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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태왕의 위대한 길
김용만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11년 7월
평점 :
품절
1. 광개토대왕이
아닌 광개토태왕이다.
조선과는
달리 고구려는 소중화를 표방하지 않았다.
오히려
당시의 중국대륙의 후연등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의 위상을 갖춘 나라였다.
그
단적인 예가 고구려만의 독특한 연호를 썼다는 것이다.
연호를
사용한다는 것은 천하의 질서는 고구려 중심으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국명을
명에게 요청한 조선의 시작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다.
또한
지은이는 대왕이 아닌 태왕이라고 불러야 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태왕이란
단순한 왕이 아니라 왕 가운데 왕이며,
제국을
다스리는 최고 지배자다.
왕이
단일한 체제를 갖춘 나라의 지배자라면,
태왕은
다양한 체제를 아우른 광범위한 제국의 지배자다.
태왕은
선택받은 자,
인간
사회의 최고 지배자를 뜻한다.
황제,
칸,
선우,
가한
등과 다를 바 없는 한국사에 등장하는 최고 지배자의 호칭이다.
p.39” 광개토태왕은
같은 문화권인 한반도 뿐 만아니라 거란,
숙신,
왜
그리고 후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화권을 공략하고 편입시켰기 때문에 태왕이라는 호칭이 가장 잘 어울린다.
2. 광개토태왕의
정복활동
⓵ 거란정벌:
391년 태자
담덕이 고구려의 왕이 되면서 391년에
거란 공략을 시작으로 395년을
기점으로 마무리된다.
거란정벌은
2차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소수림왕
8년에
거란에 의해 8개
부락이 함락되고 고구려 백성이 끌려가게 되지만,
백제와
후연과의 거듭된 전쟁으로 손을 쓸 수 없었다.
1차
거란정벌은 거란족이 약탈한 고구려 백성을 되찾기 위한 정벌이다.
395년에
거행한 2차
거란정벌은 소,
말,
양,
소금
등의 획득을 통한 경제적 이득과 후연 정벌을 염두에 두고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다.
(p.141-153)
⓶ 백제공략:
광개토태왕의
할아버지인 고국원왕은 백제의 근초고왕과의 전투에서 목숨을 잃게 된다.
광개토태왕이
백제공략을 통해 그 원수를 갚게 된다.
396년
영락6년에
그는 대대적인 백제 공격에 나서서 승리한다.
그러나
고구려는 백제 왕실을 보존하는 것이 전력을 다해 백제를 통합하는 것보다 이익이 된다고 판단한다.
“광개토태왕은
백제를 굴복시킨 후,
백제에서
잡아온 포로가 고구려인으로 정착해 살 수 있도록 했다.
그러는
한편 힘을 모아 후연정벌을 준비했다.
그
때문에 백제 전선에 투입한 대군을 서둘러 철수한 것이다.
백제를
지배하고 통일하겠다는 의지가 부족한 것이 아니라 당시 국력과 백제의 저항,
차후
전략적 목표 때문에 백제를 멸망시키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p.188”
⓷ 숙신정벌:
영락8년
숙신지역을 공격한다.
숙신은
고구려에 내지와 같은 곳이기 때문에 소규모 군대로 반란 세력을 제거하는 정도의 군사행동을 하는데 그쳤다.
(p.196-200)
⓸ 신라
구원과 남해안 대원정:
영락9년(399년)
왜의
공격을 당한 신라는 고구려에 구원을 요청한다.
백제는
왜의 군대를 끌어들여 신라를 멸망시키거나 혼란에 빠뜨리는 것이 고구려의 힘을 약화 시킨다.
그리고
왜,
가야
연합을 구축해 고구려에 반격하려는 것이다.
이에
고구려는 5만
대군을 동원하게 된다.
그런데
400년
2월
후연의 3만
군대가 고구려에 쳐들어왔다.
고구려는
군대를 철수할 수밖에 없게 된다.
고구려는
신라와 가야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
“고구려는
신라의 임금을 교체하기도 했지만,
신라를
흡수하진 않았다.
신라는
고구려에 조공을 바치는 신민이었지만 국가의 정체성을 상실하지 않았고,
도리어
고구려의 선진 문화를 받아들여 고대국가로 발전하는 계기로 삼았다.
그렇게
고구려의 영향으로 당시 가장 중요한 경쟁자였던 가야 연맹보다 앞서 성장할 수 있었다.
신라입장에서
고구려의 신민으로 지낸 약 100년간은
역사적 퇴보가 아닌 발전을 위한 시기였다.
p.218” 또한
고구려의 남해안 대원정에서 패한 가야는 철제 갑옷과 기병양성등과 같은 변화의 모습을 보이게 된다.
(p.201-231)
⓹ 왜
격퇴:
앞에서
언급한 영락9년-10년간의
전쟁이외에 영락14년(404년)의
전쟁이 있다.
404년은
고구려가 후연을 공격해 거듭 승전보를 울리던 때이다.
이 틈을
이용한 왜의 공격으로 고구려는 후연을 굴복시킬 기회를 잃게 된다.
이에
분노한 광개토태왕은 왜군을 참살했다는 기록이 광개토태왕릉비문에 등장한다.
(p.232-249)
⓺ 후연정벌:
전연을
건국한 모용황은 고국원왕의 아버지였던 미천왕의 시체와 어머니 주태후 그리고 왕비를 사로잡았다.
죽은
자와 살아있는 자는 완전히 단절되지 않는다고 믿었던 고구려에게는 엄청난 수치였다.
당연히
전연에 이어 건국된 후연 또한 고구려 즉,
광개토태왕에게는
복수의 대상이었다.
400년
후연의 기습공격으로 신성과 남소성을 비롯한 700리의
땅을 빼앗기고 5,000여호의
백성이 붙잡혀 간다.
406년
1월
전투를 끝으로 고구려와 후연에 대한 기록은 더 이상 찾아 볼 수 없다.
407년
7월
후연에서 모반이 일어나 모용희가 죽임을 당하고 고구려 왕족의 후예인 고운이 북연을 건국한다.
408년
3월
광개토태왕은 북연에 사신을 보내 고운의 즉위를 축하며 종족의 예를 베풀었다.
이에
북연의 고운은 시어사 이발을 보내 답례했다.
고구려가
종주국,
북연이
제후국으로 두 나라의 관계가 정립되었다고 여겨진다.
409년
고운이 신하에 의해 시해 당하고 풍발이 임금이 된다.
하지만
신라의 경우와는 달리 고구려의 개입은 없었다.
409년에
고구려는 서쪽의 북연이 아니라 동쪽에 위치한 동부여를 공략하는데 온 힘을 쏟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구려는
당시 후연을 완전히 정벌할 힘이 없었다.
그래서
고운과 풍발이 외교적으로 고구려에 머리를 굽히자 서부 변경 지역이 안정된 것에 만족하고 서진정책을 마무리한다.
(p.250-268)
⓻ 마지막
정벌지 동부여:
4세기
중반 고국천왕때 고구려가 모용선비와 백제에 거듭 패하면서 동부여에 대한 통제력도 약해졌다.
동부여가
더 이상 고구려에 조공을 바치지 않자 영락 20년(410년)
광개토태왕이
마침내 정벌에 나선다.
(p.269-278)
3. 광개토태왕의
국가경영
“고구려
제국은 강력한 힘을 바탕으로 외부의 위협을 물리쳐 제국 내 평화와 안정을 가져왔다.
광개토태왕의
정복활동이 일단락 된 후,
고구려는
5-6세기에
걸쳐 오랜 기간 평화를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고구려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 전쟁에만 몰입한 것은 아니다.
광개토태왕은
정복 활동 외에 내치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⓵
법과
제도정비 (율령반포의
이점은 p.
118-120) ⓶종교정책
(불교수용에
관련된 내용은 p.133-136,
320-326) ⓷
국토
재편과 평양 천도 준비(p.331-334)
⓸
백성을 위한 정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