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씨. 숙분이 부를 때마다 나경은 속으로 되뇌었다. 나경은 가끔은 아가씨로 또 가끔은 아줌마로 불렸지만 둘 다 자신에게 딱 맞는 호칭은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고 저 아가씨 아닌데요, 라고 대꾸하지도 않았다. 그다음 벌어질 상황이 더 귀찮을 것 같아서였다. 나경은 숙분이나 동네 어르신들이 혼기가 꽉 찬 아가씨로 자신을 오해하도록 놔두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이 됐다. 아가씨로 알고 중매를 서겠다고 하면 어쩌지? 재취 자리지만 사람이 참 좋으니 한번 만나나보라며 불쑥 낯선 사람의 사진을 내밀면 어쩌지? 집 앞 골목이나 계단에서 마주친 숙분에게 인사를 하고 돌아설 때면 나경의 머릿속에는 그런 어처구니없는 생각이 스쳐 갔다. 스스로 판단하기에도 앞서가도 너무 앞서 나간 우려였지만 자신도 모르게 급발진해버리는 망상을 멈춰 세우기가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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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경은 당장 이사 갈 상황이 아닌데도 틈만 나면 부동산 시세를 알아봤다. 재개발 아파트, 주택 청약을 검색해보다가 자신의 처지에는 무엇도 해당하지 않는다는 것을 재차 깨닫고는 주변 빌라나 다세대주택, 회사 부근 오피스텔 전월세 시세를 살펴봤다. 초역세권 오피스텔의 월세와 관리비를 내며 살 수 있을까. 감당하려고 하면 못 할 것도 없겠지만 아무래도 너무 비쌌다. 그래도 오피스텔에 살면 주인집 간섭은 안 받겠지? 풀 옵션 9.3평형 오피스텔 내부 사진을 확대해 보면서 나경의 마음은 번번이 조금 기울었다가 현재로 돌아오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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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기다려보라며 숙분이 밖으로 나갔다. 누군가와 통화를 하는지 우렁찬 목소리가 들렸지만 내용을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엉겁결에 생시를 말해놓고 나경은 뒤늦게 어리둥절해졌다. 세입자 생시는 알아서 뭐 하나? 그런 건 왜 물으시냐고 물어볼까? 나경은 공연히 소파 옆에 놓인 금전수의 새로 돋은 잎사귀를 만지작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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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취향들도 점점 어려지는 느낌.

정오가 술을 주문하고 얼마 뒤 작은 백자 호리병과 잔 두 개, 방어회가 나왔다. 운두가 낮은 화려한 접시에 방어회가 부위별로 소담하게 담겨 있었다. 제주산 숙성 대방어입니다. 종업원이 나직하게 말했다. 회에 곁들일 기름장, 생와사비, 무순, 백김치, 파래김이 차례대로 상 위에 놓이는 동안 정오와 나는 말없이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다시 미닫이문이 조용히 닫혔다.
정오가 호리병의 뚜껑을 따고 병 주둥이를 내 앞으로 기울였다. 붓글씨로 쓰인 ‘安東燒酎’를 보며 안동소주, 하고 속으로 읽었다. 나는 그가 따라주는 술을 받았다.
요즘은 독한 게 오히려 속이 편하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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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겨울방학이 되었을 무렵 정오는 거의 우리 집에서 살다시피 했다. 같은 학원으로 수학 특강을 들으러 가고, 돌아오는 길에는 비디오대여점에 들러 비디오테이프를 빌려 와 늦은 밤까지 영화를 봤다. 정독도서관이나 광화문 교보문고에도 자주 갔는데 두 사람은 참고서와 문제집, 소설책을 모두 공유했다. 이따금 말끔한 사복 차림으로 대학로 민들레영토에 가기도 했다. 그곳에서 영화인지 사진인지 정확히 어떤 동호회였는지 기억나지는 않지만 다음 카페에서 만난 다른 학교 또래들과 모임을 하고 오기도 했다.

28/95

그리고 언젠가부터 같은 영화를 보고, 같은 책을 읽고 밤이면 각자의 잠자리에 누워 이어폰을 꽂고 같은 주파수의 라디오를 듣게 되었다. 두 사람을 통해 나는 오스카 와일드, 랭보, 헤르만 헤세, 알베르 카뮈, 프랑수아즈 사강, 전혜린, 기형도, 진이정을 알게 되었다. 셋이서 비디오로 <길버트 그레이프> <아이다호> <중경삼림> <올리브 나무 사이로> <첨밀밀>을 거실 소파에 기대어 보았던 밤도 기억한다. 두 사람이 모아놓은 『KINO』나 『씨네21』 같은 영화 잡지에서 프랑수와 트뤼포, 장 뤽 고다르, 왕가위, 압버스 키어로스타미의 이름을 처음 보았고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그 이름이 좀처럼 외워지지 않아 이삼일을 입 속으로 중얼거리기도 했다. 두 사람은 <FM 음악도시 유희열입니다>를 즐겨 들었는데 생방송 라디오에서 나오는 음악과 어딘가에서 구해 온 음반을 녹음해 둘만의 카세트테이프를 만들기도 했다. 거기에는 뭔가 연결성이 있는 듯도 하고 없는 듯도 한 음악들이 녹음되어 있었는데 플레이리스트는 이랬다. 너바나, 쳇 베이커, 사카모토 류이치, 아스토르 피아졸라, 안토니오 카를로스 조빔, 시규어 로스, 카디건스, 신해철, 유재하.
29/95

무엇이 그토록 그 두 사람을, 그리고 우리 셋을 서로 끌어당기게 했는지 지금도 정확히는 모른다. 우리가 아버지 없는 아이들이었다는 것, 일찍부터 엄마 없는 집에서 남아도는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 익히 알았다는 것, 뭐 하나 특출난 것은 없지만 특별하기를 원하는 평범한 아이들이었다는 것, 그런 이유가 아니었을까 짐작해볼 뿐이다. 우리 세 사람은 안전한 집에 모여 앉아서 멀리 떠나 있기를 바랐던 것인지도 모른다. 여기가 아닌 다른 어딘가로, 낯선 언어와 감정이 우리를 꼼짝없이 포위하는 곳으로. 그도 아니라면, 그저 외로운 아이들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정오, 오빠 그리고 나는 우리만의 시공간을 만들어갔다. 세상이 돌아가는 형편은 잘 몰랐다. 두 사람은 어땠는지 몰라도 적어도 나는 그랬다. IMF 시대의 한가운데를 통과하고 있었지만 그것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다. 나는 극장에 가 <타이타닉>을 두 번 관람하고 금 모으기 운동에도 동참하는 그런 부류의 아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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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을 창가로 옮기고 어제 사다 놓은 흰 전지를 깔아요. 음식이 담긴 접시를 하나씩 올려요. 육개장, 미역국, 밥, 시금치무침, 콩나물무침, 무나물, 애호박전, 두부부침, 찹쌀떡, 절편, 딸기. 그리고 언니가 좋아하는 냉동실에서 막 꺼낸 차가운 소주, 늘 태우던 담배 한 갑.
언니. 그날로부터 줄곧 언니에게 묻고 싶었던 말을 오늘도 하지 못할 것 같아요.

18/95

임종은 몇 번인가 아주 가까이 엄마에게 다가왔다가 물러갔다. 나는 그만 엄마가 편안해지기를 바랐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언제까지나 곁에 머물러 있어주기를 바랐다. 그 두 개의 희망이 내 안에서 같은 무게로 번갈아 가라앉을 때마다, 그 일렁임이 내 삶에 멀미를 일으키고 차라리 절망의 편으로 도주하고 싶을 때마다 나는 오늘이 아닌 앞으로의 일들을 생각했다.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손꼽아보았다. 마땅한 상조와 장례식장을 미리 알아보고, 틈틈이 조문객 명단을 핸드폰 메모장에 적어놓았다. 그건 내가 두려움을 외면하는 방식이었고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비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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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라, 장필순, 오소영, 정밀아. 만나본 적도 없는 가수들의 노래를, 우리 언니들의 노래라고 하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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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사람들이 음식을 정말 많이 남겨요. 설거지도 설거진데 버리는 게 일이에요. 버려지는 음식을 계속 보는 게 이렇게 마음을 힘들게 할 줄은 몰랐어요. 뭐랄까. 너무 쉬워요. 버리고 버려지는 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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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호박전은 언젠가 예능 프로에서 본 것을 따라 해봤어요. 다른 과정은 다 똑같은데 납작납작 썬 애호박 속을 동그랗게 파내고 그 안에 명란젓을 넣어 부치는 거예요. 엄마가 보내준 김치도 썰고 한 팩에 2만 원 가까이 하는 금실 딸기도 씻어두었죠. 잊을까 봐 마트에서 사 온 떡도 꺼냈어요. 언니도 딸기를 좋아했죠. 비싸서 혼자 있을 땐 안 사 먹고 나한테 놀러 올 때나 산다고 했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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