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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든파티 - 영국 ㅣ 창비세계문학 단편선
캐서린 맨스필드 외 지음, 김영희 엮고 옮김 / 창비 / 2010년 1월
평점 :
새 책이 세상에 첫 선을 보이는 때부터 유독 끌리는 책이 있다. 바로 ‘창비 세계문학’이 그랬다. 나라별 근현대 대표 작가들의 대표적 단편들을 엮었다는 차별화가 바로 이 세계문학 전집의 매력이었다. 단편에 치중했던 몇몇 작가들을 제외하고는 장편에 비해서 은근히 차별대접을 받아왔던 단편의 재발견이랄까. 기대감에 한껏 부풀어 있었다. 손 안에 받아보니 그 자태 또한 사랑스럽다. 조심스럽게 한번 읽었음에도 속살이 드러나서 오래두고 볼 수 있을까 염려스런 눈길로 쳐다보게 되는 모 출판사 문학전집과는 격이 다른 근래에 보기 드문 야무진 양장본이다. 제목과 수록된 작품들의 목록이 들어있는 광택의 하얀 글 박스와 감각적인 사진들이 어우러진 표지부터 마음을 달뜨게 만든다. 수록된 작품들은 작가별 시대순을 원칙으로 한다. 작품에 들어가기 앞서 작가와 작품에 대한 간략한 소개가 있고 작품 말미에는 작가의 다른 작품들을 소개하면서 충실한 번역본을 추천해놓은 글이 있다. 일일이 확인한 것도 아니고 번역에 대해서 평가할 만한 입장이 아니지만 창비본이 아닌 타 출판사의 책들도 거침없이 추천하는 역자의 다소 주관적일 수 있는 추천을 작품 선택할 때 고려할 것 같다.
영국 편을 가장 먼저 읽었다. 우선 아주 재미있고 쉽게 읽힌다. 장편을 대할 때 날 괴롭히던 제임스 조이스나 버지니아 울프마저도 아주 친절했다.^^ 책을 다 읽고 나서 이 책에 수록된 11편의 단편 중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었던 작품을 꼽아보려니까 거의 모든 작품들이 떠오를 정도로 수작들이 많다. 작가의 대표작이 아니더라도 작품세계를 대변할 만한 작품들을 실었음을 엿볼 수 있다. 그래도 몇 작품을 꼽아보면 찰스 디킨즈의 ‘신호수’, 토머스 하디의 ‘오그라든 팔’, 조지프 콘래드의 ‘진보의 전초기지’, D.H. 로런스의 ‘말장수의 딸’, 캐서린 맨스필드의 ‘가든파티’ 정도를 고를 수 있겠다.
찰스 디킨스 ‘신호수’
높은 돌벼랑 사이 골짜기에 위치한 외딴 초소를 지키는 신호수의 일상은 열차 사고에 대해 경고를 하는 유령의 출현에도 불구하고 단조롭고 무력하게만 느껴진다. 두 번의 열차 사고를 유령의 경고로 미리 알았던 신호수는 최근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유령 때문에 몹시 괴로운 상황이다. 사고가 일어날 날짜나 시각을 알려주면 좋으련만 그저 의미를 알 수 없는 메시지와 몸짓뿐이라 초조하고 두렵기만 할 뿐이다. 하지만 죽음은 숙명처럼 유령이 예고한 바로 그 자리에 바로 그 모습대로 소리치며 팔을 휘저으며 경고하는 열차 기관사의 모습으로 신호수를 덮치게 된다. 고독, 상실, 숙명을 이야기하는 신호수 앞에서 시대를 뛰어넘어 공감하지 못하는 현대인은 없을 듯하다.
토머스 하디 ‘오그라든 팔’
롯지 농장주의 아들을 낳은 여자 로다 브룩, 농장주의 젊고 예쁜 신부 거트루드 롯지, 롯지 농장주와 얽힌 두 여인네의 이야기다. 어린 신부는 신혼 초부터 원인을 알 수 없는 팔의 흉터로 팔이 오그라드는 병에 걸리게 된다. 로다는 아들의 아버지가 신부를 맞이한 지 몇 주 되지 않아 롯지 부인의 팔을 움켜잡는 생생한 꿈을 꾸고 나서 꿈속의 그 여자를 만나 바로 그 팔에 손가락 자국이 선명한 상처를 보고 놀라고 만다. 의술의 효과를 보지 못한 롯지는 결국 주술사를 통해 자신의 적의 저주 때문에 생긴 흉터라는 말을 듣게 되고 주술을 통해서 그 얼굴이 바로 로다임을 보게 된다. 이렇게 얽힌 농장주와 그의 사생아와 로다와 거트루드는 서서히 그 종말을 향한다. 주술사를 통해서 유일한 치료법은 교수형을 당한 자의 목을 그 팔로 만져서 피를 바꾸고 체질을 변화시키는 것뿐이라는 것을 알고 모험을 감행하는 거트루드는 ‘피 바꿈’이 일어난 바로 그 순간 그 장소에서 로다와 남편을 만나게 된다. 그 사형수가 바로 남편과 로다의 아들이었던 거다. 신분제도의 폐해가 가져온 총체적 불행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진보의 전초기지’는 제국주의 시대 인간성 상실의 문제를 심도 있게 파헤치는 조지프 콘래드(조셉 콘래드가 더 익숙하지만..^^)의 단편이다. 조지프 콘래드의 대표작 중 하나인 ‘암흑의 핵심’처럼 역시 벨기에령 콩고의 출장소가 그 배경이다. 출장소에 고립된 채 피폐와 파멸의 길로 접어드는 카이어츠와 칼리어를 통해서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D.H. 로런스의 ‘말장수의 딸’은 몰락한 말장수 집안의 딸 메이블과 의사 퍼거슨의 죽음 근처에서 발견한 사랑에 공감 했다기보다는 오연한 자세로 꿋꿋하게 버텨내던 상황의 그 절망적인 끝을 맞닥뜨렸을 때 역겨운 냄새 가득한 연못 속으로 걸어 들어가게 만드는 그 상실감을 이해했다고 할까.
캐서린 맨스필드의 ‘가든파티’는 가든파티를 위해 하늘마저도 맞춤 주문한 듯한 날 이웃마을의 마부가 사고로 죽게 되는 사건을 두고 파티를 주관한 부잣집 소녀의 심리상태를 따라가며 이야기가 진행된다. 엄마에게 선물 받은 너무나 매력적인 파티용 모자와 그와 대조되는 ‘굴뚝에서 나오는 연기조차도 가난에 찌들어 보이는’ 골목의 한 집에 무겁게 내려앉은 슬픔. 가든파티를 취소하고 싶어 하는 아이다운 순수와 함께 소녀가 어렴풋하게 느꼈을 계급의 격차와 삶과 죽음의 무게는 조문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오빠 앞에서 흐느껴 울며 “인생이란 게―” 하며 설명할 수 없지만 누구나 이해하는 말로 대신한다. 인생이란 게....참...
작품과 작가의 생애가 무관하지 않은 것처럼 굳이 참여문학이 아니더라도 시대의 흐름이나 사회가 처한 특수한 상황들이 작품 속에 녹아들게 마련이다. 19세기 중엽부터 20세기 중엽까지의 작품들이 수록된 이 책을 통해서 그 시대의 영국사회를 만나고 작가들의 작품세계를 엿봤다. 창비 세계문학을 읽음으로 인해 제목만으로 익숙한 책과 재미를 느끼지 못했던 책들이 차곡차곡 담긴 목록이 늘어가고 있다. 차근차근 읽어보려 한다. 하지만 지금은 내 책장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창비 세계문학의 다른 세계들로 서둘러 날아가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