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의 동행
미치 앨봄 지음, 이수경 옮김 / 살림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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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의 동행』

미치 앨봄이 보여주려 했던 것은 무엇일까?
그는 8년 동안 렙을 만났다. 렙이 숨을 거둘 때까지
렙은 유대인 지도자로서, 미치 앨봄이 어렸을 적에 다녔던 회당의 지도자였다.
렙은 앨봄에게 추도사를 부탁했고, 그렇게 해서 둘은 8년이란 시간을 보냈다.

추도사를 쓰는데 8년이 걸렸다?
8년 동안 가까운 동네에 있던 렙이 아니었음에도
그는 렙을 만나 삶을 나눴다. 그리고 추도사를 썼다.
그렇게까지 해서 추도사를 쓸 필요가 있었을까?
앨봄의 유년시절 다녔던 회당의 훌륭한 지도자!
그것이 추도사를 쓸 이유는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면 왜 일까?

그것은 아마도
미치 앨봄이 사람 중심의 관계 지향적 됨됨이가 있어 그러지 않았을까.
전작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에서 보여주었듯이.
시간, 합리적인 것과 효율성, 성취 지향적인 것보다
사람과 사람사이의 그 자연스러운 관계에 중심을 두었기 때문에
우연히 마주친, 다시금 만날 수 있게 된, 렙과 8년을 함께 했을 것이다.
글의 담백한 맛으로는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보다 더 담백하고
일상의 내용들이 잔잔히 기록되어 있다.

그러면서 사람을 알아간다는 것은
그 사람의 삶의 고비를, 마지막을 지켜보면서, 그 사람을 기억하면서
추도사를 써내려 갈수 있다는 것은
담담히 함께 길을 걸어가는 것임을 보여준다.
그 누군가를 알아간다는 것은
그 누군가와 마음이 닿는다는 것은
어떠한 노력이나 애씀이 아니라, 자료를 검토하고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담백하게, 담담하게, 꾸미는 것이 아닌, 각색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가지고, 있는 그대로 나를 향해 기다리는 사람을
자연스레 만나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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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학교 게리 토마스의 인생학교
게리 토마스 지음, 윤종석 옮김 / 도서출판CUP(씨유피)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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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남편)을 이해하는 핵심을 제공하며 항상 고쳐지지 않는 남자(남편)이 그럴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알게 한다. 시행착오의 원인 및 해결을 찾아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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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학교 게리 토마스의 인생학교
게리 토마스 지음, 윤종석 옮김 / 도서출판CUP(씨유피)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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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남편)을 이해하는 핵심을 제공하며  항상 고쳐지지 않는 남자(남편)이 그럴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알게 한다.
 시행착오의 원인 및 해결을 찾아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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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은 힘이 세다
이철환 지음 / 해냄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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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환 작가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너무나 기대가 되었다.

장편소설이 나온다고 했는데,

처음에는 6월 첫 주에 나온다고 했다가,

8월에서야 출간이 되었다.

출판사에서 여러 가지 이유로 8월에 출간하였다.




책을 잡자마자 순식간에 읽어 내려갔다.

이철환 작가의 삶이 녹아 있는 성장소설이기에

단숨에 읽어 갔다.

연탄길, 곰보빵, 행복한 고물상, 보물찾기, 못난이 만두이야기 등을 읽었다면

더욱 더 공감을 하며 읽어 갈 수 있다.




무엇보다 이번 소설은

프롤로그, 에필로그, 작가의 말을 제외하면

모두 28장의 소주제로 구성되어 있다.

각각의 28장은 독립된 글로 구성되어 있으면서도

하나의 소설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하나의 플롯을 생각하고

거기에 절정과 반전이 깃든 소설을 생각한다면

이 작품의 진가를 느끼지 못할 것이다.




이번 소설은 하나하나의 글들이, 소주제들이 모두 완벽한 이야기가 된다.

마치 이철환 작가의 이전 글에서 읽어 보았듯이.




형식이 어떠하든, 글을 풀어내는 방식이 어떠하든

이번 글에서 이철환 작가의 사람을 바라보는 눈빛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라라를 너무나도 좋아하는 주인공 유진이.

유진이는 너무나 가난했다.

유진이는 가난한 나머지 대학을 뒤로하고 일을 할 수밖에 없었고

라라는 대학에 진학한다.

그렇게 ‘유진’이는 ‘라라’보다 작았다.




유진이 주변에는 유진이와 같이 애처로워 보이는 사람들이 많다.

그의 아버지, 어머니, 무엇보다 옆집에 사는 시각 장애인 아저씨.

이 아저씨의 아내는 시각 장애인이었고, 뺑소니차에 치어 죽고 만다.

유진이는 시각 장애인 아저씨와 함께 슬픔을 나누고

삶을 나누고 문학을 나누고 인생을 나눈다.

유진이의 주변에는 늘 이런 사람들이었다.

유진이 주변에는 늘 소외된 자들, 연약한 자들,

그래서 눈물짓게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작가는 이들 작은 사람, 연약한 사람, 소외된 사람을 통해

우리의 실존을 바라보게 한다.

가난 때문에 라라보다 작게 보인

자기 처지로 인해

일을 할 수밖에 없었던

그래서 라라를 만나러 나갈 때에

손톱 밑에 기름때를 지우기 위해

손톱 밑이 아리도록 문질렀던 유진이.

유진이는 그런 아픔이 있었기에

공부를 할 수 있었고, 글을 쓸 수 있었다.

그리고 희망을 노래할 수 있었다.




시각 장애인 아저씨의 삶을 면면히 바라보고 지켜본 유진이는

아저씨의 삶을 지켜드리고 싶었다.

하지만 아저씨의 죽음.

지켜드리지 못한 죄송한 마음.

글을 몇 편씩 내면서 작가의 길을 걸어가는 동안

아저씨는 죽어갔고, 끝내 유진이는 아저씨에게 죄인이 되었다고 고백한다.

죄인된 고백을 통해 유진이는 계속해서 희망을 쓰게 되었다.




알코올 중독자로 끝내 폐쇄병동 안으로 들어간 아버지를 둔 유진.

미국으로 이민 간 라라의 연락과 라라를 만난 시간들.




모두 다 아픔이었다.

유진이는 중환자실에서 숨을 거두는 아버지에게

울면서 사랑의 고백을 한다.

“아버지,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아버지의 눈가에도 한 줄기 눈물이 흘렀다.




작가는 무엇을 말하려고 했을까?




바로 아픔이라고 하는 것은 더 이상 아픔이 아닐 수 있음을 말하려는 것은 아닐까?

눈물은 더 이상 눈물이 아님을 말하려는 것은 아닐까?




너무나 가난해서,

대학을 가지 못해서,

좋아하는 라라에게 당당히 다가가

좋아한다는 말도 못해서,

늦게 공부를 하고 대학에 가서,

그리고 어렵게 글을 써서 출판사를 찾아가면

번번이 퇴짜를 맞아서,

주변을 둘러보면 온통 슬픔이어서,

술만 마시면 망가져 가는 아버지 그리고 그의 죽음,

아버지를 보며 어찌 할 줄 모르는 어머니,

무엇보다 시각 장애인 아저씨의 죽음.




그렇게 유진이의 삶은 슬펐다.

기쁨이 멀리 있고,

언제나 돌아보면 아픔이었던 삶들은

아픔이 눈물이 되어

향방 없는 인생에 길이 되었고,

힘이 되었고, 겸손이 되었고, 이 악물고 살아가는 의지가 되었다.




그래서 눈물은 힘이 센 것이다.




열등감, 모욕감이라고 하는 것도

인간의 삶을 끌고 가는 발걸음이며

보잘 것 없는 것들이 보잘 것 없는 우리 인간들을

이끌고 간다는 가르침.

이 가르침을 통해 우리 불안전한 인간이, 유한한 인간이

너무나 목에 힘주지 않기를,

그리고 무엇보다 눈물을 흘리며 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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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아들 - 양장본
이문열 지음 / 민음사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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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신을 찾아 헤매는 구도자의 방황. 결론은….

작가의 지향점을 찾지 못한다면 “다빈치 코드”보다 더 곤란한 책!




민요섭이란 사람이 무참히 살해되어 발견된다. 민요섭의 죽음을 조사 하던 남경사는 민요섭이 쓴 소설을 발견한다. 남경사는 그 소설이 죽은 민요섭의 삶과 유사함을 느끼게 된다. 남경사는 민요섭이 쓰다 만 소설에 공감이나 한 듯, 민요섭에게 빠져들어 간다. 남경사는 민요섭의 행적을 조사하면서 조동팔이 범인임을 알게 되었고, 그의 범행 수법과 자백을 듣게 된다. 이것이 『사람의 아들』의 큰 궤적이고, 이 안에 민요섭의 소설이 등장한다.




   『사람의 아들』은 액자 소설이다. 아하스 페르츠의 이야기를 속 그림으로 한다. 아하스 페르츠는 인간들의 비참, 고통, 불행에 눈뜬다. 전지전능한 야훼가 창조한 인간세계는 죄악과 고통이 가득하다. 야훼는 고통과 죄악이 가득한 인간들의 세계에 너무나 무력하였고, 아하스 페르츠는 이 부분에 대해 회의하기 시작했다.




   아하스 페르츠는, 만약 야훼가 죄악을 만들었다면 그 죄는 인간의 책임이 아니라 야훼의 것이다, 라고 생각한 것 같다. 인간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신이라면 인간에게 고통을 떠안겨주는 죄악을 만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대로 죄악이 야훼의 뜻이 아니라면 그의 전능은 부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 같다. 이러한 회의 속에서 그는 안락한 고향과 촉망받는 사제로서의 길을 포기하고 참된 지혜를 얻기 위해 방랑과 방황의 길에 오른다.




   그는 이집트, 가나안, 페니키아, 바빌론, 인도 등을 돌며 진정한 신을 찾아 고통의 방황을 계속한다. 그러나 어느 곳에서도 진정한 신은 없었다. 단지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제도뿐이다. 그 제도는 약해빠진 자신들의 집단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아하스 페르츠는 10년 가까이 방황을 하였고, 그는 고향에 돌아와 비로소 그가 찾던 신을 광야에서 만나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도 저자는 진정한 신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아하스 페르츠가 그동안 찾았지만 만나지 못했던 신을, 이제는 고향 땅에 돌아 와서야 만나게 된 신에게서도 그는 답을 찾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이런 상황에서 이문열은 “쿠아란타리아서”에서 어느 정도 답을 제시하지만, 잘 모르겠다. 제시하려 했던 답이 답인지를.

   어쨌든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을 읽으면서, 신선하면서도 진부한 양면을 발견한다.

   

   진부한 점은 예수의 신성과 인성의 문제를 소설에서 차용한 것이다. 예수의 인성과 신성에 관한 논쟁은 교회사에서 끊임없이 이어져온 것이다. 아직도 핫 이슈이다. 얼마 전에 SBS에서 방영한 <신의 길 인간의 길>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예수의 인성과 신성은 진부한 논쟁거리지만, 논란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언제나 소설의 신선한 소재가 될 수 있다. 이문열은 이 논쟁을 파헤치기 위해 아하스 페르츠를 등장 시킨다. 그리고 아하스 페르츠의 진정한 신을 찾아 헤매는 구도의 삶을, 아하스 페르츠의 방황과 방랑의 모습들을 스케치 해낸다.




   이를 위해 고대 근동 여러 나라들의 신화를 공부했다. 하지만 이 부분은 너무나 지루했다. 읽는 독자인 나에게도 공부였기 때문이다. 아하스 페르츠의 방황과 구도의 모습을 조금 더 생생하게 일반 대중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그림으로 스케치 할 수 없었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러나 이 작품의 신선한 부분은 예수의 인성과 신성의 문제를 이 사회 안으로 가지고 들어왔다는 것이다. 신학을 공부하는 것은 때로는 인간을 이해하기 위함이다. 아니다. 어떤 신학자는 신학을 인간학이라 하지 않았던가! 역시나 이문열을 위대한 작가라 말할 수 있는 것은 신학의 범주 안에 있을 법한 문제의식을 사회 안으로 가지고 나왔다는 것이다.




   이문열은 그렇다면 『사람의 아들』을 통해 무슨 이야기를 하려 한 것일까? 이 사회 안으로 가지고 들어온 신의 문제, 종교의 문제들은 혼란스러워 보인다.

   가감 없이 보여주는 제도권 교회의 모습은 비판이 필요하다. 정화가 필요하다. 새로움이 필요해 보이며, 거듭남을 외치는 교회의 진정한 거듭남이 필요함을 절실히 드러내 보인다. 이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작가와의 호흡에 동의하면, 그야말로 종교는 무익하다. 존재치 말아야 된다. 아하스 페르츠가 부정한 신처럼.

   

   그렇다면 이문열은 그 누구나 할 수 있는 당연한 작업을 한 것인가? 종교가 무익하고 존재하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만약 그게 다일까? 독자들에게 그렇게 잃혀 진다면 “다빈치 코드”보다 더 나쁜 책이리라. 허구를 통해 “사실”을 오도하기 때문이다. “사실”을 진실이라 증명할 수 없는 영역의 것이라 전제한다면, 오도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의 진실도 서로 지켜주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이문열은 액자소설 속에서 그러니까 “쿠아란타리아서”에서 위험한 글쓰기를 한다. “위대한 지혜”의 등장이 그것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유일신 하나님이 “둘”이란 것이다. 위대한 지혜의 신이 침묵하는 동안 천지를 창조한 신인 야훼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위대한 지혜”는 하와에게 진실을 알려주기 위해 뱀을 보낸다, 라고 하는 설정은 기독교 역사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이단 중의 하나이다. 기독교 역사 상 얼마나 많은 이단이 존재했던가.




   그러면 『사람의 아들』은 이단을 소재로 한 것인가. 여기까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와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단정해 버리기에는 그 무언가가 있지는 않을까?




   그렇다면 그 무언가는 무엇일까? 나는 이 사회의 부조리성을 고발하는 작가의 뜻이 있으리라, 라는 추측만을 할 뿐이다. 결국 나는 『사람의 아들』 뒤에는 무언가 거대한 진실이 있겠지, 하는 생각에 어떠한 결론도 내리지 못한다.




   하지만 이 책이 안고 있는 위험성을 “위대한 지혜”라든가, “쿠아란타리아서”, 천지를 창조한 “야훼”의 설정만으로도 발견할 수 있음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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