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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 어려운 시대에 안주하는 사토리 세대의 정체
후루이치 노리토시 지음, 이언숙 옮김, 오찬호 해제 / 민음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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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이가 행복하다? 그것도 절망의 나라에서? 이해되지 않는 제목이다. 읽어야 할 책이 아니라면 제목만 보고 지나치고도 남을 만한 책이다. 언뜻 “절망의 나라에서도 꿈을 가지고 열심히 노력하고 또 노력하고 아파도 참으면서 청춘을 즐기며 스펙을 쌓고 자기관리와 자기성찰을 병행하면서 힐링 주사 한 방씩 맞아가며 노력하면 행복할 수 있습니다.”라는 흔하디흔한 자기계발서로 오해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 책은 정말 절망적인 책이다.

지난 대선과 총선을 통해 확인한 바, 일정 정도 투표율을 넘기면 예전 선거에서는 야당 후보의 당선이 유력시 되었다. 하지만 지난번 선거들에서는 모조리 그 법칙이 깨졌다. 20,30대 보다 50,60대가 더 투표를 많이 하게 된 것이다. 선거 후 각종 비난과 비판이 젊은 세대에게 쏟아졌다. 하루 놀러가고, 하루 일하는 거 그거 좀 안 하고 투표를 해야 세상이 바뀌지 언제까지 계속 이런 세상을 살겠냐고.

 

이 책을 해제한 오찬호 선생의 책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를 읽고 받은 충격이 떠오른다. 지성인이고 파릇파릇한 젊은이들인 한국의 대학생들이, 서로가 서로를 차별하고 그것을 정당화하고 계급을 나눠 내면화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정말 충격이었다. ‘내가 대학 다닐 때는 말이야~’라는 말은 나도 정말 듣기 싫었다. 특히 386들 한테. 그런데 오찬호 선생의 책을 읽고 나도 모르게 ‘나 때와는 정말 다르구나~’탄식하게 되었다. 소위 인서울 해 있는 대학 중에서도 SKY를 제외하고 가장 높은 수준에 있는 대학에 다니는 한 학생의 인터뷰였다. 자기는 한 번도 그 대학을 들어보지 못했다는 것. 누가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나는 연세대, 고려대 갈 수 있는데 전공 때문에 여기 온 거야’라고 한다는 것. 지하철에서 다른 학교 학생이 영문으로 학교 이름이 새겨진 야구점퍼를 입은 것을 보면 ‘나보다 못한 학교에 다니면서도 쪽팔리지도 않아’라고 생각한다는 것. 혹시 자신보다 좋은 학교에 다니는 학생이 야구점퍼를 입고 있으면 들고 있는 전공서적이나 파일에 담긴 서류를 봐서라도 꼭 전공을 확인한다는 것. 전공이 경영·경상계열이면 그냥 넘어가고 혹시 인문계열이면 ‘풋! 나는 거기 들어가고도 남는 성적이었어.’라고 생각한다는 것.

더군다나 이것이 한 두 학생의 생각이 아니라 20대 대학생들에게 만연해 있다는 것이었다. ‘지역균형발전 특례입학’으로 들어 온 학생에 대해 ‘지균충’이라 비하하는 학생들이 있다는 것이었다.

 

이 책에서 소개되는 일본의 젊은이들은 행복하단다. 정말?

나는 일본이 한국보다 정치·경제·사회·문화·의식 모든 수준에서 20년 정도는 앞서 있다고 생각한다. 일본이 이미 겪은 버블경제를 따라가고 있고 노동형태나 정치형태도 일본의 이전 20년 정도를 답습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책이 주는 의미는 더 크다고 생각한다. 아직 야구점퍼 따위로 몇 사람 건너면 아는 사람일 지도 모를 동년배를 계급화해서 무시하고 같은 학교에 다니는 동기임에도 지균충, 기균충 이라며 비하하는 한국의 대학생, 나아가서 젊은이들이 20년 쯤 후면 이 책에 소개된 일본의 젊은이들과 비슷해 질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한다.

20년 후면 한국의 젊은이들도 행복하다고 말할까? 정말?

    

 

“그가 발견한 젊은이들의 ‘행복’은 ‘희망적인 미래’를 기대하지 않기에 가능하다. 쉽게 말해, 미래를 포기했기 때문에 가능한 선택지다.” (p.8)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소박하게 ‘오늘보다 내일이 더 나아질 것이다.’라는 생각을 믿지 않는다. 그들의 눈앞에 펼쳐져 있는 것은 그저 ‘끝나지 않는 일상’일 뿐이다. 그래서 ‘지금 행복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었을 때 비로소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이다.” (p.136)

 

제목은 순전히 낚시용이었다.

아니, 낚시가 아닐 수도 있다. 보는 관점에 따라서.

분명 일본의 젊은이들은 행복하단다. 여론조사와 여러 사회조사의 통계결과라고 한다. ‘오늘보다 내일이 더 나아질 것이 없으니 차라리 오늘에 만족하고 살자.’라는 것이란다. 이 무슨 니체적이고 염세적인 생각일까? 생각되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인 것 같다. 오랜 기간 경기불황과 정체된 사회적 분위기에서 나고 자란 일본의 젊은이들에게 도전과 모험, 시도와 변혁, 전복과 반전 같은 단어는 외계어와 같은 것이다. 저자의 말대로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었기 때문에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모순적이고 슬프다. 더 이상 내 삶이 나아질 기미도 보이지 않고 그렇다고 국가나 사회가 나서서 내 삶을 인도해 주지도 않는다는 것을 자각하는 순간, 일본의 젊은이들은 삶의 미시적 세계에 몰입한다. 나와 내 가족, 내가 만나는 주변 사람들 몇몇을 제외하고는 큰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옳거나 그르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각자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다르고 그 세상을 살아내는 방향이 다르니까. 다만, 슬프고 암울하다. ‘더 나아질 것이 없어서 차라리 행복하다고 착각해 버리자.’라는 말로 들르기 때문에.

비단 일본만의 문제는 아닐 것 같아서 더 마음이 조마조마하다. 20대 초반 세상과 자아와 사회와 이웃과 정의와 상식을 생각해야 할 한국의 청춘들이 기성세대와 천박한 자본주의가 만들어 놓은 틀에 그대로 짜 맞춰 들어가, 친구들을 무시하고 비하하고 단순히 대학 서열 하나 만으로 그 사람의 모든 것을 판단해 버리는 괴물들이 있는 상황. 이들의 20년 후가 일본의 현재보다 한 치도 나아질 것 같지 않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확신마저 드니 깜깜하다.

    

 

“참으로 열렬히 ‘일본’을 응원했다. 나는 ‘어쩌면 일본의 패배에 분노해 폭도로 돌변할지도 몰라.’라고 속으로 은근히 기대해 봤으나, 그러한 일은 전혀 발생하지 않았다. ‘수고했어! 라는 목소리였다. 뭐라고, “수고했다”라고?”

“‘일본’이 졌다는 사실에 달리 속상해하는 일도 없었다. 오히려 한결 산뜻해진 얼굴로 인사를 나누는 사람들이 많았던 듯 싶다. 마치 ‘무언가를 해냈나.’라는” (p.154)

“2005년에 실시된 「세계 가치관 조사」에 따르면, ‘만약 전쟁이 일어나면, 국가를 위해 싸우겠는가?’라는 설문에 ‘그렇다.’라고 대답한 일본인의 비율은 15.1%였다. 일본은 조사 대상국인 스물 네 곳의 국가 중에서도 최저 수치를 보였다.” (p.186)

    

전 세계적으로 젊은이들을 걱정하고 염려하는 사람들은 많다. 정치인, 사회학자, 언론인 등등. 그들은 거의 공통적으로 이야기한다. 요즘 젊은 애들은 용기가 없다. 생각이 없다. 주관이 없다. 꿈이 없다. 희망이 없다.

신자유주의가 세계를 휩쓸고 각국은 빠르게 국수주의·보수주의화 되고 있다. 그래서 유럽의 젊은이들이 극우주의에 빠질 것을 염려하는 칼럼도 유럽 유수의 언론에서 읽은 적이 있다. 한국도 일베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는 실정이다. 일베의 전형이 되는 것이 일본의 넷우익인데, 일본은 극우에서 극좌까지 정치지형만으로는 한국보다 훨씬 민주적이고 다면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만큼 극우화될 위험이 많다는 뜻이다.

저자도 그 부분을 염려했는데, 책에 소개된 월드컵 기간 동안 일본의 젊은이들이 보여준 모습을 보면 어른들의 걱정쯤은 저 멀리 붙들어 매도 괜찮을 것 같다.

열렬히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을 응원한다. 다음날 출근을 하고 등교를 해야 하는 젊은이들이 새벽3시30분에 시작되는 축구경기를 위해 유니폼을 입고, 일장기를 들고 거리로 모여 든다. 떠들썩하고 왁자지껄하게 응원을 하고 나서 하는 이야기가 ‘수고했다. 수고했어.’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이 상대팀에 패해 월드컵 토너먼트에 진출하지 못하게 된 것 쯤은 별 거 아니라는 것이다. 흥분되고 고조된 열기 탓에 자칫 폭동이나 시위가 일어나지 않을까 걱정했던 저자의 염려를 무색케 만들었다. 마치 ‘한 판 시원하게 자~알 놀았다.’정도의 느낌이랄까. 넷우익인 재특회의 가입숫자가 늘어나고 있고 그들이 벌이는 재일 한국인과 타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시위와 테러가 늘어나고 있지만 염려할 수준은 아니라는 것이다.

    

 

“다른 참여자들도 ‘내 마음을 둘 곳으로 이러한 곳’을 찾고 있었다.” (p.226)

 

희망의 끄트머리도 찾을 수 없는 국가에서 나고 자란 절망의 젊은이들에게 넷우익, 극우, 백색테러 같은 것들은 ‘한 번 쯤은 가볼 만한 곳.’ 정도일 뿐이지. 사명감을 가지고 목숨을 걸고 하는 절박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소수의 젊은이들은 그것에 목숨을 걸고 있겠지만 다수의 경우는 아니라는 것이다.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이 월드컵 토너먼트에 진출하지 못한 것이 너무 속상하고 가슴 아파서 며칠을 밥도 안 먹고 끙끙 앓는 일본 젊은이도 있겠지만 다수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이것이 포인트다. 그저 ‘내 마음 둘 곳’ 정도를 찾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전쟁과 입대 같은 개념은 외계어다.

‘왜 내가 일본이라는 국가를 지켜야 돼? 내게는 당장 내일의 희망이 없는데? 전쟁에 참전해 승리한다고 해도 내 삶의 어떤 것이 더 나아질까?’

무서운 논리가 이미 내면화된 젊은이들의 ‘행복’은 그만큼 처참하다. 책에서 ‘내 삶은 행복해’라고 말한 젊은이나 설문조사에 참여한 젊은이의 생각을 폄하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들의 생각은 그들에게는 정답이다. 한국이라는 다른 국가에 살고 있는 30대 중반을 넘어선 아저씨의 생각에서는 처참한 ‘행복’이지만, 그들에게는 최선의 ‘행복’일 수 있는 것이다. 이건 인정해야 할 차이다.

    

 

“아무리 과거의 정책을 비판하더라도 현재 일본의 상황이 하루아침에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세대 간 격차’가 여러 사회 문제들의 본질이 아닐지라도, 일본의 미래가 절망적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다만 분명한 사실은, 이렇듯 절망적인 미래를 더 오랫동안 살아가야 하는 쪽이 젊은이 혹은 아이들이라는 점이다.” (p.289)

 

한국의 젊은이(나를 포함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한국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나? 일본보다 더 절망적일 수밖에 없는 한국에서 우리는 어떻게 ‘행복’을 찾아야 할까? 날씨가 조금 따뜻해져 8개월 된 딸아이를 데리고 산책을 나가려 해도 미세먼지 농도가 매번 ‘나쁨’이라고 표시되는 곳에서 어떻게 아이를 키워야 하나? 모르겠다. “‘희망’이 없으니 ‘행복’이라는 착각을 해버리자!?” 20년 후에나 답을 알게 될까? 내 딸아이가 대학에 들어가는 그때, 시원한 맥주 같이 마시며 딸아이에게 물어봐야겠다. “너 행복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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