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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아들 - 양장본
이문열 지음 / 민음사 / 2004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참 신을 찾아 헤매는 구도자의 방황. 결론은….
작가의 지향점을 찾지 못한다면 “다빈치 코드”보다 더 곤란한 책!
민요섭이란 사람이 무참히 살해되어 발견된다. 민요섭의 죽음을 조사 하던 남경사는 민요섭이 쓴 소설을 발견한다. 남경사는 그 소설이 죽은 민요섭의 삶과 유사함을 느끼게 된다. 남경사는 민요섭이 쓰다 만 소설에 공감이나 한 듯, 민요섭에게 빠져들어 간다. 남경사는 민요섭의 행적을 조사하면서 조동팔이 범인임을 알게 되었고, 그의 범행 수법과 자백을 듣게 된다. 이것이 『사람의 아들』의 큰 궤적이고, 이 안에 민요섭의 소설이 등장한다.
『사람의 아들』은 액자 소설이다. 아하스 페르츠의 이야기를 속 그림으로 한다. 아하스 페르츠는 인간들의 비참, 고통, 불행에 눈뜬다. 전지전능한 야훼가 창조한 인간세계는 죄악과 고통이 가득하다. 야훼는 고통과 죄악이 가득한 인간들의 세계에 너무나 무력하였고, 아하스 페르츠는 이 부분에 대해 회의하기 시작했다.
아하스 페르츠는, 만약 야훼가 죄악을 만들었다면 그 죄는 인간의 책임이 아니라 야훼의 것이다, 라고 생각한 것 같다. 인간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신이라면 인간에게 고통을 떠안겨주는 죄악을 만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대로 죄악이 야훼의 뜻이 아니라면 그의 전능은 부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 같다. 이러한 회의 속에서 그는 안락한 고향과 촉망받는 사제로서의 길을 포기하고 참된 지혜를 얻기 위해 방랑과 방황의 길에 오른다.
그는 이집트, 가나안, 페니키아, 바빌론, 인도 등을 돌며 진정한 신을 찾아 고통의 방황을 계속한다. 그러나 어느 곳에서도 진정한 신은 없었다. 단지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제도뿐이다. 그 제도는 약해빠진 자신들의 집단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아하스 페르츠는 10년 가까이 방황을 하였고, 그는 고향에 돌아와 비로소 그가 찾던 신을 광야에서 만나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도 저자는 진정한 신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아하스 페르츠가 그동안 찾았지만 만나지 못했던 신을, 이제는 고향 땅에 돌아 와서야 만나게 된 신에게서도 그는 답을 찾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이런 상황에서 이문열은 “쿠아란타리아서”에서 어느 정도 답을 제시하지만, 잘 모르겠다. 제시하려 했던 답이 답인지를.
어쨌든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을 읽으면서, 신선하면서도 진부한 양면을 발견한다.
진부한 점은 예수의 신성과 인성의 문제를 소설에서 차용한 것이다. 예수의 인성과 신성에 관한 논쟁은 교회사에서 끊임없이 이어져온 것이다. 아직도 핫 이슈이다. 얼마 전에 SBS에서 방영한 <신의 길 인간의 길>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예수의 인성과 신성은 진부한 논쟁거리지만, 논란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언제나 소설의 신선한 소재가 될 수 있다. 이문열은 이 논쟁을 파헤치기 위해 아하스 페르츠를 등장 시킨다. 그리고 아하스 페르츠의 진정한 신을 찾아 헤매는 구도의 삶을, 아하스 페르츠의 방황과 방랑의 모습들을 스케치 해낸다.
이를 위해 고대 근동 여러 나라들의 신화를 공부했다. 하지만 이 부분은 너무나 지루했다. 읽는 독자인 나에게도 공부였기 때문이다. 아하스 페르츠의 방황과 구도의 모습을 조금 더 생생하게 일반 대중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그림으로 스케치 할 수 없었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러나 이 작품의 신선한 부분은 예수의 인성과 신성의 문제를 이 사회 안으로 가지고 들어왔다는 것이다. 신학을 공부하는 것은 때로는 인간을 이해하기 위함이다. 아니다. 어떤 신학자는 신학을 인간학이라 하지 않았던가! 역시나 이문열을 위대한 작가라 말할 수 있는 것은 신학의 범주 안에 있을 법한 문제의식을 사회 안으로 가지고 나왔다는 것이다.
이문열은 그렇다면 『사람의 아들』을 통해 무슨 이야기를 하려 한 것일까? 이 사회 안으로 가지고 들어온 신의 문제, 종교의 문제들은 혼란스러워 보인다.
가감 없이 보여주는 제도권 교회의 모습은 비판이 필요하다. 정화가 필요하다. 새로움이 필요해 보이며, 거듭남을 외치는 교회의 진정한 거듭남이 필요함을 절실히 드러내 보인다. 이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작가와의 호흡에 동의하면, 그야말로 종교는 무익하다. 존재치 말아야 된다. 아하스 페르츠가 부정한 신처럼.
그렇다면 이문열은 그 누구나 할 수 있는 당연한 작업을 한 것인가? 종교가 무익하고 존재하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만약 그게 다일까? 독자들에게 그렇게 잃혀 진다면 “다빈치 코드”보다 더 나쁜 책이리라. 허구를 통해 “사실”을 오도하기 때문이다. “사실”을 진실이라 증명할 수 없는 영역의 것이라 전제한다면, 오도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의 진실도 서로 지켜주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이문열은 액자소설 속에서 그러니까 “쿠아란타리아서”에서 위험한 글쓰기를 한다. “위대한 지혜”의 등장이 그것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유일신 하나님이 “둘”이란 것이다. 위대한 지혜의 신이 침묵하는 동안 천지를 창조한 신인 야훼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위대한 지혜”는 하와에게 진실을 알려주기 위해 뱀을 보낸다, 라고 하는 설정은 기독교 역사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이단 중의 하나이다. 기독교 역사 상 얼마나 많은 이단이 존재했던가.
그러면 『사람의 아들』은 이단을 소재로 한 것인가. 여기까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와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단정해 버리기에는 그 무언가가 있지는 않을까?
그렇다면 그 무언가는 무엇일까? 나는 이 사회의 부조리성을 고발하는 작가의 뜻이 있으리라, 라는 추측만을 할 뿐이다. 결국 나는 『사람의 아들』 뒤에는 무언가 거대한 진실이 있겠지, 하는 생각에 어떠한 결론도 내리지 못한다.
하지만 이 책이 안고 있는 위험성을 “위대한 지혜”라든가, “쿠아란타리아서”, 천지를 창조한 “야훼”의 설정만으로도 발견할 수 있음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