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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 그리고 삶은 어떻게 소진되는가
류동민 지음 / 코난북스 / 2014년 12월
평점 :
절판


서울을 좋아한다. 우리나라의 수도니까. 모든 것이 모여 있고,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곳이니까.

딸아이가 태어나기 전, 2년 연속으로 서울 여름휴가를 떠났다. 산으로, 바다로, 해외로 나가는 수많은 여행객들을 뒤로한 채 우리부부는 서울로 향했다. 레지던스에 며칠을 묵으면서 서울 곳곳을 여행했다. 아무리 여름휴가 기간이라도 서울은 서울이기에(그만큼 크고, 사람도 많다는)복잡했다. 그래도 보통 사람들의 여름휴가와는 전혀 다른 방식, 나름의 유니크한 여름휴가를 보내고 있다는 뿌듯함이 컸다. 그리고 1년에 1-2번 오게 되는 서울은 친척 잔치가 있거나 특별한 일이 있을 때가 대부분이었다. 오로지 여름휴가 며칠 전부를 서울에 머물면서 평소에는 TV나 책에서만 보던 곳들을 밟아보고 만져보면서 나름의 휴가를 보냈다. 재미있었다.

잔치나 특별한 업무차, 2년 동안의 여름휴가를 통해 얻게 된 서울의 공통된 이미지는?

복잡하다. 빠르게 움직인다.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넘쳐 났다. 에스컬레이터에서 계단에서 거리에서 사람들은 너무나도 빠르게 움직였다. 요리조리 사람들 틈을 피해가며 움직였다. 내 걸음으로는 도저히 쫓을 수 없는 영역이었다.

서울에서 만난, 지나친 사람들(물론, 모두 서울에 거주하거나 서울에 직장을 가지고 있거나 서울에서 장사나 사업을 하는 사람들은 아니겠지만)은 거의 모두 바빠 보였다. 정말 열심히 사는 것 같았다. 그렇게만 살면 모두들 성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결코 아니다. 모두들 아는 얘기다.

    

 

“거시적 위험과 불안이 상존하는 사회에서 개인은 누구나 알아서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는 수밖에 없게 된다. ‘알아서 살아남기’, 그러므로 이것은 지금 여기 서울의 공간에서 적용되는 중요한 생존 원칙이다.” (p.278)

    

언제부터인가 한국에서 살고 있는 한국인들에게는 ‘알아서 살아남기’는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신기한 일이다. 국가가 있고 정부가 있고 지방자치단체가 있는데 말이다. 나라가 통째로 망해 외국의 금융구제 아래로 들어가게 되었을 때, 나라는·국가는 국민을 지켜주지 않았다. 수많은 가장이 자기 목숨을 내다 버리는 중에 국가와 나라는 없었다. 아무리 법과 상식에 호소해도 기득권을 깨뜨릴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라는 옛말이 뼛속에 새겨지는 근래였다. 단숨에 한 가정의 가장의 일자리를 빼앗아도 아무런 제제와 처벌을 받지 않는 천한 자본주의 사회를 살면서 한국인들이 내제화한 진리는 이것이다. ‘국가는 나를 지켜주지 않는다. 나는 내가 지켜야 한다.’

작년 삼백 명이 넘는 국민이 바다에 침몰한 여객선에서 죽어가는 상황을 실시간으로 지켜봐야 했다. 두 달 후면 벌써 1주년이 된다. 그런데 왜 여객선이 침몰했는지, 왜 구조를 하지 못했는지, 왜 진상규명의 ‘ㅈ’조차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지 아무것도 되는 일이 없다. 이런 사안을 반복적이고 지속적으로 지켜봐 온 한국인들은 차라리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마음 편하다.

‘맞아, 나는 내가 지키는 거지’

    

 

“사실은 매우 자주, 세상은 구성원 개개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스스로의 논리를 가지고 굴러가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회사건 가족이건 사람들의 모임 안에서 딱히 내 뜻도 다른 그 누구의 뜻도 아닌 방향으로, 이를테면 제도나 조직이 물 흐르듯 흘러가는 느낌, 그 하나하나의 모든 흐름을 살펴보고 의문을 제기하며 방향을 틀어보려 노력하기에는 자신이 너무도 무력함을 깨닫게 될 때 좌절은 체념으로, 체념은 다시 안일로 바뀐다.” (p.100)

 

노력 → 무력 → 좌절 → 체념 → 안일은 연쇄반응으로 일어난다. 순차적이고 일차원적이다. 중간 과정에서 다른 요소의 직접적 관여는 없다. 노력에서 안일까지는 일사천리다. 이것은 서울사람이든, 대구사람이든 상관없다. 우리는 그런 사회를 살아가고 있다. ‘이 놈의 세상 더러워 죽겠다. 도무지 안 되겠다.’ 라고 생각하지만 갈아엎으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아니, 하지 못한다. 단 한 번도 기층 국민에서부터 시작된 혁명을 비롯한 시위나 데모 따위가 최고위층의 목을 잘라낸 적이 없다. 경험이 없으니 상상이 불가능하다. 책을 읽고 친구와 대화를 나누고 교육을 받으면 상상할 수 있다고? 구라다. 상상할 수 없다. 인간의 상상력은(특히, 한국인들의 상상력은) 생각보다 협소하다. 한 번도 해보지 않았는데, 들어보지도 못했는데 ‘왜 그렇게 가만히 있느냐? 왜 대들지 못하고 당하고만 있냐?’라고 하는 것은 폭력이다. 꼰대다.

    

 

“국가브랜드위원회라는 황당한 명칭의 조직이 야심차게 실행한 우측통행 정책의 안전 효과가 천 몇 백억 원이라는 홍보문구를 보면” (p.242)

“곳곳에서 강화되는 배제의 원리는 공간을 격리시킨다. 격리된 공간은 사람과 정보의 자유로운 흐름을 막는다. 공공의 공간, 사회 구성원들이 공동으로 권리를 갖는 영역은 배제 원리가 확산됨에 따라 점점 줄어든다.” (p.276)

 

갑자기 우측통행을 한다고 난리를 쳤다. 갑자기 신호체계가 바뀐 적도 있었다. 그런데 그 우측통행 시행의 가장 큰 이유가 천박한 자본의 논리였단다. 국가브랜드위원회에서 우측통행 정책의 안전 효과가 천 몇 백억 원? 경제학자인 저자의 눈에 얼마나 골 때리는 논리였을까?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이런 정책에 대해 반기를 들거나 비판하는 경제학자들이 없다는 사실이다. 뭐, 그렇다면 그렇지요 뭐, 하고 입을 다무는 것인지, 너무 골 때리고 어이가 없어서 말할 가치도 없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G20 정상회담을 하면 몇 조 원의 경제효과가 유발된다는 논리와도 상통한다. 그렇게 공간은 배제를 낳는다. 아무리 골 때리고, 공적 영역을 사적 이익으로 치환하는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할지라도 얼마 정도의 경제적 효과를 창출하는 것은 분명할 거다. 어쨌든 생산력이나 부가가치의 일정 정도 상승은 있을 테니까 말이다. 그런데 그 끄트머리 이익조차도 얻을 수 있는 구성원은 대다수가 아니라 극소수 일 테다. 그렇게 자본의 논리는 공간을 나누고 나눠진 공간은 배제를 강화한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저자의 눈에 비친 과거의 경험과 현재의 모습은 강화된 배제의 논리를 확인하는 과정이다. 이 책이 바로 그 과정을 담았다. 잘 모르는 서울의 지명과 모습을 생각해보지 않더라도 각자의 고향의 모습을 생각해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자신에게 아련한 추억을 가져다주는 공간이 그대로 남아 있기 바라면서도 물질적 이익을 위해서라면 그 공간을 스스로 파괴하는 실천도 마다하지 않는다.” (p.27)

 

“엄마, 거기 OO. 땅값 올랐겠네요?”

“그렇겠지. KTX뚫리고 그 근처로 KTX역 들어서니까.”

“거기. 어릴 때 많이 갔었는데...”

 

얼마 전에 어머니와 나눈 대화다.

몇 년 전, 부동산을 하는 지인의 권유로 시골에 땅을 조금 사두셨는데, 그 인근에 KTX가 뚫리고 역이 들어선다고 한다. 안 그래도 시세도 알아보고 할 겸 부동산을 하는 지인분과 다녀오셨다고 했다. 엄청 놀라셨단다. 시내까지 들어오려면 자동차로 30분 넘게 걸리는 곳이라 땅값도 싸고 아파트 값도 쌌는데, 너무 올랐다는 것이다. 지금 살고 있는 본가 아파트 시세보다 더 올랐다면서 혀를 찼다. 그래도 은근히 기대를 하시는 눈치였다. KTX선로와 역사와는 다소 거리가 있었지만 인근에 상가가 개발되고 아파트가 많이 들어설 수도 있다는 가능성 때문이었다. 어머니의 기대가 충족될지는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아쉽다. 부모님이 산 땅에 내 어린 시절 추억이 많다. 아주 어릴 때는 아버지를 따라 간 바다낚시를 마치고 난 후 들리던 아버지 친구 집이 그 근처였다. 잡아온 생선을 회로 먹거나 구이로 먹었다. 아버지 친구 집에는 형들이 있었다. 잘 데리고 놀아줘서 한참을 놀다 밤늦게 돌아오고는 했다. 좀 더 커서는 근처에 온천이 있었다. 중고등학생 시절 공부의 피로를 덜고 스트레스를 풀라며 자주 온천을 찾았다. 온천에 갈 때마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나선 바다낚시와 그 후에 꼭 들리던 아버지 친구 분과 친구 분 집, 형들의 이야기를 하고는 했다.

한참 지나 온천에도 몇 해째 가지 않고, 더 이상 바다낚시를 다니지 않게 되면서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내게 추억밖에 없는 그 곳 땅값이 오르면 내게도 좋은 일일까? 맞다. 좋은 일이다. 나도 어쩔 수 없는 천박한 자본주의 세계를 사는 한국인이니까. 흐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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