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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신사
에이모 토울스 지음, 서창렬 옮김 / 현대문학 / 2018년 6월
평점 :
근래 러시아 혁명 시기를 다룬 책을 세 권이나 읽게 되었다. 그것도 각기 다른 장르로. 르포르타주(<세계를 뒤흔든 열흘>), 역사서(<왜 제1차 세계대전은 끝나지 않았는가>), 그리고 바로 이 소설 <모스크바의 신사>. 내키는 대로, 손에 잡히는 대로 읽는 내 독서 스타일을 감안하면 상당히 멋진 우연이라 할 수 있겠다.
<모스크바의 신사>는 러시아 혁명 후 공산당으로부터 모스크바의 메트로폴 호텔 바깥으로는 한 발짝도 나오지 못하도록 유폐 명령을 받은 러시아 귀족 알렉산드르 일리치 로스토프 백작의 이야기다. 백작은 1922년부터 1954년까지 장장 32년 동안 호텔에 갇혀 있게 되지만, 구시대의 귀족답게 풍부한 교양과 유머, 사람을 끄는 특유의 매력으로 호텔의 다양한 사람들과 오랜 세월 친교를 맺는다. 공작에게 유폐형을 선언하는 자리에서 한 공산당 고위직은 ‘매력은 유한계급의 마지막 야망‘이라고 표현하는데, 귀족으로서 갈고 닦은 매력이 없었다면 백작이 공산당 치하에서 멀쩡히 살 수 있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단지 매력만으로 그 긴 세월을 견딜 수는 없는 법. 하루 아침에 스위트룸에서 종탑 아래 다락방으로 쫓겨 났음에도 좌절하지 않는 인내력과 낙천성, 겸손함과 신중함까지 갖춘 그는 가히 초인에 가까운 캐릭터이다.
어쨌든 백작은 이 소설 속에서 오랫동안 수많은 에피소드를 겪는데 그 하나하나가 굉장히 재미있다. 우리가 러시아 소설 하면 흔히 떠올리는, 잔뜩 구름 낀 차가운 시베리아의 광활한 눈밭 같은 음울한 이미지는 이 소설에서 찾아볼 수 없다. 미국 소설가의 작품이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러시아 혁명 이후의 소련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기엔 역사의 흐름과 지나치게 동떨어져 있어서 왠지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백작은 여배우와 오랜 기간 사랑을 나누고, 꼬마 아이와 우정을 맺고, 그 꼬마아이가 장성해서 낳은 딸을 대신 맡아 키운다. 소련을 멸망 직전까지 몰고 갔던 독소전도, 무시무시한 스탈린의 독재도 이 소설엔 거의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그러니 이 이야기는 미국 작가가 멋진 상상력을 발휘하여 모스크바의 한 호텔을 배경으로 정묘하게 건축한 한 편의 판타지라고 보는 게 맞겠다. 애초에 소련의 현실을 보여주고자 한 소설은 아니니까.
그러면서도 이 책은 캐릭터에만 의존하지 않는다. 작가의 두 번째 작품이라는 게 믿기지 않는 재치있고 완숙한 문장과 치밀한 구성이 곳곳에서 빛을 발하는 근사한 소설이다. 700페이지가 넘는 장편이지만 뒤로 갈수록 글의 흡입력이 강해져서 독자로 하여금 꼼짝없이 제자리에서 다 읽게 만드는, 걸출한 재미를 선사하는 소설이기도 하다. 실제로 모스크바 붉은 광장 앞에 있다는 메트로폴 호텔을 한 번 둘러보고 싶어질 정도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