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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 ㅣ 민음사 모던 클래식 52
뮈리엘 바르베리 지음, 홍서연 옮김 / 민음사 / 2011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고슴도치의 우아함>으로 유명한 작가 뮈리엘 바르베리의 신작 <맛>은 제목만큼이나 심플한 표지, 얇은 두께로 시선을 사로 잡는다. 티비를 틀면 각가지 음식들이 쏟아져 나오듯 글에서 느낄 수 있는 맛을 저자는 어떻게 표현할까. 미각, 냄새, 시각으로 볼 수 있는 산해진미들이 마구 펼쳐지겠지 라는 추측과 달리 <맛>은 주인공의 삶을 다룬다. '기억 속에서 사라져 버린 인생 최고의 맛을 찾는다'지만 기억 속에 사라져 버린 맛을 찾으려면 결국 자신이 먹었던, 자신이 걸어왔던 길을 되짚어 볼 수 밖에 없다.
사람이 태어나면서 본능적으로 살기 위해 '먹는 것'을 탐하고, 그 영양분으로 인해 삶을 살아간다. 사람들은 곧 잘 먹기위해 사는 건지? 살기 위해 먹는건지? 라고 묻지만 계란이 먼저인지, 닭이 먼저인지라고 묻는 것과 같은 이치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비평가인 그는 어느날, 단 이틀 밖에 살지 못한다. '맛'이라면 최고로 평가하는 그가, 그의 입을 통해 품평하고, 글을 통해지는 영향력은 어마어마하다. 그런 그가 돌연 남은 여생을 기억 속에 잊혀져 버린 맛을 찾아 떠났다. 과연 찾을 수 있을까?
오늘 내가 찾으려 애쓰는 무언가는 아마도 이 대비에서 그리 멀지 않을 것이다. 단순하고 강한 고기의 노골적인 맛과 필요 이상의 탐식에 공모한 달콤한 맛 사이의 놀라운 대비. 예민한 포식 종족인 인간이 지닌 모든 인간성의 역사가 탕헤르에서의 이 식사로 요약되며 반대로 인간성의 역사는 이 식사에서 쾌락의 기이한 능력을 설명해 준다. - p.26
신의 영역이었던 '불'을 프로메테우스를 통해 전해 받은 인간은 그것으로 위해 많은 것을 영위할 수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그동안 날 것으로 먹었던 것을 익혀먹고, 끓여먹고, 다양한 재료를 어울러 '음식'을 만들 수 있었다. 파블로프의 개처럼 예전에 먹었던 '맛' 을 떠올리면 절로 침이 흐르는 것처럼 누군가로 인해 먹었던 추억과 음식의 풍미, 식감으로 전해지던 맛. 누군가를 통해 먹던 그 맛의 매력. 밥의 매력처럼 화려하지 않아도, 지겹지 않은 어머니의 손맛, 20년 동안 단골이었던 마르케의 레스토랑, 이모의 채소밭, 삼촌의 식탁,할아버지의 포도주 등 삶을 살아오면서 먹었던 수 많은 맛 중에서 잊지 않았던 '맛'들을 기억하며 미식가의 그것처럼 맛의로드를 떠나, 삶의 종착역을 향한다. 자신의 이야기 뿐 아니라 그가 살아왔던 삶들을 돌이켜보고, 그의 지인들, 가장 가까웠던 가족들의 이야기가 거미줄처럼 얽힌다.
나는 졌다. 그때부터 무엇인가 뒤집어질 수도 있었을, 아버지 없는 내 어린 시절의 메마름이 터질 듯한 새로운 사랑으로 변할 수도 있었을 이 가슴 아픈 일화를 머릿속에서, 꿈속에서 얼마나 되풀이했던가······. 슬로우 모션처럼 순간들은 좌절된 욕망의 고통스러운 화폭 위에 차례로 나타난다. 질문, 대답, 기다림, 그리고 전멸. 그의 눈속에서 빛은 타올랐을 때만큼이나 빨리 꺼진다. - p.22
왕처럼 맛을 풍미했던 한 요리비평가의 오만한, 미움, 욕망, 호기심, 싫증, 애정, 미움......음식에 쓰이는 재료처럼 그가 삶에서 남기고 간 흔적들의 감정들과 그로인해 상처받은 사람들의 짧은 시선은 다채롭게 그가 지내왔던 여정들을 나타내고 있다. 사진을 찍듯, 촤락촤락 뷰파인더가 넘어가는 소리는, 째깍이는 시계처럼 그의 인생을 대변하고 있으며 최고의 맛을 추구해온 왕은 오만하게도 자신이 추구하는 맛 이외에 느껴지는 소박함, 알싸한 아픔을 느끼지 못한채 찬란하고, 화려함, 자신의 혀를 통해 느껴지는 미각만을 믿고 생활해왔다. 그런 그가 찾은 최고의 맛은 기억 어딘가에 잠재되어 있던 이야기가 떠오르면서 찾는다.
어린 날의 맛.
나는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채 '향토(terroir)'라는 단어만을 입에 머금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제서야 '향토'가 어린 시절이나 마찬가지인 신화를 통해서만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우리가 땅에 뿌리박은 전통의 세계와 지방색을 만들어 내는 것은 어른이 된다는 공포를 맛보기 이전에 존재하던 결코 끝나지 않을 마술적인 몇 해를 견고하게 만들고 객관화하고자 하기 때문임을 안다. 흐르는 시간에도 불구하고 사라진 세계가 영속하기를 바라는 맹렬한 의지만이 '향토'의 존재에 대한 믿음을 설명할 수 있다. 그것은 지나간 모든 인생이며 조상들의 의례와 토속 음식 속에 침전된 맛과 냄새와 흩어진 향기의 집합체이며 모래로 금을, 시간으로 영원을 만들려 했던 환상의 기억을 담은 도가니다. - p.58
이십 몇년을 살아가면서 먹었던 수 많은 맛 중에서도 잊지 못하는 음식? 맛이 있다. 처음으로 먹었던 석류, 달짝지근한 감초, 은은한 박하향이 나는 은단. 이 세가지 맛은 아직까지도 머릿속에 저장되어 있다. 위의 세가지 맛은 어렸을 때 할아버지를 통해 맛보게 되었다. 어린아이였던 나는 부모님을 따라 시골에 가면 할아버지가 어린 손녀를 위해 남겨주시는 것들이었다. 언젠가 석류를 따서 먹었던 새콤하고 달콤한 맛은 어떤 석류를 먹어봐도 그 옛날 먹었던 석류의 느낌과는 이질적으로 달랐다. 시중에서 파는 외국에서 수입해 온 석류를 구분하고, 중국산 감초를 감별하는 것처럼 한 번 먹었지만 잊을 수 없는 맛이 존재한다.
뮈리엘 바르베리의 글을 읽고 나서 이야기에 공감했던 이유는 사람은 결국 처음 느꼈던 '맛'을 잊지 못하고, 삶을 마치고 돌아가는 그의 행보는 결국 사람은 자연의 일부이기에 아무리 화려하고, 찬란했던 음식일지라도 중요한 순간에는 가장 순박하고, 소박했던 것을 찾기 때문이다. 일종의 어머니의 손맛같은 것이다.
뮈리엘 바르베리가 외국인이 아닌 우리나라 소설가였더라면 어땠을까? 라는 물음이 들었을만큼 <맛>은 서양의 다양한 음식들이 즐비하다. 다른 책과 다른 각주가 음식을 소개하는 것이라 새로웠다. 요리책을 보는 것처럼 다양한 음식이 등장하고,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는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등장하지만 그 안에서 찾는 단 한가지 맛을 통해 찾는 삶의 근원을 찾아가는 행보는 여타의 소설과 다른 맛이 느껴졌다. 읽으면 읽을수록 맛과 인간의 삶이 떨어질 수 없는 것처럼 그녀는 뗄 수 없는 그것들을 단순하게, 때로는 복잡하게 어우른다. 읽을 때 보다는, 읽고 나서 리뷰를 쓰면서 더 깊은 맛이 우러나오는 것이 <맛>의 묘미. 먹는 것만큼이나 즐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