 싶다'



첫 문장에 함몰되어 이야기를 계속 읽게 되었다. 한 시간에 50페이지를 겨우 읽는 산만함을 가진 나는 앉은 자리에서 꾸역꾸역 글을 읽었다. 9시에 읽기 시작한 글을 자정이 되어서야 읽을 수 있었다.



나는 이야기를 따라 읽으면서 동생의 이야기가 언제나올까 싶었다.이제야 언니에게니까 동생의 이야기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책을 2/3 정도 읽다가 도대체 다시 책의 첫 표지를 본다. [이제야 언니에게] 그제야 알았다. 제목이 어떤 의미인지



마지막 문장



언제가는 너를 만나러 갈게 내가 꼭 너에게 갈게



마지막 문장을 읽으면서 최진영 작가의 글이 조금은 밝아진 것 같아 서운하면서도 다행스러웠다. 그도 그럴 것이 [구의 증명]이라든지 [ 당신 곁을 스쳐간 소녀의 이름은] 같은 글들은 일관되게 묵직했고 그로테스크한 느낌이었는데 [해가 지는 곳으로]부터 조금은 분위기가 최진영 작가의 글에 햇볕이 비집고 들어와서 조금은 뽀송하게 말려놓은 느낌이었다.



발문을 보면 이런 문장이 나온다. "최진영은 끝가지 우리 삶의 전부를 써낼 것이다. 그 어떤 과거로도 그 어떤 미래로도 나아갈 것이다. 그렇게 쓰는 사람으로서의 자신을 증명할 것이다."



최진영 작가가 증명한다면 나는 끝까지 읽을 것이다. 당신이 써내려간 한 삶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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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다른 곳에 밀란 쿤데라 전집 3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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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집]

기형도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춧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난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 집에 같혔네

시인은 사랑을 했고 , 사랑의 한 삶을 살았다.

그녀는 이전에 너무 조숙했던 체념에서 확실히 벗어났다. 어니의 테니스 라켓이 이제는 그녀를 풀 죽게 하지 않았다. 그녀의 몸은 마침내 몸으로 살았고 그녀는 그렇게 사는것이 아름답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이 새로운 삶이 속임수 약속이 아닌 다른 것이길 오래 지속되는 진실이길 소망했다..

삶을 다른 곳에를 읽으면서 내가 처음 밑줄을 그은 문장이다. 처음에 시인이 탄생했고 그 과정에서 그녀의 어머니의 연애사가 들러나는 부분이었다 시인은 말과 언어로 생을 지탱하고 구체화 시키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것이 내 생각인데 그 대척점에서 말이나 언어가 아니라 몸으로 삶을 인식하는 지점에 시인의 어머니가 있다는 것은 약간은 아이러해보였으나 그 것으로 충분히 좋았다.

밀란 쿤데라 읽기 세 번 째 [삶은 다른 곳에] 를 읽는다. 처음 [농담]과 두 번 째 [우스운 사랑들]을 시간을 들여 고되게 읽은 기억이 있다. [농담]을 이야기할 때도 밝힌바 있지만 약간의 트라우마가 있었고 , 그것을 견디며 읽는 일이 지난했다. 다행히 세 번 째여서인지 아니면 [삶은 다른 곳에서]의 서사와 사건이 내 취향이어서인지 전작에 비해 조금 빨리 읽을 수 있었다.

몸에서 떨어져 나와 세상에 던져진 자들은 그 몸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일이다. 그 그늘을 벗어나는 것은 새로운 세상을 구축하는 일이며 , 이러한 일은 그 혹은 그녀가 속해있던 한 세계가 무너지지 않고서는 가능해보이지 않는다.

사랑의 시작 , 그것은 완벽하게 통제되는 세계의 균열이다.

달콤한 사랑이란 우리가 성인으로 넘어가는 문턱에서 그리고 아이였을 때는 알지 못했던 유년의 좋은 점들ㅇ르 깨달으며 가슴 아파하는 그 나이가 될 때 그 때 태어난다.

달콤한 사랑 이것은 성인의 나이가 우리에게 불러일으키는 공포다.

달콤한 사랑, 이것은 다른 사람이 어린 아이로 다뤄지는 인공적인 공간을 만들어내고자 하는 시도다.

달콤한 사랑 이것은 또한 사랑이 따르는 육체 요소들에 대한 공포이기도 하다. 이것은 사랑을 어른들의 세상 (사랑은 기만적이고 억압적이며 육신과 책임으로 무겁게 짓눌려 있는 세상)에서 빼내어 여인을 어린 아이로 간주하고자 하는 시도다.
180쪽

안타깝게도 달콤한 사랑이란 표현은 지독한 공포로 읽힌다. 사랑은 인간의 삶의 한 변곡점이 되기에 충분하다. 세상의 고난과 공포를 체득하는 변곡점 말이다.

이 책은 야로밀의 연애사이며 어머니와 여자친구 사이에 벌어지는 이야기다. 나는 이러한 어머니를 영화에서 본 것 같기도 하다. 물론 야로밀의 여자친구 빨간머리 아가씨와 어머니의 대결은 영화에 비하면 장난 수준이지만 어머니의 상실감과 질투는 이해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몸에서 떨어져 나온 자기의 살과 피가 자기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직시하게 될 때 , 그런 살과 피를 타인에게 양도해야 할 때 일어나는 감정은 질투이자 분노이지 않겠는가?

야로밀은 사랑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난 사랑에 어중간한 것은 없다고 생각해 사랑할때는 서로에게 모든 것을 다 줘야 하는 거야 198쪽

야로밀의 이러한 사랑은 맹목적이고 폭력적이고 관음적으로 변질된다.내가 지켜본 야로밀의 사랑은 자신은 하나도 내어 놓은 것 없는 상대방에게만 바라는 불구의 사랑이었고 비겁했고 치졸했고 옹졸했다. 피학적 관능이랄지 가학적 관능관능이란 것은 조르쥬 바티유의 [에로티즘]에게 맡겨 볼 만한 일이다.

시인은 말로 절을 - 서양에서는 성 정도가 될 듯 하지만 - 쌓는 일이라고 정희성 시인이 노래한 적이 있다. 야로밀에 대해서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그는 늘 거울의 벽에 둘러 싸여 그 너머를 보지 못한다". 그렇다 시인은 결국 자기가 만든 성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한다. 안타깝게도 그가 만든 성과 세계는 현실이 아니라 가공의 세계다. 그가 노래하는 세계는 인간이 삶을 살아가는 현장이 아니다. 인간이 살아가는 , 아니 사람이 살아낸 삶은 시인의 성이 아니라 다른 곳에 있다. 거울 너머 그 테두리 넘어 말이다.

온전히 시의 세계를 살던 야로밀은 빨간 머리가 늦게 온 날 어쩔 수 없이 넘어가려던 거짓말을 진실로 받아들이고 그 진실이든 거짓이든 그 한 사건은 자신의 완전한 세계에서는 읽어나지 말아야 할 일이었으므로 그것을 미연에 방지하려고 한다. 결국 맞이하는 것은 파국이었다. 스스로 맞이한 파국은 결국 자기가 만들어낸 서사시의 주인공으로서 삶과 야로밀의 삶을 산다. 작가는 이렇게 쓴다 " 야로밀은 자신의 분신 자비에를 만들어내 그와 더불어 또 다른 삶 , 꿈과 같고 모험에 찬 다른 삶을 지어- 내가 보기엔 이 부분이 삶은 다른 곳에 있다고 말해도 좋을 부분이지 싶다. - 냈다. 현실의 부정과 회피로 선택한 자비에로서의 삶을 살았다는 야로밀은 행복했을까? 분리하지 않고서는 , 부정하지 않고서는 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살아내고자 했던 야로밀은 죽었다. 자가가 만든 세계에서 추방되고 유폐되어 절멸했다. 야로밀이 살아낸 한 삶은 허무하다. 스스로 만들어낸 세계에서 살다간 한 시인의 삶은 행복했을까?

글의 처음도 시로 시작했으니 마지막도 시로 마무리해보기로 한다.

[질투는 나의 힘]

기형도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이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듯이 사랑을 찾아 해메었으나
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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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민 2022-08-29 06: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98쪽 대사는 야로밀의 대사가 아닐 거에요
 

비극은 비극에 등장하는 합창대로부터 생겨났으며 근본적으로 합창대이며 합창대 이외의 다른 무엇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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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랍 비극은 이전의 자매 예술 장르들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소멸했다. 희랍 비극은 자살로 끝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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