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1
윌리엄 포크너 지음, 김명주 옮김 / 민음사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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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호? 이것의 정체가 무엇이냐? 두세 장을 넘지 않게 짤막하게 토막 난 글들이 모여 책 한권을 이룬다. 끊임없이 등장하는 인물들을 우선 번드런 가의 사람들과 주변인들로 나눠야 하고, 번드런 가의 자식들을 서열 순으로 제자리를 찾아줄 수 있는 것도 이 책의 2/3 지점에 가서야 가능한 일이다. 이 작품에 대한 사전지식 없이 덤벼든 탓에 처음 몇 토막에서는 화자를 찾으려는 어리석은 시도를 했음도 고백한다. 하지만 이 책이 59개의 독백으로 구성된 소설이라는 기본지식만 알았더라면 쉽게 해결됐을 고민이었다. 아주 친절하게도 소제목들이 바로 말하고 있는 화자였던 것이다. 15명의 등장인물과 59개의 독백, 정말 실험정신으로 똘똘 뭉친 소설이다.     

이 이야기의 중심에는 번드런 가의 안주인 애디가 있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말이다. 죽음을 목전에 둔 애디의 방 창 앞에서는 장남 캐시가 어머니가 죽어 눕게 될 관을 짜느라 톱질 대패질을 하고 있다. 이 집안의 가장인 앤스는 통나무를 한짐 해서 3달러를 벌어오겠다고 마차를 가져가려는 두 아들 달, 주얼과 실랑이를 벌인다. 애디가 죽게 되면 마차가 필요한데 곧 닥칠 일이니 마차 사용을 선뜻 허락할 수 없다는 내용이다. 이 집안의 외동딸 듀이 델은 죽어가는 어머니 곁에서 여러 날 째 부채질 중이다. 막내 바더만은 이 상황에서 낚시로 잡은 물고기를 자랑할 정도로 아직 어린 소년이다.

이 가족들의 면면을 살펴보자. 우선 가장 앤스는 젊었을 때 큰 사고 이후로 땀을 흘리면 죽게 될 거라는 믿음에 우선해서 이웃의 노동력을 염치없이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그의 자식들은 아버지의 셔츠가 젖는 걸 본 적이 없을 정도로 게으르고 권위적이고 도무지 정이 가지 않는 인물이다. 마지막 장면에서는 확실하게 그 진면목을 보여주신다. 장남 캐시는 연장도구를 소중히 여기는 목수이고, 주얼은 말(馬)을 목숨처럼 아끼는 다혈질의 거친 젊은이다. 듀이 델은 어머니의 임종을 앞에 두고 있지만 현재 임신 중인 이 상황이 더 고민거리다. 어쩌면 가족 중 유일하게 제대로 상황을 받아들이고 있는 달은 오히려 정신병자 몽상가 취급을 받는다. 죽음은 앞둔 애디는 남편과 다섯 아이들이 있지만 늘 고독하고 외로운 영혼이었고 남편에 대한 사랑 또한 이미 죽은 지 오래된 여자다. 그리고 마을 목사와의 불륜으로 인해 태어난 주얼을 목숨처럼 아끼지만 끝내 그 비밀은 함구한 채 죽음을 맞이한다. ‘우리가 살아있는 이유는 오랫동안 죽어있을 준비를 하기 위해서...’라는 친정아버지의 말이 그녀의 인생에 알게 모르게 간섭을 했음이 분명한 그녀는 자신이 죽으면 40마일이나 떨어진 친정이 있는 제퍼슨에 묻어달라고 오래 전부터 부탁을 해온 터였다. 그녀의 이 말과 그 약속을 지키고 싶다는 우직함으로 무장한 듯한 남편 앤스의 결심이 이 고난의 행군과도 같은 이야기를 탄생시킨 것이다.

때는 무더운 여름, 때맞춰 내린 폭우로 강물이 불어 제퍼슨으로 가는 길의 다리들이 거의 다 유실되어 먼 길을 돌아가야 하는데다 무리하게 강을 건너려다 노새만 잃고 어머니가 누워있는 관마저 물속에서 겨우 건져 올릴 수 있는 상황까지 간다. 그 과정에서 끝까지 관을 지키려던 캐시는 예전에 사고로 부러졌던 다리를 또 다치게 되고, 가뜩이나 더운 날씨인데다 여드레도 넘게 시신을 마차 싣고 다닌데다 물에 빠졌던 애디의 시신은 그 지나는 곳마다 악취를 풍겨댄다. 온 가족이 장례에 참석해야한다는 원칙 아래 부러진 다리로 덜컹거리는 마차에 실려 가는 캐시의 고통을 덜어준다고 시멘트를 발라 고정시키는 일을 아무렇지 않게 지시하는 앤스, 이 상황을 끝내려는 달은 가는 길에 신세를 지게 된 농가의 어머니의 관이 자리한 헛간에 불을 지르게 되고 그 일로 결국 정신병원에 끌려가게 된다. 물에 빠진 캐시의 옷을 뒤져 축음기를 사려고 모아둔 돈을 빼돌리고 아들이 목숨처럼 아끼는 말을 제멋대로 팔아치우고 딸의 애인이 낙태를 위해 약을 구입하라고 준 돈마저 빼앗는 아버지는 아내의 장례를 치룬 다음날 새 양복에 의치를 해 넣고 아이들 앞에 나타나 새엄마를 소개하며 이야기는 끝이 난다. 

난 어릴 적, 죽음을 단순히 몸의 변화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제 난 죽음을 마음의 변화로 이해한다. 즉 사별을 견디어야 하는 사람들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변화 말이다. 허무주의자들은 죽음이 끝이라고 하고, 근본주의자들은 새로운 시작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사실상 죽음이란, 가족 또는 세들었던 사람이 집이나 마을을 떠나는 것이나 다름없다. (53쪽)

온갖 시련에도 굴하지 않고 시신을 운반하는 이 가족의 무모하게 우직하고 측은하기까지 한 이 행렬에서 죽음과 남겨진 자들의 삶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강물에 떠내려가는 어머니의 관을 지키려다 다친 다리에 시멘트를 부어 고정시켰던 아버지 때문에 다리를 잘라내야 하는 지경에 처했음에도 새어머니의 축음기를 보며 음악 감상을 할 수 있겠다는 새로운 기대를 품는 캐시처럼 삶이란 그렇게 얄팍한 신의와 맞바꿔 살아내야 하는 것인가 묻고 싶다.

죽은 자의 생의 시계가 멈추고 남겨진 자의 시계는 무겁게 내리 누르는 슬픔의 무게에도 무심하게 째깍째깍 움직이는 죽음이라는 분기선. 죽은 자의 길은 따라가 볼 수도 없으니 어느 곳을 향해 달리는 지 알 길이 없고, 남겨진 자의 길은 결국 또 다른 죽음이라는 분기선을 향해 나 있다. 산 자의 행보는 죽음을 향해 가서 오랫동안 죽어있기 위함이라면 죽은 자의 행보는? 죽음 이후에 어디론가 연결 되어있을지 단지 소멸의 길을 걷고 있을지 그것은 찰나의 생을 사는 내가 알 수 있는 영역 밖의 일이다. 하지만 그렇게 죽은 자와 산 자는 서로 다른 길 어쩌면 반대 방향으로 나 있는 길을 따라 멀어지고 있는 게 아닐까. 불편스러울 정도로 우직하고 고통스러운 이 행보는 번드런 가족만의 죽은 자와 산 자의 이별 방식일 것이다. 목숨처럼 아끼는 말을 어이없이 빼앗겨서 분개하는 주얼도 다리가 부러져 뼈가 덜렁거리는 상황에서 마차에 실려 장지로 향해 가는 캐시도 낙태할 의사나 약사를 찾아야 할 절박한 듀이 델도 죽은 애디를 땅에 묻고 돌아서서 이제 각자의 길로 걸어갈 것이다.   


이 소설은 등장인물들의 독백만으로 이야기를 끌어간다. 이 가족의 행렬은 이 독백만으로 그 여정을 그대로 드러낸다. 독특한 서술 방식이다. 윌리엄 포크너는 이 소설을 두고 ‘이 소설은 나를 일으켜 세우거나 거꾸러뜨릴 것이다.’라고 했다 한다. 이 소설이 윌리엄 포크너를 거꾸러뜨리지는 않은 모양이다. 노벨상과 퓰리처상까지 받으며 그 자리를 굳건히 한 작가로 꼽히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초반부에 정신없이 등장하는 인물들의 연관성을 이해하기 전,  그리고 이 가족의 고통스런 행렬에 함께 하면서 내가 거꾸러질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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