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기억의 피아니시모
리사 제노바 지음, 민승남 옮김 / 세계사 / 2009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예닐곱 살 때의 기억이다. 너무 먼 곳이라 자주 가지 못했던 외갓집이었다. 어쩌면 처음 외갓집에 갔던 날인지도 모른다. 외할머니 외삼촌들과 엄마 아빠가 너무 분주했던 그날과 함께 공원에서 낙엽을 줍고 계시던 할아버지의 모습이 내가 기억하는 외할아버지에 대한 유일한 모습이다. 외할아버지는 치매를 앓고 계셨다. 갑자기 사라진 할아버지를 찾아 헤매다 결국 공원에 계신 할아버지를 발견하는 순간이었다. 소중한 보물이라도 되는 양 공원의 낙엽들을 한가득 안고 계시는 모습이 30년도 훌쩍 넘은 지금까지도 희미하게 기억된다.

지금껏 나는 치매 환자라고 하면 상식을 벗어난 행동으로 가족들에게 말할 수 없는 무게의 슬픔과 슬퍼할 겨를도 없이 몰아치는 부양의 고단함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세월을 거슬러 도로 어린아이가 되는 병에 걸린 덩치 큰 어른이라 보살핌의 손길이 늘 필요한 상황이 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정작 병에 걸린 본인보다는 주변사람들의 고통으로 접근했었다. 이 책을 읽으며 한순간 멍한 느낌이었다. 이 책은 알츠하이머 환자의 이야기를 다룬 다른 책들과 그 방향을 조금 달리한다. 기억이 조금씩 흐려져 가는 알츠하이머 환자 엘리스의 의식을 그대로 쫒아가며 기술하고 있다. 시시콜콜한 버릇까지 세세하게 알고 있는 남편이 차도를 걷다 차에 치일 뻔한 자신을 구한 친절한 행인으로 변해가고, 사랑하는 딸들은 아기 엄마나 여배우로 변해가는 그 희미해지는 기억의 자취를 그대로 따라가고 있다. 기억을 조금씩 잃어가는 알츠하이머 환자에게 막연히 가졌던 측은한 마음이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엘리스를 통해서 오히려 절절하게 전해져왔다.

알츠하이머가 휘두르는 권한은 가히 절대적이다. 알츠하이머가 훑고 지나간 자리는 빈 공허뿐이다. 7,80대 평범한 노인이건 엘리스처럼 쉰 살의 하버드 대학 정교수이건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모든 것을 앗아가 버린다. 알츠하이머 환자는 속수무책으로 당하면서도 미리 대책을 세워둘 수도, 빼앗아 가는 것을 빤히 보면서도 당해낼 수 없는 것이다. 결국에는 빼앗긴 것이 무엇인지 빼앗겼다는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상태로 죽음에 이르게 되는 병이다. 병에 걸린 환자임에도 주변사람들의 응원과 격려를 바랄 수 없다. 병에 걸렸음에도 생존에 대한 의지를 불태울 수도 없다. 죽음의 순간에도 그 눈 속에 사랑하는 사람들을 담아갈 수조차 없다. 고귀한 개인의 완벽한 상실...참 고약한 병이라 할 수 있다.

하버드 대학 교수인 남편과 법대와 의대를 졸업한 딸과 아들을 뒀고 자신 또한 하버드대 교수인 쉰 살의 엘리스에게 유일한 고민은 대학진학을 거부하고 배우의 길을 택한 막내딸 리디아뿐이다. 갱년기 현상쯤으로 여기던 기억장애가 바로 조발성 알츠하이머가 원인이었다는 진단을 받으며 엘리스 자신의 혼란스러움은 물론이고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 남편과 자식들에게 미칠 유전적 영향에 대해서 또한 걱정해야 한다. 단 하나 위안을 삼자면 불편했던 막내딸과의 사이에 진정한 공감과 이해가 이뤄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늘 성실하고 치열하게 인생을 살아온 엘리스는 주어진 상황 속에서 정말 최대한 잘 살아가고 있다. 지난날들은 죄다 사라져버렸고 앞으로 다가올 날들은 지금보다 더 끔찍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엘리스다.       

창 가득 햇살을 들이고 거실에 누워 나른하게 하루해를 보낸다. 얼굴 가득 쏟아지는 햇빛을 피해 돌아누운 등으로 쏟아지던 햇살은 어느새 초저녁 어스름에 자리를 내주고 희미하게 퇴장해버리고 만다. 먼지 한 톨마저 그 속살이 다 드러나 보이는 햇빛 속에 있다가 불을 켜지 않으면 익숙한 동선에서도 부딪기 마련인 암흑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느낌일 것이다. 아마 암흑 속에 있다는 사실조차도 알지 못하게 될 것이다. 지난날의 미숙함이나 실수는 너무도 생생하게 기억 속에 새겨져 아픈 후회로 나를 힘들게 해 차라리 잊어버렸으면 싶을 때가 있다. 잊어버리고 싶은 기억들과 내 인생의 보루처럼 소중한 기억들이 선택의 여지도 없이 죄다 조금씩 사라져 버린다는 것, 사라져 버렸다는 것조차 기억에 없다는 것, 그것은 끔찍하게 슬픈 일이다. 살아있는 동안 훗날을 기약하며 살지 말자고 다짐해 본다. 사랑할 수 있을 때 바로 오늘 맘껏 사랑하자. 다른 길은 다음 날 걸어보리라 미뤄두지 말자. 현재의 안위와 망설임으로 잃어버려도 안타깝지 않을 초라한 미래는 만들지 말자. 오늘부터 내가 살아가는 날들은 누군가는 치열하게 살아내고 싶어 하던 그런 날들임을 기억하자. 수많은 다짐들이 처음인 것처럼 퐁퐁 솟아난다. 고마워요. 엘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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