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책읽기 - 김현의 일기 1986~1989
김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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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기 선생의 타계 소식으로 인한 허망한 마음에 두문불출하다 <행복한 책읽기>에 대한 게으른 리뷰로 슬며시 세상 밖을 내다본다. 최근 들어 나의 책읽기는 오래 전 책들을 손에 잡히는 대로 마음이 끄는 대로 다시 읽기 중이다. 이윤기 선생의 타계소식을 들었을 때 마침 읽고 있던 책이 김현의 <행복한 책읽기>였다. 거의 15년 만에 다시 꺼내 보는 책이다. 어찌 보면 이윤기 선생의 타계소식에 이렇게 마음 아파하며 일상의 일들에서 손을 놓게 만들어버린 이 끝없는 상실감에 빠지게 된 그 처음은 김현 선생이었다. <행복한 책읽기>를 통해 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알았고 자연스레 번역가 이윤기에 대한 관심으로 확대되었었다. 에코뿐이더냐... 밀란 쿤데라, 토마스 만, 귄터 그라스, 소포클레스를 비롯한 고대 그리스 희비극들, ‘천일야화’와 ‘데카메론’까지 내 독서 영역을 넓히는 데 바로 이 책 한권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었다고 고백한다. 지금 내 책장에서 한 자리 차지하고 있는 문지사 시집들과 한동안 빠지지 않고 사 모았던 무슨무슨 문학상 수상집들도 다 이 책 한권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난해함으로 정평이 나 있는 작품들에 대한 도전의 용기 또한 이 책에서 얻었다 할 수 있다. 그러고 보니 내 책읽기는 김현 선생의 신세를 많이 지고 있는 셈이다.     

<행복한 책읽기>를 읽었을 때 이렇게 멋진 분을 유고작으로 처음 만났다는 사실에 너무나 아쉬워했었다. 훗날 알게 된 이야기지만, 김현의 빈소에서 문인들이 모여 “앞으로 백 년 동안 야만의 시대가 올 것이다”라며 김현 선생의 죽음을 두고 한 사람의 문인의 죽음이 아니라 한국 문단의 커다란 상실로 받아들였다 한다. 또 김현 선생의 제자인 시인 황지우는 김현 선생이 등단한 1962년부터 타계하신 1990년까지의 한국 문학은 김현 비평에 의해 축복받았다고 했다 한다.

1986년부터 1989년까지의 김현 선생의 일기를 담고 있는 이 책을 보면서 가장 먼저 다가온 느낌 하나. 김현 선생과 동시대를 살며 글줄 깨나 쓴다는 혹은, 작가의 길로 막 접어들려는 신참들은 대단한 행운의 시대를 살지 않았나 싶다. 그의 절제된 칭찬에 창작 욕구는 마구 솟아났을 테고 그의 혹평은 날카롭고 아팠으리라. 하지만 작가라는 타이틀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열렬히 자신의 작품을 읽어주는 이가 있다는 것은 분명 행복이었으리라. 엄청나게 방대한 독서량이 눈에 띈다. 한 해 동안 쏟아져 나오는 거의 모든 저작물들을 챙겨 본 듯하다. 대가나 신참을 가리지 않고 그만이 할 수 있는 미래를 위한 충고도 아끼지 않고 쏟아낸다. 몇 가지 옮겨보면...

황동규의 <악어를 조심하라고?>(문지,1986)도 활달하지만 직관의 깊이가 있다. 그 깊이를 성숙이라고 부를 수도 있고 명료성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만 나로서는 깊이라고 부르고 싶다. 성숙은 두터움이 더 강조되는 어휘이고, 명료성은 논리성 사상성이 더 강조되는 어휘이다. 직관의 깊이에는 그 모든 것이 다 어우러져 있다. 그의 그 깊이는 "계단을 기어 올라가 옥상 난간에 뜨거운 배를 대고"있는 악어의 시선의 깊이이다. 그 높이 있음이 별을 향한 초월적 바람의 의지가 아니라, 아래로 내려갈 수 없다는, 그러나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는 하강적 바람의 의지라는 데 그의 시의 특징이 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높은 곳이 있다, 그러나 나는 내려가야 한다. 그것이 엘리트주의일까? (52쪽)

정호승의 <새벽 편지>(민음사,1987)는 애절하게 아름답다. 피 묻은 별의 그리움이라고 요약할 수 있는 그의 시는 절제된 슬픔 때문에 애절하다. 피 묻은 별의 그리움이란 자유를 향한 그리움에는 피가 묻게 마련이다는 정치적 상상력의 시적 치환이지만, 그 치환이 경직화되어 있지 아니한 것이 그의 시의 장점이다. 그러나 그 세계의 폭과 깊이는 좁고 얕다. (117쪽)

최하림의 <겨울 깊은 물소리>(열음사, 1988)를 공들여 읽었으나 깊은 감동을 받지는 못했다. 리듬하고 별 관계없어 보이는 전라도 사투리며, 라이 보리 같은 외래어도 눈에 설었다. 시, 말, 새, 바다 등의 어휘들이 자주 나오는 것을 보면 그의 사유가 어디에 가 있나 짐작이 가지만, 그렇다고 좋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차라리 그의 산물 <말과 현실>이 더 절실하게 느껴졌다. 그는 결국 초기시의 세계로 되돌아왔는데, 초기시의 가난은 없어지고, 그렇다고 그 다음의 정열도 없어져, 기교만 남은 느낌이다. (131쪽)

최성각의 <잠자는 불>(민음사, 1988)은 읽힌다. 그러나 감동적이지는 않다. 울림이 옅어서, 재치도 재치 같지가 않고, 고통도 고통 같지가 않다. 그렇다고 마르셀 에메처럼 가볍게 날지도 못한다. 우화적이지도 않다. 그럼 뭣일까? 지루한 가벼움이랄까. 가난도, 사랑도, 데모도....다 둔하게, 지루하게 가볍다('잠자는 불' "앞으로 가는 고기"......'모르는 사람들') 악마 같은 고통이 더 필요하다.

김선학의 <현실과 언어의 그늘>(민음사, 1988)도 마찬가지다. 꼼꼼히 읽어보면, 별로 틀린 소리 같지 않은데, 지루하다. 모범 답안 같은 비평을 보는 지루함이다. (198쪽)

안도현의 <모닥불>(창비,1989)은 재미없다. 체험의 폭도 좁고(평교사의 지루한 체험), 사유의 깊이도 없다, 아니 없어 보인다. 통일의 당위성을 주장하는 의식이 무의식을 완전히 억압하고 있다. 좋은 교사, 좋은 시민. 옳다고 알려진 것만을 사유하는 젊은 시인의 그 순응주의가 내 마음을 아프게 한다. 그의 재능이 이 정도였는가? (218쪽)

지금은 한국문학의 대가의 위치에 올라있는 김훈에 대한 글도 인상적이다. 한국일보 기자 시절의 김훈의 풋풋한 글에 대한 평이 절로 웃음 짓게 한다.

한국일보 사보(1987년 봄호)가 갑자기 내 손에 들어왔다. 웬일로 한국일보가 그것을 보내줬나 모르겠다. 천천히 읽어나가다가, 김훈의 '문학기행 유감'을 읽게 되었다. 그의 글은 기자의 글로서는 거의 파격적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있다. 그 드러냄 때문에 그의 글에 대한 찬반이다, 그의 남의 글에 대한 찬반은 매우 분명하고 확실하다. 그의 글을 보니까 아버지에 대한 그의 애정/증오가 그의 글쓰기의 밑바닥에 있음을 알겠다. 그는 깊게 사랑하거나 짙게 미워한다. .......그의 글은 거침이 없다. 생각나는 대로 쓰는 것 같으나, 그 생각난 대로 씌어진 것들은 훌륭하게 이음새 없이 붙어 있다. (96쪽)

김훈의 <내가 읽은 책과 세상>(푸른숲, 1989)은 김훈 특유의 화려한 수사의 모음이다. 그의 글은 이상하게도 일상적인 삶을 그가 묘사하고 있을 때에도 화려하다. 그 이유는 그가 "업과 더불어 짜증과 더불어 모자람과 더불어 한 발자국씩" 나아가고 있는 데에 있다. 자기 삶의 체취가 진하게 배어 있는 글은 어떤 경우에도 수사쪽으로 기운다. 소박도 그때에는 하나의 수사이다. 그 수사가 남의 감정을 뒤흔든다. 그 수사에는 흔히 삶의 진수가 숨어 있다. "판소리의 바탕은 한국의 산하와 한국의 자연, 그리고 거기서 벌어진 삶의 내용 전체"(269)라든가 북을 만드는 데에는 "산전수전을 다 겪고 죽은 늙은 황소의 가죽이"(286)좋다. 라고 그가 쓸 때, 그의 수사는 수사 이상이다. 그의 책-세상 읽기는 사람 읽기에 다름 아니다. (266쪽)

자신의 글에 대한 자부심도 곳곳에서 드러난다. 김현의 비평을 통해서 시적 신분증을 얻었다 하는 송욱 선생의 글을 보면서 아마도 그 시대 문인들의 바람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되돌아가는 진로>(문예중앙, 1986년 겨울호)를 보니, 박태순이 내 글을 괴팍하다고 했다고 한다. 괴팍하다니. 나는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썼을 뿐이며, 남들도 다 쓸 수 있는 글들을 쓰는 것을 삼갔을 따름이다. (57쪽)

 책상을 뒤지다가 송욱 선생의 글을 한 편 발견했다. 아, 그런 글이 있었지. 학장을 그만둔 뒤 너무 쓸쓸해해서, 그의 시선집을 만들자고 말해, 거기에 해설을 썼는데, 책이 나온 뒤에, 중국 그림 전시회에서 복사판을 한 장 사다주면서 이 글을 주셨다. 과분한 사랑이었던 것 같다:  


김현의 '말과 우주'를 읽고   

사람의 몸은 거울이 없고 보면 제 눈으로는 제 얼굴을 보지 못하게 되어 있다. 이는 아마 우리 존재가 실존적이라는 뜻을 드러내는 사실이리라. 그의 글을 일고 나는 대중탕에 걸려 있는 큰 거울을 생각한다. 내 온몸을 비추어주는 겅루을, 그러나 그의 글은 그러한 거울과 흡사하기도 하지만, 나에게는 매우 다른 측면이 더욱 중요한 아주 희귀한 거울이다. 이십대에서 사십대에 이르는 시인으로서의 내 전신상을 드러내주는 공간적일 뿐만 아니라 시간적인 거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물며 내 시의 독자들에 있어서랴! 나는 그의 글에서 내 시적 신분증을 얻었다. 하물며 독자 여러분들에 있어서랴! 그의 이 글에서 내 시론인 시적 평전에 없는 방법을 보여준다. 하물며 내 시론의 독자들에 있어서랴! 우리는 그의 글을 읽고 비로소 시가 실존의 표현임을 깨닫게 된다. 시인은 제 눈으로는 자기 시의 온몸을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그러나 그는 아직 젊다. 그에게 장차 눈부신 변신이 있기를 간절히 바라며.

1987년 3월 16일, 송욱

마지막 몇 해의 일기에서는 죽음을 예감이라도 했던 것처럼 죽음에 대한 단상들이 눈에 띈다.

삶의 순간순간이 죽음과의 싸움인데 그것을 모르고 희희낙락 지낸다. 그러나 고통이 없다면 죽음의 실감도 없으리라. 많이 아프라, 죽음이 너를 무서워하도록. (232쪽)

어떻든 한 젊은 시인은 죽었고 우리는 살아남아 그를 이야기한다. 죽음만이 어떤 사람에 대해 아무런 말을 해도 괜찮게 만들어준다. 죽음은 모든 것을 허용한다. (231쪽)

젊고 재능 있는 시인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던 김현은 그의 유고시집의 해설을 썼다. 바로 그 젊고 재능 있는 시인이 기형도다. 기형도의 누이를 만나 기형도의 살아생전의 이야기들과 가족 이야기를 전해 듣는 일화도 이 일기에서 소개하고 있다. 요절한 시인을 안타까워하더니 기형도가 세상을 떠난 그 다음해 김현도 48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다. 천재는 요절을 하는 건지, 요절이 천재를 만드는 건지 알 수는 없지만 그 재능의 수혜를 오래도록 받고 싶어 하는 평범한 독자인 나에게는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다. 29세의 기형도, 48세의 김현, 63세의 이윤기. 이들의 죽음이 안타까운 이유는 이들이 쏟아낼 미지의 글들을 손에 만져보지도 못하고 빼앗겨 버린 것 같은 애달픔이다. 그것들은 분명 눈부시게 아름다울 것이기 때문이다. 안타깝고 또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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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서 행복해졌다 - 차로, 두 발로, 자유로움으로 세 가지 스타일 30개의 해피 루트
전은정.장세이.이혜필 지음 / 컬처그라퍼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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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나에게 제주로의 여행은 막무가내로 휴가를 보장 받으려는 마음이 앞서서 떠난 여행들이었다. 그런 내게 제주는 대체로 흡족했다. 뻑뻑한 삶을 이리저리 쪼개서 시간을 만들고 통장 잔고를 이리저리 긁어모아서 떠났던 젊은 날의 첫 여행을 기억한다. 대한민국의 풍경이 거기서 거기일 텐데 제주만의 특별한 무언가에 대한 사전지식이 전무했기에 상상조차 불가능했던 기대감에 부풀어 잠 못 들던 여행 전날 밤도 기억한다. 공항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다리가 아프도록 제주를 휘젓고 다니다가 숙소에 들어와 녹초가 되어서도 다음날 아침이면 거뜬하게 일어나 또다시 제주를 느끼며 다녔던 3박 4일 간의 꿈같은 날들은 아마도 앞으로의 제주 여행에서도 다시 느껴보지 못할 감상일 것이다. 첫 여행 이후로 ‘제주’라 하면 맹목적인 찬사를 쏟아 붓는 제주예찬론자가 되었다. 마치 내 고향에 대한 짝사랑에 수다스러워지는 그 마음과 다르지 않은 것처럼...

이 책은 잡지사에서 함께 일했던 인연으로 엮인 세 명의 싱글 여인네들의 세 가지 스타일의 여행 방법에 맞는 해피 제주를 담고 있다. 달리고 주차간산(走車看山), 걷고 도보천리(徒步千里), 쉬는 유유자적(悠遊自適). 세 사람이 추천하는 세 가지 스타일의 여행 테마 중 내 마음을 또다시 설레게 하는 것은 역시 도보천리다. 유유자적 스타일은 저자와 개인적인 친분으로 엮인 특별한 인연을 이야기 하고 있어서 평범한 여행자라면 쉽게 꿈꿀 수 있는 여행 방법이 아니라 동떨어진 느낌이 들고, 주차간산 스타일은 현지 가이드까지 대동해서 제주를 휘젓고 다녔던 경험이 이미 있어서 색다른 맛이 없는데 반해 도보천리는 앞으로의 제주 여행의 테마로 계획하고 있는 부분들을 담고 있으니 마음이 그리로 끌리는 게 당연하다. 도보천리 스타일이 내 마음을 끌었던 것처럼 누군가에게는 다른 테마가 흡족하리라. 어느 방법을 택하든 온통 매력적인 것은 분명하다.

조.이.락. 세 명의 여행자의 세 가지 스타일의 여행. 그 중 ‘이’의 도보천리 스타일이 내게 맞춤인 것을 떠나서 ‘이’의 글맛이 내 입맛에도 딱인 모양이다. 마음에 드는 글을 만나면 차마 긋지 못하는 밑줄을 대신해서 색색의 포스트잇을 붙여두는데 ‘이’의 글에 집중되어 있다. 그녀의 감상에 내 마음을 얹어둔 듯하게 격한 공감을 대신해주고 있다. 제주에 여행 왔다가 제주가 좋아서 제주에 눌러 살게 된 사람들과의 인연을 소개한 ‘락’의 글도 인상적이었다. 대부분 예술인이거나 예술적인 기질이 강한 사람들, 그 속에 세 명의 저자가 네 번째 저자라고 말한 ‘제주 할망’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자연스레 소개한 제주도 ‘설문대할망’ 신화가 눈길을 끈다.  

설화에 따르면 오백나한은 모두 설문대할망의 아들이다. 할망은 한라산의 어머니고, 슬하에 500명의 아들을 둔 거신(巨神)이다. 체구가 어찌나 큰지 빨래를 할 때면 제주 북쪽 관탈섬과 제주 남쪽 마라도에 다리를 한쪽씩 얹고 성산일출봉을 빨래통 삼고 우도를 빨래판 삼는다. 어느 날, 피곤한 할망이 한라산을 베고 누우려는데 꼭대기가 뾰족해 주먹으로 산 정상을 쳐 백록담이 생겼다고 한다. 쌀국수 먹으러 베트남 가고 생수 마시러 스위스 가고 껌 씹으러 핀란드 간다는 '허풍개그'가 이만할까. (155쪽)

세 가지 스타일의 30가지 루트를 소개하고 여행자들을 위한 최신 생생정보까지 각 루트의 말미에 친절하게 붙여두고 있다. 여행 관련된 책들이 그러하듯 풍부한 사진들도 담고 있다. 하지만 제주의 행복 속으로 날아가고 싶게 마음을 움직이는 것들은 도움 받을 만한 맛집, 숙소, 환상 코스의 정보가 아니라 그곳이 아니라면 느끼지 못할 감상과 길 위에 선 여행자의 절반쯤 탈속과 해탈의 경지에 오른 듯한 착각에 빠지게 만드는 여행 자체의 매력이 아닐까 싶다.

여행은 '몰아쉬는 숨'이다. 오래 참은 숨을 한 번에 뱉으니 발끝에서 해녀의 숨비 소리가 난다. 참은 숨을 몰아쉬러 제주에 갔다. 안정되어도 뻑뻑한 삶, 불안정해도 여유로운 삶, 양단간에 결론을 내고 싶던 어느 날이었다. 지상을 떠나 지상을 내려다본 순간, 금세 마음이 노곤해졌다. 강과 산 같은 큰 흐름만 남고 족쇄 같던 공간은 점조차 되지 못했다. 사람은 더 미미해 보이지도 않았다. 숱한 아귀다툼이 우스워졌다. (164쪽)

무시로 때때로 훌쩍 떠날 수 있는 세 여인네들의 자유가 살짝 부러워지다가도 매일 아침 유치원 버스에 오르기 전에 소나기 뽀뽀를 퍼붓는 아이의 얼굴이 겹쳐 보인다. 우선 몸이 매인 곳이 없으니 자유로울 수 있는 이 여인들이 부럽다가 어차피 한평생 살아가는 것은 각자의 쳇바퀴 안에서의 행보가 아니겠는가 하는 쪽으로 생각이 튄다. 다만 한적하고 여유롭게 내 시간들을 맘껏 운용할 수 있는 자유가 내게서 다른 쪽으로 분산이 될 수밖에 없는 앞으로의 여행을 현실로 받아들여야 하는 서글픔은 약간 있다.^^ 마음은 간절하나 체력이 뒷받침 해주지 못할 나이가 되기 전에 제주 올레길을 걸어보리라. 나의 버킷리스트에 올라있는 이 계획이 조만간 실행에 옮겨질 날을 고대해 본다. 그동안 이 책으로 시장기를 달래야겠다. 물론 이 책은 애피타이저 보다는 성찬에 가까운 아주 맛있는 책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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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기억의 피아니시모
리사 제노바 지음, 민승남 옮김 / 세계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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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예닐곱 살 때의 기억이다. 너무 먼 곳이라 자주 가지 못했던 외갓집이었다. 어쩌면 처음 외갓집에 갔던 날인지도 모른다. 외할머니 외삼촌들과 엄마 아빠가 너무 분주했던 그날과 함께 공원에서 낙엽을 줍고 계시던 할아버지의 모습이 내가 기억하는 외할아버지에 대한 유일한 모습이다. 외할아버지는 치매를 앓고 계셨다. 갑자기 사라진 할아버지를 찾아 헤매다 결국 공원에 계신 할아버지를 발견하는 순간이었다. 소중한 보물이라도 되는 양 공원의 낙엽들을 한가득 안고 계시는 모습이 30년도 훌쩍 넘은 지금까지도 희미하게 기억된다.

지금껏 나는 치매 환자라고 하면 상식을 벗어난 행동으로 가족들에게 말할 수 없는 무게의 슬픔과 슬퍼할 겨를도 없이 몰아치는 부양의 고단함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세월을 거슬러 도로 어린아이가 되는 병에 걸린 덩치 큰 어른이라 보살핌의 손길이 늘 필요한 상황이 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정작 병에 걸린 본인보다는 주변사람들의 고통으로 접근했었다. 이 책을 읽으며 한순간 멍한 느낌이었다. 이 책은 알츠하이머 환자의 이야기를 다룬 다른 책들과 그 방향을 조금 달리한다. 기억이 조금씩 흐려져 가는 알츠하이머 환자 엘리스의 의식을 그대로 쫒아가며 기술하고 있다. 시시콜콜한 버릇까지 세세하게 알고 있는 남편이 차도를 걷다 차에 치일 뻔한 자신을 구한 친절한 행인으로 변해가고, 사랑하는 딸들은 아기 엄마나 여배우로 변해가는 그 희미해지는 기억의 자취를 그대로 따라가고 있다. 기억을 조금씩 잃어가는 알츠하이머 환자에게 막연히 가졌던 측은한 마음이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엘리스를 통해서 오히려 절절하게 전해져왔다.

알츠하이머가 휘두르는 권한은 가히 절대적이다. 알츠하이머가 훑고 지나간 자리는 빈 공허뿐이다. 7,80대 평범한 노인이건 엘리스처럼 쉰 살의 하버드 대학 정교수이건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모든 것을 앗아가 버린다. 알츠하이머 환자는 속수무책으로 당하면서도 미리 대책을 세워둘 수도, 빼앗아 가는 것을 빤히 보면서도 당해낼 수 없는 것이다. 결국에는 빼앗긴 것이 무엇인지 빼앗겼다는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상태로 죽음에 이르게 되는 병이다. 병에 걸린 환자임에도 주변사람들의 응원과 격려를 바랄 수 없다. 병에 걸렸음에도 생존에 대한 의지를 불태울 수도 없다. 죽음의 순간에도 그 눈 속에 사랑하는 사람들을 담아갈 수조차 없다. 고귀한 개인의 완벽한 상실...참 고약한 병이라 할 수 있다.

하버드 대학 교수인 남편과 법대와 의대를 졸업한 딸과 아들을 뒀고 자신 또한 하버드대 교수인 쉰 살의 엘리스에게 유일한 고민은 대학진학을 거부하고 배우의 길을 택한 막내딸 리디아뿐이다. 갱년기 현상쯤으로 여기던 기억장애가 바로 조발성 알츠하이머가 원인이었다는 진단을 받으며 엘리스 자신의 혼란스러움은 물론이고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 남편과 자식들에게 미칠 유전적 영향에 대해서 또한 걱정해야 한다. 단 하나 위안을 삼자면 불편했던 막내딸과의 사이에 진정한 공감과 이해가 이뤄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늘 성실하고 치열하게 인생을 살아온 엘리스는 주어진 상황 속에서 정말 최대한 잘 살아가고 있다. 지난날들은 죄다 사라져버렸고 앞으로 다가올 날들은 지금보다 더 끔찍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엘리스다.       

창 가득 햇살을 들이고 거실에 누워 나른하게 하루해를 보낸다. 얼굴 가득 쏟아지는 햇빛을 피해 돌아누운 등으로 쏟아지던 햇살은 어느새 초저녁 어스름에 자리를 내주고 희미하게 퇴장해버리고 만다. 먼지 한 톨마저 그 속살이 다 드러나 보이는 햇빛 속에 있다가 불을 켜지 않으면 익숙한 동선에서도 부딪기 마련인 암흑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느낌일 것이다. 아마 암흑 속에 있다는 사실조차도 알지 못하게 될 것이다. 지난날의 미숙함이나 실수는 너무도 생생하게 기억 속에 새겨져 아픈 후회로 나를 힘들게 해 차라리 잊어버렸으면 싶을 때가 있다. 잊어버리고 싶은 기억들과 내 인생의 보루처럼 소중한 기억들이 선택의 여지도 없이 죄다 조금씩 사라져 버린다는 것, 사라져 버렸다는 것조차 기억에 없다는 것, 그것은 끔찍하게 슬픈 일이다. 살아있는 동안 훗날을 기약하며 살지 말자고 다짐해 본다. 사랑할 수 있을 때 바로 오늘 맘껏 사랑하자. 다른 길은 다음 날 걸어보리라 미뤄두지 말자. 현재의 안위와 망설임으로 잃어버려도 안타깝지 않을 초라한 미래는 만들지 말자. 오늘부터 내가 살아가는 날들은 누군가는 치열하게 살아내고 싶어 하던 그런 날들임을 기억하자. 수많은 다짐들이 처음인 것처럼 퐁퐁 솟아난다. 고마워요. 엘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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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끝날 때까지 아직 10억 년 열린책들 세계문학 52
A.스뜨루가쯔키 외 지음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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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뜨루가츠끼 형제가 20세기 러시아 최고의 SF작가라는 설명이 없었다면 나는 이 책을 감시와 지배하의 소련 사회를 풍자한 소설쯤으로 여겼을 지도 모른다. 시공간을 넘나드는 우주선도 없고 휘황찬란한 첨단 과학도 등장하지 않는다. 2백 년 만에 찾아온 폭염 속 레닌그라드의 한 아파트 안에서 5층과 8층 사이를 오르락내리락 할 뿐이다. 물론 등장인물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수학자, 언어학자, 물리학자, 공학자, 생물학자, 천문학자들이니 그들의 연구 주제에 대해 깊숙이 들어간다면 아마도 우주선이 휙휙 날아다니고 황당한 외계생물이 튀어나오는 SF쪽으로 도망가고 싶어질 지도 모른다. 다행히 깊숙하게 파고 들어가지 않고 다만 지금 그들의 연구가 완성 단계에 이르렀고 발표를 앞두고 있으며 그 연구의 결과물은 10억 년쯤 후에는 다른 연구들과 결합하여 지구의 종말에 영향을 끼칠 지도 모를 엄청난 발견에 해당된다는 것 정도로만 알고 있으면 된다.

폭염으로 도시 전체가 이글거리는 레닌그라드의 한 아파트에서 천문학자 말랴노프는 자신의 연구 과제의 결정적인 공식 하나가 명료하게 떠오른다. 차분하게 이 공식을 정리해 보고자 하지만 그 순간부터 전화벨은 쉴새없이 울려대고 식료품점에서는 주문하지도 않은 물건들이 배달되어 오고 아내의 친구라는 매력적인 여성도 짐가방을 들고 쳐들어와 은근하게 유혹하고 이웃집 남자 스네고보이도 방문해서 함께 어울려 술파티를 벌이게 된다. 이튿날 아침, 며칠 머물 예정이라던 아내의 친구는 흔적없이 사라져 버렸고 지난밤 말랴노프에게 이상한 이야기를 하던 물리학자 스네고보이는 시체로 발견되고 수사관들은 말랴노프에게 살인의 혐의를 추궁하기 위해 방문을 한다. 일이 알 수 없는 방향으로 진행되어 가는 상황에서 오랜 친구인 생물학자 바인가르텐과 정밀 공학자 자하르가 말랴노프의 아파트를 찾아온다. 이들의 친구이면서 지적이고 이성적인 8층에 사는 수학자 베체로프스키와 의문의 언어학자 글루호프, 이렇게 모여서 이들은 각자의 비밀을 털어놓기 시작한다.

이들 모두는 심지어 냉철하고 차분해 보이는 베체로프스키 마저도 지금 알 수없는 존재들에게서 협박과 회유를 받고 있다는 것이다. 자신에게 노벨상을 안겨줄 일생일대의 업적이 될 수 있을 연구부터 그리 중요해 보이지 않는 연구까지 이들이 현재 진행하고 있는 작업을 중지하라는 협박이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었다. 높은 지위와 경제적인 안위를 약속하기도 하고 예전에 사귀던 여자들이 한꺼번에 나타나기도 하고 연구과제에 손을 대기만 하면 끔찍한 두통에 시달리기도 하고 말랴노프처럼 살인자로 추궁을 당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스네고보이 또한 이들의 특별관리 대상 명단에 있던 학자였으니 분명 그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해 권총자살을 했을 거라는 결론을 내린다. 자, 이들은 이제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학자로서의 자존심을 지킬 것이냐 아니면 굴복하고 치욕스럽게 비굴하게 살아가느냐.

그럼 이들을 위협하는 이 전지전능한 존재는 과연 무엇일까? 이 존재는 인류의 모든 과학적 업적을 감시하고 과학기술의 진보가 파괴의 목적에 이용되지 못하도록 통제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지금 당장은 위험해 보이지 않는 말랴노프를 비롯한 이 학자들의 연구를 중단시키려 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 전지전능한 존재에 ‘항상성(恒常性) 우주’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미지의 4차원 문명’ 우주가 자기방어 또는 자정장치를 작동시키는 하나의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학자들의 연구가 가져올 진보를 통제하기로 결정한 항상성 우주의 절대적인 힘 앞에 굴복할 것인가 학문의 미래를 위해 저항할 것인가.

잘 풀리던 일에 갑자기 제동이 걸린다거나 열정적으로 매달리던 것에 이유 없이 흥미를 잃게 되는 것처럼 설명할 수 없는 이유로 어긋나는 모든 일의 해답을 ‘항상성 우주’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이 리뷰를 쓰는 동안 우리 집을 찾아온 많은 방문객들과 한시도 쉬지 않고 종알거리는 아들을 보면서 ‘항상성 우주’의 방해를 받고 있는 느낌이었다. 내 리뷰가 우주의 종말에 영향을 끼칠 만한 위험성을 안고 있다는 걸까? 그래도 리뷰를 마쳤으니 그 위험성이 사라진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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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1
윌리엄 포크너 지음, 김명주 옮김 / 민음사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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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호? 이것의 정체가 무엇이냐? 두세 장을 넘지 않게 짤막하게 토막 난 글들이 모여 책 한권을 이룬다. 끊임없이 등장하는 인물들을 우선 번드런 가의 사람들과 주변인들로 나눠야 하고, 번드런 가의 자식들을 서열 순으로 제자리를 찾아줄 수 있는 것도 이 책의 2/3 지점에 가서야 가능한 일이다. 이 작품에 대한 사전지식 없이 덤벼든 탓에 처음 몇 토막에서는 화자를 찾으려는 어리석은 시도를 했음도 고백한다. 하지만 이 책이 59개의 독백으로 구성된 소설이라는 기본지식만 알았더라면 쉽게 해결됐을 고민이었다. 아주 친절하게도 소제목들이 바로 말하고 있는 화자였던 것이다. 15명의 등장인물과 59개의 독백, 정말 실험정신으로 똘똘 뭉친 소설이다.     

이 이야기의 중심에는 번드런 가의 안주인 애디가 있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말이다. 죽음을 목전에 둔 애디의 방 창 앞에서는 장남 캐시가 어머니가 죽어 눕게 될 관을 짜느라 톱질 대패질을 하고 있다. 이 집안의 가장인 앤스는 통나무를 한짐 해서 3달러를 벌어오겠다고 마차를 가져가려는 두 아들 달, 주얼과 실랑이를 벌인다. 애디가 죽게 되면 마차가 필요한데 곧 닥칠 일이니 마차 사용을 선뜻 허락할 수 없다는 내용이다. 이 집안의 외동딸 듀이 델은 죽어가는 어머니 곁에서 여러 날 째 부채질 중이다. 막내 바더만은 이 상황에서 낚시로 잡은 물고기를 자랑할 정도로 아직 어린 소년이다.

이 가족들의 면면을 살펴보자. 우선 가장 앤스는 젊었을 때 큰 사고 이후로 땀을 흘리면 죽게 될 거라는 믿음에 우선해서 이웃의 노동력을 염치없이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그의 자식들은 아버지의 셔츠가 젖는 걸 본 적이 없을 정도로 게으르고 권위적이고 도무지 정이 가지 않는 인물이다. 마지막 장면에서는 확실하게 그 진면목을 보여주신다. 장남 캐시는 연장도구를 소중히 여기는 목수이고, 주얼은 말(馬)을 목숨처럼 아끼는 다혈질의 거친 젊은이다. 듀이 델은 어머니의 임종을 앞에 두고 있지만 현재 임신 중인 이 상황이 더 고민거리다. 어쩌면 가족 중 유일하게 제대로 상황을 받아들이고 있는 달은 오히려 정신병자 몽상가 취급을 받는다. 죽음은 앞둔 애디는 남편과 다섯 아이들이 있지만 늘 고독하고 외로운 영혼이었고 남편에 대한 사랑 또한 이미 죽은 지 오래된 여자다. 그리고 마을 목사와의 불륜으로 인해 태어난 주얼을 목숨처럼 아끼지만 끝내 그 비밀은 함구한 채 죽음을 맞이한다. ‘우리가 살아있는 이유는 오랫동안 죽어있을 준비를 하기 위해서...’라는 친정아버지의 말이 그녀의 인생에 알게 모르게 간섭을 했음이 분명한 그녀는 자신이 죽으면 40마일이나 떨어진 친정이 있는 제퍼슨에 묻어달라고 오래 전부터 부탁을 해온 터였다. 그녀의 이 말과 그 약속을 지키고 싶다는 우직함으로 무장한 듯한 남편 앤스의 결심이 이 고난의 행군과도 같은 이야기를 탄생시킨 것이다.

때는 무더운 여름, 때맞춰 내린 폭우로 강물이 불어 제퍼슨으로 가는 길의 다리들이 거의 다 유실되어 먼 길을 돌아가야 하는데다 무리하게 강을 건너려다 노새만 잃고 어머니가 누워있는 관마저 물속에서 겨우 건져 올릴 수 있는 상황까지 간다. 그 과정에서 끝까지 관을 지키려던 캐시는 예전에 사고로 부러졌던 다리를 또 다치게 되고, 가뜩이나 더운 날씨인데다 여드레도 넘게 시신을 마차 싣고 다닌데다 물에 빠졌던 애디의 시신은 그 지나는 곳마다 악취를 풍겨댄다. 온 가족이 장례에 참석해야한다는 원칙 아래 부러진 다리로 덜컹거리는 마차에 실려 가는 캐시의 고통을 덜어준다고 시멘트를 발라 고정시키는 일을 아무렇지 않게 지시하는 앤스, 이 상황을 끝내려는 달은 가는 길에 신세를 지게 된 농가의 어머니의 관이 자리한 헛간에 불을 지르게 되고 그 일로 결국 정신병원에 끌려가게 된다. 물에 빠진 캐시의 옷을 뒤져 축음기를 사려고 모아둔 돈을 빼돌리고 아들이 목숨처럼 아끼는 말을 제멋대로 팔아치우고 딸의 애인이 낙태를 위해 약을 구입하라고 준 돈마저 빼앗는 아버지는 아내의 장례를 치룬 다음날 새 양복에 의치를 해 넣고 아이들 앞에 나타나 새엄마를 소개하며 이야기는 끝이 난다. 

난 어릴 적, 죽음을 단순히 몸의 변화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제 난 죽음을 마음의 변화로 이해한다. 즉 사별을 견디어야 하는 사람들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변화 말이다. 허무주의자들은 죽음이 끝이라고 하고, 근본주의자들은 새로운 시작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사실상 죽음이란, 가족 또는 세들었던 사람이 집이나 마을을 떠나는 것이나 다름없다. (53쪽)

온갖 시련에도 굴하지 않고 시신을 운반하는 이 가족의 무모하게 우직하고 측은하기까지 한 이 행렬에서 죽음과 남겨진 자들의 삶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강물에 떠내려가는 어머니의 관을 지키려다 다친 다리에 시멘트를 부어 고정시켰던 아버지 때문에 다리를 잘라내야 하는 지경에 처했음에도 새어머니의 축음기를 보며 음악 감상을 할 수 있겠다는 새로운 기대를 품는 캐시처럼 삶이란 그렇게 얄팍한 신의와 맞바꿔 살아내야 하는 것인가 묻고 싶다.

죽은 자의 생의 시계가 멈추고 남겨진 자의 시계는 무겁게 내리 누르는 슬픔의 무게에도 무심하게 째깍째깍 움직이는 죽음이라는 분기선. 죽은 자의 길은 따라가 볼 수도 없으니 어느 곳을 향해 달리는 지 알 길이 없고, 남겨진 자의 길은 결국 또 다른 죽음이라는 분기선을 향해 나 있다. 산 자의 행보는 죽음을 향해 가서 오랫동안 죽어있기 위함이라면 죽은 자의 행보는? 죽음 이후에 어디론가 연결 되어있을지 단지 소멸의 길을 걷고 있을지 그것은 찰나의 생을 사는 내가 알 수 있는 영역 밖의 일이다. 하지만 그렇게 죽은 자와 산 자는 서로 다른 길 어쩌면 반대 방향으로 나 있는 길을 따라 멀어지고 있는 게 아닐까. 불편스러울 정도로 우직하고 고통스러운 이 행보는 번드런 가족만의 죽은 자와 산 자의 이별 방식일 것이다. 목숨처럼 아끼는 말을 어이없이 빼앗겨서 분개하는 주얼도 다리가 부러져 뼈가 덜렁거리는 상황에서 마차에 실려 장지로 향해 가는 캐시도 낙태할 의사나 약사를 찾아야 할 절박한 듀이 델도 죽은 애디를 땅에 묻고 돌아서서 이제 각자의 길로 걸어갈 것이다.   


이 소설은 등장인물들의 독백만으로 이야기를 끌어간다. 이 가족의 행렬은 이 독백만으로 그 여정을 그대로 드러낸다. 독특한 서술 방식이다. 윌리엄 포크너는 이 소설을 두고 ‘이 소설은 나를 일으켜 세우거나 거꾸러뜨릴 것이다.’라고 했다 한다. 이 소설이 윌리엄 포크너를 거꾸러뜨리지는 않은 모양이다. 노벨상과 퓰리처상까지 받으며 그 자리를 굳건히 한 작가로 꼽히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초반부에 정신없이 등장하는 인물들의 연관성을 이해하기 전,  그리고 이 가족의 고통스런 행렬에 함께 하면서 내가 거꾸러질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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