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신형철 지음 / 한겨레출판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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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가는, 침대 위에 콩 한 쪽을 놓고 그 위에 수십 겹의 요를 쌓아두어도 눕자마자 금방 알아차리는 안데르센 동화 속 공주처럼, 미묘한 단어와 문구의 차이에도 민감하게 반응하고 다른 이들이 알아차리지 못하는 숨은 뜻을 끌어올리는, 그런 존재다. 그가 서문에서 밝힌 바와 같이 신형철은 글짓기를 “특정한 인식을 가감 없이 실어 나르는 단 하나의 문장“을 찾아 균형을 맞추어 넘치는 것도 부족한 것도 없도록 배치하는 행위로 인식하고 있다. 정확한 문장과 구조적 균형을 중시하는 평론가이기에 이런 예민함이 필요한 것일게다. 이 예민함이 신형철을 이토록 ‘슬픔‘에 천착하게 만들지 않았을까.

인간 내면의 깊은 우물에서 천천히 슬픔을 길어올린 이 뛰어난 산문집의 첫 번째 글에서 그는 말한다. 인간에게, 자기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이기적일 수 밖에 없는 우리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배움이자 또한 가장 배우기 어려운 것은 바로 타인의 슬픔이라고. 그러나 그는 이러한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되 긍정하지는 못한다.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슬퍼할 줄 아는 생명˝이면서 ˝그 슬픔의 힘으로, 타인의 슬픔을 향해 가려고 노력˝하는 존재니까. 이기심과 위선의 사이에서 비참을 느끼는 우리는 그래서 슬픔을 공부한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타인의 슬픔을 조롱하는데 익숙해져 있다. 비단 조롱이 아니더라도 ‘당신의 고통이 나를 불편하게 한다‘는 말이 광장에서 공공연히 떠돌아 다닌다. 신형철의 말대로, 이 얼마나 잔인한 폭력인가. 용산참사 희생자에게, 쌍용차 해고 노동자에게, 세월호 유가족에게, 인간으로서 해서는 안 될 비난과 지독히 가학적인 조롱이 줄을 잇는 광경을 우리는 지난 몇 년간 똑똑히 보아 왔다. 타인의 슬픔에 대해 위선 조차 내비치지 않고 비참함 따위는 더더욱 느끼지 않는 사회가 되어 가고 있는 지금, 우리는 그래서 슬픔을 공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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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신형철 지음 / 한겨레출판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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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가는, 침대 위에 콩 한 쪽을 놓고 그 위에 수많은 요를 쌓아두어도 눕자마자 금방 알아차리는 안데르센 동화 속 공주처럼, 미묘한 단어와 문구의 차이에도 민감하게 반응하고 다른 이들이 알아차리지 못하는 숨은 뜻을 끌어올리는, 그런 존재다. 그가 서문에서 밝힌 바와 같이 신형철은 글짓기를 “특정한 인식을 가감 없이 실어 나르는 단 하나의 문장“을 찾아 균형을 맞추어 넘치는 것도 부족한 것도 없도록 배치하는 행위로 인식하고 있다. 정확한 문장과 구조적 균형을 중시하는 평론가이기에 이런 예민함이 필요한 것일게다. 이 예민함이 신형철을 이토록 ‘슬픔‘에 천착하게 만들지 않았을까.

인간 내면의 깊은 우물에서 천천히 슬픔을 길어올린 이 뛰어난 산문집의 첫 번째 글에서 그는 말한다. 인간에게, 자기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이기적일 수 밖에 없는 우리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배움이자 또한 가장 배우기 어려운 것은 바로 타인의 슬픔이라고. 그러나 그는 이러한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되 긍정하지는 못한다.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슬퍼할 줄 아는 생명˝이면서 ˝그 슬픔의 힘으로, 타인의 슬픔을 향해 가려고 노력˝하는 존재니까. 이기심과 위선의 사이에서 비참을 느끼는 우리는 그래서 슬픔을 공부한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타인의 슬픔을 조롱하는데 익숙해져 있다. 비단 조롱이 아니더라도 ‘당신의 고통이 나를 불편하게 한다‘는 말이 광장에서 공공연히 떠돌아 다닌다. 신형철의 말대로, 이 얼마나 잔인한 폭력인가. 용산참사 희생자에게, 쌍용차 해고 노동자에게, 세월호 유가족에게, 인간으로서 해서는 안 될 비난과 지독히 가학적인 조롱이 줄을 잇는 광경을 우리는 지난 몇 년간 똑똑히 보아 왔다. 타인의 슬픔에 대해 위선 조차 내비치지 않고 비참함 따위는 더더욱 느끼지 않는 사회가 되어 가고 있는 지금, 우리는 그래서 슬픔을 공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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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신사
에이모 토울스 지음, 서창렬 옮김 / 현대문학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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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러시아 혁명 시기를 다룬 책을 세 권이나 읽게 되었다. 그것도 각기 다른 장르로. 르포르타주(<세계를 뒤흔든 열흘>), 역사서(<왜 제1차 세계대전은 끝나지 않았는가>), 그리고 바로 이 소설 <모스크바의 신사>. 내키는 대로, 손에 잡히는 대로 읽는 내 독서 스타일을 감안하면 상당히 멋진 우연이라 할 수 있겠다.

<모스크바의 신사>는 러시아 혁명 후 공산당으로부터 모스크바의 메트로폴 호텔 바깥으로는 한 발짝도 나오지 못하도록 유폐 명령을 받은 러시아 귀족 알렉산드르 일리치 로스토프 백작의 이야기다. 백작은 1922년부터 1954년까지 장장 32년 동안 호텔에 갇혀 있게 되지만, 구시대의 귀족답게 풍부한 교양과 유머, 사람을 끄는 특유의 매력으로 호텔의 다양한 사람들과 오랜 세월 친교를 맺는다. 공작에게 유폐형을 선언하는 자리에서 한 공산당 고위직은 ‘매력은 유한계급의 마지막 야망‘이라고 표현하는데, 귀족으로서 갈고 닦은 매력이 없었다면 백작이 공산당 치하에서 멀쩡히 살 수 있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단지 매력만으로 그 긴 세월을 견딜 수는 없는 법. 하루 아침에 스위트룸에서 종탑 아래 다락방으로 쫓겨 났음에도 좌절하지 않는 인내력과 낙천성, 겸손함과 신중함까지 갖춘 그는 가히 초인에 가까운 캐릭터이다.

어쨌든 백작은 이 소설 속에서 오랫동안 수많은 에피소드를 겪는데 그 하나하나가 굉장히 재미있다. 우리가 러시아 소설 하면 흔히 떠올리는, 잔뜩 구름 낀 차가운 시베리아의 광활한 눈밭 같은 음울한 이미지는 이 소설에서 찾아볼 수 없다. 미국 소설가의 작품이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러시아 혁명 이후의 소련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기엔 역사의 흐름과 지나치게 동떨어져 있어서 왠지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백작은 여배우와 오랜 기간 사랑을 나누고, 꼬마 아이와 우정을 맺고, 그 꼬마아이가 장성해서 낳은 딸을 대신 맡아 키운다. 소련을 멸망 직전까지 몰고 갔던 독소전도, 무시무시한 스탈린의 독재도 이 소설엔 거의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그러니 이 이야기는 미국 작가가 멋진 상상력을 발휘하여 모스크바의 한 호텔을 배경으로 정묘하게 건축한 한 편의 판타지라고 보는 게 맞겠다. 애초에 소련의 현실을 보여주고자 한 소설은 아니니까.

그러면서도 이 책은 캐릭터에만 의존하지 않는다. 작가의 두 번째 작품이라는 게 믿기지 않는 재치있고 완숙한 문장과 치밀한 구성이 곳곳에서 빛을 발하는 근사한 소설이다. 700페이지가 넘는 장편이지만 뒤로 갈수록 글의 흡입력이 강해져서 독자로 하여금 꼼짝없이 제자리에서 다 읽게 만드는, 걸출한 재미를 선사하는 소설이기도 하다. 실제로 모스크바 붉은 광장 앞에 있다는 메트로폴 호텔을 한 번 둘러보고 싶어질 정도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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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
코맥 매카시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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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멸망했다. 온통 잿빛의 하늘과 땅만 남은 세상. 강물도 말라붙고 생명은 자취를 감추었다. 여기를 아버지와 어린 아들, 단 둘이 걸어간다. 하염없이 바다를 향해. 멸망한 세계는 지독히 가혹하다. 자연이 완전히 망가져 언젠가는 다시 푸르른 지구가 되리라는 희망 따윈 기대할 수 없는 곳. 흔적만 남은 문명의 잔해에서 인간이 인간을 사냥하는 지옥이 펼쳐진다. 아버지는 아들을 살리기 위해, 정확히는 아들이 자기보다 먼저 죽지 않도록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항상 주위를 경계하고, 어떻게든 먹을 것을 구하고, 불을 피우고 쉴 곳을 마련한다. 식량을 구하는 게 거의 불가능한 환경에서 이들은 과연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한 페이지 넘기는 것 조차 두려울 정도로 무섭고 고통스러운 소설이었다. 특히나 부모로서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무서운 악몽이기도 했다. 까마귀 떼처럼 죽음이 머리 위를 뱅뱅 도는 삶 속에서 나는 얼마나 나 자신으로 살 수 있을까? 내 아이와의 끈을 언제까지 놓지 않을 수 있을까?

너무나 어둡고 우울한 소설이라 독자들은 이 책을 읽으며 끊임없이 행복의 실마리를 찾는다. 주인공들이 구원받았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혹시나 작가가 남겼을지 모를 희망의 복선을 찾아 책 구석구석을 훑는다. 하지만 구원은 독자가 기대하지 않은 방식으로 다가온다. 아이는 멸망 이후의 세계에서 태어나 이전 세계의 모습과 문화를 알지 못하나, 역설적으로 가장 휴머니즘이 넘치는 인물이다. 자기를 죽이려 했던 사람마저 연민하고, 길에서 만난 노인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 주자고 말한다. 당장 내일 식량이 떨어져 굶게 되어도 이상하지 않은 세상에서 말이다. 인간 불신으로 가득한 소설이지만 결국 구원은 인간에 대한 믿음을 통해 찾아온다.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세계를 다룬 작품은 많지만 이만한 걸작을 앞으로도 찾아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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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극의 문구 - 매일매일 책상 위에서 고군분투하는 일상 문구 카탈로그
다카바타케 마사유키 지음, 김보화 옮김 / 벤치워머스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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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최고라고 공인 받은 문구 덕후가 뽑은 궁극의 아이템 리뷰집. 뚜렷한 목적성과 예술에 가까운 밸런스를 지닌 각 분야별 대표 문구들이 황홀하게 소개된다. 나 또한 문구를 사랑하는 입장에서 무척이나 즐겁게 읽었다. 저자가 하나하나 펜으로 정교하게 그린 문구 일러스트와 해당 문구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소개하는 짧은 리뷰가 잘 버무려져 있다. 다만 각 분야의 대표 선수만 소개하다보니 다양한 제품이 등장하지 않는 건 불만이다. 그래서 내가 사랑하는 로디아 메모패드와 플래티넘 프레피 만년필이 없다는 건 동의하기 힘들다.
문구는 우리가 매일매일 사용하는 친숙한 도구다. 어떻게 보면 신체의 연장(延長)이라고 할만한 것들이라, 우리는 문구가 마치 생명이 있는 것인 양 애착을 느낀다. 손에 익은 만년필을 잃어버렸을 때 느끼는 상실감이 큰 것은 그런 까닭이리라. 사용하기 편하고 손에 착 붙는 문구는 그래서 우리의 일상을 더욱 즐겁고 풍부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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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붕툐툐 2018-12-26 00: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 제목만 보고, 좋은 문구[문꾸]를 뽑아놓은 책인 줄 알았습니다. 진짜 문구[문구]일 줄이야~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