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덕 평전 - 겨레에 바친 애국혼, 반민특위위원장
김삼웅 지음 / 책으로보는세상(책보세) / 2011년 3월
평점 :
품절


2014년 한국은 정상적인 사회가 아니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단지 정권과 정부에 비판적이라는 이유만으로 빨갱이 취급을 받고 나쁜 사람 혹은 집단으로 매도되는 경우는 유사이래 찾아볼 수 없다고 생각한다. 세월호 참사를 두고 각계에서 쏟아진 막말과 망발을 보며 사람들은 분개했지만 저들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 같다. 단 한명도 구조해 내지 못했고 침몰과 구조, 그 이후의 상황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정부와 정권에 대해서 이렇게도 관대한 사회는 정말 정상적인 사회가 아니다. 6월초에 있을 지방선거를 앞두고 발표되는 여론조사를 보면 더 참담하다. 집권여당 출신 후보자들이 대부분의 지역구에서 여론조사 1위를 기록하고 있다. 참사에 적절하게 대처하고 유가족과 피해자들에 대한 감동적인 대책이 마련되고 국민 전체가 안고 있는 슬픔과 회한을 적극적으로 위로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이런 결과가 나왔다는 것이 나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다. 현재 한국사회가 가진 온갖 문제와 갈등, 정치적인 한계와 언론의 비상식적인 행태는 비단 어제 오늘 일은 아니다. 그래도 정치적·경제적·사회적 민주화와 진보, 발전은 시간이 갈수록 더해져야 하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이놈의 나라에서는 점점 후퇴하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이 모든 것의 기원은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이하 반민특위)의 실패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본다. 광복 이후 미군정을 거치며 남한만의 국회가 만들어지고 반민특위가 설치되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반민특위는 헌법 기관이었음에도 6개월의 짧은 활동밖에 하지 못했다.

 

 

“반민특위의 좌절로 민족정기는 굴절되었으며, 친일반민족세력이 다시 득세하고 이승만 정권이 장기 독재체제로 가는 전기가 되었다.” (p.267)

 

반민특위는 일제 강점시기 나라의 광복과 민족의 해방의 편에 서지 않고 소극적이든 적극적이든 일제에 부역하고 협력하면서 반민족 행위를 한 자들을 찾아내 처벌하기 위해 만들어 졌다. 책에서 소개된 반민특위와 비슷한 국가기구는 여러 국가에서 설치되어 활동했다. 일본 제국주의의 압제를 받은 아시아의 여러 국가, 나치의 압제를 받은 유럽의 여러 국가들에서 이런 국가기구가 설치되어 많은 반민족행위자들을 찾아내 처벌 했다. 프랑스와 독일에서는 아직도 이런 자들을 찾아내기 위해 전 세계를 뒤지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한국의 반민특위는 실패했다. 제헌국회에서 반민특위에 대한 법안이 발의되고 통과되는 것에도 난관이 있었고 어렵게 만들어진 반민특위도 제대로 활동하지 못한 채 무너지고 말았다. 다른 것도 아닌 대통령과 당시 국회는 물론 정치·경제 각 분야에서 기득권을 형성하고 있던 반민족행위자들, 친일파들에 의해 무너졌다. 책에는 당시 반민특위에서 활동했던 인사의 인터뷰를 언급했는데, 친일 경찰로 구성된 당시 한국 경찰은 이승만과 기득권을 가진 친일세력을 등에 업고 백주대낮에 반민특위를 습격한다. 당시 반민특위 사무실에 있던 검찰총장의 권총을 빼앗는 것은 물론, 반민특위 위원들을 빨갱이로 둔갑해 깡그리 망가뜨렸다.

 

 

“반민법 제정에 불안과 공포를 느낀 친일세력은 풍부한 자금과 정보·조직을 이용해 반민법 제정을 반대하거나 이 법 제정에 앞장선 국회의원들을 공산당으로 몰아붙이는 등 방해공작을 시도하였다.” (p.231)

“김상덕은 이승만의 담화에 대해 강력히 반박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p.255)

 

당시 친일세력들은 반민법이 제정되어 반민특위가 활동하고 그들에게 체포되면 처벌받을 것

이 당연한 결과였다. 그들에게는 생사여탈의 여부가 반민특위의 손에 달려 있었다. 이유야 어찌되었건 반민족 행위를 한 자들은 처벌받아야 한다. 책에서도 여러 번 언급되지만 그래야 민족정기가 바로 서게 되고 역사를 바로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은 미군정과 이승만이 뒤에 있었다. 미군정에게도 이승만에게도 친일세력들은 가장 큰 도움이 되는 실제적 조력자였다. 무엇보다 이승만에게는 임시정부가 가진 정통성이 가장 두려운 정치적 라이벌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친일세력을 이용해 반민특위를 끊임없이 공격하고 와해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악질적인 일제부역자 노덕술이 반민특위에 의해 체포된 후 비상대책을 논의했을 정도로 제 정신이 아니었던 사람이다. 거듭되는 이승만의 방해와 협박에도 반민특위 위원장 김상덕은 굴하지 않았다. 돌이켜 보면 이것이 이승만이 더 무모해지도록 한 계기가 되었던 것 같기도 하다. 아무리 헌법기관의 수장이지만 대통령의 협박에도 굴하지 않은 사람이 김상덕이었다. 이승만이 담화를 발표하면 곧바로 그 담화를 반박하는 담화를 발표하고 거듭되는 방해에도 한 명이라도 더 반민족행위자들을 체포하기 위해 노력한 김상덕은 제가 대상 1순위 이었다.

 

해방된 조국, 그러나 분단된 조국에서 수십 년 동안 조국의 광복과 해방을 위해 목숨을 바친 독립운동가들과 압제당한 조국은 뒤로 한 채 압제자의 편에 서서 호의호식하며 민족을 반역한 친일세력들의 생각은 완전히 달랐다. 해방 후 미군정을 거치며 이들의 처신도 완전히 달랐다. 일제 강점시기 독립운동가들을 열심히 탄압하던 친일세력들에게 해방되었지만 분단된 조국의 상황은 오히려 호기였다.

 

 

“친일파들은 반민특위 요인들을 빨갱이라고 몰아쳤다. 자신들이 발행하는 신문을 통해 연일 국가안보를 해치는 빨갱이들을 처단하라고 주장했다. 심지어 특위 요인들을 암살하고자 기도했다. 암살 대상 1호는 김상덕 위원장이었다.” (p.9)

“이성근은 2회 공판을 끝으로 해를 넘겨 반민특위가 유야무야되면서 석방되었다... 김덕기는 재심청구를 냈다가 각하되고 사형이 확정됐지만 6.25직전에 감형으로 풀려났다.” (p.249)

 

빨갱이 프레임은 여기에서부터 출발한다. 해방된 조국에 들어온 미군들은 해방군이 아니라 점령군이었기 때문이다. 미국은 미 군정청이 서울에 진주했으니 임시정부는 개인 자격으로 들어올 것을 통보했다. 단지 한반도에서 가장 가까운 오키나와에 진주하고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미군정 사령관이 된 하지 중장은 일제 강점의 역사와 한반도 백성들의 민심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했다. 조국의 땅은 아니었지만 중국에서 임시정부를 구성하고 해방 후 조국으로 돌아와 정통성을 지닌 채 정부를 재구성하려 했던 독립운동가들의 노력과 피와 땀을 깡그리 무시한 것이었다. 그들에게는 당장 미군정을 도와 혼란스러운 상황을 마무리할 세력이 필요했다. 미군정은 독립운동가와 자생적으로 발생한 인민위원회 대신 이승만과 친일세력을 선택했다. 그래서 친일세력은 그대로 옷만 바꿔 입은 채 여전히 권력과 기득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해방 된 조국에 빨갱이가 득시글하니 빨갱이를 때려잡아야 한다!” 라는 외침 하나면 충분했다. 왜냐하면 조국으로 돌아온 독립운동가, 자생적으로 만들어진 인민위원회에 비해 친일세력은 조직·재정·배후가 막강했기 때문이다. 해방 후 치열했던 이념대립의 경험을 이용해 빨갱이 이데올로기를 만들어 냈다. 배후에 이승만이 있으니 거칠 것이 없었던 것이다. 공공연히 김상덕 위원장을 비롯한 반민특위 위원들에 대한 암살을 도모했다. 국회 내 존재하던 진보적 성향의 국회의원들은 ‘국회프락치사건’이라는 조작사건으로 쫓아내 버리고 반민특위는 친일경찰들에 의해 부숴버렸다. 당연히 반민특위에 의해 체포되어 조사받던 반민족행위자들은 모두 풀려났다. 반민족행위를 단죄하지 못한 것이다.

 

사실 이 영향은 수십 년이나 이어졌다. 나는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라 생각한다. “정부 수립 후 친일파는 자신들의 반민족행위를 반공 이데올로기로 둔갑시키고 이승만, 박정희로 이어지는 독재정권에 충성을 다하여 독재정권의 영속을 추구했으며, 분단체제의 고착화에 앞장섰다.” 총선 전 드러나는 후보자들의 약력과 그들 선대의 약력을 보면 친일파의 후손들이 d이렇게나 많나 싶다. 후손이 국회의원에 출마할 정도라면 해방 후 지금까지 기득권으로 잘 먹고 잘 살았다는 말인데, 그런 사람들이 단지 국회의원 후보자뿐이겠나. 지금 한국사회 곳곳에 친일세력은 잔존하고 있다. 지난 민주정부 10년 동안 친일인명사전 편찬 등 반민특위가 끝내지 못한 일을 조금이라도 이어가기 위해 노력했지만 제대로 하지 못했다. 국가의 지원을 받지 못한 채 미완성되었다. 선대의 친일행적이 밝혀졌다면 사죄하거나 최소한 부끄러워하는 척이라도 해야 하는데, 그런 사람은 없다. 그게 뭐 대수냐! 라는 태도로 일관한다. 그런데 더욱 기가 막히는 것은 그런 사람들을 또 뽑아준다. 선대가 아무리 친일행적이 있다손 치더라도 뽑아주는 것이다. 단 한 번도 역사정기를 바로 잡지 못하고 반민족 행위자들을 단죄하지 못한 역사를 산 국민들의 당연한 태도라고 보기에는 너무 슬픈 일이다. 아무리 도덕적으로 문제가 많고 뽑아준다고 해도 그 사람과 같은 부자가 될 수 없음에도 그 사람을 뽑아주는 국민들이다. 지난 대선과 총선, 이번 지방선거를 앞두고 국민들을 탓하지 말라는 일부 진보개혁 인사들의 언론 인터뷰나 sns 발언을 접하면서 나는 더 답답했다. 나는 국민 탓이라고 본다. 내가 살고 있는 대구·경북에서는 무조건 1번이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무슨 실수를 저지르고 무슨 막말과 망발을 일삼아도 무조건 1번이다.

역사에서 만약은 금기이지만, 만약 반민특위 활동이 제헌국회 내내 지속되고 정권이 바뀐 후에도 헌법기관으로 존속했다면 지금과 같았을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만약 반민족행위자들의 악행이 만천하게 밝혀지고 그것으로 인해 처벌 받고 하는 선례가 명확했다면 국민들의 의식과 수준은 달라졌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김상덕은 낮에는 목수일로 학비를 벌고, 밤이면 공부하면서 20대 초반의 청년기를 경신학교에서 보냈다.” (p.23)

“뒤편에 사는 김원봉 장군 댁도 우리 집과 마찬가지로 부인이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 주변에서 걱정들이 많았다.” (p.90)

 

평생을 독립운동에 매진한 김상덕 선생은 가난한 시골 출신이었다. 낮에는 학비를 벌고 밤에 공부하면서 독립운동의 싹을 틔웠다. 일본 유학 시절에는 3.1운동의 단초가 된 2.8독립선언의 주역이기도 했다. 독립운동가 김상덕 선생은 평생을 가난하게 살았다. 아내를 잃고 두 아이를 거둘 수 없어 고아원에 보내야 할 정도였다. 책에서 언급되는 선생의 아들 김정륙씨의 이야기 속에는 가난했던 어린 시절에 대한 기억이 많다. 독립운동을 하다 한 달에 한번 아이들을 찾아와 빨래를 해주는 아버지. 빨래 후 목을 축이려 술 한 잔을 사지만 맛 좋은 안주를 사지 못하고 가장 싼 마른두부를 샀던 가난했던 독립운동가 아버지의 모습. 중국에서 독립운동가들이 모여 살 때, 유명한 약산 김원봉 선생의 집도 우환이 많았다. 이들은 독립운동을 할 때에도 해방된 조국에서도, 이후 현재에 이르는 역사의 와중에서도 환영받지 못하고 알려지지도 않았다. 김원봉 선생과 김상덕 선생보다 월북했다는 이유가 아마 가장 클 것이다. 그러나 약산 김원봉 선생은 해방된 조국에서 친일경찰에 의해 고초와 수모를 겪은 후 원하지 않았지만 신변의 위협으로 월북했고, 김상덕 선생은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에 의해 두 아이가 보는 앞에서 납치당해 월북했다. 그런데 이들 독립운동가들은 북에서도 남에서도 환영받지 못했다. 김원봉, 김상덕 선생 모두 북에서 숙청당했기 때문이다. 분단 초기 김일성은 그의 정치적 입지를 다지기 위해 독립운동가들을 이용했다가 숙청했다. 남에서는 당연히 월북한 인사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노비문서와도 같은 연좌제가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진로를 죄 가로막았으니, 김정륙 역시 다 되었던 일자리도 나중에 ‘김상덕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취소당했다. 따라서 이 무렵 독립운동가 후손들은 이력서나 신원증명서에 애써 선대의 독립운동 사실을 숨긴 사계가 적지 않았다.” (p.309)

 

독립운동가의 후손이라는 사실이 ‘노비문서와도 같은 연좌제’가 되었다고 한다. 조국의 독립과 해방을 위해 수십 년을 힘쓰고 그로 인해 목숨을 잃은 독립운동가의 후손이라면 국가에서는 최고의 대우를 해줘야 마땅하다. 그런데 한국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못한 것이 아니라 안 한 것이다. 왜냐하면 국가의 주요한 자리 곳곳에 친일세력과 그들의 후손이 자리 잡고 있으니 될 리 만무하다. 하다못해 작은 일자리조차 갖지 못한 채 막노동을 전전했다는 김상덕 선생의 아들 김정륙씨의 이야기를 읽다보니 울컥했다. 먹고 살기 위해 자랑스러워야 할 선대의 독립운동 사실을 숨겨야만 했던 그들의 인생이 얼마나 고단하고 아팠을까. 나는 짐작조차 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김정륙씨는 아버지가 납북된 후 60년이 지나서야 북에 있는 아버지 묘소에 찾아가게 된다. 2006년의 일이었다. 생전에 좋아하시던 술을 잔에 가득 부어 올려 드렸다고 한다.

 

 

“‘존재’는 낯익지만 ‘실체’는 낯선 독립지사”

 

이 책의 첫머리에는 김상덕 선생을 ‘존재’는 낯익지만 ‘실체’는 낯선 독립지사라고 표현했다. 공감이 가는 표현이다. 월북했기 때문에 독립운동가 중에서도 알려지지 않았고 가장 중요한 민족사적 사명이었던 반민특위의 위원장이었지만 반민특위의 실패로 더욱 낯설게 되었다. 또 만약이라는 가정을 해 보는데, 반민특위가 성공하고 친일세력을 단죄했다면 김상덕 선생의 국회의원 재선은 당연했을 것이고 그의 공적으로 인해 최소한 대통령 후보는 되지 않았을까 싶다. 그렇다면 그의 후손들도 지금보다는 더 나은 형편으로 살아올 수 있었을 것인데…….

이 책 「김상덕 평전」을 읽으며 ‘이런 책을 얼마나 읽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처럼 근현대사에 관심이 많은 이들이 아니라면 찾아 읽을까 싶었다. 학계에서도, 언론에서도 이런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연구나 보도, 취재는 미진한 현실이다. 여전히 친일세력의 후손들이 국가의 기득권으로 형성되어 있고 이것은 앞으로도 영원할 것 같다. 다시 한 번 반민특위가 설치될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지난 민주정권에서 친일인명사전 하나 편찬하는 것도 난리를 치며 방해해 성공을 거둔 저들인데 2차 반민특위는…… 아마 이 나라가 멸망하기 전까지 절대로 만들어 질 수 없을 것이다.

 

 

 

“조국을 배신한 자는 그가 절대로 다시 해를 끼치기 불가능하도록 완전히 그리고 신속히 처리되어야 한다.” (p.220)

 

 

벨기에 정부가 공포한 <전시에 국가의 국가 안보에 반해 저지른 범죄로 인해 국적과 일정한 권리를 박탁하고 정지하는 사안에 관한 명령>의 한 대목이다.

신속히 처리한 국가와 정부의 오늘과 지금 우리나라, 대한민국의 오늘을 비교해 보니 참담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