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원하게 나를 죽여라 - 이덕일의 시대에 도전한 사람들
이덕일 지음 / 한겨레출판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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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자를 위한 역사'만 존재하는 세상에서 그 승리자로 인해 패배자로 낙인찍히고 역사의 흐름속에서 지워질 수 밖에 없었던 이들의 이야기이다. 시대를 앞지른 사고를 가진 자, 올바른 전통을 유지하고 지키려는 자,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의지는 있으나 힘이 없는 자들의 인생이야기이다. 시간은 흘러 시대는 변했지만 그 본질은 언제나 제자리 걸음인 현대를 사는 우리이기에 더 슬픈 이야기이다. 동시에 그들과 같은 담대함과 용기가 없어서 부끄러운 우리들의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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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하라
스테판 에셀 지음, 임희근 옮김 / 돌베개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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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세기 사회는 넘쳐나는 정보홍수로 익사직전까지 가 있다. 분당 새로운 소식들이 바로 바로 입력되다보니 그럴 만도 하다. 그런데 진짜 정보는 얼마나 될까? 어떤 정보가 내가 필요한 정보이며 그 정보가 과연 정확한 진실을 담고 있는지 우리는 한번이라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인터넷 신문지상에 1면으로 나오는 제목을 보면 거의 대부분이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제목을 달고 사람들의 클릭욕구를 불러일으킨다. 덕분에 우리는 더 선정적이고 더 가십적인 내용을 찾아 헤맨다. 굳이 찾아서 보지 않는 이상 양질의 정보를 찾는 것이 쉽지 않다. 어느 연예인이 누구와 사귀고 헤어지는 것은 핫 이슈이지만 11월 제 1차 민중궐기운동 중 다친 한 농민의 상태는 관심 밖의 일이다. 현대에서 나오는 새로운 제네시스의 외관은 검색어에 올라오지만 국정교과서라는 단어는 검색어에서 보기가 쉽지 않다. 우리는 정말 올바른 정보를 섭취하고 있는 것일까? 혹시 정보 편식증에 걸린 것은 아닐까? 사방을 보지 못하고 오직 앞만 보도록 끌려 다니고 있는 것은 아닌가?

 

분노하라의 저자 스테판 에셀은 이렇게 말한다. 자기 나름으로 자유롭게 생각하는 것, 광고 메시지나 언론이 전하는 말에 속아 넘어가지 않는 것, 이것이 중요합니다. 자유로운 사고를 해야만 자유롭게, 양심에 입각해서 행동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p.63” 자유롭다는 것은 틀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것이고, 틀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것은 넓고 깊음을 의미한다. 곧 세상을 자기중심에서 우리, 내가 사는 나라에서 우리가 사는 지구로 생각의 확장을 할 수 있게 된다. 그 와중에 세상의 부조리에 마주하게 되고 분노하게 된다. 분노는 저항을 불러오고 그 저항은 다시 변화를 이끌어 낸다. 변화는 다시 재창조로 옮겨와 너와 내가 균형을 이루는 사회를 만들어간다. 그래서 저자는 강조한다. 분노하라고....창조 그것은 저항이며 저항, 그것은 창조다. p39.”

 

레지스탕스(저항)가 폭력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분노가 물리적인 힘을 과시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레지스탕스와 분노는 내가 살아있음을 그리고 자유롭게 사고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물론 비폭력이라는 방식으로.... 나는 호소합니다. 우리의 정신을 완전히 개혁하자고. 폭력은 거부해야 합니다. 우선 효과가 없기 때문에 그래야 합니다......폭력은 폭력의 악순환을 더욱 심화시킵니다. 미래로, 희망으로 향한 문을 닫아버리게 합니다..... 비폭력이란 손 놓고 팔짱 끼고, 속수무책으로 따귀 때는 자에게 뺨이나 내밀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비폭력이란 우선 자기 자신을 정복하는 일, 그 다음에 타인들의 폭력성향을 정복하는 일입니다. p.65”

93세의 노학자의 분노하라라는 외침은 외면적인 젊음만을 추구하고 내면적인 젊음은 죽어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먼저 우리 자신에게 분노하라고 외친다. 비폭력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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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태왕의 위대한 길
김용만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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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광개토대왕이 아닌 광개토태왕이다.

조선과는 달리 고구려는 소중화를 표방하지 않았다. 오히려 당시의 중국대륙의 후연등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의 위상을 갖춘 나라였다. 그 단적인 예가 고구려만의 독특한 연호를 썼다는 것이다. 연호를 사용한다는 것은 천하의 질서는 고구려 중심으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국명을 명에게 요청한 조선의 시작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다. 또한 지은이는 대왕이 아닌 태왕이라고 불러야 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태왕이란 단순한 왕이 아니라 왕 가운데 왕이며, 제국을 다스리는 최고 지배자다. 왕이 단일한 체제를 갖춘 나라의 지배자라면, 태왕은 다양한 체제를 아우른 광범위한 제국의 지배자다. 태왕은 선택받은 자, 인간 사회의 최고 지배자를 뜻한다. 황제, , 선우, 가한 등과 다를 바 없는 한국사에 등장하는 최고 지배자의 호칭이다. p.39” 광개토태왕은 같은 문화권인 한반도 뿐 만아니라 거란, 숙신, 왜 그리고 후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화권을 공략하고 편입시켰기 때문에 태왕이라는 호칭이 가장 잘 어울린다.

 

2. 광개토태왕의 정복활동

거란정벌: 391년 태자 담덕이 고구려의 왕이 되면서 391년에 거란 공략을 시작으로 395년을 기점으로 마무리된다. 거란정벌은 2차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소수림왕 8년에 거란에 의해 8개 부락이 함락되고 고구려 백성이 끌려가게 되지만, 백제와 후연과의 거듭된 전쟁으로 손을 쓸 수 없었다. 1차 거란정벌은 거란족이 약탈한 고구려 백성을 되찾기 위한 정벌이다. 395년에 거행한 2차 거란정벌은 소, , , 소금 등의 획득을 통한 경제적 이득과 후연 정벌을 염두에 두고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다. (p.141-153)

 

백제공략: 광개토태왕의 할아버지인 고국원왕은 백제의 근초고왕과의 전투에서 목숨을 잃게 된다. 광개토태왕이 백제공략을 통해 그 원수를 갚게 된다. 396년 영락6년에 그는 대대적인 백제 공격에 나서서 승리한다. 그러나 고구려는 백제 왕실을 보존하는 것이 전력을 다해 백제를 통합하는 것보다 이익이 된다고 판단한다. 광개토태왕은 백제를 굴복시킨 후, 백제에서 잡아온 포로가 고구려인으로 정착해 살 수 있도록 했다. 그러는 한편 힘을 모아 후연정벌을 준비했다. 그 때문에 백제 전선에 투입한 대군을 서둘러 철수한 것이다. 백제를 지배하고 통일하겠다는 의지가 부족한 것이 아니라 당시 국력과 백제의 저항, 차후 전략적 목표 때문에 백제를 멸망시키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p.188”

 

숙신정벌: 영락8년 숙신지역을 공격한다. 숙신은 고구려에 내지와 같은 곳이기 때문에 소규모 군대로 반란 세력을 제거하는 정도의 군사행동을 하는데 그쳤다. (p.196-200)

 

신라 구원과 남해안 대원정: 영락9(399) 왜의 공격을 당한 신라는 고구려에 구원을 요청한다. 백제는 왜의 군대를 끌어들여 신라를 멸망시키거나 혼란에 빠뜨리는 것이 고구려의 힘을 약화 시킨다. 그리고 왜, 가야 연합을 구축해 고구려에 반격하려는 것이다. 이에 고구려는 5만 대군을 동원하게 된다. 그런데 4002월 후연의 3만 군대가 고구려에 쳐들어왔다. 고구려는 군대를 철수할 수밖에 없게 된다. 고구려는 신라와 가야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 고구려는 신라의 임금을 교체하기도 했지만, 신라를 흡수하진 않았다. 신라는 고구려에 조공을 바치는 신민이었지만 국가의 정체성을 상실하지 않았고, 도리어 고구려의 선진 문화를 받아들여 고대국가로 발전하는 계기로 삼았다. 그렇게 고구려의 영향으로 당시 가장 중요한 경쟁자였던 가야 연맹보다 앞서 성장할 수 있었다. 신라입장에서 고구려의 신민으로 지낸 약 100년간은 역사적 퇴보가 아닌 발전을 위한 시기였다. p.218” 또한 고구려의 남해안 대원정에서 패한 가야는 철제 갑옷과 기병양성등과 같은 변화의 모습을 보이게 된다. (p.201-231)

 

왜 격퇴: 앞에서 언급한 영락9-10년간의 전쟁이외에 영락14(404)의 전쟁이 있다. 404년은 고구려가 후연을 공격해 거듭 승전보를 울리던 때이다. 이 틈을 이용한 왜의 공격으로 고구려는 후연을 굴복시킬 기회를 잃게 된다. 이에 분노한 광개토태왕은 왜군을 참살했다는 기록이 광개토태왕릉비문에 등장한다. (p.232-249)

 

후연정벌: 전연을 건국한 모용황은 고국원왕의 아버지였던 미천왕의 시체와 어머니 주태후 그리고 왕비를 사로잡았다. 죽은 자와 살아있는 자는 완전히 단절되지 않는다고 믿었던 고구려에게는 엄청난 수치였다. 당연히 전연에 이어 건국된 후연 또한 고구려 즉, 광개토태왕에게는 복수의 대상이었다. 400년 후연의 기습공격으로 신성과 남소성을 비롯한 700리의 땅을 빼앗기고 5,000여호의 백성이 붙잡혀 간다. 4061월 전투를 끝으로 고구려와 후연에 대한 기록은 더 이상 찾아 볼 수 없다. 4077월 후연에서 모반이 일어나 모용희가 죽임을 당하고 고구려 왕족의 후예인 고운이 북연을 건국한다. 4083월 광개토태왕은 북연에 사신을 보내 고운의 즉위를 축하며 종족의 예를 베풀었다. 이에 북연의 고운은 시어사 이발을 보내 답례했다. 고구려가 종주국, 북연이 제후국으로 두 나라의 관계가 정립되었다고 여겨진다. 409년 고운이 신하에 의해 시해 당하고 풍발이 임금이 된다. 하지만 신라의 경우와는 달리 고구려의 개입은 없었다. 409년에 고구려는 서쪽의 북연이 아니라 동쪽에 위치한 동부여를 공략하는데 온 힘을 쏟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구려는 당시 후연을 완전히 정벌할 힘이 없었다. 그래서 고운과 풍발이 외교적으로 고구려에 머리를 굽히자 서부 변경 지역이 안정된 것에 만족하고 서진정책을 마무리한다. (p.250-268)

 

마지막 정벌지 동부여: 4세기 중반 고국천왕때 고구려가 모용선비와 백제에 거듭 패하면서 동부여에 대한 통제력도 약해졌다. 동부여가 더 이상 고구려에 조공을 바치지 않자 영락 20(410) 광개토태왕이 마침내 정벌에 나선다. (p.269-278)

 

3. 광개토태왕의 국가경영

고구려 제국은 강력한 힘을 바탕으로 외부의 위협을 물리쳐 제국 내 평화와 안정을 가져왔다. 광개토태왕의 정복활동이 일단락 된 후, 고구려는 5-6세기에 걸쳐 오랜 기간 평화를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고구려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 전쟁에만 몰입한 것은 아니다. 광개토태왕은 정복 활동 외에 내치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법과 제도정비 (율령반포의 이점은 p. 118-120) 종교정책 (불교수용에 관련된 내용은 p.133-136, 320-326) 국토 재편과 평양 천도 준비(p.331-334) 백성을 위한 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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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타고 3부작 - 전4권
로스 레키 지음, 이창식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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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연 인간은 이성적 동물일까? 감성적 동물일까?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 한다.” 라는 말 이후로 인류는 언제나 이성적 동물이다. 철학을 비롯한 과학, 수학 그리고 심리학에 이르기까지 이성을 두고 인간을 분석하고 인류의 우수성을 증명하려고 했다. 결국 이성적이라는 것은 언제나 옳음을 추구하고 발전 지향적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언제나 인류는 옳음을 추구하지 못하고 언제나 발전 지향적이지 못하다. 인류의 탄생이후로 전쟁은 인간의 또 다른 성별이었으며 파괴는 인간의 사생아였다. 지금도 우리는 종교전쟁을 하고 있으며, 인류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자연을 파괴하고 있다. 인간은 이성적인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감성적 존재이다. 그렇게 때문에 우리는 쉽게 변하지 못한다. 머리로 논리성과 합리성을 따지기 이전에 이미 우리의 감성은 직감적으로 선택을 한다. 이후 이성은 그것의 대변인으로서의 역할을 할 뿐이다. 조너선 하이트 교수의 바른마음에서 이것을 코끼리 등에 탄 기수로 비유하고 있다. 코끼리는 감성(직감), 기수는 이성을 나타낸다. 우리는 기수가 코끼리를 조종한다고 생각한다. 사실은 코끼리가 가고자 하는 길로 기수가 인도해 줄 뿐이다. (말이 아닌 코끼리로 비유한 것은 그 만큼 인간의 감성이 큰 역할을 한다는 의미이리라.) 따라서 언제나 나는 옳지만 너는 언제나 틀리다. 코끼리에 의해 이미 옳은 길을 안내받은 우리 이성은 거기에 합당한 이유들은 만들어낸다. 당연히 인간 vs 인간 의 전투가 벌어질 수밖에 없다. 현재 논쟁이 되고 있는 국정 vs 검인정, 보수 vs 진보 등은 언제나 내가 옳다는 코끼리에 이끌린 기수들의 싸움인 것이다.

 

로스 레키의 카르타고 3부작은 같은 역사를 다른 렌즈를 가지고 바라본 인물의 책이다. 앞의 한니발은 카르타고의 입장에서 스키피오는 로마, 그리고 마지막 편인 카르타고는 로마인과 카르타고인의 관점차이를 다시한번 보여준다. 당연히 로마인은 카르타고를 나쁘게, 그에 반해 카르타고인은 로마인을 안 좋게 표현하고 있다. 후세대인 우리는 누구 편을 들어야 하나? 역사의 승리자인 로마중심으로 쓰여진 책을 많이 접한 나로서는 로마를 비판하는 한니발의 서자인 한노가 불편하기만 하다. 곧 나의 이성은 로마인들의 편을 들 준비가 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카르타고는 유서 깊은 고대 도시이다.... 로마가 단순한 왕정일 때에도 카르타고의 복잡한 국체는 수백 년간 잘 운용되고 있었다.....로마에서는 투표하려면 로마 시민이 되어야 하는데 그건 쉬운 일이 아니다.....그러나 카르타고는 평화로이 입국한 사람은 누구든 언제나 환영했다. p.65-66”

 

로스 레키의 카르타고 3부작은 흥미 있는 소재여서 산 책이었지만 기대에 미치지는 못하는 책이었다. 한니발과 스키피오 두 명장은 무엇보다도 뛰어난 전략과 전술이 돋보이는 인물이라 그림을 첨부한 상세한 전투장면의 묘사를 기대했다. 그림이 없는 간단한 전투장면은 나의 상상력부족으로 새 생명을 얻지 못하고 책 속의 글자로만 사장되어 버렸다. 카르타고 3부작의 2부인 스키피오에서는 한니발의 적수로의 스키피오보다는 그의 성장기를 그리는 것으로 대부분의 페이지를 소모하고 있다. 보통 인간인 스키피오는 있지만 로마의 영웅인 스키피오는 몇 페이지 되지 않는 것 같다. 하지만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같은 역사를 다른 관점에서 바라본다는 컨셉 덕분에 다시한번 균형적인 시각을 가진 인간의 중요성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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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안의 식민사관 - 해방되지 못한 역사, 그들은 어떻게 우리를 지배했는가
이덕일 지음, 권태균 사진 / 만권당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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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흔하게 들어본 속담 중에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라는 말이 있다. 한 인물의 이름 석 자가 후대에 그 사람이 어떤 인물인지를 전해 준다는 소리이다. 그럼 그 이름은 어떻게 인물의 성격과 이미지라는 것을 대표하게 되었을까? 첫 번째는 그 사람이 남긴 문헌과 그와 관련된 주변 인물의 글과 전언이 가장 중요한 1차적 자료가 될 것이다. 글 속에는 그 사람의 생각과 인물됨이 자연스레 녹아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이런 문헌에 그의 업적 등이 포함되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두 번째는 그 사람이 사용한 물건들 그리고 그 사람이 지나쳤던 여러 장소들이 될 것이다. 사용했던 물건들, 아꼈던 물품들 또한 그 사람을 알아 가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이 두 가지 요소들, 특히 1차 문헌이 아무개=who he was’ 라는 공식이 성립되게 해 주는 것이다. 과거를 알아가는 것도 또한 한 사람의 과거를 알아가는 과정과 비슷할 것이다. 과거의 문헌과 고고학적 유물과 유적을 뼈대로 과거를 형성해 나간다.

 

 이덕일 선생님의 우리 안의 식민 사관에서 줄기차게 주장하는 부분이 일부 역사전문가들의 문헌과 유물 등의 잘못된 해석이며 그 해석이 식민지사관을 유지하기 위한 편법으로 사용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그들이 역사학의 주류라는 사실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21세기 하드웨어에 19세기 소프트웨어를 사용하면서 멋진 컴퓨터를 가지고 있다고 자랑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역사교과서의 국정화가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는 지금,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한 번은 이 책을 읽어봐야 할 것 같다. 여기서 제시하는 문제는 크게 두 가지 사실이다. 하나는 한사군의 위치이다. 연나라의 위만은 고조선으로 망명하여 준왕을 몰아내고 위만조선을 세운다. 이 때의 위만조선을 멸망케한 한나라는 그 자리에 한사군(낙랑군, 임둔군, 현도군, 진번군)을 설치한다. 한사군의 위치가 일제 식민사관, 즉 조선총독부 사관의 주장대로 한강 이북에 있었다면 고조선도 거기 있었던 것이 된다. 대동강 유역에 있었다는 낙랑군을 중심으로 한강 이북에 한사군이 있는 것이다. 그러면 북한 전역은 과거 한나라 영토가 된다. 중국 동북공정은 맞는 논리가 된다. 반면, 독립 운동가들의 주장대로 한사군이 만주 서쪽이나 허베이성(하북성)일대에 있었다면 이 일대까지 고조선 강역이 된다. 즉 지금의 베이징부근까지 한때는 한국사의 역사 강역이었다는 뜻이 된다. p.221” 이것이 한사군의 위치가 중요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두 번째는 임나일본부설의 진위이다. 우리가 삼국시대라고 알고 있는 시대가 사실은 아직 국가의 형태를 갖추지 못한 삼한이며 백제와 신라 가야를 일제 강점기의 조선총독부와 같은 임나일본부가 지배했다는 주장이다. 이 논리를 사실인 것처럼 만들기 위해 식민지사관주의자들은 삼국사기초기 기록 불신론을 내세운다. 왜 부정했겠는가? 일본서기나 고사기에는 한반도 내의 왜, 즉 임나일본부가 한반도 남부를 지배하고 있는 것처럼 서술하고 있지만 삼국사기 신라본기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쓰다 소키치는 한반도 남부에 고대판 조선총독부인 임나일본부, 즉 왜가 존속하고 있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 삼국사기 신라본기를 주목했다. 그러나 그런 내용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쓰다 소키치는 고사기 및 일본서기가 사실이라면서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가짜로 모는 이른바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불신론을 창안해 했는데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관하여 가 그 논문이었다. p .177”

 

 대한민국 임시정부 제2대 박은식 대통령은국어,국사는 혼이다” p.25 라고 말씀하셨다. 잘 먹고 잘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올바른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더 중요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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