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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오 크뢰거 / 트리스탄 /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
토마스 만 지음, 안삼환 외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평점 :
「마의 산」은 15년째 내 책장에 꽂혀있다. 책갈피는 상권의 3/4 지점에 머물러 있다. 처음에는 집중할 수 없는 지루함에 잠시 미뤄뒀던 걸로 기억된다. 다른 책들 몇 권 거치고 마음을 가다듬고 곧 다시 읽을 계획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상태로 20세기에서 21세기로 넘어오게 된 것이다. 한번 정도 다시 도전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아마 책갈피가 꽂혀있는 지점은 두 번째 도전의 결과일 것이다. 두 번의 실패는 마치 한때 한국축구에 대해 공한증에 걸렸던 중국을 연상케 할 만큼 토마스 만에 대한 공포까지는 아니더라도 쉽게 친해지지 못할 것 같은 부담감이 마음에 묵직하게 자리 잡게 된 것 같다. 서경식이 ‘소년의 눈물’에서 「마의 산」을 끝까지 읽지 못했음을 고백할 때, 글쟁이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그 말에 동감을 표하고 여기저기서 양심선언이 이어질 때 읽지 않은 책이 내 책장에 꽂혀있을 때의 그 찜찜함을 그들에게 어쭙잖게 묻어가며 합리화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지난 연말에 토마스만이 십여 년의 기간 동안 집필해서 완성한 「요셉과 그 형제들」6권 전권을 지인에게서 선물 받은 것이다. 아아, 운명은 토마스 만과의 화해를 원하고 있단 말인가...뭐 이런 느낌을 받았다. 「마의 산」에 재도전하기에 앞서 단편들은 좀 수월하지 않을까 싶어서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마의 산」을 두 번 읽다 만 사람이 아주 건방지게 쓰는 글일지는 몰라도 책에 수록된 토마스 만의 8편의 단편들을 읽고 나니 어렵게만 느꼈던 토마스 만의 작품세계는 의외로 쉽게 해석이 가능했다. ‘경계에 선 인간의 고뇌’ 이데올로기의 경계, 시민성과 예술성의 경계, 북국과 남국의 경계, 삶과 예술의 경계에 서서 양쪽 세상을 고뇌에 찬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토마스 만을 대부분의 작품들 속에서 만나게 된다. 경계인으로서의 고뇌가 가장 잘 표현되어 있는 작품이 바로 <토니오 크뢰거>다.
나는 두 세계 사이에 서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세계에도 안주할 수 없습니다. 그 결과 약간 견디기가 어렵지요. 당신들 예술가들은 저를 시민이라 부르고, 또 시민들은 나를 체포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됩니다. 이 둘 중 어느 쪽이 더 나의 마음에 쓰라린 모욕감을 주는지 모르겠습니다. (토니오 크뢰거)
<토니오 크뢰거>는 토마스 만의 완벽한 자전소설이다. 부와 권력을 겸비한 아버지와 이국적인 분위기의 어머니가 등장하고 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북독의 도시를 떠나 남독의 도시 뮌헨으로의 이주해서 예술가로 살아가는 토마스 만의 청년시절이 그대로 담겨있다. 그리고 그가 펼치고 싶은 예술에 대한, 예술가의 자세에 대한 견해도 조심스레 피력하고 있다.
<삶>은 정신과 예술의 영원한 대립 개념으로서 우리들과 같은 비정상적인 인간들에게는 피비린내 나는 위대성과 거친 아름다움의 환상으로 나타나거나 비정상적인 것으로서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정상적이고 단정하고 사랑스러운 것이야말로 우리들이 동경하는 나라이며, 그것이 바로 유혹적인 진부성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삶인 것입니다. 세련되고 상궤를 벗어난 것, 악마적인 것을 궁극적 목표로 삼고 그것에 깊이 열중하는 자는 아직 예술가라 할 수 없습니다. 악의 없고 단순하며 생동하는 것에 대한 동경을 모르는 자, 약간의 우정, 헌신, 친밀감, 그리고 인간적인 행복에 대한 동경을 모르는 자는 아직 예술가가 아닙니다. 평범성이 주는 온갖 열락을 향한 은밀하고 애타는 동경을 알아야 한단 말입니다. (토니오 크뢰거)
경계에 선 토마스 만은 자신의 모습이 투영된 대치 상황을 꾸준히 제시한다. 뤼벡의 시민성과 뮌헨의 예술성 그리고 그 안에서 악의 없고 마냥 행복한 사람들 한스, 잉에보르크와 고뇌하는 토니오 크뢰거(토니오 크뢰거), 불구의 몸으로 관중을 우롱하고 멋대로 휘두르고 지배하는 자 치폴라와 불편한 분위기를 감지하면서도 섣불리 행동으로 옮기길 꺼리는 좌중들(마리오와 마술사), ‘어두운 곳에 쭈그리고 앉아 있기’ ‘경계선 밖에 있기’ ‘철학적인 고독’등을 들어 빛의 인간과 대립 개념으로 스스로를 표현한 어릿광대(어릿광대), 글 뒤로 교묘하게 숨으며 야비해 보이기까지 하는 작가 슈피넬과 성공한 상인 클뢰터얀(트리스탄). 이렇게 확연히 드러나는 예를 제외하고도 토마스 만의 작품들 속에서 시민성과 예술성은 끊임없이 충돌한다.
자기변호, 자기혐오, 자기비판이 가득한 자전적 소설들을 만나기 전에 토마스 만의 생애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북독의 뤼벡시에서 부와 명예와 권력까지 완벽하게 갖춘 아버지와 독일인과 남국의 혼혈인 이국적인 분위기의 어머니 사이에서 특별한 혜택을 누리며 자란 유년시절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토마스 만의 작품 속에서 시민성의 대표로 등장하는 아버지 혹은 북독의 뤼벡과 그 반대편인 예술성의 대표로 등장하는 어머니 혹은 남독의 뮌헨의 대치상황은 뤼벡에서 태어나 뮌헨으로 이주한 토마스 만의 유소년 시절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일찍이 참여문학에 심취해서 민주주의적 투쟁에 앞장섰던 형 하인리히 만과 달리 정치적인 참여에 미온적이었고 오로지 창작에만 전념했던 토마스 만은 뒤늦게 나치 독일에 반감을 표하며 망명을 하게 되지만 이는 독일의 진보적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보수주의자로 몰리고 독일의 국수주의자들에게는 민족의 배반자로 몰리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이 또한 토마스 만의 고뇌의 한 자락이었을 것이라 짐작된다.
이탈리아 가공의 휴양지 토레를 배경으로 한 <마리오와 어릿광대>를 살펴보면 정치참여에 미온적이었던 토마스 만이 민주주의자로 옮아가는 과정을 담은 작품이라고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형인 하인리히 만과의 정치적인 입장 차이로 인한 일련의 사건들과 토마스만의 정치참여 과정을 미리 알고 이 작품을 읽는다면 채찍으로 좌중을 휘두르고 모멸감을 주며 지배하는 최면술사 치폴라를 향한 마리오의 총구는 다름 아닌 파시즘, 나치즘을 겨냥한 것임을 금방 알아차리게 된다.
토마스 만의 작품세계에 대한 해답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지만 결코 호락호락하게 읽힐 책은 아니다. 의식의 흐름을 쫓아가려면 고도의 집중을 필요로 한다. 그 흐름을 잠시라도 놓치면 작품 전체를 놓치게 된다. 단편이라 좀 수월하게 생각했지만 한편을 읽고 나면 녹초가 돼버려서 다음 작품은 다음날을 기약하게 만든다. 8편의 단편들은 중간 휴식 시간이라도 제공했지만 「마의 산」과 「요셉과 그 형제들」은 나를 어디까지 끌어다 놓을 지 걱정 반 기대 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