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필 증언록 1~2 세트 - 전2권 - JP가 말하는 대한민국 현대사
김종필 지음, 중앙일보 김종필증언록팀 엮음 / 와이즈베리 / 2016년 3월
평점 :
품절


질문>

무력으로 정권을 빼앗는 일, 재배 계급 내부의 단순한 권력이동으로 이루어지며, 체제 변혁을 목적으로 하는 혁명과는 구별된다. 대부분 군대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이후에는 언론을 통제한다거나 반대파를 숙청하고 계엄령을 선포하기도 한다. 이것은 은밀하게 계획되며 기습적으로 감행된다.

답>

쿠데타

그런데 김종필은 이 질문에 대해서 "혁명"이라고 답했다.

명확한 오답이다.

이것은 혁명이 아니다. 피지배계급이 주체로 체제 변혁을 꾀하는 것, 즉 민중의 동의와 지지와 참여가 있어야 혁명이다. 그러므로 대한민국에서 1961년 5월 16일에 발생한 사건은 군사쿠데타가 답이다. 김종필이 계획하고(김종필 증언록에 따르면 5.16 군사쿠데타는 자신이 계획하고 박정희와 군사세력이 동조했다) 성사시킨 5.16에 대해 시종일관 '혁명'이라고 칭하는 <김종필 증언록>은 사실에서 많이 벗어난다. 즉, 이것은 김종필의 '증언'일 뿐이다.

1961년 5월 16일에 대한민국의 정치사에 등장해서 2004년 정계를 은퇴하기까지 43년 동안 자신이 겪은 대한민국 정치를 다룬 <김종필 증언록>은 일단 재미있게 읽힌다. 삼국지처럼, 혹은 정치 드라마처럼 흥미롭다. 그가 사생의 결단을 했다는 그 절박함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바는 없지만 6.25 전쟁을 치른지 10년도 안되는 상황, 어지럽던 나라에서 혼란스러운 풍조에 종지부를 찍었다고 하는 5.16 군사쿠데타를 일으키는 그 몇 달을 마치 영화처럼 그렸다. 하지만 곳곳에서 김종필이 역사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드러난다. 절박했다고 하지만 이유가 부족하고 4.19는 벌어진 일이 되어버린다.


1961년 5.14일 일요일. 나는 아내에게 군복을 준비해 달라고 했다. ...... 나는 그해 그 봄, 그렇듯 결연했다. 사생의 각오로 덤비지 않으면 안 될 절박함이 내 마음속 깊숙이 자리 잡았던 것이다. 중략 1960년 4.19가 벌어졌다.

당시 소장이던 박정희는 김종필의 증언에서 박 장군이 되기도 하고, 혁명공약 제1조의 '​반공을 국시의 제1의로 삼고'라는 문장은 박정희의 빨갱이 혐의를 불식시키기 위한 것이었다는 것은 아주 사소할 수도 있는 것이 시대의 흐름을 업고 더욱 커져서 온 국민을 옥죄는 사상이 되기도 함을 엿볼 수 있다. 비례대표를 만들었던 이유가 당시 쿠데타의 주요 세력이었던 이북 출신의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서였다는 증언은 솔직하고 재미있는 부분이었다.

한국 근현대사의 주요 현안에 김종필이 관여하지 않은 부분이 없어 보일 정도로 그는 현대 정치사의 곳곳에 등장해 흐름을 바꿔놓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가진 책임이 더욱 크다는 생각이 든다. 자화자찬과 5.16의 미화로 증언록의 대부분을 채우기는 했지만, 거꾸로 우리의 의식이 이런 정치가와 정부를 용인했다는 반성도 하게 된다.

모든 국민은 자기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진다.

프랑스의 정치가 토크빌(Alexis de Toqueville:1805~1859)의 말이 딱 맞는 말이다 싶다. 랑케가 말한 '원래 그러했던 그대로'라는 실증주의 역사철학의 진술에 매여 역사적 서술은 모두 사실에 근거한 것처럼 잘못 알고 있는데, 여러 사실들 중에서 선택하는 것도 그 사실을 해석하는 것도 모두 주관이 개입될 수밖에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설전 - 법정이 묻고 성철이 답하다
성철.법정 지음 / 책읽는섬 / 2016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는 '심정적 불교신자'다. 이런 단어가 성립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렸을 적 할머니를 따라 절에 간 기억만 가지고 있을 뿐 성인이 되기까지 종교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결혼을 하고 난 뒤 불교학생회 활동을 했다는 남편을 따라 절에 몇 번 따라가 잠도 자고 밥도 먹고(마치 잘 아는 친척 집에 놀러 간 것 마냥) 먹을 것도 잔뜩 챙겨서 온 적이 있다. 남편을 따라가서 만난 비구니 스님은 마치 친정 엄마처럼 따스하신 분이셨다. 스님과의 이야기도 그저 사는 이야기여서 불교의 교리를 딱히 배워 본 적도 없다. 하지만 이리저리 책을 읽다가 우연히 만난 종교 서적 중에서 법정 스님이 쓰신 글이 가장 마음에 남았고, 그래서 쉽게 쓴 <법구경, 십이지장경>을 읽어 본 적이 있다.  성철 스님의 경우 딱히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아서 그저 이름이나 겨우 알고 있는 정도다. 이번에 읽은 <설전>이 성철 스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다.


법정이 묻고 성철이 답하다는 부제를 단 <설전>은 성철 스님을 가장 가까이 모셨다는 원철 스님의 증언을 토대로 두 사람 사이의 일화와 대화를 기록한 것이다.

이 책 <설전>에도 나오지만 법정 스님은 성철 스님에게 쉽게 수긍하지 않고 꼬치꼬치 캐묻는다. 위대한 스승 앞에 무턱대고 고개를 끄덕이지 않는 날카로운 질문과 그런 질문에도 계속 답해가는 성철 스님의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법정 스님의 질문은 나와 같이 불교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물어보았음직한 질문부터 공부를 많이 한 이들이 다가갈 수 있는 고차원적인 질문까지 이어진다.


'왜 하필이면 불교를 택하셨느냐'라는 질문에 성철 스님은 답한다. "진리를 위해서"

성철 스님의 답을 구체적으로 들어보자.


나는 진리를 위해서 불교를 택한 것이지, 불교를 위해서 진리를 택한 것이 아닙니다. 내 생각이 모자란 건지 알 순 없지만 내가 아무리 생각하고 연구를 해 봐도 그 어느 진리보다 불교가 가장 뛰어난 것 같아요. 그래서 불교를 하고 있지요. 하지만 불교보다 더 나은 것이 있다 하면 그때는 미련이 없습니다. 인정사정없이 싹 벗어 버리지요. 그러니 언제든 진리를 위해서 산다는 이 근본 자세는 조금도 변동이 안 될 일입니다. 참으로 진리를 위해 살려면 세속적인 일체 명리는 다 버려야 합니다. 만약 그것이 앞서면 진리는 세속적인 영리를 추구하는 일종의 도구가 되어 버리니까요. p.51

​또 다른 질문 한 가지, "유교와 기독교와 불교의 차이점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은 명쾌하다. 역시 성철 스님의 답을 들어보면,

유교와 기독교와 불교의 차이점 유교는 문자에 의지해서 세운 것이고 기독교는 하느님의 계시에 의해서 성경에 의지해서 세웠고 불교는 깨달음, 스스로의 힘으로 자성하는데서 세워졌다. .......부처님께서 직접 법문을 하시고도 그 언어문자는 달 가리키는 손가락이다 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수행하는 스님들에 대한 내 생각이 조금은 달라졌다. 나는 솔직히 스님들이 세상을 버리고, 속세를 버리고 산에 들어갔다고 생각했다. 힘들고 어지러운 세상을 버린 '참 맘 편한 사람들'이란 생각이 항상 있었다. 그래서 심지어 스님에게 '스님도 속세에 한 번 살아보세요. 얼마나 힘든지."라고 말한 적도 있다. 성철 스님은 수행의 목적이 자신을 위하는 데 있지 않다고 말한다. 남을 위해서 수행을 하고 만나는 모든 중생이 본래 부처임을 깨닫고 우리가 사는 세상이 원래 극락세계임을 깨닫는 것이 바로 불교라고 말한다. 현실 세계에서 행복을 찾는 것을 포기하고 다른 세계에서 절대 행복을 찾는 것이 부조리함을 말하며, 스스로가 절대적인 존재이며, 자기뿐만 아니라 남도 그렇다는 것을 알고 서로를 이롭게 하는 것이 불교의 근본이라는 것이다. 다른 무엇보다 가슴에 남는 말은 밥을 '먹는' 사람이 되어야지 밥에 '먹히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말이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이 스스로를 죽이는 일, 자살이 되는 길이다.

우선 밥부터 먹고 봐야 하지요. 그러나 밥을 '먹는' 사람이 되어야지 밥에 '먹히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이 기술의 신봉자가 되고 물질의 노예가 되어 버리면 자살이 되어 버립니다.


참 이상한 일이다. 이런 책을 읽으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책을 읽는 것만으로 욕심이 약해지고 눈이 맑아지는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멀고도 가까운 - 읽기, 쓰기, 고독, 연대에 관하여
리베카 솔닛 지음, 김현우 옮김 / 반비 / 2016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꼭꼭 씹어가면서 읽고 싶은 책을 만났다. 평소에 먹을 수 없는 과자라서 나만 아는 곳에 숨겨두고 몰래 먹고 싶고, 조금씩 아껴가며 야금야금 먹고 싶은 과자처럼 그런 책이다. <멀고도 가까운>을 쓴 리베카 솔닛을 나는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라는 책의 서평을 통해서 알았다. 그 책을 읽은 것은 아니지만, 서평만으로도 무릎을 치며 좋아했다. 어쩌면 내 생각을 이렇게 시원하게 짚어주고 있는지 하며.
안타깝게도 그 책은 읽지 못했지만, 전미비평가 협회 상 최종 후보로 올랐다는 그녀의 최신작 <멀고도 가까운>이 그 아쉬움을 달래주었다.
이 책은 그녀가 알츠하이머에 걸린 어머니를 돌보는 때부터 시작해서 쓰게 된 '회고록'이라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단지 회고록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다양한 이야기를 품고 있어서 그저 '어떤 이야기'라고 말하고 싶다. 이 책의 시작은 알츠하이머에 걸린 어머니의 집 마당에 있는 살구나무에서 따 온 산더미 같은 살구에서부터 시작한다. 서로 간에 이해가 부족한 두 모녀의 이야기는 <프랑켄슈타인>, <나니아 연대기>, <눈의 여왕> 등의 책 이야기에서부터 가까이 지내던 사람들의 이야기, 쓰기에 대한 이야기, 저 멀리 아이슬란드에서 있었던 이야기 등 경계 없이 뻗어나간다.
마치 <천일야화>에서 셰에라자드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실타래처럼 줄줄 풀어져 나오는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이야기를 밤이 새도록 또 다른 밤이 이어지도록 듣고 싶었다. 작가인 리베카 솔닛은 부제인 '읽기, 쓰기, 고독, 연대에 대하여'처럼 읽기에서 쓰기까지, 고독에서 연대까지를 이야기한다. 그녀가 말하는 문장 하나하나가 마음을 울리지만 나는 '나병 이야기'에서 뻗어 나온 '연대'의 이야기가 가장 좋았다. 나병은 특정 박테리아 감염에서 생기는 병이다. 실제로 생각만큼 위험하지도 않고 치료도 되지만 치료가 끝난 후에도 환자들은 손가락과 발가락을 잃는다. 브랜드라는 학자는 그 이유가 '무감각'때문임을 밝혔다. 나병이 신경을 짓눌러 아무런 감각을 느낄 수 없게 만들어 고통 또한 느낄 수 없는 환자는 그 부위를 돌보지 않게 된다고 한다. 스스로가 손, 발을 베이고도, 화상을 입고도 고통을 느낄 수 없으니 결국에는 그 부위를 잃게 되는 것이다.
'느낄 수도 없는 것에 대해서는 돌보지도 않는다.'
작가는 이 이야기에서 사회적 연대까지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 제목 '멀고도 가까운'이라는 말처럼 물리적인 거리는 멀리 있지만, 감정이입을 통한 정신적인 거리를 좁히는 것이 연대다. 내전으로, 혹은 전쟁으로 고통받는 나라의 국민들, 식량과 물 부족으로 죽어가는 어린이들, 고국을 떠나 떠도는 난민들, 가난에 허덕이는 이웃들의 고통에 공감하는 것이 이 세상을 조금 더 따뜻하게, 그리고 살 만하게 만들 것이다.

고통이 몸의 경계를 정하는 것이라면 당신은 감정을 이입함으로써, 그들의 고통에 함께 아파함으로써, 어떤 사회 구성체의 일부가 되는 셈이다.
당신이 누구와 혹은 무엇과 스스로를 동일시하느냐에 따라 당신의 정체성이 구축된다.
정신적 자아의 한계는 더도 덜도 말고, 딱 사랑의 한계다. 그러니까 사랑은 확장된다는 이야기다. 사랑은 끊임없이 뭔가를 덧붙여 가고, 가장 궁극적인 사랑은 모든 경계를 지워버린다. p.157~158

"멀고도 가까운 곳에서"  그건 물리적인 거리와 정신적인 거리를 함께 가늠하는 방법이었다. p.160

감정이입을 한다는 것은 감각의 미로를 통해 들어온 정보를 맞아 주기 위해 손을 뻗는 것, 그것을 껴안고 그것과 섞이는 일이다. 즉 타인의 삶이 여행지라도 된다는 듯 그 속으로 들어가는 일이다. p.28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 심장을 향해 쏴라
마이클 길모어 지음, 이빈 옮김 / 박하 / 2016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집안에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살인자가 있다면 우리는 어떨까? 실제로 그런 경우에 처한 경우는 거의 없겠지만, 과연 우리는 어떤 기분이 들고, 어떤 선택을 할까?

<롤링 스톤>의 수석 편집장이며 뛰어난 음악 평론가인 마이클 길모어는 미국에서 유명한 게리 길모어라는 사형수의 막냇동생이다. 그의 형 게리 길모어는 이유 없이 두 명을 죽인 살인자로 사형제가 점차 사라지던 1977년 부활한 사형제도에 의해 살해된 첫 번째 사형수다. 마이클의 형, 게리에 대한 책이 이미 나와 있음에도 마이클은 형에 대한 책을 쓴다. 왜 썼을까? 그냥 전혀 상관없는 사람처럼 사는 게 더 좋지 않았을까? 아픈 상처를 오히려 더 아프게 하지는 않았을까? 마이클 길모어는 그 뿌리를 찾아간다. 그 당시 어렸기 때문에 보지 못하고 알지 못 했던 것들에 대한 자료를 충실히 모으고 자신의 형이 살인자가 된 그 근원을 찾는다.

나는 이 이야기 속에서 모든 것이 잘못되기 시작한 그 시점을 꼭 찾고 싶다. 우리 가족의 파멸, 특히 게리의 파멸이 잉태된 시점을. 어머니는 게리의 파멸이 우리가 솔트레이크 시에 살았던 그 짧은 기간에 시작됐다고 생각했고, 프랭크 형도 그 그간 동안에 게리에게 뭔가 중요한 변화가 있었다고 보고 있다. 나로서는 아버지의 매질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본다. 덧붙여 게리 형의 운명은 부모님이 그를 잉태한 순간에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는 것이 단순한 (그러나 더욱 놀라운) 진실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부모님이 아이를 잉태한 순간, 아니 부모님이 잉태되던 그 순간까지 집안의 역사를 파헤쳐 가는 마이클의 기록은 모르몬교의 이야기와 함께 얽히면서 흥미롭게 전개된다. 미신적이 요소가 다분히 존재했던 시절, 부모의 아동학대가 교육적 차원에서 아무렇지도 않았던 그 시절의 이야기는 마치 미국의 역사를 들여다보는 것 같다. 마이클이 알아낸 아버지는 알코올중독자에 사기와 도망과 많은 결혼과 이주로 생을 이어온 사기꾼이며, 어머니는 모르몬 교도의 제멋대로인 딸로 나이 많은 아버지를 만나 자식을 낳았지만, 자식들에게 파멸의 신화를 심어 준 인물이다.

읽는 내내 무엇이 게리를 살인자로 만들었을까가 아니라 이런 환경에서 살인자가 되지 않고 있었던 작가가 오히려 이상해 보였다. 가문의 중심에 자리 잡은 어두운 그림자, 괴물로 변해가는 형들. 그 형제들 중 게리는 살인을 저지르고 결국 사형대에 오르기를 강하게 주장해 스스로를 살해하는 지경에 이른다. 마이클은 형, 게리의 그런 행동을 '스스로 속죄라고 생각한 방식'이었다고 말한다. 게리가 원한 것은 '죽음이었으며, 그것은 그의 최종적인 구원의 시나리오이자, 법으로부터의 마지막 탈출구'였다고. 그런 형이지만 결국에는 사랑할 수밖에 없는 형제라는 운명, 그 운명에 대한 속죄가 바로 이 책인듯하다. 책 속에 다음의 두 문장이 가슴에 남았다.


'어제, 나는 게리 길모어와 관련된 전화를 한 통 받았습니다. 게리는 어떤 사람에게 이렇게 말했답니다. 어릴 적 8학년 때의 담임선생님이 있었는데, 자기는 그 선생님에게 도움의 손길을 청하고 싶었다고. 그런데 그 선생님이 자기 손을 잡아줄 만큼 손을 내밀어 주지 않았다고. 그 선생님이 바로 저입니다. 자, 선생님들, 우리가 이 학생에게 해줄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그 후론, 그 선생들은 그 아이를 위해서라면 온몸을 던졌습니다.

"내 말 꼭 기억해라, 마이크. 약속해, 훌륭한 사람이 되겠다고 형한테 약속해라. 그들이 널 때려도 넌 가만히 있겠다고 약속해." 그 겨울밤, 우리는 서로 얼굴을 마주하고 그렇게 앉아 있었다. 형이 두 손으로 내 얼굴을 감싸 쥔 채, 누가 날 때려도 달게 맞겠노라고 약속하라는 말을 할 때, 형의 핏발 선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문제는 저항력이다 - 무기력보다 더 강력한 인생 장벽
박경숙 지음 / 와이즈베리 / 2016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힘들게 읽었다. 책이 어려워서는 아니었다. 내가 감추고 있던 걸 콕콕 꼬집어 말해주는 얄미운 친구를 만나는 기분이었다. 분명 나한테 도움이 되는 이야기인데, 그런데 왜 나는 듣기가 싫었을까? 그래서 읽다가 덮어두다가를 반복했다. 아직 나는 나를 들여다볼 마음의 준비조차 되어 있지 않은 상태인 듯하다. 그런데 문제는 그다음에 또 찾아왔다. 리뷰를 써야 하는데 또 미루고 있었다. 사실 '내가 이런 상태야'라는 말을 도저히 하지 못하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을 글로 옮기는 데 시간이 걸렸다. 결국 내 맘속에 리뷰의 데드라인으로 정해두었던 오늘에 와서야 리뷰를 쓰고 있다.
저자는 왜 우리는 해야 할 일을 미루고 핑계를 대는 건지, 무엇이 기꺼이 당장, 적극적으로 하려는 마음의 시동을 꺼버리는 건지 살펴본다. 저자가 학교를 그만두고 나서 생긴 그 미루고 또 미루는 원인을 살펴보는 과정이 바로 이 책이 되었다. 저자는 그 원인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의 저항력에 그 원인이 있다고 말한다. 우리의 마음이 '저항'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하지 않는 이유를 만들고, 심리적 타협을 하고 해야 할 일이 하지 않아도 좋은 일이 된다.
앞선 저자의 책 <문제는 무기력이다>에서 말한 무기력과 <문제는 저항력이다>에서 다룬 저항력은 비슷하지만 다른 문제다. 저자는 그것을 니체의 낙타와 사자로 비유한다. 니체가 말한 낙타는 무기력에 빠져 있다. 낙타는 주인에 매인 몸이라 하고 싶지만 하지 못하는 상태다. 하지만 사자는 자유로운 직업에 종사하고 있어 모든 것이 가능한데도 '사냥하지 않는 사자'가 되는 것이다.
하지 않는 상태에서 벗어나기를 다루는 이 책은 전반부는 왜 이런 상태에 빠져있는지를 다룬 심리학적 고찰을 담고 있다. 그리고 후반부는 어떻게 하면 그 상태에서 벗어나 니체가 말한 자유로운 어린아이가 될 수 있는가 하는 실천적인 방법을 다루고 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아들 생각이 많이 났다. 역시 저자도 자신의 딸을 생각하며 글을 썼나 보다. 이심전심이다.

부모가 되어도 여전히 우리는 매우 부족하다. 부모라면 누구든 자신의 아이를 잘 키우고 싶어 할 것이다. 그럼에도 자신의 한계 때문에 딱 자기만큼의 아이를 만들어 낸다. 내 아이를 어떻게 도와야 할 것인가? 잘 양육하지 못해 미안한 마음을 담은 책. 이 책이 인생의 어느 날 저항에 막히고 한계에 떨며 울고 있을지 모를 내 딸에게 미리 주는 장문의 편지이자 정신적 유산일지도 모른다.
그 모든 것을 넘어갈 힘을 기르기 바란다. 당신 속의 아이를 당신이 안아 주는 새 부모가 되어 보는 것이다. 우리는 아이의 좋은 부모가 되는 것에는 큰 신경을 쓰지만, 자기 자신의 부모가 된다는 생각은 하지 못한다. 이제 스스로의 부모가 되어 자신을 치유해보자. 이를 위해 마음의 힘을 기르는 것이다. 마음의 힘이 생기면 자신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새아기를 잉태할 수 있다. 자신에게 좋은 부모가 되어 자기를 완전히 받아들일 수 있을 때, 니체가 말한 아모르파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저자의 바람대로 남을 돕고 저자를 돕는 책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이 저자의 딸까지 닿았으면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