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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든파티 - 영국 창비세계문학 단편선
캐서린 맨스필드 외 지음, 김영희 엮고 옮김 / 창비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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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책이 세상에 첫 선을 보이는 때부터 유독 끌리는 책이 있다. 바로 ‘창비 세계문학’이 그랬다. 나라별 근현대 대표 작가들의 대표적 단편들을 엮었다는 차별화가 바로 이 세계문학 전집의 매력이었다. 단편에 치중했던 몇몇 작가들을 제외하고는 장편에 비해서 은근히 차별대접을 받아왔던 단편의 재발견이랄까. 기대감에 한껏 부풀어 있었다. 손 안에 받아보니 그 자태 또한 사랑스럽다. 조심스럽게 한번 읽었음에도 속살이 드러나서 오래두고 볼 수 있을까 염려스런 눈길로 쳐다보게 되는 모 출판사 문학전집과는 격이 다른 근래에 보기 드문 야무진 양장본이다. 제목과 수록된 작품들의 목록이 들어있는 광택의 하얀 글 박스와 감각적인 사진들이 어우러진 표지부터 마음을 달뜨게 만든다. 수록된 작품들은 작가별 시대순을 원칙으로 한다. 작품에 들어가기 앞서 작가와 작품에 대한 간략한 소개가 있고 작품 말미에는 작가의 다른 작품들을 소개하면서 충실한 번역본을 추천해놓은 글이 있다. 일일이 확인한 것도 아니고 번역에 대해서 평가할 만한 입장이 아니지만 창비본이 아닌 타 출판사의 책들도 거침없이 추천하는 역자의 다소 주관적일 수 있는 추천을 작품 선택할 때 고려할 것 같다.

영국 편을 가장 먼저 읽었다. 우선 아주 재미있고 쉽게 읽힌다. 장편을 대할 때 날 괴롭히던 제임스 조이스나 버지니아 울프마저도 아주 친절했다.^^ 책을 다 읽고 나서 이 책에 수록된 11편의 단편 중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었던 작품을 꼽아보려니까 거의 모든 작품들이 떠오를 정도로 수작들이 많다. 작가의 대표작이 아니더라도 작품세계를 대변할 만한 작품들을 실었음을 엿볼 수 있다. 그래도 몇 작품을 꼽아보면 찰스 디킨즈의 ‘신호수’, 토머스 하디의 ‘오그라든 팔’, 조지프 콘래드의 ‘진보의 전초기지’, D.H. 로런스의 ‘말장수의 딸’, 캐서린 맨스필드의 ‘가든파티’ 정도를 고를 수 있겠다.

찰스 디킨스 ‘신호수’

높은 돌벼랑 사이 골짜기에 위치한 외딴 초소를 지키는 신호수의 일상은 열차 사고에 대해 경고를 하는 유령의 출현에도 불구하고 단조롭고 무력하게만 느껴진다. 두 번의 열차 사고를 유령의 경고로 미리 알았던 신호수는 최근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유령 때문에 몹시 괴로운 상황이다. 사고가 일어날 날짜나 시각을 알려주면 좋으련만 그저 의미를 알 수 없는 메시지와 몸짓뿐이라 초조하고 두렵기만 할 뿐이다. 하지만 죽음은 숙명처럼 유령이 예고한 바로 그 자리에 바로 그 모습대로 소리치며 팔을 휘저으며 경고하는 열차 기관사의 모습으로 신호수를 덮치게 된다. 고독, 상실, 숙명을 이야기하는 신호수 앞에서 시대를 뛰어넘어 공감하지 못하는 현대인은 없을 듯하다.

토머스 하디 ‘오그라든 팔’

롯지 농장주의 아들을 낳은 여자 로다 브룩, 농장주의 젊고 예쁜 신부 거트루드 롯지, 롯지 농장주와 얽힌 두 여인네의 이야기다. 어린 신부는 신혼 초부터 원인을 알 수 없는 팔의 흉터로 팔이 오그라드는 병에 걸리게 된다. 로다는 아들의 아버지가 신부를 맞이한 지 몇 주 되지 않아 롯지 부인의 팔을 움켜잡는 생생한 꿈을 꾸고 나서 꿈속의 그 여자를 만나 바로 그 팔에 손가락 자국이 선명한 상처를 보고 놀라고 만다. 의술의 효과를 보지 못한 롯지는 결국 주술사를 통해 자신의 적의 저주 때문에 생긴 흉터라는 말을 듣게 되고 주술을 통해서 그 얼굴이 바로 로다임을 보게 된다. 이렇게 얽힌 농장주와 그의 사생아와 로다와 거트루드는 서서히 그 종말을 향한다. 주술사를 통해서 유일한 치료법은 교수형을 당한 자의 목을 그 팔로 만져서 피를 바꾸고 체질을 변화시키는 것뿐이라는 것을 알고 모험을 감행하는 거트루드는 ‘피 바꿈’이 일어난 바로 그 순간 그 장소에서 로다와 남편을 만나게 된다. 그 사형수가 바로 남편과 로다의 아들이었던 거다. 신분제도의 폐해가 가져온 총체적 불행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진보의 전초기지’는 제국주의 시대 인간성 상실의 문제를 심도 있게 파헤치는 조지프 콘래드(조셉 콘래드가 더 익숙하지만..^^)의 단편이다. 조지프 콘래드의 대표작 중 하나인 ‘암흑의 핵심’처럼 역시 벨기에령 콩고의 출장소가 그 배경이다. 출장소에 고립된 채 피폐와 파멸의 길로 접어드는 카이어츠와 칼리어를 통해서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D.H. 로런스의 ‘말장수의 딸’은 몰락한 말장수 집안의 딸 메이블과 의사 퍼거슨의 죽음 근처에서 발견한 사랑에 공감 했다기보다는 오연한 자세로 꿋꿋하게 버텨내던 상황의 그 절망적인 끝을 맞닥뜨렸을 때 역겨운 냄새 가득한 연못 속으로 걸어 들어가게 만드는 그 상실감을 이해했다고 할까.


캐서린 맨스필드의 ‘가든파티’는 가든파티를 위해 하늘마저도 맞춤 주문한 듯한 날 이웃마을의 마부가 사고로 죽게 되는 사건을 두고 파티를 주관한 부잣집 소녀의 심리상태를 따라가며 이야기가 진행된다. 엄마에게 선물 받은 너무나 매력적인 파티용 모자와 그와 대조되는 ‘굴뚝에서 나오는 연기조차도 가난에 찌들어 보이는’ 골목의 한 집에 무겁게 내려앉은 슬픔. 가든파티를 취소하고 싶어 하는 아이다운 순수와 함께 소녀가 어렴풋하게 느꼈을 계급의 격차와 삶과 죽음의 무게는 조문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오빠 앞에서 흐느껴 울며 “인생이란 게―” 하며 설명할 수 없지만 누구나 이해하는 말로 대신한다. 인생이란 게....참...    
 

  

작품과 작가의 생애가 무관하지 않은 것처럼 굳이 참여문학이 아니더라도 시대의 흐름이나 사회가 처한 특수한 상황들이 작품 속에 녹아들게 마련이다. 19세기 중엽부터 20세기 중엽까지의 작품들이 수록된 이 책을 통해서 그 시대의 영국사회를 만나고 작가들의 작품세계를 엿봤다. 창비 세계문학을 읽음으로 인해 제목만으로 익숙한 책과 재미를 느끼지 못했던 책들이 차곡차곡 담긴 목록이 늘어가고 있다. 차근차근 읽어보려 한다. 하지만 지금은 내 책장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창비 세계문학의 다른 세계들로 서둘러 날아가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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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오 크뢰거 / 트리스탄 /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
토마스 만 지음, 안삼환 외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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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의 산」은 15년째 내 책장에 꽂혀있다. 책갈피는 상권의 3/4 지점에 머물러 있다. 처음에는 집중할 수 없는 지루함에 잠시 미뤄뒀던 걸로 기억된다. 다른 책들 몇 권 거치고 마음을 가다듬고 곧 다시 읽을 계획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상태로 20세기에서 21세기로 넘어오게 된 것이다. 한번 정도 다시 도전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아마 책갈피가 꽂혀있는 지점은 두 번째 도전의 결과일 것이다. 두 번의 실패는 마치 한때 한국축구에 대해 공한증에 걸렸던 중국을 연상케 할 만큼 토마스 만에 대한 공포까지는 아니더라도 쉽게 친해지지 못할 것 같은 부담감이 마음에 묵직하게 자리 잡게 된 것 같다. 서경식이 ‘소년의 눈물’에서 「마의 산」을 끝까지 읽지 못했음을 고백할 때, 글쟁이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그 말에 동감을 표하고 여기저기서 양심선언이 이어질 때 읽지 않은 책이 내 책장에 꽂혀있을 때의 그 찜찜함을 그들에게 어쭙잖게 묻어가며 합리화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지난 연말에 토마스만이 십여 년의 기간 동안 집필해서 완성한 「요셉과 그 형제들」6권 전권을 지인에게서 선물 받은 것이다. 아아, 운명은 토마스 만과의 화해를 원하고 있단 말인가...뭐 이런 느낌을 받았다. 「마의 산」에 재도전하기에 앞서 단편들은 좀 수월하지 않을까 싶어서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마의 산」을 두 번 읽다 만 사람이 아주 건방지게 쓰는 글일지는 몰라도 책에 수록된 토마스 만의 8편의 단편들을 읽고 나니 어렵게만 느꼈던 토마스 만의 작품세계는 의외로 쉽게 해석이 가능했다. ‘경계에 선 인간의 고뇌’ 이데올로기의 경계, 시민성과 예술성의 경계, 북국과 남국의 경계, 삶과 예술의 경계에 서서 양쪽 세상을 고뇌에 찬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토마스 만을 대부분의 작품들 속에서 만나게 된다. 경계인으로서의 고뇌가 가장 잘 표현되어 있는 작품이 바로 <토니오 크뢰거>다.

나는 두 세계 사이에 서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세계에도 안주할 수 없습니다. 그 결과 약간 견디기가 어렵지요. 당신들 예술가들은 저를 시민이라 부르고, 또 시민들은 나를 체포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됩니다. 이 둘 중 어느 쪽이 더 나의 마음에 쓰라린 모욕감을 주는지 모르겠습니다. (토니오 크뢰거)       

 

<토니오 크뢰거>는 토마스 만의 완벽한 자전소설이다. 부와 권력을 겸비한 아버지와 이국적인 분위기의 어머니가 등장하고 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북독의 도시를 떠나 남독의 도시 뮌헨으로의 이주해서 예술가로 살아가는 토마스 만의 청년시절이 그대로 담겨있다. 그리고 그가 펼치고 싶은 예술에 대한, 예술가의 자세에 대한 견해도 조심스레 피력하고 있다.

<삶>은 정신과 예술의 영원한 대립 개념으로서 우리들과 같은 비정상적인 인간들에게는 피비린내 나는 위대성과 거친 아름다움의 환상으로 나타나거나 비정상적인 것으로서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정상적이고 단정하고 사랑스러운 것이야말로 우리들이 동경하는 나라이며, 그것이 바로 유혹적인 진부성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삶인 것입니다. 세련되고 상궤를 벗어난 것, 악마적인 것을 궁극적 목표로 삼고 그것에 깊이 열중하는 자는 아직 예술가라 할 수 없습니다. 악의 없고 단순하며 생동하는 것에 대한 동경을 모르는 자, 약간의 우정, 헌신, 친밀감, 그리고 인간적인 행복에 대한 동경을 모르는 자는 아직 예술가가 아닙니다. 평범성이 주는 온갖 열락을 향한 은밀하고 애타는 동경을 알아야 한단 말입니다. (토니오 크뢰거)  

경계에 선 토마스 만은 자신의 모습이 투영된 대치 상황을 꾸준히 제시한다. 뤼벡의 시민성과 뮌헨의 예술성 그리고 그 안에서 악의 없고 마냥 행복한 사람들 한스, 잉에보르크와 고뇌하는 토니오 크뢰거(토니오 크뢰거), 불구의 몸으로 관중을 우롱하고 멋대로 휘두르고 지배하는 자 치폴라와 불편한 분위기를 감지하면서도 섣불리 행동으로 옮기길 꺼리는 좌중들(마리오와 마술사), ‘어두운 곳에 쭈그리고 앉아 있기’ ‘경계선 밖에 있기’ ‘철학적인 고독’등을 들어 빛의 인간과 대립 개념으로 스스로를 표현한 어릿광대(어릿광대), 글 뒤로 교묘하게 숨으며 야비해 보이기까지 하는 작가 슈피넬과 성공한 상인 클뢰터얀(트리스탄). 이렇게 확연히 드러나는 예를 제외하고도 토마스 만의 작품들 속에서 시민성과 예술성은 끊임없이 충돌한다. 

자기변호, 자기혐오, 자기비판이 가득한 자전적 소설들을 만나기 전에 토마스 만의 생애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북독의 뤼벡시에서 부와 명예와 권력까지 완벽하게 갖춘 아버지와 독일인과 남국의 혼혈인 이국적인 분위기의 어머니 사이에서 특별한 혜택을 누리며 자란 유년시절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토마스 만의 작품 속에서 시민성의 대표로 등장하는 아버지 혹은 북독의 뤼벡과 그 반대편인 예술성의 대표로 등장하는 어머니 혹은 남독의 뮌헨의 대치상황은 뤼벡에서 태어나 뮌헨으로 이주한 토마스 만의 유소년 시절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일찍이 참여문학에 심취해서 민주주의적 투쟁에 앞장섰던 형 하인리히 만과 달리 정치적인 참여에 미온적이었고 오로지 창작에만 전념했던 토마스 만은 뒤늦게 나치 독일에 반감을 표하며 망명을 하게 되지만 이는 독일의 진보적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보수주의자로 몰리고 독일의 국수주의자들에게는 민족의 배반자로 몰리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이 또한 토마스 만의 고뇌의 한 자락이었을 것이라 짐작된다.

이탈리아 가공의 휴양지 토레를 배경으로 한 <마리오와 어릿광대>를 살펴보면 정치참여에 미온적이었던 토마스 만이 민주주의자로 옮아가는 과정을 담은 작품이라고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형인 하인리히 만과의 정치적인 입장 차이로 인한 일련의 사건들과 토마스만의 정치참여 과정을 미리 알고 이 작품을 읽는다면 채찍으로 좌중을 휘두르고 모멸감을 주며 지배하는 최면술사 치폴라를 향한 마리오의 총구는 다름 아닌 파시즘, 나치즘을 겨냥한 것임을 금방 알아차리게 된다.

토마스 만의 작품세계에 대한 해답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지만 결코 호락호락하게 읽힐 책은 아니다. 의식의 흐름을 쫓아가려면 고도의 집중을 필요로 한다. 그 흐름을 잠시라도 놓치면 작품 전체를 놓치게 된다. 단편이라 좀 수월하게 생각했지만 한편을 읽고 나면 녹초가 돼버려서 다음 작품은 다음날을 기약하게 만든다. 8편의 단편들은 중간 휴식 시간이라도 제공했지만 「마의 산」과 「요셉과 그 형제들」은 나를 어디까지 끌어다 놓을 지 걱정 반 기대 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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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담 보바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6
귀스타브 플로베르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0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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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이미 읽었거나 혹은 다이제스트를 통해서 줄거리를 알고 있음이 분명한 고전, 특히 이 책 ‘마담 보바리’는 내가 읽은 책이 분명하다. 25년쯤 전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러다 보니 알고 있는 내용이 나오기까지의 이 지루한 도입부를 견디기가 힘들 지경이었다. 플로베르에 의해 치밀하게 의도된 지루함이었다고 해도 말이다.

나는 소설을 즐겨읽는다. 각종 사건 사고들이 몰아치고 급작스런 반전과 놀라운 볼거리들을 풀어내는 소설보다는 내 의식의 흐름을 쫓아올 테면 쫓아와 보라고 글을 쓰는 오만한 작가들의 글에 매력을 느껴왔다. 어찌 보면 현대 소설의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플로베르에게 나는 빚이 있는 셈이다. 빚진 자 입장에서 무엇인들 못 견뎌내겠는가. 플로베르가 6개월이 넘는 기간 동안 일곱 번이나 다시 고쳐 썼다는 그 유명한 농사 공진회 장면의 그 진절머리 나는 장황한 연설과 퇴비 상, 숫염소 상, 깻묵 활용상 등등의 지루한 시상 장면을 그런 심정이 아니고서는 어찌 견뎌내겠는가. 다시 책 이야기로 돌아가서...

무미건조 하다못해 시시하기까지 한 소년 샤를르 보바리의 등장부터 시작된 이야기가 샤를르의 부모님의 일대기를 훑더니 의사면허 시험을 거쳐 돈 많은 과부와의 결혼으로 맹맹하게 진행된다. 결국 주인공으로 전면에 나서게 될 엠마와의 첫 만남의 장소인 베르트 농가가 등장하지만 내 조바심과는 별개로 농가의 주변과 농가 살림살이에 대한 지리한 묘사만 늘어놓는다. 그러다 갑작스런 부인의 죽음과 그와 맞먹게 루오 영감의 덧문 신호와 함께 갑작스레 샤를르와 엠마의 결혼이 결정되면서 드디어 주인공 엠마가 전면에 나서며 그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지만 엠마의 과거로 돌아가 연애소설을 즐겨읽던 수도원생활을 이야기하며 그 지루함을 조금 더 연장한다.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의 자신과 다르게 상상하는’ ‘보바리즘’이란 말로 대변되는 엠마를 위해서는 꼭 짚고 넘어가야 하는 부분이니 또 참아주기로 한다.  

농부의 딸로 태어났지만 적당한 교육을 받았고 연애소설이지만 책도 좀 읽었으니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인근 농부의 아내로 만족할 수 없는 엠마였다. 하지만 탈출구로 생각했던 샤를르와의 결혼은 다만 장소와 사람만 바뀌었을 뿐 특별할 것 없는 지루한 일상의 연속이었다. 결혼생활에 대한 설레임은 며칠간의 실내장식과 커튼 장식을 바꾸는 들뜬 분주함으로 서둘러 식어버린다. 단 한 번의 찬란한 날, 보비에사르 저택에서의 무도회가 있었지만 상류사회 무도회의 화려함은 상대적으로 시골의사 부인의 비참한 삶을 부각시켰고 그로 인해 엠마는 마음의 병이 깊어진다. 그녀가 동경하던 실체를 직접 눈으로 확인한 순간 그 잡을 수 없는 것들을 갈망하는 마음이 몇 곱절 더 그녀를 괴롭혔으니 말이다. 그렇게 병들어가는 엠마를 보다 못한 샤를르는 그녀에게 다른 환경을 만들어 주기 위해 이제 자리 잡기 시작한 토트를 떠나 드디어 모든 파란만장한 사건의 중심에 있는 용빌로 이사하게 된다.

작품의 1/3쯤을 차지하는 도입부는 마치 엠마의 권태로운 일상처럼 지루하게 계속되다가 위에서 언급한 농사 공진회 장면으로 그 정점을 찍고 드디어 육체적 욕망에 눈을 뜨고 과감하게 환상을 실행에 옮기는 엠마를 만나게 된다. 용빌의 젊은 청년 레옹과의 교류에서 지켜냈던 얄팍한 망설임과 조심스러움은 바람둥이 로돌프를 만나면서 걷잡을 수없이 무너져 버리게 된다. 엠마의 욕망은 터진 봇물처럼 걷잡을 수 없다. 샤를르의 진찰실, 자신의 집 정원 으슥한 곳에서 사랑을 나누는 대담함을 보여준다. 새벽마다 침대에서 빠져나와 애인에게로 달려가는 엠마는 로돌프만이 진정한 사랑임을 의심치 않았고 드디어 사랑의 도피를 감행하려 했다. 하지만 로돌프가 누구던가. 여자를 만나는 순간부터 떼어낼 궁리를 하는 작자가 아니던가. 사랑이라 믿었던 로돌프에게 배신당한 엠마는 몸져눕게 되고 엠마의 사치로 인한 빚과 밀린 약값으로 돈이 불러올 또 다른 파탄을 예고하면서 엠마는 또 다른 사랑에게 온몸을 맡기게 된다. 오페라를 보기위해 들른 루앙에서 바로 레옹과 재회하게 된 것이다.

로돌프로 인해 마음의 상처를 입은 엠마, 그녀는 이번에도 레옹을 밀어내려 시도하지만 그녀의 저항은 늘 너무 미약했다. 플로베르에게 풍기문란의 죄를 물어 법정에까지 서게 한 바로 그 장면, 레옹을 거절하기 위해 만난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출발해서 달리는 마차에서의 정사를 시작으로 엠마는 결국 몰락을 향해 질주하게 된다. 이제부터 그녀의 일상은 모두 거짓말과 사치와 감당할 수없는 채무로 인한 빚 독촉뿐이다. 결국 그녀에게 마지막 일격을 가한 것은 애인들을 전전하며 무절제한 소비로 인한 빚이었지만 자신의 참모습을 돌볼 줄 모르고 환상만을 쫓으려 했던 욕망 때문이었다.  

배신마저도 짜릿한 맛이 나고 슬픔마저도 빛나는 연애소설 속의 격정적인 사랑만이 사랑이 아님을 진작에 깨달았다면, 그래서 성실하고 자신을 사랑하는 남편과 딸에게 마음을 주려는 노력을 조금만 기울였다면, 그녀의 사랑스러움과 예술적 감수성을 닿을 수 없는 곳에 저당 잡히지 말고 현실 속에서 나누려 했다면 다른 모습으로 구현될 수도 있었을 그녀의 인생... 그녀의 어리석음이 가엾기까지 하다.

이 책에는 다양한 인간의 모습들을 보여준다. 현실과의 타협에는 재빠르고 계산적이고 결국 파멸에 이르는 보바르 부부와 대조적으로 레지옹 도뇌르 훈장까지 거머쥐며 이야기의 마지막을 장식하게 되는 약제사 오메, 달콤한 말과 술수로 엠마를 꾀는 고리대금업자 뢰르, 그리고 잠깐의 등장이지만 엠마의 모습과 겹쳐 강한 인상을 남긴 농사 공진회의 노파에 집중해본다. 한 농장에서 54년 근속 표창을 받게 된 이 노파, 농부의 딸로 태어난 엠마에게서 예쁘장한 얼굴과 터무니없는 공상이 쏙 빠졌더라면 어쩌면 이런 모습으로 늙어가지 않았을까 싶은 바로 그 모습이다. 플로베르는 용빌을 지나는 바람마저 적절한 시간에 끌어다 불게하고 들판의 꽃마저도 원하는 품종으로 피게 했다고 느낄 정도로 치밀한 글쓰기를 보여주고 있다. 이 노파의 등장도 그런 치밀한 장치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 

플로베르는 친구인 부이예의 권고를 받고 ‘마담 보바리’를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플로베르의 치열한 고통으로 빚어진 ‘마담 보바리’ 덕분에 감사해야 할 또 한 명의 엠마...당시 사회적으로 이슈가 됐던 ‘들로네 사건’으로 사치와 방탕하고 문란한 생활을 하다 자살로 생을 마감한 사회면에 등장한 실화 속 여인네가 ‘마담 보바리’를 통해서 이렇게 오래도록 살아남을 수 있고 단순한 지탄의 대상에서 동정과 연민까지 보태게 된 것이다.       

세상에는 많은 엠마들이 넘친다. 엠마 보바리처럼 극단적으로 타락의 일로를 걷지 않더라도 누구나의 마음속에는 내가 현재 발 딛고 있는 현실보다는 좀 더 나은 삶을 꿈꾸는 엠마가 존재하지 않을까. 엠마 보바리는 탐욕에 굴복당한 전형을 보여주고 있지만 부디 현실의 엠마들은 꿋꿋하게 이상을 쫓아 꿈에 가까이 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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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젤과 크레테 - 힐데군스트 폰 미텐메츠가 쓴 차모니아의 동화
발터 뫼르스 지음, 전은경 옮김 / 들녘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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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 뫼르스를, 차모니아를 만나는 일은 늘 설렌다. <꿈꾸는 책들의 도시>로 처음 만났을 때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게 사방에서 나를 향해 날아오던 강펀치에 나의 보잘 것 없는 하나 뿐인 뇌(나흐티갈러 박사처럼 뇌가 일곱개라면..)와 약한 심장의 헐떡임에도 링을 향해 수건을 던져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버텨내서 얻게 된 발터 뫼르스의 세계 ‘차모니아’. 기발한 상상력으로 창조한 이 세계에 대한 경탄으로 시작해서 한 작품 한 작품 읽다보니 나에게 차모니아는 지구상 어딘가에 존재하는 대륙처럼 다가온다. 어쩌면 버뮤다 삼각지대에 존재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보기도 한다.

발터 뫼르스의 팬이라면 기본 상식으로 통하겠지만(그래서 나의 잘난 척에 콧방귀로 응수하겠지만) 초보자를 위한 안내를 간략하게 하자면 <푸른 곰 선장의 13 1/2의 삶>, <엔젤과 크레테>, <루모와 어둠 속의 기적>, <꿈꾸는 책들의 도시>를 지칭해서 발터 뫼르스의 ‘차모니아 4부작’ 이라 일컫는다. 위의 작품들은 정교하게 얽혀있다.(하지만 따로 읽는다고 문제될 것은 전혀 없다.) 네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경력과 나이를 유추해서 연대별로 줄 세우기도 해보고, 전 편에 혹은 중복해서 등장하는 인물 찾는 재미라든가(상대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는 아이데트 종족에 속하는 나흐티갈러 박사는 의심의 여지없이 전편에 등장한다. 이 책 ‘엔젤과 크레테’에서는 각주의 기본이 된 백과사전의 저자로 등장한다.) 읽을수록 친근해지는 차모니아의 종족들과 동,식물들에 관한 이야기만으로도 책 한권이 뚝딱 완성될 것 같다.(조앤 롤링이 심심풀이로 엮은 ‘신비한 동물 사전’과도 같은...) 이런 재미들은 혼자 즐기기에 참으로 아쉽다. 발터 뫼르스를 좋아하는 사람과 수다판을 벌이면 아마도 차모니아 원시수학으로 표현하자면 ‘이중 이중 이중 4’ 시간도 부족할 것이다. 언젠가 그런 행복한 수다의 시간도 기대해 본다.

역시 우려했던 대로 발터 뫼르스의 작품에 대한 리뷰가 내게서 나오기는 틀렸다. 그의 눈부신 상상력에 찬사를 보내는데 절반이 넘게 할애했으니 나머지는 책 이야기를 해 보자. <엔젤과 크레테>..제목에서 노골적으로 풍기는 분위기는 그림형제의 동화 ‘헨젤과 그레텔’의 패러디다. 금지된 숲에서 길을 잃은 페른하헨 난쟁이 오누이의 이야기를 전면에 내세웠지만 사실은 <꿈꾸는 책들의 도시>에서 아직은 풋내기 작가에 불과했지만 이미 오래 전에 대가의 반열에 오른 힐데군스트 폰 미텐메츠의 이야기가 주류가 아닌가 싶다. ‘미텐메츠식 여담’이라는 새로운 서술형식을 빌어서 이야기 중간에 불쑥 끼어들기도 하고, 책 내용과는 무관한 신변잡기를 늘어놓는다거나 차모니아의 정치나 교육현실에 대해 신랄하게 꼬집기도 하고, 평생의 숙적이었던 평론가 라프탄티델 라투다(라투다와 미텐메츠의 인연의 시작은 ‘꿈꾸는 책들의 도시’를 참조하기 바란다.)에 대한 인신공격을 퍼붓기도 하며 결론을 열어둔 상태에서 독자들과 흥정을 벌이기도 한다.(이야기 중간에 마음대로 끼어들 수 있는 ‘미텐메츠식 여담’이란 서술방식은 발터 뫼르스를 비롯해서 작가들이라면 꽤 관심을 보일 것 같다.) ‘엔젤과 크레테’의 이야기 끝에 자리 잡은 저자 소개란에도 떡하니 ‘힐데군스트 폰 미텐메츠의 반생 전기’가 차지하고 있다. 발터 뫼르스의 역할은 차모니아어를 번역하고 삽화를 그린 정도다.^^

천재작가 호문콜로스를 부흐하임 지하세계의 괴물로 만들어버린 하르펜슈톡과 스마이크(꿈꾸는 책들의 도시), 잔인함의 끝을 보여주는 구리용병의 대장 ‘짹깍짹깍 장군’(루모와 어둠 속의 기적)에 비하면 이 책에 등장하는 ‘숲거미 마녀’나 ‘이파리 늑대’는 발터 뫼르스의 악당들에 내성이 생긴 독자에게는 정말 차모니아 동화 수준이다. 발터 뫼르스의 다른 작품들을 이미 읽은 독자라면 이 책은 다소 편안하게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을 발터 뫼르스의 첫 작품으로 만난 독자라면 진정한 그의 대표작들을 만나보길 추천한다. 개인적으로는 <꿈꾸는 책들의 도시>와 <루모와 어둠속의 기적>을 슬쩍 밀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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