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13) 책을 통해 본, 인간의 욕망이 낳은 것들


1.


김윤희 저, <이완용 평전>이란 신간이 나왔다. 저자가 이완용을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한 책이어서 그를 그저 매국노로만 알던 우리에게 새로운 시각을 열게 해 줄 것 같다. 매국노로 살았던 그의 삶의 이면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긴다.


저자는 “이완용은 그저 ‘매국노’로서가 아니라 ‘부조리한 현실에 분노할 줄 모르는’ 또는 ‘그것을 극복하려는 사람들이 호명하는 가치에 호응할 줄 모르는’ 인물로서 비판되어야 한다”고 지적한다(조선일보, 2011. 5. 28.).


이 책에서 새로 밝혀낸 것에 대해 저자는 “그의 생활은 탐욕과는 거리가 있었다. 당대 제2의 갑부였지만 생활은 대체로 검소했다. 취미도 붓글씨에 문방사우 수집 정도였다. 돈 버는 것에 대해 창피해 하지 않아 직접 채소 농사에 투자해서 돈을 벌어보이기도 한다.”라고 말했다.


신문을 통해 이 책의 소개에 대한 글을 읽으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누군가에 대해 알고 있는 사실은 그 누군가의 전부가 아니라 그저 일부일 수 있다는 것. 더 중요한 것은 누군가의 나쁜 점은 우리 인간 모두가 가지고 있는 공통점일 수 있다는 것. 예를 들면, 인간의 욕망과 이기심은 누구에게나 있는 공통점이 아니던가.


쇼펜하우어 저, <사랑은 없다>에는 이런 글이 있다.




누구에게나 ‘우주의 멸망과 자신의 멸망 중에서 어느 것을 선택하겠느냐’고 물어보아라. 답은 이미 나와 있다.


심지어는 전쟁이 일어나 국가에 존망의 위기가 닥쳐도 ‘그럼 나는 어떻게 되지?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지’하고 제일 먼저 자신의 이해타산을 떠올린다. - <사랑은 없다>에서.





도스토예프스키 저, <지히생활자의 수기>에는 이런 글이 있다.




세계가 파멸하는 것과 내가 차를 마시지 못하게 되는 것과 어느 쪽이 큰일인가! 설사 온 세계가 파멸해 버린대도 상관없지만, 나는 언제나 차를 마시고 싶을 때 마셔야 한다. - <지하생활자의 수기>에서.





 

우리는 타인을 위해 자신의 개인적인 즐거움을 기꺼이 포기할 수 있을까. 만약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평생 커피를 마실 수 없는 것’과 ‘다른 나라에서 큰 지진이 일어나는 것’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라면 어느 쪽을 선택할까. 만약 술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평생 술을 마실 수 없는 것’과 ‘다른 나라에서 큰 지진이 일어나는 것’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라면 어느 쪽을 선택할까. 이것에 대한 답변이 어떨지는 이런 질문으로 확연히 짐작할 수 있다. ‘평생 술을 마실 수 없는 애주가’와 ‘다른 나라에서 큰 지진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접한 사람’ 중에서 누가 더 불행한 삶을 살까. 아마도 대다수의 사람들이 다른 나라에서 큰 지진이 일어난 것에 대해선 며칠만 지나면 잊고 말 것이다. 자신의 불행이 중요하지 타인의 불행 따윈 안중에 두지도 않는 게 인간 아닌가. 

<이완용 평전>을 통해 이완용의 삶을 들여다보면 뜻밖에도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은 아닐까. 이 책을 읽고 난 뒤의 그 결론이 궁금하다. 나의 결론도 독자들의 결론도 궁금하다.

2.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원작, 제프리 S. 크래머 엮음, <주석 달린 월든>이란 신간이 나왔다. 소로우의 <월든>이란 책에 대한 안내자 역할을 해 줄 책이라고 한다.


소로우가 인용한 고대 경전부터 그리스 신화, 논어 등 동서양 고전의 출전을 파악하고, 현대의 작가와 학자들이 인용한 소로 관련 내용까지 덧붙였다(조선일보, 2011. 5. 28.)고 한다.



요즘 하우스 푸어(House Poor)란 말이 신문에 자주 등장하고 있는데, 이것은 ‘지불 능력으로 감당 못하는 집을 산 사람들’을 말한다. 하우스 푸어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집을 갖고 있으면서도 가난하다. 집을 마련하기 위해 은행에서 대출한 돈을 갚느라 가난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불행하다.


일찍이 소로우는 미래에 하우스 푸어와 같은 사람들이 출연하는 세상이 오리라고 예견했던 것일까. 이미 그는 세속적인 성공만을 위해 숨 가쁘게 사는 문명사회의 사람들이 과연 행복한가를 스스로 묻게 만드는 글을 남겼다. 그것이 1854년에 출간된 <월든>이다.  






사람들은 그릇된 생각 때문에 고생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의 육신은 조만간에 땅에 묻혀 퇴비로 변한다. 사람들은 흔히 필요성이라고 불리는 거짓 운명의 말을 듣고는 한 옛날 책(성경)의 말처럼 좀이 파먹고 녹이 슬며 도둑이 들어와서 훔쳐 갈 재물을 모으느라고 정신이 없다. 그러나 인생이 끝날 무렵이면 자연히 알게 되겠지만 이것은 어리석은 자의 인생이다. - <월든>에서.






지금 남부와 북부에는 인간을 노예로 만들려고 눈을 번뜩이는 악랄한 노예주인들이 수없이 많다. 남부의 노예감독 밑에서 일하는 것도 힘들지만 북부의 노예감독 밑에서 일하는 것은 더욱 힘들다. 그러나 가장 힘든 것은 당신이 당신 자신의 노예감독일 때이다. - <월든>에서.






오늘 모든 사람들이 진리라고 받아들이고 묵과한 것이 내일에는 거짓으로 판명될지도 모른다. - <월든>에서.





‘오늘’은 50평짜리의 비싼 아파트에서 은행 빚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갖고 사는 게 좋은 삶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내일’이 되면 잘못된 생각으로 판명될지 모른다. 그 50평의 아파트에서 사는 것보다 그보다 싼 30평의 아파트에서 살면서 빚 없이 저축하며 마음 편히 사는 게 좋은 삶이라는 것을 깨달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소로우는 실제로 문명을 등지고 월든 호숫가에서 원시적인 삼림 생활을 했다. 그 생활을 <월든>을 통해 엿볼 수 있다. 이미 <월든>을 읽은 나로서는 <주석 달린 월든>이 궁금해진다. 독자들의 호응도 어떨지 궁금하다.


3.


모파상의 소설 <목걸이>이란 작품이 있다. 여주인공인 가난한 L부인은 남편과 함께 파티에 가기 위해 친구로부터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빌려서 하고 간다. 파티가 끝나 집에 돌아와 거울에 선 그녀는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른다. 목에 당연히 걸려 있어야 할 목걸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집으로 오는 도중 그 목걸이를 잃어버린 것이다.    

    
  
 

 

 

 


궁리한 끝에 그들 부부는 어느 보석상에서 그 잃어버린 다이아몬드 목걸이와 아주 비슷한 것을 사서, 빌렸던 친구에게 돌려준다. 목걸이의 가격은 매우 비쌌으므로 그들은 빚을 졌고 10년 동안 심적, 육체적으로 고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10년이 지나자 빚을 다 갚았다.


어느 날 L부인은 우연히 거리에서 자기에게 목걸이를 빌려 주었던 친구를 만나게 되어, 그 동안에 있었던 일을 그 친구에게 들려준다. 그때 L부인은 그 친구로부터 이런 충격적인 말을 듣는다.


“아, 가엾어라. 내 목걸이는 가짜였단다. 기껏해야 5백 프랑밖에 되지 않는 것인데…….”


L부인이 파티에 가기 위해 값비싼 목걸이를 친구에게 빌리기까지 한 것은 타인의 눈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중요시해서다. 이렇듯 겉치레를 중시하는 허영심은 우리의 삶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옷을 구입할 때 값싼 옷 대신 비싼 옷을 사는 이유가 옷감이나 색상, 디자인 등이 마음에 들어서가 아니라 단지 유명 메이커의 옷이기 때문이라면 이것도 허영심이다. 또 승용차를 구입할 때 소형차 대신 중형차를 구입하는 이유가 더 안전해서가 아니라 남에게 과시하고 싶기 때문이라면 이것도 허영심이다.


L부인처럼 생활필수품이 아닌 고급 목걸이를 필요로 할 때가 우리에게도 있을 것이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목걸이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일까.


4.


최근 악성 댓글로 괴로워하다가 자살한 사람이 있었다. 위치 추적이 가능한 스마트폰과 곳곳에 설치되어 있는 CCTV로 사생활 침해 논란이 생겼다. 이것들은 과학의 발전으로 생기는 폐해다. 지진이나 원전사고만이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게 아니다. 과학이 발전함에 따라 예전엔 없었던 나쁜 일들이 자꾸 생긴다. 이렇게 사람을 불행하게 만드는 일들이 앞으로 또 얼마나 생길까.


과학의 발전을 멈추게 할 수는 없을까. 휴일이 없는 과학의 발전이 나는 두렵다. 도대체 과학은 이 세상을 어디까지 끌고 갈 것인가. 그곳에도 사람 냄새가 나긴 할까. 이쯤해서 인간의 욕망에 끝이 있었으면 좋겠다.


러셀 저, <런던통신 1931-1935>에 이런 글이 있다.




교구 목사 오피미언 박사는 다음과 같은 말로 과학에 대한 길고 통렬한 비난을 마무리한다. “과학이 인류에게 끼친 해악을 일일이 열거하자면 날이 저물 것이다. 인류를 절멸시키는 것이 과학의 궁극적인 운명이라는 생각까지 들 정도다.” - <런던통신 1931-1935>에서.





 

5. 


요즘 스마트폰 사용자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언젠가는 스마트폰이 없는 사람은 사회로부터 고립을 당할지 모른다. 나 역시 스스로 고립을 자초한 소로우가 될 자신이 없기에, 언젠가는 스마트폰을 구입하게 될 것이다. 스마트폰이 위치 추적까지 된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조차도 결국 구입하고 말 것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하나씩 어떤 문화의 ‘노예’가 되어간다. 그렇다면 행복한 노예일까, 불행한 노예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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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달샘 2011-06-13 1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많은 울림을 주는 글입니다. 저도 스마트폰이나 갤럭시탭으로 바꾸고 싶은 마음이 하루에도 열두 번씩 듭니다. 그러다 새로운 기계조작법을 익히는게 두려워 차일피일 미루고 있지요. 어떤 문화의 노예가 되어간다는 말이 실감이 나고 소름끼치기도 하네요. 나중엔 인류의 지배자가 문명이나 문화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페크pek0501 2011-06-13 18:02   좋아요 0 | URL
며칠 전 친구를 만났는데, 스마트폰을 가지고 있었어요. 스마트폰 사용자들끼리는 무료로 제공되는 통신서비스가 있다며 저보고 스마트폰을 사라고 하더군요. 제 핸드폰에 통신하면 사용료가 많이 든대요. 이런 말을 여러 사람으로부터 듣게 되면 결국 저도 민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스마트폰을 사게 될 거예요. 혼자서 왕따 당하지 않으려면 이 시대의 문화를 부지런히 쫓아가야 할 듯...ㅋ 세상이 천천히 바뀌었으면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