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큰작가 조정래의 인물 이야기 2
조정래 지음, 이택구 그림 / 문학동네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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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3월 26일, 안중근 의사 서거 100주년이었다. 방송 인터뷰에 많은 젊은이들이 안중근 의사의 사진을 보고도 누군지 모르고, 혹 알아보는 이도 무슨 일을 했는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조국 광복을 위해 피흘린 이들은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고, 친일파들이 득세한 대한민국 교육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현장이었다.  


우리의 근현대사 3부작 아리랑, 태백산맥, 한강을 20년에 걸쳐 집필한 조정래 선생님은, 남은 시간은 손주들에게 들려줄 큰인물 이야기를 집필하고 싶다고 하셨는데... 안중근도 그렇게 나온 책이다. 

손주들과 함께 하는 사진 속의 작가님은 여늬 할아버지와 다를바 없는 모습이다. 이 책에서도 할아버지가 손주를 무릎에 앉히고 들려주는 이야기처럼 조곤조곤 풀어냈다.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에서 아버지 안태훈과 어머니 조마리아 사이에서 안응칠은 맏아들로 태어났다. 배에 북두칠성 점을 갖고 태어나 큰인물이 될 거라며 할아버지 안인수는 크게 기뻐하셨고, 할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한 응칠을 문무를 겸비한 인물로 키웠다. 할아버지는 손자를 찬찬히 살펴 기질이나 성격, 소질 같은 것을 파악했다. 강단이나 담력, 고집은 남자답고 무인적 기절이라 글공부를 싫어할까봐 강압적인 방법을 쓰지 않고 은근슬쩍 손자를 유혹했다니, 할아버지의 지혜가 돋보인다. 

 
  
응칠이 일곱 살 되던 해, 개화파는 조정을 혁신하고 선진 문물을 배워와 새 나라를 만들기 위해 우수한 학생 70명을 뽑아 외국 유학을 시킬 계획을 세웠고, 거기에 응칠의 아버지 안태훈도 들어 있었다. 하지만 개화파의 갑신정변은 3일 천하로 끝났고, 고향으로 피신한 안태훈은 아버지와 상의해 하인까지 80여명의 대가족을 이끌고 황해도 해주 신천군 청계동으로 이사했다. 난세에 부귀와 공명을 꿈꾸지 않고 산중에 들어가 세상을 등지고 살기에 안성맞춤한 곳이었다.

응칠은 산중에서 무예 기르기에 힘을 쏟아 말타기와 활쏘기, 총쏘기까지 익혔다. 3년을 수련하여 고정된 표적을 백발백중 맞혔고, 2년을 연습해 이동표적을 백발백중으로 맞혔다. 마지막은 말을 타고 달리면서 이동표적 맞추기였는데 그도 2년을 연습했다. 응칠은 14살이 되었다. 할아버지는  급한 성격을 누르고 묵직한 사람이 되라며 '重根'이란 이름을 내리고, 세상을 떠나셨다. 중근은 학문으로 세상에 이름을 드러내기 보다 씩씩한 장부로 일생을 살고자 하였다. 
 
중근은 1894년 열여섯 살에 김홍섭의 딸 아려와 결혼했고, 고부군수 조병갑의 폭정을 못견딘 농민들은 동학군으로 들고 일어났다. 하지만 동학군을 빙자한 도둑들의 행패가 심해지자, 아버지 안진사는 가짜 동학군을 물리치기 위해 군대를 조직했다. 중근도 아버지를 도와 70여명의 의병대를 이끌었다. 당시 서로 치지 않기로 약조한 진짜 동학군이었던 김창수 부대는 훗날의 백범 김구였고, 백범일지에 안중근에 대한 회상을 기록해 놓았다.   

 

프랑스의 요셉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가족 모두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중근의 세례명은 도마(토마스)다. 대한제국의 임금은 무능했고, 벼슬아치들은 자기들 배를 불리기 위해 권력으로 백성을 누르고 부정부패를 일삼았다. 견디다 못한 백성은 사람답게 사는 새 세상을 만들자고 동학군 봉기가 일어났고, 자기 왕조를 지키는데 급급한 임금은 청나라에 봉기진압을 요청했다. 결국 청일전쟁의 빌미를 제공하고 우리 땅에서 두 나라의 군대가 싸우는 꼴이 되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이란 사설로 황성신문은 폐간되었고, 민영환은 자결했다. 안중근은 기울어가는 나라의 인재를 키우기 위해 교육사업에 투신했으나, 조선인이 많이 배우는 것을 원치 않는 천주교 뮈텔 신부의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 결국 자기 일은 자기들 스스로 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안중근은 1907년 러시아에서 '대한의군'을 창설하고 참모중장이 되어 군대를 훈련시켰다. 1908년 6월, 두만강을 건너 함경북도에 들어와 일본군과 싸웠으니 기습공격으로 패하여 혼자 살아 돌아갔다. 1909년 1월, 11명의 동지들과 단지동맹으로 대한독립을 맹세했다. 1909년 10월 26일, 러시아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고 "코리아 우라(대한제국 만세)!"를 외쳤다.  



안중근은 삶을 구걸하지 않고 이토의 15가지 죄악을 고발했다. 첫번째 명성황후 '시해'는 '살해'로 바꿔어야 한다. '시해'란 '자식이 부모를 죽이고, 신하가 왕을 죽이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일본은 자신들의 죄악을 조선인에게 뒤집어 씌우려고 '시해'라는 낱말을 썼기에 '살해'로 바로잡아야 한다.  

꿋꿋한 용기와 초연한 인품에 일본 검찰관조차 "당신은 참으로 동양의 의인이라 하지 않을 수 없소. 당신은 의인이니까 결코 사형당하는 일은 없을테니 걱정하지 마시오."라면서 흠모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태도를 바꾸었고, 안중근은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1909년 12월 13일부터 <안응칠의 역사>란 자서전을 쓰기 시작했다.  

1910년 2월 14일 오전 10시 일본은  한국인 변호사 안병찬과 영국 변호사를 참석은 시켰으나 변론권을 주지 않고 방청석에서 지켜보는 형식적인 재판을 했다.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의 열다섯 가지의 죄를 응징하기 위해 대한제국의 의병 참모총장으로 그를 쏘았고 포로가 되어 이옷에 왔으니 국제법에 따라 재판해야만 한다. 당당한 대한제국의 국민이 일본법에 따라 일본 법정에서 공정한 재판을 받을 수 없으니 편파적인 재판을 거부한다,고 진술했으나 그들은 결국 사형을 언도했다.  

안중근은 일본법에 의해서 또 재판을 받는 것은 일본의 행위가 옳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며, 공소권을 이용해 생명을 연장하는 치졸한 짓을 하지 않겠다며 공소하지 않았다. 안중근이 사형을 언도받고 공소하지 않자 그의 감방에는 비단과 종이 수백 장, 벼루와 붓이 들어왔다. 안중근의 인품을 우러른 일본인들이 그의 글씨를 받고자 함이었다. 안중근은 그들의 마음을 뿌리치지 못하고 정성을 다해 글을 써 주었다. 



그가 찍어 준 낙관은 네번째 손가락 한 마디가 없어진 손바닥 도장이었다. 안중근의 손바닥 도장은 섬뜩하게 사람을 긴장시키는 불변의 의지가 담긴 것이다. 사형을 앞두고 어머니는 두 동생들을 보내어 말씀을 전하셨다. 

옳은 일을 한 것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떳떳하게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163쪽) 

안중근은 어머니의 말씀을 듣고 공소권을 포기한 일이 얼마나 잘한 일인지 확인했고, 만약 공소했더라면 어머니계 면목없는 불효자가 될 뻔했다는 걸 깨달았다.

동포에게 고함 

내가 한국의 독립을 되찾고 동야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3년 동안 해외에서 모진 고생을 하다가 그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이곳에서 죽노니, 우리들 2천만 동포는 가가가 스스로 노력하여 학문에 힘쓰고, 농업.공업.상업 등을 일으켜, 나의 뜻을 이어 우리나라의 자유  독립을 되찾는다면 죽는 자 남은 한이 없겠노라.(163쪽)

 안중근은 사형집행 전 날 동포들에게 마지막 글을 보내고, 두 동생에게 마지막 유언을 남겼다. 

내가 죽은 뒤에 내 뼈를 하얼빈 공원 옆에 묻어두었다가, 우리나라가 독립을 되찾거든 고국으로 옮겨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자 모두가 국민 된 의무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합아여 큰뜻을 이루도록 일러다오.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164쪽) 

1910년 3월 26일 아침, 고향에서 보내 온 한복을 갈아입고 서른두 살 안중근은 죽었다. 일제는 안중근 의사의 묘소가 독립운동의 성지가 되고 구심적미 되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안중근의 유해를 넘겨주지 않고 수인 묘지에 매장했다. 해방이 되고 김구 선생은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세 사람의 유골을 조국으로 모셔와 효창공원에 묘역을 만들었으나, 앞자리에 안중근 의사의 유골을 봉안할 자리를 비워두었다. 아직도 빈 묘로 남아 있으니 반드시 안의사의 유골을 찾아 모셔야 할 숙제가 남아 있다. 

책 뒤에 안중근 의사의 행적과 당시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자료가 수록되어 초등 고학년들이 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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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하늘 2010-05-11 0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마전 TV방송에서 안중근 의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서 아이들이 의사가 병을 고치는 의사인줄 안다는 얘기에 충격이었던 기억이... 저도 <안중근 하얼빈의 11일>이란 책을 읽어야 하는데 정말 요즘 너무 바쁘다는...

순오기 2010-05-12 02:03   좋아요 0 | URL
의사를 그 의사로 안다니... 에휴!

마노아 2010-05-11 08: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위인들의 실제 나이를 보면 너무 젊다는 것에 한 번 더 놀라게 되어요. 백년 전의 그들에 비해서 오늘의 젊은이들은 너무 늦되어서 또 부끄럽구요.

순오기 2010-05-12 02:04   좋아요 0 | URL
옛날엔 일찍 과거를 보고 어른이 되었나 봅니다.
요즘은 결혼을 해도 부모 품에서 살려고 하잖아요.ㅜㅜ

머큐리 2010-05-11 0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애들에게 꼭 읽혀야 겠어요...

순오기 2010-05-12 02:04   좋아요 0 | URL
예~ 어린이나 청소년들이 꼭 읽어야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