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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담 보바리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6
귀스타브 플로베르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00년 2월
평점 :
오래 전에 이미 읽었거나 혹은 다이제스트를 통해서 줄거리를 알고 있음이 분명한 고전, 특히 이 책 ‘마담 보바리’는 내가 읽은 책이 분명하다. 25년쯤 전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러다 보니 알고 있는 내용이 나오기까지의 이 지루한 도입부를 견디기가 힘들 지경이었다. 플로베르에 의해 치밀하게 의도된 지루함이었다고 해도 말이다.
나는 소설을 즐겨읽는다. 각종 사건 사고들이 몰아치고 급작스런 반전과 놀라운 볼거리들을 풀어내는 소설보다는 내 의식의 흐름을 쫓아올 테면 쫓아와 보라고 글을 쓰는 오만한 작가들의 글에 매력을 느껴왔다. 어찌 보면 현대 소설의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플로베르에게 나는 빚이 있는 셈이다. 빚진 자 입장에서 무엇인들 못 견뎌내겠는가. 플로베르가 6개월이 넘는 기간 동안 일곱 번이나 다시 고쳐 썼다는 그 유명한 농사 공진회 장면의 그 진절머리 나는 장황한 연설과 퇴비 상, 숫염소 상, 깻묵 활용상 등등의 지루한 시상 장면을 그런 심정이 아니고서는 어찌 견뎌내겠는가. 다시 책 이야기로 돌아가서...
무미건조 하다못해 시시하기까지 한 소년 샤를르 보바리의 등장부터 시작된 이야기가 샤를르의 부모님의 일대기를 훑더니 의사면허 시험을 거쳐 돈 많은 과부와의 결혼으로 맹맹하게 진행된다. 결국 주인공으로 전면에 나서게 될 엠마와의 첫 만남의 장소인 베르트 농가가 등장하지만 내 조바심과는 별개로 농가의 주변과 농가 살림살이에 대한 지리한 묘사만 늘어놓는다. 그러다 갑작스런 부인의 죽음과 그와 맞먹게 루오 영감의 덧문 신호와 함께 갑작스레 샤를르와 엠마의 결혼이 결정되면서 드디어 주인공 엠마가 전면에 나서며 그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지만 엠마의 과거로 돌아가 연애소설을 즐겨읽던 수도원생활을 이야기하며 그 지루함을 조금 더 연장한다.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의 자신과 다르게 상상하는’ ‘보바리즘’이란 말로 대변되는 엠마를 위해서는 꼭 짚고 넘어가야 하는 부분이니 또 참아주기로 한다.
농부의 딸로 태어났지만 적당한 교육을 받았고 연애소설이지만 책도 좀 읽었으니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인근 농부의 아내로 만족할 수 없는 엠마였다. 하지만 탈출구로 생각했던 샤를르와의 결혼은 다만 장소와 사람만 바뀌었을 뿐 특별할 것 없는 지루한 일상의 연속이었다. 결혼생활에 대한 설레임은 며칠간의 실내장식과 커튼 장식을 바꾸는 들뜬 분주함으로 서둘러 식어버린다. 단 한 번의 찬란한 날, 보비에사르 저택에서의 무도회가 있었지만 상류사회 무도회의 화려함은 상대적으로 시골의사 부인의 비참한 삶을 부각시켰고 그로 인해 엠마는 마음의 병이 깊어진다. 그녀가 동경하던 실체를 직접 눈으로 확인한 순간 그 잡을 수 없는 것들을 갈망하는 마음이 몇 곱절 더 그녀를 괴롭혔으니 말이다. 그렇게 병들어가는 엠마를 보다 못한 샤를르는 그녀에게 다른 환경을 만들어 주기 위해 이제 자리 잡기 시작한 토트를 떠나 드디어 모든 파란만장한 사건의 중심에 있는 용빌로 이사하게 된다.
작품의 1/3쯤을 차지하는 도입부는 마치 엠마의 권태로운 일상처럼 지루하게 계속되다가 위에서 언급한 농사 공진회 장면으로 그 정점을 찍고 드디어 육체적 욕망에 눈을 뜨고 과감하게 환상을 실행에 옮기는 엠마를 만나게 된다. 용빌의 젊은 청년 레옹과의 교류에서 지켜냈던 얄팍한 망설임과 조심스러움은 바람둥이 로돌프를 만나면서 걷잡을 수없이 무너져 버리게 된다. 엠마의 욕망은 터진 봇물처럼 걷잡을 수 없다. 샤를르의 진찰실, 자신의 집 정원 으슥한 곳에서 사랑을 나누는 대담함을 보여준다. 새벽마다 침대에서 빠져나와 애인에게로 달려가는 엠마는 로돌프만이 진정한 사랑임을 의심치 않았고 드디어 사랑의 도피를 감행하려 했다. 하지만 로돌프가 누구던가. 여자를 만나는 순간부터 떼어낼 궁리를 하는 작자가 아니던가. 사랑이라 믿었던 로돌프에게 배신당한 엠마는 몸져눕게 되고 엠마의 사치로 인한 빚과 밀린 약값으로 돈이 불러올 또 다른 파탄을 예고하면서 엠마는 또 다른 사랑에게 온몸을 맡기게 된다. 오페라를 보기위해 들른 루앙에서 바로 레옹과 재회하게 된 것이다.
로돌프로 인해 마음의 상처를 입은 엠마, 그녀는 이번에도 레옹을 밀어내려 시도하지만 그녀의 저항은 늘 너무 미약했다. 플로베르에게 풍기문란의 죄를 물어 법정에까지 서게 한 바로 그 장면, 레옹을 거절하기 위해 만난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출발해서 달리는 마차에서의 정사를 시작으로 엠마는 결국 몰락을 향해 질주하게 된다. 이제부터 그녀의 일상은 모두 거짓말과 사치와 감당할 수없는 채무로 인한 빚 독촉뿐이다. 결국 그녀에게 마지막 일격을 가한 것은 애인들을 전전하며 무절제한 소비로 인한 빚이었지만 자신의 참모습을 돌볼 줄 모르고 환상만을 쫓으려 했던 욕망 때문이었다.
배신마저도 짜릿한 맛이 나고 슬픔마저도 빛나는 연애소설 속의 격정적인 사랑만이 사랑이 아님을 진작에 깨달았다면, 그래서 성실하고 자신을 사랑하는 남편과 딸에게 마음을 주려는 노력을 조금만 기울였다면, 그녀의 사랑스러움과 예술적 감수성을 닿을 수 없는 곳에 저당 잡히지 말고 현실 속에서 나누려 했다면 다른 모습으로 구현될 수도 있었을 그녀의 인생... 그녀의 어리석음이 가엾기까지 하다.
이 책에는 다양한 인간의 모습들을 보여준다. 현실과의 타협에는 재빠르고 계산적이고 결국 파멸에 이르는 보바르 부부와 대조적으로 레지옹 도뇌르 훈장까지 거머쥐며 이야기의 마지막을 장식하게 되는 약제사 오메, 달콤한 말과 술수로 엠마를 꾀는 고리대금업자 뢰르, 그리고 잠깐의 등장이지만 엠마의 모습과 겹쳐 강한 인상을 남긴 농사 공진회의 노파에 집중해본다. 한 농장에서 54년 근속 표창을 받게 된 이 노파, 농부의 딸로 태어난 엠마에게서 예쁘장한 얼굴과 터무니없는 공상이 쏙 빠졌더라면 어쩌면 이런 모습으로 늙어가지 않았을까 싶은 바로 그 모습이다. 플로베르는 용빌을 지나는 바람마저 적절한 시간에 끌어다 불게하고 들판의 꽃마저도 원하는 품종으로 피게 했다고 느낄 정도로 치밀한 글쓰기를 보여주고 있다. 이 노파의 등장도 그런 치밀한 장치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
플로베르는 친구인 부이예의 권고를 받고 ‘마담 보바리’를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플로베르의 치열한 고통으로 빚어진 ‘마담 보바리’ 덕분에 감사해야 할 또 한 명의 엠마...당시 사회적으로 이슈가 됐던 ‘들로네 사건’으로 사치와 방탕하고 문란한 생활을 하다 자살로 생을 마감한 사회면에 등장한 실화 속 여인네가 ‘마담 보바리’를 통해서 이렇게 오래도록 살아남을 수 있고 단순한 지탄의 대상에서 동정과 연민까지 보태게 된 것이다.
세상에는 많은 엠마들이 넘친다. 엠마 보바리처럼 극단적으로 타락의 일로를 걷지 않더라도 누구나의 마음속에는 내가 현재 발 딛고 있는 현실보다는 좀 더 나은 삶을 꿈꾸는 엠마가 존재하지 않을까. 엠마 보바리는 탐욕에 굴복당한 전형을 보여주고 있지만 부디 현실의 엠마들은 꿋꿋하게 이상을 쫓아 꿈에 가까이 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