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비 사회를 넘어서 - 계획적 진부화라는 광기에 관한 보고서
세르주 라투슈 지음, 정기헌 옮김 / 민음사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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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노트북이 3대다. 데스크 탑을 치우고 장만한 노트북. 10년 사이에 컴퓨터를 4대나 장만한 셈이다. 이상하게도 컴퓨터는 쓰면서 계속 고장이 났다. 고장의 원인은 웹상에서 유포되는 악성 파일 때문이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부품 결함 때문이었다. 노트북을 산 후 약 2년 안에 보드나 램 또는 다른 장치에 이상이 생겨 수리를 반복 할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단종된 모델은 수리비가 매우 비쌌다. 저가 새 노트북을 구입하는 가격에 육박했다. 프린터도 마찬가지였다. 비싼 카트리지를 사 가며 써 봤지만, 이상하게도 1년에 2-3번은 수리 기사를 불러야 했다. 1달 동안 기사를 무려 3번이나 부른 적도 있다. 그러다가 결국 2년도 되지 않아 다른 기종으로 교체하게 된다.

 

잠을 잘 때 요긴하게 쓰는 담요의 경우 요즘 1만 원 정도면 구매할 수 있다. 문제는 세탁비다. 담요를 세탁하는 요금이 1만원이다. 새 담요가 1만원이니, 세탁할 바에는 차라리 새 상품을 구입하게 된다. 그렇게 내다 버린 담요만도 서너 장은 된다. 휴대폰의 경우 2년 이상 쓰면 모델이 단종 된다. 그러면 액정 하나만 수리해도 10만 원을 가뿐히 넘는다.

 

옷은 말할 것도 없다. 멀쩡한 티셔츠나 면바지 또는 청바지를 수도 없이 헌 옷 상자에 담아 버렸다. 유니클로 같은 저가 브랜드에 가면 티셔츠 한 장에 5천 원 뿐이 안한다. 바지 역시 마찬가지. 유행에 맞게 이것저것 사다보면 옷이 사정없이 늘어나고, 한 번도 입지 않은 옷들을 정리해서 버리게 된다.

 

정말 낭비도 이런 낭비가 없다. 30여 년 전만해도 가전제품은 완전 고장이 나지 않는 한 버리지 않았고, 옷 또한 헤질 정도로 입었다. 하지만 지금은 고쳐 쓰거나 입지 않는다. 수리하는 곳도 없거니와, 수리비가 새 상품 가격을 넘은 경우도 많다. 대개 버리고 새 상품을 사는 순환을 반복한다.

 

도대체 요즘 가전제품의 수명은 왜 이리 짧은 것이며, 고장은 왜 이리 잘 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던 차에 도서관에서 <낭비사회를 넘어서>(민음사, 2014)라는 얇은 책을 만났다. 사실 ‘낭비사회’의 원인이 궁금해서 책을 찾던 중 우연히 눈에 띈 책이다. 다소 생소한 프랑스 학자였는데, 주제 또한 매우 생소했다.

 

페이지를 넘겨 몇 줄 읽지도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계획적 진부화’라는 학술 용어가 튀어 나왔다. 헌데 저자인 세르주 라투슈가 겪은 경험이 나와 거의 비슷하여 책에 몰입할 수밖에 없었다. 저자가 알려주는 ‘계획적 진부화’의 실체를 알아갈수록 경악을 금치 못했다. 프린터나 만년필이 2년을 넘을 수 없게 제조회사가 계획적으로 그리 만든다고 하니, 기가 찰 노릇이다.

 

 "이 책의 중심 주제인 ‘계획적 진부화’는 인위적으로 수명을 단축하거나 결함을 삽입하는 방식을 말한다. 제작자가 상품을 설계하는 단계에서부터 특수한 장치 등을 이용해 미리 수명을 제한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프린터를 제작할 때 인쇄 매수가 1만 8000장이 넘으면 자동으로 작동을 멈추게 하는 마이크로 칩을 삽입한다든지, 제품 보증 기간이 끝나자마자 고장이 나도록 기계를 설계하는 식이다." (p 34)

 

사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눈을 비비고 두세 번 거듭 읽어야 했다. 거짓말 같았기 때문이다. 설마 했는데, 뒤로 갈수록 그 놀라운 실체를 보니, ‘설마가 사람을 잡는’ 꼴이었다. 곰곰 생각해보니, 충분히 그럴 수 있겠다 싶다. 자본주의의 본질을 조금만 생각했더라면, 예견된 일이었는데, 물고기가 물을 보지 못하는 것처럼 자본주의 사회에 살며 이를 간파하기란 좀처럼 쉽지 않았다.

 

자본주의 사회는 소비를 지속하지 않으면 문제를 일으키는 체제다.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가장 기본적인 전제는 생산된 상품의 소비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성장’을 지속적으로 강조하는 이유가 바로 이 전제 때문이었다. 자본주의가 성장하지 못하면 어떤 사태가 벌어질까? 바로 인플레이션과 실업이 발생한다. 우리가 목도했던 ‘그리스 사태’는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였다.

 

이런 패닉 상태를 막기 위해 자본주의는 광고라는 매개를 사용하여 끊임없이 사람들을 소비하게 한다. 쓰레기가 산더미같이 쌓여도 자본주의가 정상적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 그래야 자본주의가 굴러간다. 그래서 저자의 다음과 같은 주장이이 더욱 설득력 있게 다가 왔다.

 

 “소비 사회는 성장 사회의 종착점이다. 성장 사회는 성장하기 위해 성장하는 사회다. (……) 생산을 무제한적으로 확대하기 위해서는 소비를 무제한적으로 부추겨야 하며, 새로운 욕망을 무제한적으로 불러일으켜야 한다. 종국에는 오염과 쓰레기가 늘어나 지구 생태계가 파괴된다." (pp 16~17)

 

‘계획적 진부화’로 인한 쓰레기 문제는 지구환경을 엄청나게 파괴하고 있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사이에 ‘계획적 진부화’와 ‘지구환경 파괴’는 인과관계로 확고하게 연결되고 있다. 문제는 우리가 이를 전혀 눈치재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문제의 심각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

 

 “평균 18개월 정도 사용되고 버려지는 휴대 전화는 비소, 안티몬, 베릴륨, 카드뮴, 납, 니켈, 아연 등 생물체에 유해한 다량의 독소를 포함한 쓰레기 더미들을 만들어 낸다. 이것들을 소각한다는 것은 다이옥신과 푸란, 그 밖의 오염물질을 대기 중으로 뿜어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미국에서는 2002년 여전히 작동 가능한 휴대전화 1억 3000만 대가 폐기 처분됐다. 이런 추세는 앞으로 더욱 심해질 것으로 보인다.” (p 99)

 

참으로 난감한 상황이다. 이런 추세가 더욱 심해진다니. 그런데 ‘계획적 진부화’의 문제가 진행되면서, 인류는 또 하나의 엄청난 재앙에 직면해 있다. 이 현상은 ‘사회적 문제’라기 보다는 재앙에 가깝다. 학문적으로 아직 활발히 연구되고 있는 분야는 아닌 듯하다. 바로 ‘인간의 존엄과 가치’에 대한 문제다. 소위 인권의 본질(인간의 존엄과 가치)에 대한 가치하락. 인간의 가치가 땅에 떨어진 근원적 이유가 바로 ‘계획적 진부화’라는 사실을 이 책을 통해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저자는 아직 ‘인권에 대한 문제’를 본격적으로 논하고 있지 않다. 이에 대한 탐구는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이 행한바 있다. 그는 (‘계획적 진부화’로 인한) 낭비 사회를 ‘쓰레기가 되는 삶’이라고 명명했다. 바우만의 논의를 따라가면 결국 비정규직의 삶이 곧 쓰레기가 되는 삶의 시초다. 세르주 라투슈는 이에 대해 “결국 계획적 진부화가 진행되면서 윤리 자체도 진부화하고 있다.”고 설파한다. 인간 역시 진부화되지 않을 수 없다는 귀결이다.

 

 “이른바 ‘발전된’ 사회는 쇠퇴를 대량 생산한다. 다시 말해 가치의 상실, 상품을 넘어 인간까지 포함하는 일반화된 퇴락을 양산한다. ‘일회용’ 제품이 갈수록 빠른 속도로 확산되면서 상품은 쓰레기로 버려지고, 인간은 소외되거나 사용 후 해고된다. 실업자, 노숙자, 부랑자, 그 외 각종 ‘인간쓰레기’에서부터 최고 경영자와 관리자들까지 예외는 없다.” (p 86)

 

현재 전 세계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을 사람답게 대접하지 않고 유통기한이 정해진 부품처럼 취급하는 근원적 실체가 밝혀지는 순간이다. 바우만이 지적한 ‘쓰레기가 되는 삶’의 근원적 주범이 바로 ‘계획적 진부화’였던 것이다. ‘계획적 진부화’가 가속화되면, 인간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 전락될 수밖에 없다. 이건 명약관화한 사실이다. 우리가 장님, 귀머거리, 병신, 기형아 등을 무의식적으로 사용하는 것처럼, '윤리적 진부화‘는 부지불식간에 우리 삶에 들어와 ‘인권 의식’ 자체를 마비시킬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직면한 새로운 재앙이다.

 

작금에 대두하고 있는 문제는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더 위협적이다. 비정규직 차별은 정말 빙산에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 이에 대한 예방 법규가 구비되지 않으면, 국민의 인권은 지금보다 훨씬 더 심각한 상황에 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 헌법과 세계인권선언은 ‘차별 금지’와 ‘노예제 금지’를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이 규정들은 현실을 반영하는데 매우 미흡하다. 규정과 현실의 갭이 너무도 크다. ‘노예’에 대한 새로운 표현이 요구된다. ‘계획적 진부화’에 의해 쓰레기로 전락하는 층을 산업사회의 새로운 ‘노예 층’으로 포섭하는 규정이 요구된다. 그렇지 않으면, 인권의 가장 근간을 이루는 ‘인간의 존엄과 가치’가 심각한 위협에 직면할 지도 모를 일이다.

 

이 책은 매우 얇다. 144쪽 분량 밖에 안 된다. 하지만 이 책에 담겨 있는 내용은 가히 치명적이다. ‘계획적 진부화’와 ‘환경 파괴’ 그리고 ‘인간의 진부화’로 이어지는 인과의 고리는 너무도 확고하다. 하지만 우리 대부분은 이 문제에 대해 거의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책이 아니면, 이 무시무시한 상황을 파악할 수도 없다니 모골이 송연해진다.

 

사실 환경문제는 인식하지 않으면 좀처럼 실천으로 이루어지기 어렵다. 눈에 보이는 부분은 상대적으로 쉽다. 공정무역 상품 구입하기, 1회용품 쓰지 않기, 친환경 물품 구입하기 등은 실천하기 그리 어렵지 않다.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할 수 있다. 이런 캠페인을 벌이는 단체들도 많다. 하지만 환경 파괴의 근본적 원인이 ‘계획적 진부화’라는 사실과 이로 인해 인권이 위협받을 수 있다는 사실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책을 통해 이러한 보이지 않는 근원적 문제점을 확인하는 것만큼 의미 있는 독서는 없을 것이다. 뭐든지 알아야 실천이건 뭐건 할 수 있으니까. 그런 면에서 이 책의 가치는 실로 크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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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7-01-04 1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야무 님 이게 얼마 만입니까. 왜 그동안 이리 뜸하셨슴꽈...
하여튼.. 반갑습니다. 새해 복 마니 받으십시요..

yamoo 2017-01-13 19:40   좋아요 0 | URL
주로 다른 데에서 놀아서뤼...^^;;
요즘 책을 많이 읽지 못하는 관계로 알라딘 서재는 뜸했습니다.
여튼 저도 반갑습니다..ㅎㅎ 곰발 님 서재 간만에 방문해 보니, 닥그네를 끊임없이 씹는 그 엄청난 페이퍼들을 봤습니다.ㅎ 정말 대단하신 거 같다는!! 그 정도로 지속적으로 집요하게 까기도 쉽지 않은데 말이죠. 필력이 더해 더 신랄한 거 같습니다!!!

곰발 님두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amor fati~

cyrus 2017-01-04 15: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오랜만에 뵙습니다. 잘 지내셨죠?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하세요. ^^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저자의 문제의식에 공감했지만, 저자가 제시한 일상적으로 실천 가능한 대안을 따르기가 망설였어요. 공감보다는 실천이 중요한데, 저는 실천을 시작하기 전에 소극적인 태도를 드러내고 맙니다. ^^;;

yamoo 2017-01-13 19:41   좋아요 0 | URL
저두 오랜 말이 뵈어요~~ㅎ
그쵸, 공감보다 실천이 훨씬 중요합니다. 하지만 공감하지 않으면 실천도 없지요. 실천은 언제나 어렵습니다~ ^^;;

사이러스 님두 새해 건강하시고, 복 많이 받으세요~~

stella.K 2017-01-04 1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이어요. 잘 지내시죠?
새해 복도 많이 받고 계시고 있죠?
올해도 변함없이 빕게되길 바랍니다.^^

yamoo 2017-01-13 19:48   좋아요 0 | URL
스텔라 님, 반갑습니다! 저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다른 곳에서 재밌게 놀다보니, 알라딘 서재에는 뜸했네요.ㅎ

스텔라 님두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하세요~^^

올 해에는 알라딘 서재 활동을 최소한으로만 할 거 같아요. 다른 곳이 워낙 재밌어서 말이쥐요..^^;;

감은빛 2017-01-05 16: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뭐든 오래 쓰는 편이예요.

지금도 가끔 쓰는 데스크톱은 거의 20년이 다 된 놈인데,
좀 느리긴 해도 아직 쓸만합니다.
노트북은 3년쯤 되었는데,
열었다 폈다 하는 이음새 한 쪽이 벌어진 걸 빼면,
아무 문제 없이 잘 돌아가요.
아마도 앞으로 5~6년은 문제없이 쓸 것 같아요.

이불은 대부분 10년 이상 된 놈들이고,
옷도 한 번 사면 어딘가 튿어지거나 구멍날 때까지 입어요.
지금 입는 옷 중에는 15년 이상 된 옷들도 좀 있어요.

그런데 휴대폰은 정말 3년 이상 못 쓰겠더라구요.
2년만 넘으면 꼭 어딘가 이상이 생기더군요.

yamoo 2017-01-13 19:50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감은빛 님!

감은빛 님은 요즘 사람 같이 않게 느리게 사는 기술을 잘 터득하신 거 같습니다. 저도 최소한의 물건들로, 그 물건들을 오래오래 사용하고 싶습니다요~ㅎ

휴대폰은 약정 넘으면 바꿔야 하는 게 맞는 거 같아요. 약정 넘어 고장나면 수리비가 정말 장난 아니거든요~

새해 건강하시고, 복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보슬비 2017-01-05 2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을 읽고 경악했던 기억이 납니다. 최대한 오래 사용할수 없으니 불편하더라도 많이 소유하지않려 노력하고 있어요. 오랜만에 오셔서 반가웠습니다.

새해에 안보이는 분들이 보이기 시작하니 더 반갑네요.^^

yamoo 2017-01-13 19:51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보슬비 님! 오랜만입니다~

이 책 읽으셨군요~ 저도 많이 경악했더랬습니다. ㅎ 적게 소유하고 최소한의 사물로, 그 사물들을 오래오래 사용하고 싶습니다.ㅎ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하시길!